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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마르코 1,21ㄴ-28
권위가 있는 말엔 항상 이것이 섞여 있다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와 같은 프로에 보면 아이들은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제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요?
부모의 말에 왜 권위가 사라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당신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성령이 말의 권위인데, 이 성령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기게 합니다.
이때 흐르는 피가 말과 섞을 때야 말에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젊은 스님이 수박을 사러 5일장에 들렀습니다.
완벽하게 익은 수박을 조심스럽게 골라 값을 지불한 스님은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치고 가서 수박이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이보시오! 남의 수박을 깨뜨린 뒤 어떻게 그냥 가버릴 수가 있어요?”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백발의 노부인이 뒤를 돌아 스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중이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이 정도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가르침과도 같은 여인의 말은 스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 같았습니다.
“보살님, 어디 사십니까?” 스님이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다.”
스님은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노파는 막걸리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남 따라다닐 시간에 네 갈 길이나 가라.”
노파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남을 따라다니기만 했구나.” 노파의 말은 계속해서 가르침처럼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부인, 당신은 매우 현명해 보이는군요. 무엇을 공부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혜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23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군에 입대하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사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 눈물이 멈출 수가 없었어요.
먹고 자고 상관없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스님은 그녀의 말속에 담긴 깊은 고통을 깨닫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떨어지는 것을 보다 보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방울이 냇물이 되어 냇물이 바다가 됩니다. 바다가 다시 구름이 되고 물방울이 되죠.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돌아옵니다.
그 근원으로. 이것을 느끼고는 슬픔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노파의 말은 곧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이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은 말들은 내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들으신 말씀으로 당신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긴 사람의 말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신도 이기지 못한 말은 권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잔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가장 권위 있는 말은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자기를 이기신 말씀.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변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말에 피를 섞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말을 하고 싶거든 매일 성령을 자기를 이기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마르코 1,21ㄴ-28
<빵은 크게! 기도 소리는 작게!>
한 무리의 본당 신자들이 한 시골 본당 주임 신부님을 찾아와 어렵사리 민원을 넣었답니다.
민원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시골 본당 전 사목회장이요, 본당에서 가장 큰 손, 읍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업가인 베틀레헴 빵집 베드로씨가, 요즘 안그래도 서민경제가 안 좋아 힘든데, 빵 가격을 올리는 대신, 빵 크기를 줄인 관계로 읍내 사람들 원성이 자자하다는 것.
두번째 민원은 본당에서 행해지는 미사나 각종 전례시간에 베드로 씨의 기도 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많은 신자들이 분심이 들어 기도가 잘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혜와 경험이 탁월한 노(老)주임 신부님께서는 베드로씨를 조용히 불러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베드로 회장님, 꼭 부탁드립니다. 빵은 크게! 기도 소리는 작게!”
연중시기의 벽두에 우리도 한번 고민해봐야곘습니다.
우리 안에 점점 확장시켜나가야할 측면은 무엇입니까?
반면에 점점 축소시켜 나가야할 측면은 무엇입니까?
내 안에 그분이 점점 커지시도록 나를 비워야 하겠습니다.
반면에 내 안에 나는 점점 작아지고 소멸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불평불만이나 이웃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가급적 낮춰야겠습니다.
대신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이웃을 칭찬하는 목소리는 더 많이 높여야겠습니다.
이번에는 다섯 명의 성가대 대원들이 같은 성가대원 바오로씨 때문에 또 다시 주임 신부님을 찾아와, 한 목소리로 그를 성토했습니다.
성탄이 코 앞인데, 바오로씨 때문에 성가 연습에 진척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몇번이고 좋은 말로 타일렀는데도 불구하고, 바오로씨 목소리가 너무 튀고, 자주 ‘삑사리’를 내서 도저히 성가연습을 진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하는 것은 바오로씨를 성가대에서 탈퇴시키지 않으면, 다섯 명 모두 성가대를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주임 신부님께서 바오로씨를 불러, 술까지 한잔 따라주며 좋게 타일렀습니다.
“바오로씨, 어쩌죠? 오늘 성가대 대원 다섯 명이나 찾아와서, 바오로씨와 같이 못 가겠다는데, 어쩌죠?
이쯤해서 바오로씨가 성가대 그만 두는게 어떨까요?”
그랬더니 화가 단단히 난 바오로씨는 그 다섯 명에게가 아니라, 갑자기 주임 신부님에게로 불화살을 날렸습니다.
“신부님, 알고보면 뭐 신부님도 만만치 않거든요.
제가 아는 신자들 중에 신부님 강론 지겹고 싫다는 사람들이 50명도 더 있거든요.
그럼 신부님도 그만 두셔야겠네요.” ^^
이웃을 향한 우리의 가르침이나 조언에 권위가 있으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행동거지의 기본이 갖춰져 있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잘 살지 못하면서, 우리가 기본도 못하면서, 이웃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것이 맞다, 저것은 안된다고 훈계하면, ‘말빨’이 전혀 안먹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올 한해 이웃들 눈 속의 작은 티에 연연하기보다는, 내 눈속의 들보 제거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주변 동료들의 작은 결핍에 스트레스 받기보다는, 내 이 심각한 결핍의 보완을 위해 더 주력해야겠습니다.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설교를 시작하셨는데, 회당 안에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놀란 이유는?
다른 꾸리꾸리하고 노회한 율법학자들,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구태의연한 설교와는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 없이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언행일치에서 흘러나옵니다.
가르침의 진실성과 진정성에서 흘러나옵니다.
오늘 우리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가르침에 놀라워합니다.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까?
우리의 가르침을 듣는 양떼들의 얼굴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강론을 끝내려 하면 신자들이 너무나 아쉬워서 발을 동동 구를 지경입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주간 화요일 강론>
(2025. 1. 14. 화)(마르 1,21ㄴ-28)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1ㄴ-2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그 힘에 압도당했다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은, 그 당시 율법학자들의 말에는 ‘힘’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신학자들 중에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지식 자랑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놀랐다가,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만으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느낀 그 ‘힘’이 실제 힘이라는 것을, 또 그 ‘힘’이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라는 사람들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시골의 가난하고 무식한 목수로만 보이는 예수가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있고, 사용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라는 뜻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말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가르침,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어서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을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그 힘을 체험할 때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기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예수님을 알게 되지만, 안 믿으면 놀라기만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3) 이 이야기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은, 사실은 더러운 영이, 즉 마귀가 하는 말이고,
그것이 하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당신은 ‘사람’일 뿐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고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는
“우리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마라. 당신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는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는데, 그 구원 사업에는 마귀를 멸망시키는 것도 포함됩니다.
종말이 되면, 마귀는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보다 위에 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나자렛 사람’을 풀이한 말이기도 하고, “당신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쫓아내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쉽게 쫓겨나지 않는다.” 라고 큰소리치는 말입니다.
4) 마귀들은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상대로 토론이나 논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조용히 하여라.” 라고 마귀의 입을
막아버리신 다음에,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마귀는 주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져서 갇히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원래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이고, 마귀들은 그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루카 8,31).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라는 말은,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순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즉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쫓겨났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여기서 항상’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그 ‘말씀의 힘’을 받아서, 그 힘 안에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