聲東擊西(성동격서)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
동쪽을 치는 듯이 하면서 실제로는 서쪽을 치는 병법의 하나.
明修棧道 暗渡陳倉
(명수잔도 암도진창)
한신의 군대가 항우를 속이기 위해 잔도를 고치는 척하여 항우군이 안심하고 있을 때,
몰래 진창길로 돌아서 관중으로 나가쳤다.
이와 같이 전투의 기술은 적을 어떻게 속여서 나의 피해를 줄이고 적의 피해를 많게 하느냐에 성패가 나뉜다.
삼국지의 조조도 수없이 제갈량에게 속았고 또 상대를 잘 속이기도 하였다.
다음은 적을 속인 실례이다.
전국시대 중기 제나라의 군사(軍師) 손빈(孫臏)은 손무(孫武), 손자(孫子)의 군사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군사 이론과 실천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을 과시한 탁월한 군사 전략가다.
그가 창안한 ‘삼사법(三駟法)’은 군사응용학의 선두를 이루었고,
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구원한다’는 ‘위위구조(圍魏救趙)’와
‘취사용 솥을 줄여 적을 유인한다’는 ‘감조유적(減灶誘敵)’ 같은 전법은 지금도 유용한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손빈은 제나라 사람으로 지금의 산동성 양곡·견성 일대에 해당하는 아(阿)·견(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춘추시대의 걸출한 군사 전문가로 훗날 ‘병성(兵聖)’ 또는 ‘무성(武聖)’으로 추앙받은 손무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주로 제나라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재위 기간에 해당하는 기원전 356년부터 기원전 319년 무렵에 활동했다.
청년 시절에는 방연과 함께 귀곡자 문하에서 병법을 배웠는데,
학업 성적이 늘 방연을 앞질러 방연의 시기와 질투 대상이 되었다.
학업을 마친 뒤 방연은 위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혜왕(惠王)에 의해 장수에 임명되었다.
당시 제나라와 위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방연은 자신이 손빈만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나라에서 손빈을 기용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 비밀리에 손빈을 자신이 몸담은 위나라로 초빙했다.
손빈이 위나라로 오자 이번에는 혜왕이 뛰어난 손빈을 총애하지 않을까 그것이 마음에 걸려 음모를 꾸며서 손빈을 해쳤다.
사악한 방연은 손빈의 선조 손무가 남긴 병서를 손에 넣기 위해 손빈을 죽이지 않고
무릎 아래를 자르는 빈형(臏刑)을 가해 앉은뱅이로 만들었다.
여기에다 손빈의 얼굴에 죄인임을 나타내는 경형(黥刑; 문신)의 흔적까지 남겼다.
물론 방연은 자신의 정체와 의도를 철저히 숨긴 채 손빈에게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꾸몄다.
얼마 뒤 동문수학한 방연의 천인공노할 흉계와 그 진상을 알게 된 손빈은
미치광이 노릇을 하는 등 방연을 방심하게 한 다음,
불굴의 의지로 사지에서 벗어나 사신을 따라 몰래 제나라로 도망쳤다.
이때부터 손빈은 그의 일생 중 가장 빛나는 시절을 맞았다.
손빈은 군사 이론과 실전을 두루 겸비한 전문가로 거듭났고,
이를 바탕으로 [손빈병법(孫臏兵法)]이라는 탁월한 군사 이론서를 남기기에 이른다.
사무치는 원한에서 힘을 얻어 재기한 손빈의 생애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복수의 힘을 최고 수준으로 승화시킨 앉은뱅이 군사의 열정은 ‘병법’으로 수렴되었다.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빠졌으며 가장 비열한 인간을 경험했다.
하지만 손빈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극복하고 사무치는 원한에서 힘을 얻어 새롭게 태어났다.
‘위위구조’와 ‘감조유적’ 등 절묘한 작전으로 자신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원수에게 당당히 복수했고,
자신의 군사 경험을 원숙한 병법으로 정리해냈다.
그의 삶을 반영한 [손빈병법]은 이런 점에서 [손자병법]을 앞지른다고 할 수 있다.
군사 전략가로서 손빈은 전쟁은 민심의 지지 여부로 승부가 판가름 난다고 단정한다.
탁월한 인식이다. 그는 자신의 실전 경험을 종합하고 분석한 결과 전쟁의 일반적 규칙을 도출해냈다.
그의 병법이 지금도 유용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구의 몸이 된 손빈은 지독한 고독과 싸우며 삶의 의욕을 되찾아나갔다.
그러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은인이라고 여긴 친구 방연이 자신을 해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죽음보다도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하지만 손빈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그리고 방연의 마수에서 벗어나 마침내 화려한 재기와 통쾌한 복수에 성공했다.
치밀한 전략과 심리전으로 원수 방연의 군대를 전멸시켰고, 이때 방연은 자살했다.
손빈은 젊을 때 귀곡자 밑에서 병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그가 병법을 공부한 것은 손자라는 걸출한 군사 전문가를 배출한 가문의 전통과도 관계가 깊다.
손빈 공부의 결정체인 [손빈병법]은 이런 배경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의 병법서 수준을 질적으로 끌어올린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처절한 복수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복수를 향한 손빈의 집념은 실전을 통해 표출되었고,
이런 실전 경험은 다시 손빈의 탁월한 전문 지식을 거치며 정교한 이론으로 거듭났다.
[손빈병법]이 시종 인간의 마음을 승리의 관건으로 지목하는 것도
배신과 복수로 점철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손빈의 공부는 말 그대로 ‘복수를 위한 공부’였고, 이를 달리 표현하면 ‘복수 공부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손빈이 그저 복수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를 뛰어난 병법서로 정리해냈다는 점에서 그의 복수는 차원이 다른 복수였다.
[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