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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홀로 테마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조선 재상 열전 12] 정광필(鄭光弼)전
월간조선 2023.12.05
庸君(어리석은 임금) 중종 밑에서 훈구와 사림의 조화 꾀한 명재상
⊙ “도량이 넓고 생각하는 바가 심원하여, 모든 일에 규각(圭角·모남)을 드러내지 않았고, 중의를 모은 다음에 자신이 결단”(실록)
⊙ 조광조의 향약 제안에 반대했으나, 기묘사화 때에는 중종에게 눈물로 士林들의 구명 호소
⊙ 연산군에게 간언, 權奸 김안로와 충돌해 귀양살이하기도
⊙ 상진·이준경 등 후배 정승감 알아보고 이끌어줘
정광필
정광필(鄭光弼·1462~1538년)은 동래 정씨로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을 지낸 정난종(鄭蘭宗·1433~1489년)의 둘째 아들이다. 위로 정광보(鄭光輔)가 있고 밑으로 정광좌(鄭光佐), 정광형(鄭光衡)이 있다.
아버지 정난종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해 세조에게 큰 총애를 받아 승지를 지냈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이시애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성종 때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참찬에 올랐다. 정난종은 훈구(勳舊)임에도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점은 정광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462년(세조 8년)에 태어난 정광필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배움에 힘써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를 독송(讀誦)해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을 묵묵히 이해하고 환하게 연구하여 널리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신도비(神道碑)에 따르면 “《좌씨춘추(左氏春秋·춘추좌씨전)》와 《주자강목(朱子綱目·자치통감강목)》을 좋아해 손에서 잠시라도 놓는 일이 없었으니 속유(俗儒·지식 등이 모자란 선비)가 다른 사람의 글귀를 표절하여 필요할 때에 써먹거나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고 한다.
연산군 시절 간언하다 유배 생활
정광필은 1492년(성종 23년)에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초급 관리 시절이 끝나기도 전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 연산군 시대를 맞이했다. 속 깊고 학식이 뛰어나 전도유망한 인재 정광필은 과연 연산군(燕山君)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을까?
간관(諫官)을 중심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정광필은 1503년(연산군 9년)에 등급을 뛰어넘어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에 제수(除授)됐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미 폭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연산은 자신에 대해 간언(諫言)하는 자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그럼에도 정광필은 일찍이 소(疏)를 올려 연산군이 사냥에 탐닉하는 것을 간언했다가 이듬해 아산현(牙山縣)으로 귀양을 갔다.
“이때 법령(法令)이 준엄하여 귀양 처벌을 당한 자는 자유롭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공은 빗자루를 들고 관문(官門)을 지키면서도 짜증내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정광필도 유배에서 풀려나 날개를 달았다. 훈구와 사림(士林) 모두에게 신망이 컸던 그는 중종 초기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다. 1507년(중종 2년) 특별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됐고, 1508년(중종 3년) 병조(兵曹)로 전직됐다.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등급을 뛰어넘어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고 얼마 있다가 예조판서로 옮겼다. 이조에서 예조에 이르기까지 항상 경연 춘추관을 겸직했다. 역사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정광필은 《성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었다.
성희안의 지원
그는 관리로서 이재(吏才)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신도비 중 일부다.
〈1510년(중종 5년)에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되었다. 이해 여름에 삼포(三浦)의 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지방이 소란하였는데, 전라도 지역과 서로 접한 곳이라 중신(重臣)을 얻어서 제압해야만 하였다. 이에 정광필을 명하여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위무(慰撫)하게 하자, 정광필은 바닷가 지역을 순찰하며 돌아다녔는데, 대체로 성진(城鎭)의 멀고 가까움과 방수(防戍)가 탄탄한지 허술한지며, 사졸(士卒)의 강하고 약함과 군기(軍器)의 날카롭고 무딘 상태를 직접 발로 뛰면서 눈으로 조사하지 않음이 없었는 바, 그 계획이 모두 그때그때 상황에 합당하였으므로 남쪽 지방이 안정되었다. 돌아와서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전선(銓選·인사 행정)이 공평하고 성실하였으며 군정(軍政)이 이내 다스려졌다.〉
그의 이런 빠른 승진은 무엇보다 반정 일등공신 중 한 사람인 성희안(成希顔·1461~1513년)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성희안은 일찍부터 정광필이 정승감임을 알아보고서 계속 초탁(超擢·빠른 승진)했다. 마침내 정광필은 1513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다. 중종 8년(1513년) 4월 11일 우의정 자리가 비어 이를 고를 때 후보자로 김응기(金應箕), 정광필, 신용개(申用漑) 세 사람이 올랐는데 성희안은 정광필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세 사람 중 김응기는 그 한 몸의 재행(才行)과 학문에 흠이 없지만, 정광필은 젊어서부터 침착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아[喜怒不形] 신망이 높으니 정광필을 먼저 써야 되겠습니다.” 너무 빠른 승진으로 인해 간관들의 비판도 있었지만 당시 이 인사에 대한 사신(史臣)의 평은 정광필이 어떤 인물인지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앞서 의정(議政·의정부)에 결원이 생겨 상이 성희안과 송질()에게 누가 합당한가를 묻자 성희안이 김응기·정광필·신용개 세 사람 이름을 써서 아뢰었는데, 상이 다시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묻자 성희안이 아뢰기를 ‘응기는 사람됨이 단아하고 후중하여 몸가짐이 성인과 다름이 없으나, 국가의 큰일은 광필이 아니면 해낼 수 없습니다. 응기는 이미 영중추(領中樞·중추원 영사)가 되었으니 지위가 부족하지 않으며 용개는 재주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찌 열 사람의 용개로 광필 한 사람과 바꾸겠습니까!
오늘날 상께서 지성으로 복상(卜相·재상 선발)하시니 실지로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고 송질은 아뢰기를 ‘응기는 성종조(成宗朝)에 이미 현임(顯任)에 제수되어 물망이 그에게로 돌아간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니, 응기를 정승으로 삼아야 됩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각각 자신의 의견으로 아뢰었는데, 응기는 사람됨이 온순하고 단아하며 신중하고 과묵하여 일거일동에 부정한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벼슬하기 전부터 남들이 안자(顔子·공자 제자 안회)로 지목하였다.
그러므로 복상할 때 인망이 많이 돌아갔고, 이 때문에 전조(銓曹)의 주의(注擬·인사안)에 역시 수위(首位)로 삼았었는데, 상께서 희안을 신임하였으므로 마침내 광필을 정승으로 삼았다. 광필의 사람됨은 도량이 넓고 생각하는 바가 심원하여, 모든 일에 규각(圭角·모남)을 드러내지 않았고, 정승이 된 뒤에도 국정을 의논할 때에는 중의(衆意)를 모은 다음에 자신이 결단하므로, 여러 사람이 모두 흡족히 여기어 참다운 재상이라 하였으며, 사람들은 희안의 그 명철한 감식에 감복하였다. 응기는 겨우 ‘예, 예!’ 하며 순종할 뿐이므로 조정에서 실망하였다.〉
향약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다
뒤에 정광필이 좌의정이 되었을 때 김응기는 우의정으로 기용된다. 또 정광필이 영의정이 되었을 때 김응기는 좌의정에 오른다. 말수가 적은 정광필이었지만 국가의 중대 사안에 대해서는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한 것은 그 한 가지 예일 뿐이다.
《중종실록》 13년(1518년) 9월 5일 자에 매우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실려 있다. 경연에서 참찬관 조광조(趙光祖·1482~1519년)가 향약(鄕約) 실시를 건의한다. “신이 듣건대 온양군 사람이 향약을 잘 행한다고 합니다. 만약 향약을 잘 이행한다면 진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향약이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취지로 한 향촌(鄕村)의 자치 규약이다. 본래 북송(北宋)의 여대균(呂大鈞)이 주창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뜬 것으로, 덕업(德業)으로 서로 권하는 것, 과실을 서로 경계하는 것, 예다운 풍속으로 서로 사귀는 것, 환난(患難) 시 서로 구휼하는 것, 이 네 가지를 강령(綱領)으로 삼았다. 이는 오늘날 시민운동과 흡사한 것인데 성리학자들이 지방을 통제하려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주자학을 받아들인 사림들이 조선 초부터 줄기차게 실시를 요구했지만 임금들은 백성을 이중으로 통치하는 것이 된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정광필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향약이 좋기는 좋지만 모인 무리가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수령의 권세가 도리어 약해질 것이니 살펴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 초 태종을 비롯한 여러 임금이 반대했던 논리와 같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조광조의 폭주가 시작된다.
조광조의 득세
무난해 보였던 중종 시절 관리 생활 중에서 첫 번째 위기가 1519년에 찾아왔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것이다. 1506년 9월 1일 연산군을 축출한 반정 핵심 세력은 곧바로 정국(靖國)공신 책봉에 들어갔다. 중종반정은 누가 뭐래도 박원종(朴元宗·1467~1510년), 성희안, 유순정(柳順汀·1459~1512년) 3인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9월 7일 발표된 101명의 공신 명단에 세 사람은 없었다.
1등공신에 유자광,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 다섯 명의 이름만 올라 있었다. 그러나 영의정 유순 등이 나서 3인을 다시 포함시켜 공신은 104명으로 늘어났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공신이 추가되어 117명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분이 약한 반정을 뒷받침해줄 정권 지지 세력 확보 차원에서 이뤄진 조처였다.
그러나 ‘공신 3훈’의 위세가 등등할 때에는 이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했다. 다만 뜻이 있는 사림 사이에서는 이들을 ‘위훈(僞勳)’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가짜 공신이라는 것이다.
조광조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종 5년(1510년) 무장(武將) 출신의 박원종은 불과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년 후에는 유순정이 53세로, 그리고 다음 해에는 성희안이 52세로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다. 실세(實勢)가 떠난 자리는 ‘위훈’ 공신이 차지하고 들어왔다. ‘사림의 청년 지도자’ 조광조가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것도 이들 위훈공신을 견제하려는 중종의 구상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19년 새해를 조광조는 종2품 대사헌으로서 맞았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대사헌이란 자리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년 이상 끌어오던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게 되었다. 모두 120명이 천거되어 28명이 급제했다. 이 중에는 이미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가 다시 응시한 사람도 여러 명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훗날 조광조의 눈치를 살폈다 하여 비판을 받게 된다. 이때 현량과에서 장원은 사헌부 장령을 지낸 바 있는 김식(金湜·1482~1520년)이었다. 조광조와 김식은 38세 동갑이었다. 김식이 조광조와 아주 가까운 데서 알 수 있듯이 28명 중 상당수가 ‘조광조 사람’이었다.
이로써 조정 내 사림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실제로 중종은 김식을 종3품인 성균관 사성으로 임명했다가 열흘 후 정3품인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시켰다. 장령이 정4품인 것을 감안한다면 불과 보름 만에 2계급 특진이었다. 그런데도 사림들은 중종을 압박해 김식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정도 되면 중종 아니라 세종대왕이라도 기분이 상할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듭 김식의 성균관 대사성 임명을 청하는 이조판서 신상의 요청에 대해 중종은 “부제학의 적임자를 기다린 후에 대사성에 임명하면 어떻겠는가?”라고 나름의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기세가 오른 사림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중종은 김식을 대사성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종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중종이 원했던 것은 왕권(王權) 강화였지 또 다른 신권(臣權) 세상을 노리는 사림의 집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훈 삭제
마침내 10월 대사헌 조광조가 칼을 뽑았다.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위훈 삭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반정 3훈’은 세상을 떠났지만 가짜 공신들은 여전히 중앙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국공신 1등에 올랐던 홍경주는 살아 있었다. 중종은 훈구와 사림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는지 모른다. 조광조는 이 점을 과소평가했다. 내친김에 훈구의 뿌리를 통째 뽑아버리려 했다. 훈구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조광조는 11월 일곱 차례의 주청을 통해 위훈 삭제를 관철시켰다. 2, 3등 공신 일부와 4등 공신 전원이 훈작(勳爵)을 삭탈당했다. 전체의 4분의 3에 달하는 76인의 훈작이 날아갔다. 당위(當爲)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반동(反動)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훈구의 전횡도 싫었지만 사림의 독선(獨善)에도 중종은 넌덜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위훈 삭제가 이뤄진 지 불과 4일 만에 훈구파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중종의 생각이 반(反)사림으로 돌고 있음을 간파한 두 사람이 있었다. 남곤(南袞·1471~1527년)과 심정(沈貞·1471~1531년)이 그들이다. 남곤은 묘하게도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그 뿌리로 보자면 사림파였다. 심정은 정국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가 위훈을 삭제당해 훈작과 토지, 노비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주인공이었다. 두 사람은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의 아버지이기도 한 정국공신 1등 홍경주를 찾아갔고 홍경주도 두 사람의 사림 제거론에 쉽게 동의했다.
홍경주는 딸 희빈 홍씨를, 심정은 자신과 가까운 경빈 박씨를 통해 중종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백성들이 모두 임금보다 조광조를 더 좋아한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희빈 홍씨는 아버지의 밀명에 따라 비원의 나뭇잎에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고 꿀로 써놓은 다음 벌레가 갉아먹은 것을 중종에게 갖다 바치기도 했다. 조(趙)씨, 즉 조광조가 곧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것을 중종이 진심으로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되는 두 후궁의 참소(讒訴)에 불안감은 더해갔을 것이다.
기묘사화
결국 중종은 당파를 형성하려 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광조 일파를 잡아들인다. 처음에는 국문도 않고 죽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 등을 옥에 가두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와 김정·김구·김식 등은 사형을 시키기로 했으나 중추부 영사 정광필이 눈물로 호소하여 일단 능주로 유배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훈구파의 김전(金詮·1458~1523년), 남곤, 이유청(李惟淸·1459~1531년)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올라 유배 가 있던 조광조 일파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중종을 설득했다. 결국 한 달 후인 12월 20일 조광조에게 사약(賜藥)이 내려왔다. 기묘사화의 시작이었다. 당시 기묘사화를 지켜보는 정광필의 입장은 중종 14년(1519년) 11월 6일 중종 앞에서 한 말 속에 그대로 들어 있다.
“저 사람들은 임금께서 다 뽑아서 현요(顯要)의 반열에 두고 말을 다 들어주셨는데 하루아침에 죄를 주면 이는 함정에 빠트리는 것과 같습니다.”
논란 끝에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던 김식은 선산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사약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으로 피했다가 목을 매 자살했다. 훗날 영의정에 오르는 김육(金堉)이 그의 증손자다.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폐비(廢妃) 신씨 복위 논쟁을 유발했다가 고초를 겪은 후 조광조의 집권 후 관직에 나와 형조판서에까지 올랐던 37세의 김정은 제주도로 안치되었다가 1521년 사약을 받았다. 아산으로 귀양을 갔던 기준(奇遵·1492~1521년)은 김정과 같은 무렵 사약을 받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조카가 선조 때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기대승(奇大升)이고 아들은 기대항(奇大恒·1519~1564년)이다. 사화(士禍)의 피바람으로 조선의 사림은 다시 깨어나기 힘든 깊은 잠에 빠져들어야 했다.
당시 정광필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그의 신도비가 잘 압축해서 기록하고 있다.
〈기묘년(己卯年·1519년, 중종 14년)에 두세 명의 신하가 거짓으로 벌레 먹은 나뭇잎과 참서(讖書)를 만들고는 액정(掖庭·후궁 경빈, 박씨를 말함)을 통해 몰래 아뢰어 천총(天聰)을 의혹시켰다. 그러고는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자, 천위(天威·임금의 위엄)가 진동하여 앙화(殃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조정의 대사(大事)를 수상(首相·영의정인 정광필을 말함)이 알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공을 불렀는데, 공이 상(上) 앞에 이르러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구원하여 화해시키려 하자 상이 진노하여 일어나 버렸다. 이에 공이 상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면서 눈물이 말을 따라 흐르자 상 또한 느껴 깨닫고서 마침내 부월(斧鉞·사형의 형벌)을 너그러이 했으니 이는 공의 힘이었다.〉 정광필은 국량(局量)이 크고 바른 재상이었다.
權奸 김안로와의 충돌
두 번째 위기는 당대의 권간(權奸) 김안로(金安老·1481~1537년)와의 충돌에서 찾아왔다. 처음에 김안로가 아직 현달하지 않았을 때 정광필이 그를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한 바 있었다. 그가 임금과 인척이 되자 내전(內殿) 세력에 의지하여 호곶(壺串)의 목장을 차지해 전답(田畓)을 만들려고 했다. 정광필이 태복시 제조(太僕寺 提調)로 재임하면서 법을 끌어대어 허락하지 않자 또 임금의 명령이라고 일컬으면서 반드시 그곳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광필이 굳게 거부하고 따르지 않자 김안로는 앙심을 품었다.
김안로가 폄척(貶斥·참소하여 벼슬을 박탈함)되어 지방에 있을 적에 그를 방환(放還·귀향보낸 죄인을 돌려보냄)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정광필이 또 자주 그 일을 중지시켰다. 이윽고 김안로가 권력을 쥐게 되자 사사로운 원한을 복수하고자 꾀하여 조정에 화근(禍根)을 빚어냈는데 정광필이 재상인 이행(李荇)에게 말하기를 “김안로는 결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쌓아 온갖 방법으로 공을 함정에 빠뜨렸다. 결국 정광필은 영의정에서 물러나 중추부 영사가 됐다. 실권(實權)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김안로의 계략에 의해 1537년 유배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6개월 만에 김안로 세력이 패망하는 바람에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중추부 영사를 맡았는데 그가 한양으로 돌아올 때의 모습과 더불어 그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신도비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서울로 들어오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구경하느라 저잣거리가 텅 비었으니, 마치 사마광(司馬光)이 낙양(洛陽)에서 궁궐로 나아오던 때에 조야(朝野)가 목을 빼고서 그가 재상으로 복직하는 것을 바라보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질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으니 무술년(戊戌年·1538년, 중종 33년) 12월 갑신일(甲申日)로 춘추는 77세였다.〉
정광필은 바르고 곧았으며 이재(吏才)와 인품을 겸비해 굽은 자를 물리치고 곧은 자를 치켜 올리려 했다. 나라의 중대한 일을 당해서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신도비는 그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했다.
〈기국과 도량이 넓고 크며 공명정대한데다가 학문으로 보충하여, 뜻하지 않은 좌절이나 굴욕에도 일찍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늙어갈수록 더욱 깊었으므로 조야는 시구[蓍龜, 점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처럼 의지하였고 사림은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렀다. 몸이 국가의 안위(安危)와 경중(輕重)을 논하는 자리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었으니, 아! 공과 같은 분은 진정 이른바 사직(社稷)을 지탱하는 신하라고 하겠다.〉
정광필은 후배를 보는 눈도 밝았다. 명종 19년 윤(閏) 2월 24일 상진(尙震·1493~1564년) 졸기 일부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도량이 있었으며 침착하고 중후하여 남과 경쟁하지 않았다. 보는 사람들이 정승감으로 기대하였다. 어렸을 적에 멋대로 행동하면서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같은 재사(齋舍)의 생도에게 욕을 당했었다. 이에 드디어 분발하여 독서하면서 과거 공부를 하여 날로 더욱 진보되어 오래지 않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기묘년에 선비들이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을 일로 삼았는데 상진은 그것을 미워하였다. 이때 반궁(泮宮)에 유학하면서 짐짓 관(冠)을 쓰지 않고 다리도 뻗고 앉아서 조롱하고 업신여기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광필을 찾아뵙고 나가니, 광필이 말하기를 “조정에 게으른 정승이 나왔다”라고 하였다.〉
상진은 실제로 1551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또 영의정으로 있을 때 좌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과 함께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 이준경을 지원하고 이끌어준 인물도 정광필이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공자(孔子)는 《주역》 곤괘(坤卦) 맨 아래 음효(陰爻)를 풀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일을 쌓은 집안[積善之家]에는 반드시 그로 인한 경사가 있고 좋지 못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그로 인한 재앙이 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는 것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일어나는 변고가 아니라 그렇게 된 원인이 점점 쌓이는 데도 그것을 분별하기를 빨리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易)에 이르기를 ‘[초륙(初六)은]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에 이르게 된다[履霜堅氷至]’라고 했으니 이는 대개 이치가 그러함을 말한 것이다.〉
정광필 형제 이름을 보면 다 신하의 본분과 관련이 있다. 보(輔), 필(弼), 좌(佐)가 그렇다. 정광필에게도 네 아들이 있었는데 겸(謙)이 돌림자로 노겸(勞謙), 휘겸(撝謙), 익겸(益謙), 복겸(福謙)이다. 노겸과 휘겸은 각각 《주역》 겸괘(謙卦) 밑에서 세 번째 양효와 네 번째 음효에 대한 풀이에 나오는 말이다. 노겸은 신하가 공로를 세워도 내세우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의 말이다.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하니[勞謙] 군자가 잘 마침이 있어[有終] 길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수고로움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공로가 있어도 자기 덕이라고 내세우지 않는 것은 (그 다움이) 두터움이 지극한 것이니 이는 자신이 공로를 세우고서도 다른 사람에게 몸을 낮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움으로 말하자면 성대하고 예갖춤으로 말하자면 공손한 것이니 겸손함이란 공손함을 지극히 함으로써 그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스란히 신하의 도리이다. 휘겸은 두루두루 겸손하다는 말이다. 정광필 생애가 아들 이름에 담겨 있다.
자손 가운데 정승이 10명 넘게 나와
정광필의 아들 중 강화부사를 지낸 정복겸의 장남 정유길(鄭惟吉·1515~1588년)이 조부를 이어 선조 때 정승에 오른다. 정유길은 정광필이 세상을 떠나던 바로 그해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는데 이때 중종이 특별히 정광필에게 잔치를 내려주었다.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鄭昌衍·1552~1636년)도 광해군 때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해 벼슬을 내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다시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창연의 아들 정광성(鄭廣成)은 돈녕부 지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정태화(鄭太和·1602~1673년), 정치화(鄭致和·1609~1677년)가 효종과 현종 때 돌아가면서 정승 자리를 차지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정태화는 특히 당색(黨色)이 서인(西人)-노론(老論) 계통이면서도 붕당을 맺지 못하도록 늘 자손들을 단속했다. 정태화의 아들 정재숭(鄭載嵩·1632~1692년)도 우의정을 지냈다. 이렇게 해서 정광필 이후 세대에서만 재상이 10명 넘게 나왔으니 정광필의 여경(餘慶)은 참으로 깊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