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6월 병진일에 태조(왕건)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고쳤다. 과거에 세조(世祖.통일신라 말기 송악군의 호족으로 왕건의 아버지)가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지었는데, 중 도선(道詵)이 문 밖 나무 아래에 와 쉬면서 탄식하기를, “이 땅에 마땅히 성인이 날 것이다."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신도 거꾸로 신은 채 따라 나가 맞이하여 그와 함께 송악산에 올랐다. 도선이 굽어 살피고 우러러 보더니 글 한 통을 지어 세조에게 주면서, “공이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자라거든 이것을 주십시오." 하였는데, 글은 비밀에 부쳐져 세상에서 알지 못하였다. 태조의 나이 17세 때에 도선이 다시 와서 보기를 청하고서, “족하(足下)는 백육(百六)의 운수를 만났으니 말세의 창생은 공이 널리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오." 하고, 곧이어 군사를 내고 진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지리ㆍ천시(天時)의 법과 산천에 제사지내는 데 관한 감통과 보우(保佑)의 이치를 말하여 주었다. 이때는 신라의 정치가 문란하여 뭇 도적들이 다투어 일어나던 때로 견훤(甄萱)은 반역하여 남쪽 고을을 점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일컫고, 궁예(弓裔)는 고구려의 옛땅을 점거하여 철원(鐵圓)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세조는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飡)이었는데, 그 고을을 거느리고 궁예에게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즉시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가 곧이어 궁예를 설득하여 아뢰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肅愼)ㆍ변한(卞韓) 땅의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군에 성을 쌓고 저의 맏아들을 그 성주(城主)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궁예가 그 말에 따라 태조에게 발어참성(勃禦槧城)을 쌓게 하고, 이어 성주로 삼으니 이때 태조의 나이 20세였다. 그 후에 광주(廣州)ㆍ충주(忠州)ㆍ당성(唐城.경기 남양)ㆍ청주(靑州)ㆍ괴양(槐壤.충북 괴산) 등의 고을을 쳐서 이를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飡)을 임명받았다. 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금성군(錦城郡)을 쳐서 이를 함락시키고 10여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이어서 금성을 나주(羅州)라 고쳤다. 양주(良州.경남 양산)가 위급함을 고하므로 궁예가 태조더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돌아와서 변방을 안정시키고 국경 지역을 개척할 계책을 말하니, 좌우의 신하가 모두 눈여겨 보았으며 궁예도 역시 기이하게 여겨 벼슬을 올려 알찬(閼粲)으로 삼았다.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을 쳐서 견훤과 여러 번 싸워 이겼다. 태조는 궁예가 교만하고 포학함을 보고 다시 외방에 장수로 나갈 뜻을 가지게 되었는데, 마침 궁예가 나주의 일을 근심하여 드디어 태조더러 가서 진압하게 하고 벼슬을 올려 한찬 해군대장군(韓飡海軍大將軍)으로 삼았다. 태조가 성심으로 군사를 위무하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푸니, 적이 두려워하여 굴복하였다. 궁예가 알찬인 종희(宗希)와 김언(金言) 등을 부장으로 삼아 주었다. 전함(戰艦)을 수리하여 광주(光州) 진도군(珍島郡) 고이도성(皐夷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덕진포(德眞浦)로 나아가 머무르자 견훤이 전함을 배열하였는데 목포(木浦)에서 덕진포까지 전함이 서로 앞뒤로 잇닿아, 바다와 육지를 누비며 군사의 세력이 심히 강성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걱정하였으나 태조는, “군사가 이기는 것은 화합(和合)하는 데 달린 것이지, 수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진군하여 급히 치니, 적의 전선이 조금 물러났다. 그러자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지르니,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반수 이상이나 되었고 5백여 급(級)을 베었는데,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왕의 군진이 나주 관내의 여러 고을과 거리가 먼데 적병이 길을 차단하였으므로 서로 응원할 수가 없어 자못 근심과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김언 등이 스스로 공은 많은데 상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못 마음이 흐트러지자 태조가 말하기를, “부디 태만하지 말라. 오직 힘을 다하고 딴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이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권세를 잡아 조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 몸도 보전하지 못하니,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여 힘을 다해 나라를 위함이 나을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드디어 반남현(潘南縣. 전남 나주군 반남면) 포구에 이르러 적의 국경에 간첩(間諜)을 놓았다. 이때에 압해현(壓海縣.전남 무안군 압해면)에 있던 적의 장수 능창(能昌)은 해도(海島) 출신으로 수전을 잘하여 수달이라고 불렸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갈초도(葛草島)의 작은 도적들과 서로 결탁하여 태조가 올 때를 엿보아 해치고자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능창은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섬의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다. 적의 무리가 비록 적지마는 만약 힘과 세력을 합쳐서 우리의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헤엄을 잘 치는 자 10여 명을 시켜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가볍고 작은 배를 타고 밤중에 갈초도 나룻가에 가서, 왕래하면서 일을 꾸미는 적을 사로잡아서 그 꾀를 저지시켜야 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이 말을 따랐다. 과연 작은 배 한 척을 잡아보니, 바로 능창이므로 잡아서 궁예에게 보내어 목베었다. 궁예가 태조를 파진찬(波珍飡) 시중(侍中)으로 임명하고 불러들였다. 이에 태조는 지위가 백관 중에 가장 높았으나 감정을 누르고 조심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참소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모두 해명하여 구해 주니, 조신(朝臣)과 장사들이 모두 흡족하여 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그러자 태조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다시 외직(外職)에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궁예 역시 말하기를, “수군의 장수가 인망이 가벼워서는 적을 위압할 수 없다." 하고, 태조의 시중 벼슬을 해임하고 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羅州)에 주둔하게 하니 후백제와 해상의 도적들이 태조가 다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 복종하여 감히 난동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돌아와서 배를 이용하는 이점과 변고에 대응하는 알맞은 방법에 대해 고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서 이 사람과 겨룰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였다. 이때 궁예는 터무니없는 반역죄를 꾸며서 날마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 어느 날 태조를 급히 불러 성난 눈으로 뚫어지게 보며 말하기를, “경이 어젯밤에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궁예가 일찍이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컬었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남의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내가 지금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관찰할 것이다." 하고,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는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때,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이를 줍고는 곧이어 빠른 걸음으로 태조의 곁을 지나면서 귓속말로, “자복하지 않으면 위태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곧 깨닫고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궁예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정직하다고 하겠다." 하면서, 곧 금과 은으로 장식한 말 안장을 태조에게 내려 주었다. 태조가 일찍이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해 3월에 객상(客商) 왕창근(王昌瑾)이 당 나라에서 와 저잣거리의 가게에 있었는데, 문득 저자 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니, 용모가 웅장하고 수염과 머리털은 희며 옛 관을 쓰고 거사(居士)의 옷을 입었으며 왼손에는 바리때를 들고 오른손에는 헌 거울을 쥐고서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느냐?" 하므로, 창근이 쌀을 주고 거울을 사서 시장 담벼락에 걸어 놓았다. 거울에 햇빛이 비치자 은은히 가느다란 글자가 드러나 읽을 수 있었는데 그 대략에, “삼수중(三水中) 사유하(四維下)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辰)ㆍ마(馬)에 내려보내어 먼저 계(鷄)를 잡고 뒤에 압(鴨)을 칠 것이다. 사년(巳年) 안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금(黑金) 동쪽에 형상을 나타내어, 성함을 보이기도 하고 쇠함을 보이기도 하는데 하나가 성하고 하나가 쇠하면 나쁜 진재(塵滓)를 없앨 것이다." 하였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를 보고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여기고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가 창근에게 명하여 물색(物色)해서 그 사람을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다만 동주(東州) 발삽사(勃颯寺)에 진성(鎭星)의 낡은 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모양과 같았으며 왼손과 오른손에 역시 바리때와 거울을 쥐고 있었다. 창근이 기뻐서 자세히 그 모양에 대해 아뢰었더니, 궁예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文人) 송함홍(宋含弘)ㆍ백탁(白卓)ㆍ허원(許原) 등을 시켜 이를 해석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말하기를, “삼수중 사유하 상제가 아들을 진ㆍ마에 내리셨다는 것은 진한(辰韓)ㆍ마한(馬韓)이요, 사년 중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 중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금 동쪽에 형상을 나타낸다 한 것은,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 용(龍) 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을 이른 것이다. 왕시중(王侍中)이 왕후(王侯)의 상(相)이 있으니, 이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鐵圓.鐵原)을 이름이다. 지금의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성하였는데 아마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것인가 보다. 먼저 계를 잡고 뒤에 압을 친다는 것은 왕시중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 뒤에 먼저 계림(鷄林.신라)을 얻고 뒤에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였다. 세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왕이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며, 우리들 역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이윽고 거짓으로 꾸며서 고하였다.
註: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조선조 김종서(金宗瑞)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고려 왕조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책으로 1452년에 간행되었으며 35권 35책이다. 반면 《高麗史(고려사)》는 이에 앞서 세종 때 왕명(王命)으로 정인지,김종서 등이 찬한 기전체(紀傳體) 역사책으로 1451년에 간행되었고 139권 100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