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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사랑하면
요일 3:19-24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19-24 /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고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다면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 우리도 죄를 저질렀을 때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스스로의 잘못을 아는데, 하물며 더없이 어지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모르시겠습니까? 21) 진정으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 양심이 깨끗하다면 우리는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당당하게 주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2) 그리고 주께 복종하며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수 있습니다. 2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24) 하나님의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께서도 그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성령께서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참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항상 함께해야 합니다. 진리가 사랑을 잃어버리면 냉혹해지게 되고 사랑이 진리를 잃어버리면 무분별해집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19-22) ‘이로써’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18절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면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진리에 속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했다”라고 말씀합니다(19). 믿음은 행함이 많아질수록 굳세어지게 되고 확신이 커지게 됩니다. 20절의 해석은 다소 난해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21절과 이어서 볼 때, 죄를 범하여 마음에 죄책감이 있더라도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됨이 증명된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고(21),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2). 22절은 ‘형제 사랑’이 기도 응답의 비결임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기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이 없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할 때 기도가 분명해지고 기도가 뜨거워지게 됩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24) 요한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23). 우리가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24).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인 연합을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단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적용: 요한은 진리에 속한 자임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안다고 말했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모습을 바라보던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과거 자신들의 본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 하지 않고 그물을 던졌을 때 제자들은 완전히 빈 그물을 거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이 그들과 함께 하였을 때 그들이 던진 그물에는 153마리나 되는 물고기를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생활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해야 한다는 엄중한 의미를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행하는 자들은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 합당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설 교 >
진리에 속한 줄을 무엇으로 알까?
요일 3:19~24 / by 조정의
접붙인 가지가 뿌리의 진액을 잘 받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롬 11:17).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걸 보고 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줄을 어떻게 알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하셨다(마 7:20). 참된 믿음은 행함이란 열매로 증명된다(약 2:17).
그런데 무성한 잎, 아름다운 꽃, 많은 열매가 달려 있어도 조화는 죽어 있다. 영적으로도 그렇다. 종교적 열심과 행함이 투철했던 바리새인들은 입술로 주를 공경하되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었다(마 15:8). 믿음이 없는 행함이 있을 수 있단 말이다.
보통 교회에서 자란 소위 ‘모태신앙인’은 이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는데 삶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행함이 너무 부족하니 믿음도 거짓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행함이 아직 부족해도 믿음은 참되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무엇으로 알까?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진리의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는지 아는 법을 소개한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 헛된 확신을 가진 이들에게 자기 현주소를 보게 하시어 예수 안에 거하게 해달라 겸손히 부르짖게 하시고, 주 안에 확실히 거하는 자들이 바른 믿음의 확신 가운데 주 앞에서 더욱더 굳세어 지길 간구한다.
1. 주 앞에서 행함(19-20절)
요한은 시작부터 분명히 말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로써는 요한이 앞서 말한 내용과 연결되는데, 특별히 18절 행함과 진실함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삶을 말한다. 10절에 나온 의를 행하는 것도 여기 포함된다. 요한은 3장 1절에 하나님께서 엄청난 사랑을 베풀어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음을 바라보라고 요구했다. 이로 보건대 요한이 설명한 행함은 하나님과 우리의 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행함이다. 믿음과 동떨어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흘러나온 행함이다.
요한은 이로써…알고(미래형-일반 원리) 또 이로써 우리 마음을 굳세게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과 연결된 행함을 통해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음을 안다. 또한 믿음과 연결된 행함을 통해 더욱더 굳센 마음을 갖는다. 굳센 마음이란 무엇인가? 요한은 앞서 2장 28절에 주가 강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는 것을 말했고, 본문 21절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 것을 말했다.
믿음에 따른 행함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주님 안에 더 확실히 거하게 된다. 더욱더 담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셨다. 이미 주님 안에 속한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럴수록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하셨다(요 15:4-5). 많은 열매는 믿음으로 맺어진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더 담대히 확신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쉽게 행함에서 믿음을 제거하고 두 부류의 오류에 빠진다. 바리새인처럼 행위로 자기 의를 얻으려 하거나 항상 부족한 행함을 보며 죄책감을 갖고 의심한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 앞에서 자기 행위를 자랑하는가? 누구 앞에서 책망을 무서워하는 종처럼 구는가?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이는…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20절)
이 말씀은 두 부류의 오류를 경계한다. 만일 당신이 행함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한다면, 기억하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바울이나 루터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도(빌 3:6) 모든 것을 아시는 거룩하신 전능자 앞에서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다(사 6:5).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눅 5:8).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반대로 당신이 만일 행함의 부족함 때문에 양심의 책망을 받아 늘 괴로우며 확신 없이 의심만 하며 산다면, 기억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 당신의 양심보다 더 정밀하게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허물을 크게 보신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사하고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셨다(롬 8:1).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20절), 우리는 “누가 능히…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다(롬 8:3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행함도 죽은 것이다. 우리의 행함은 마땅히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 곧 진리에 둔 믿음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절대 분리되면 안 된다.
가령 ‘하나님은 은혜로 나를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그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이렇게 사는 제가 부끄럽고 의심스러워요’라고 말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것 믿어요, 그런데 교회 나가는 것도 귀찮고 말씀도 지겹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둘 다 현재 겉으로 보이는 행함엔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나? 두 사람의 행함이 은혜로운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그리고 참된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다. 우리는 행함 자체보다 더 예리하게 행함의 이유(동기)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행함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코람 데오(라틴어, “하나님 앞에”)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 앞에서 마음을 굳세게 하는 비결이다. 교회에서 시키는 몇 가지 항목 혹은 당신이 세운 몇 가지 삶의 규칙이 아니라 모든 생각, 모든 행동, 모든 감정을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은혜로운 주님 앞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은혜로 자녀 삼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갖춰라. 그러면 당신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더욱더 굳센 마음으로 주 앞에서 담대히 살아갈 것이다.
2. 주 뜻대로 구함(21-22절)
20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었다면, 21절의 결과물을 얻는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다. 자기 양심에 비춰 책망할 것이 없을 수 있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를 자백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은혜로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요일 1:9).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히 4: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님 덕분이다(히 4:15; 엡 3:12).
자, 그런데 요한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는다고 말한다(22절). 요한은 이 약속을 예수님께 직접 들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 말씀은 아마도 기도에 관하여 가장 오해받고 해석하기 꺼려지는 말씀일 것이다. 우리 생각대로 거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주님께 받는다면 주께 속한 줄을 분명 알게 될 것이다(요 11:42).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22절)
여기 다시 한번 행함이 나온다. 계명을 지키는 것과 주가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계명엔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신 뜻이 담겨 있다(롬 7:12). 그런데 행함과 구하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아버지께 받으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 욕심을 위해 구한 적이 없으시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을 때도 들으심을 얻었는데(히 5:7), 그때도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하셨다(눅 22:42).
그러면 주 앞에서 그가 기뻐하시는 계명을 지키며 행하는 자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주님 이름으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구할 것이다. 자기 안에 거한 주님 말씀에 합당한 것을 구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 것이다. 아버지께 받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진심으로 바라고 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도의 부재는 매우 위험한 신호이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단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걸 의미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뜻대로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아는 방법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생각해보라. 먹는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방인이 우상을 만들어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마 6:31-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그것이 참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자들이 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부모의 기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구할 때도 있다. 구한 것을 얻지 못해 실망하거나 분노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진심으로 구한 적이 없다면, ‘주님의 선하신 뜻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구한 적이 없다면,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당신이 구한대로 하나님이 놀랍게 주신 것을 가지고 그분과의 관계에 확신을 갖지 말라. 더 굳센 확신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당신이 구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당신이 바라는 것에서 온다. 때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셨고, 사도 바울이 또 그런 간구를 드렸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진리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는 일을 행하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그것을 간절히 구한다.
3. 성령으로 행함(23-24절)
23절에서 요한은 22절에 말한 그의 계명이 무엇인지 이렇게 요약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40). 믿음은 순종과 사랑이란 행함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분이 주신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한다(요 13:34; 15:12). 이처럼 믿음과 행함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믿음과 연결된 행함은 우리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24절을 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마다.’ 이 행함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은 열매다. 그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고, 성령께서는 그 관계 속에서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 주신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면서 바로 그 행함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라고 확신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친히…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은 영으로 인도함을 받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말했다(롬 8:13-16). 성령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으로 우릴 인도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엡 3:16; 5:18).
흥미롭게도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롬 8:26-27). ②주 뜻대로 구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또한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고전 12:3).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롬 5:5). ①하나님을 아는 진리에 믿음을 두고 주 앞에서 행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했다(고전 3:16).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비주의와 은사 주의를 성경적으로 반대하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자체를 부정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과오를 자주 범한다.
우리는 오롯이 우리에게 달린 것처럼 행함을 추구하면서 그 결과를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 반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과 연결된 행함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약속하셨다(요 14:18). 그 약속은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 속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령을 받은 날부터 그들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 그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그들 안에 계심을 알게 되었다(요 14:20).
행함은 단순히 당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일군 열매가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아 뿌리의 진액을 통해 맺은 열매이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못할 때 기도하라. 성령과 함께 탄식하며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달라고 구하라. 순종할 때 기뻐하고 감사하라.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소원과 능력으로 주께서 존귀함을 얻으시고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결 론
만일 당신의 가족이 당신에게 “진리에 속한 줄을 무엇으로 확신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교회 참석, 성경 읽기, 이웃 사랑, 금연과 금주, 신비로운 체험이나 놀라운 기도 응답?
당신이 삶으로 맺는 열매들이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은 첫째,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그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 둘째, 주님 뜻대로 구하는 마음에서 온다. 셋째,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열매의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의 삶에서 좋은 열매를 발견하는가?
사랑하면 누리는 축복
요한일서 3장 18-24절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그리고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과 성경이 약속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볼까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세상에 많은 아버지와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잖아요.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이 늘 친밀하고 서로 마음을 나누고 따뜻한 부자의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실질적이고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죠. 우물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땅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간 우물은 그 누가 보아도 우물입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가뭄이 어찌나 극심하였는지 우물이 말라 그곳에서는 더 이상 한 방울의 물도 길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물이라는 이름과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는 우물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면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우물이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단 한 바가지의 물도 길어 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메말라 성경이 묘사하는 그 충만한 하늘의 은총을 조금도 경험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힘겨운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실질적이고 너무도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줍니다. 오늘 본문 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정도로는 안되고, 행함으로 그리고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대답이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꼭, 그리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대답이 조금 의외라고 생각되시는 분은 계속 이어지는 오늘의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어떻게요? “이로써”, 곧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9절은 더욱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로써” 곧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19절 뒷부분,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그러므로 내가 진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굳세게 서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정도로는 안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인생의 풍파가 찾아옵니다. 계획이 무너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그저 눈물로 기도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광야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수님을 분명히 믿기는 믿지만 우리 마음에 확신이 사라지고 의심을 생길 때도 분명히 있지요.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나? 과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맞나? 과연 지금 내가 걸아가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생명의 길, 기쁨과 행복의 길이 맞나?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분명히 믿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의문이 들고 걱정이 찾아는 경우가 있어요. 바로 그때 누가 확신을 가지고 그 마음을 굳세게 붙잡을 수가 있을까요? 매일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어디를 가든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대답을 전혀 내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제 아무리 강력한 폭풍우가 몰려와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믿음 안에 굳세게 설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여러분의 사회 생활, 여러분의 가정생활, 심지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별로 큰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마땅히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느냐 용서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단지 그 사람과 여러분의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로 이어진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만드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먼저 용서하십시오. 마지막까지 이해하고,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축복 – 기도의 응답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곧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한 축복을 누립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그 가운데 오늘은 두 가지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당연하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을 알면서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했다면,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면, 여전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여 내 마음이 그 사람을 싫어한다면,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할 때 그것이 마음에 걸림이 되지요. 자책이 되잖아요. 당연히 하나님께 담대한 마음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1절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새 계명과 같이 서로 사랑하면,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데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22절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계속해서 설명하지요.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 곧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로 그 계명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본문에 따르면 우리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새벽과 밤으로 매일 같이 교회에 나와 울부짖으며 기도하지만,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나아가 누군가를 끝까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의 기도를 과연 들어주실까요? 그러면 과연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사랑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 나의 마음을 조금 속상하게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사람. 하나님은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은 구약시대부터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 15:7-8)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신 15:10a)이제 이 말씀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5:10b)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마다 모두 응답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의 말씀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축복 –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곧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한 축복을 누립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그 첫 번째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오늘 본문 23절과 2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합니다.’ 그리고 ‘주님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다니는 신학생이었을 때, 여러 선배 목사님들과 짧지 않은 여행길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여행길에서 들었던 어느 선배 목사님의 이야기가 아직도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기도의 중요성,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깊이 오랜 시간 기도하며 교제하고 싶은 것은 마음뿐이요 실제로 기도하려고 앉으면 몇 마디 기도하고는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좀더 길게 좀더 깊이 기도하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가 않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제가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오래 하나님과 깊이 기도하며 교제하고 싶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불현듯 하나님께서 놀라운 지혜를 주셨답니다. 그 지혜는 이것이었어요. “교회 요람을 보고 기도하여라.”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던 바로 그 날부터 그분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이 새벽마다 교회 요람을 펼쳐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어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첫 페이지부터 한 분 한 분의 성도님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 기도 시간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요 기도가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 지더라는 거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도 내일부터 새벽예배에 오실 때에는 성경책과 찬송가만 가지고 오지 마시게 교회 요람을 가지고 오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요람을 펼쳐놓고 기도하는 것이 왜 그토록 그분의 기도를 풍성하게 만들었는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본인이 목양하는 성도님들을 한 분 한 분 생각하며 진심으로 기도하다 보니 그분의 마음속에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일어났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곧 예수님을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면,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면 바로 그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바로 그 사람 안에 거하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영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에게서 멀리 계신 분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주님이 내 삶에 가까이 오신다는 것이 별로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계신다는 성경의 표현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출석해도 경험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읽는 것도 물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사랑하되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사랑으로 응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과 반응에 상관하지 말고 여러분은 끊임없이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여러분 곁에 있는 한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확신을 얻게 되고, 그렇게 내 곁에 있는 사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그렇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끝까지 사랑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요한일서 3:13-24 / 최현준
요한일서가 기록되고 읽혔던 시대에는 영지주의 이단이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와 함께 육체적 욕구들은 악한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인 욕구들을 절제하는 것을 신앙적인 삶으로 오해하는 경향이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절제하고, 잠을 줄이고, 말을 적게하며, 성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경건한 삶을 위한 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이원론적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의 모습과 일상생활에서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중적인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요한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사랑으로 건져주시고 주님의 친구 삼아 주셨습니다. 참된 경건은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형제를 섬기는 방식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3-24절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인 13-18절은 그리스도인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근거와 방법을 교훈하며 후반부인 19-24절은 형제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연결되는지 교훈합니다.
사랑: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13-15)
(13-15)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은 요한일서의 수신자들을 향해 ‘자녀들아’(2:1), ‘아이들아’(2:18)라는 호칭에 이어 ‘형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고대 지중해 사람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곧 가정을 잘 돌보며 지키는 사람을 의미하였으며, 자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동함으로 가정에서 특별하게 여기는 가치를 드러내었습니다. 이와같은 문화적 토대 위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형제, 자매임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서 세상은 자기의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이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교훈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13-15절을 사랑과 미움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형제 사랑은 구원받은 사람의 표지입니다. 셋째,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요한일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고 순교할 수도 있는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3절에 ‘이상히 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상히 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를 주로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이상한 일은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며 성령의 공동체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 가족의 표지이며 영생을 얻은 사람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요한은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친족살해’였음을 상기시키며 15절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영생이 없었을 때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태복음 5장 21절 이하에서 새 계명의 적용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선생으로 자처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께서 매섭게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겉으로는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시커먼 속내를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형제를 향해 분노하고 모욕적인 말을 한 것이 실제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셨으며 이성을 향해 음란한 생각을 품은 것은 곧 간음죄를 범한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 자리할 수 없는 이유는 성도의 마음이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욕구를 따라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그동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겼던 기본적인 감정과 욕구들을 성령 안에서 새롭게 배우고 훈련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야 할 감정이며 훈련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 행함과 진실함으로(16-18)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많은 성도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롭게 배우거나 훈련받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정의하는 세상의 방식을 살펴보면 사랑은 새롭게 배워야 할 감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집착하고 폭력을 행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기대하는 가정에서도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 대신에 학대와 살인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와같은 현실을 마주할 때면 사랑은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익숙한 것이 아니라 낯설고 배워야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요한은 형제 사랑하기를 강조하며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으며 우리를 얻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강요하거나 말뿐인 공허한 사랑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십자가를 통해 증거하셨습니다. 사랑은 행동이며, 사랑은 희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요한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표현을 통해 자기 희생 없는 공허한 사랑을 교회 안에서 몰아내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밀알의 사랑을 교회에 심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풍성한 열매가 교회 안에 충만할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17-18)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시작되었고 그 사랑이 교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본분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만큼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사랑’의 가치를 귀하게 생각하는 곳이 있을까요? 그런데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을 향해 형제를 사랑할 것을 강조합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것을 강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의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채워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물’은 ‘이 땅’에 속한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돈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막강한 권세를 행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했을 때는 돈을 사랑하고 재물을 섬기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삼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경고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은 인격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딤전6:10, 딤후3:2, 히13:5).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합니다. 돈은 형제를 향한 사랑의 수단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이 세상은 황금이 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형제를 위해 자신의 물질을 나눌 수 있다면 물질과 함께 시간도 재능도 그 어떤 희생도 가능하게 됩니다. 즉, 형제를 향한 사랑은 말 뿐인 공허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말해주는 것들(19-24)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구별됨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말과 행동의 절제나 겸양의 태도나 금욕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재물을 형제를 위해 기꺼이 나누는 생활방식입니다. 세상은 피와 땀과 소망인 돈을 흘려보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상히 여길 것이며 물질을 흘려보내는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자신의 소속이 세상이 아니라 진리임을 알고 믿음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20-21)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위선과 위장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생 노릇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도 그들의 겉과 속이 다름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사랑의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것을 강하게 권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 전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떠는 삶을 살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22-24)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형제 사랑으로 증명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간구하는 것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필요를 채우며 연약한 형제를 돕는 일에 사용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면 처음에는 ‘주님’이라고 시작하지만 이어지는 기도의 목적어는 언제나 ‘나’임을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시기를 바라고 주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같은 기도를 들으실 때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돈을 채워주면 그것으로 형제의 삶을 위로하며 건강을 붙들어 주면 그것으로 형제를 위해 봉사하고 높은 지위로 올려주면 그것으로 낮은 곳을 섬기는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친구 삼아주신 주님과 동행하는 비결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뿐인 사랑으로 우리를 권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마른 나뭇가지와 같은 우리의 인생을 생명나무 되시는 주님께 접붙여 주셨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증거하는 것은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 우상숭배와 돈을 사랑하는 맘모니즘(mammonism)에 빠져있습니다. 주님께서 친구삼아 주신 우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뿐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싹틔우는 삶을 시작하길 원합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끝까지 지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시며 믿음으로 용기낼 수 있도록 힘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측량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생을 얻었음에도 말 뿐인 공허한 사랑의 삶을 살았던 우리를 돌아보게 하시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상히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 오히려 우리의 삶에 사랑이 없음을 이상히 여기며 사랑이 메마른 우리의 마음이 더 황폐해지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시옵소서. 죄의 종 노릇하던 우리를 무한하신 사랑으로 친구삼아 주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기꺼이 삶을 나누는 삶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이상히 여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시선을 그동안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2.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으로써 ‘사랑’을 알았다는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 생각했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난 이후의 ‘사랑’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3.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4. 우리를 친구 삼아주신 주님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원수 되었던 우리를 친구 삼아주신 사랑을 받았음에도 제한적인 사랑을 하고 있었던 삶에서 어떻게 돌이키시겠습니까?
5.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하시겠습니까?
진실한 사랑
요한일서 3:10-24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이 의인 아벨을 증오했듯이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은 다르기 때문에 겉으로는 평화와 화목을 말하지만 깊은 골이 있습니다. 그런데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 본문은 세상과 형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본문은 특별히 주 안에서 지근의 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라는 본문을 보아 더욱 분명합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 말은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라는 이 말을 자칫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 그대로 우리가 지금 형제사랑을 행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구원 받았음 말해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미움과 살인은 동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인은 미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게 된 데부터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살인은 한 가지 동기, 미움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 미움은 마귀의 획책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 살인은 살인의 원조인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살인자는 마귀에게서 났고 그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 마음에 내가 누구를 미워해야 미움(恨)이라 생각하는 것은 협소한 생각입니다. 형제를 돌보지 못하게 마귀가 심은 마음이 다 미움입니다. ○ 미움과 동일한 부류의 마음이 시기심, 무관심, 이기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움을 품은 자들은 천국의 시민으로 부적격한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보통 ’살인‘을 생각할 때 고의적으로 계획한 살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법은 자신이 몰랐다 하더라도 사망의 위험성을 방치하면 살인죄와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공사장에 난간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것, 부모가 더운 날에 어린아이를 차 안에 방치한 것, 이것 역시 살인죄로 다스립니다. 알면서도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살인 방조죄이며 의도적인 살인과 동일하게 보는 것입니다. 탈북한 북한주민을 북한으로 다시 돌려 보내 죽게 한 것도 살인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무관심이고 부주의이고 이기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몰랐다. 내가 안 했다” 변명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에서 요한은 형제 사랑의 이유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희생의 사랑을 제시합니다. ○ 주님은 대속적 희생, 고귀한 죽음으로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은 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사랑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유의할 것은 목슴을 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실제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타적 자세로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리고 희생이 없는 사랑은 값어치 없는 가벼운 사랑입니다.
[17절] 누가 이 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즐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이는 형제를 위하여 목슴까지도 버리는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했습니다.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을 물질로 돕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물질은 죽고 사는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물질로써 증명해야 합니다. ○ 사랑이란 추상적인 내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직접 행동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세상이 말하는 사랑을 구분 짓는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사랑은 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19, 20절]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가 참된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과 신앙의 더욱 큰 확신이 생기게 된다 말합니다. '진리에 속했는가?'의 증거는 '행함과 진실함'입니다. 나의 행동, 나의 결단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믿음을 보이고 나면 나는 자유롭고 담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 어느 목사의 가정에서는 매주 성경 한 구절씩 암송하기로 하였습니다. 두 딸은 부모보다 더 성경 암송을 잘했습니다. 어느 날 두 딸이 소리를 지르며 싸움이 붙었습니다.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을 때, 아버지인 목사님이 큰딸을 불러 물었습니다. 이번 주 성경 구절이 어디지?" 그러자 딸은 "요한일서 4장11절이에요. 사랑 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줄줄 암송하며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방으로 들어가 더 심하게 싸우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진리에 속한 자라고 말하지만, 진리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외우고 하면 무엇합니까? 삶 속에 진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욥기 31:6-8]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고후 8:10,11]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 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은 “내가 기근을 땅에 내리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니라" (암8:11)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도 기갈이지만 말씀을 실천하려 하지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 데 있습니다.
○ 한국에서 수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험이 있는 날에는 김포비행장에 비행기도 뜨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고3 아들을 둔 부모가 있습니다. 시험을 한 달 앞 두고야 그 부모는 매일같이 철야기도 금식기도 새벽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 24시간 찾아가 매달립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학부모의 마음을 맞추어 고3시험생 특별기도회 시간을 만들어 실시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입니다.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 아들 녀석이 이번에 좋은 점수를 맞게 해주십시오”
○ 좀더 일찍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여 살았으면 얼마나 더 사랑을 받았겠습니까? 천지 우주만물의 창조자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을 믿었더라면 얼마나 담대함으로 구하여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보이셨습니다. ○ 우리는 그의 계명, 그의 원하시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이 시대에 사람들은 c19로 전염병에 걸릴까 염려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혼, 살인, 자살, 마약중득, 낙태, 동성애 등등 범죄가 만연하여 사망의 길을 가고 있음을 통탄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주어야 할 것은 진실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20절]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보신다면 우리는 책망 받을 일들이 엄청나게 많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바로 책망하지 않으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오래 참으시는 속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은 죄를 지어도 심판하지 않으시는 분, 하나님은 죄를 덮으시는 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자신을 섬기는 자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22,23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우리에게 보이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일반적으로 불교는 자비의 종교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종교의 특성을 한 개 단어로 뭉뚱그릴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0:25-37절에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유대교 신학자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묻자 예수님은 ‘당신이 평생 연구한 율법은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소?’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신학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하게 보살펴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신학적인 이론보다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44절에서는 ‘원수사랑’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사도들의 편지에도 흔하게 나옵니다. 그중에 요한일서가 대표적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요일 4:7-21절은 사랑의 신학적 특징을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두 군데만 인용하겠습니다.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좀더 격하게 반응하는 분들은 이 구절들을 공책에 쓰기도 하고, 외우기도 합니다. 이런 말씀을 접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를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와 다르게 반응하는 기독교인들도 없지 않습니다. 뭔가 그럴듯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실제 삶에서는 실감이 가지 않는 겁니다. 더 나가서 뭔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기까지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설교 본문인 요일 3:16절을 읽어봅시다. 이 말씀이 실제로 어떻게 들리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에는 흔쾌하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간혹 그런 감동적인 동화를 듣기는 합니다. 사형수 친구가 사형 집행되기 전에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대신 감옥에 들어갔다가 돌아오기로 약속된 날짜에 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기꺼이 대신 사형장에 끌려 나간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한 겁니다. 목을 치려는 그 순간에 친구가 돌아와서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왕이 이들의 우정을 높이 평가해서 사형수마저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면서 이웃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매스컴에 오르내립니다. 본문을 쓴 요한도 이런 경우를 머리에 그리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고 말한 것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부담을 느낄만한 진술입니다. 이런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이웃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카페를 운영하는 기독교인이 이 말씀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손님들을 이웃 카페로 다 보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한은 이어지는 17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강도를 약간 낮추어서 설명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목숨에서 돈으로 단계가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가난한 교우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시다. 돈의 액수에 따라서, 그리고 그런 부탁을 받은 이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지겠지만 입장이 곤혹스럽다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돈 관계는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돈거래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돈도 잃고 사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교우가 직접 돈 이야기는 하지 않더라도 그런 신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사를 비롯한 모든 신자들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신자들을 도와 줄 마음이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운운할 수 있느냐 하는 오늘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난감합니다.
저는 요한일서 기자가 우리의 영혼을 불편하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형제사랑을 단호하게 언급해야만 했던 어떤 상황이 요한일서 공동체에 있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잘못된 사상을 염두에 두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요일 2:26절에서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 했습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오늘 설교 본문 다음에 나오는 요일 4:1-6절에서 자세하게 언급됩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1절)이고, ‘적그리스도의 영’(3절)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한다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만연했던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영지주의는 1세기 말과 2세기에 걸쳐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플라톤 철학의 아류입니다. 이 철학은 영만 최고의 가치로 보고 육과 물질은 악한 것으로 봅니다. 영육이원론에 기초한 사상입니다. 이런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영향을 끼친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요소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보통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살았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곤란합니다. 육체는 본능적인 속성으로 움직입니다. 식욕, 성욕, 자기 성취욕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게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 천사나 귀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된 신이었던 예수님이 이런 육체로 살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일부 기독교인들은 영지주의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았던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산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로 살았다고 말입니다. 그걸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이런 영지주의의 변형된 형태는 현대 기독교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회만 거룩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성속이원론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개인이나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신약성서 기자들과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과 격렬하게 투쟁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을 이단으로 단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성육신 교리가 이런 신학 투쟁의 결과입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요한도 그들 교회 안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요한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악하고 썩어버릴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순수한 영혼 구원의 신비를 깨닫고 허무한 세상에서의 삶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만 한다는 겁니다.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교우들을 향해서 ‘그게 아니다.’ 하고 설득하는 중입니다. 실제 육체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과 그 삶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리신 것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형제 사랑은 영지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모른 척하고 살아도 좋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만 성서가 말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이해 없이 무조건 ‘사랑합시다.’ 하고 외치기만 하면 그것은 공허한 주장이 되고 맙니다. 더 나가서 설교 앞부분에서 짚었듯이 우리의 영혼을 오히려 불편하게 하는 또 하나의 율법이 되고 맙니다. 다행스럽게도 형제 사랑을 피력하는 요한의 이 편지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형제 사랑을 말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계명을 언급하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겁니다. 요한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중입니다. 형제 사랑도 그런 삶의 일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본문에서 계명은 두 가지로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를 줄이면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을 수직적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수평적인 겁니다. 우리가 흔하게 들었던 구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계명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겁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고, 사랑은 육적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 해결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실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성적이고 인격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형제 사랑을 온전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일은 하지 말고, 오히려 칭찬받을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구제와 봉사와 자비와 긍휼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려고 애를 씁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입장을 귀하게 여기지만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의 생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그분들의 이해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문제를 바울의 가르침에 기대서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일명 사랑 예찬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본질, 또는 사랑의 능력을 피력했습니다. 그중에 고전 13:3절만 읽겠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극치의 사랑 실천입니다. 요일 3:16, 17절이 말하듯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 주는 것이며, 가난한 형제를 위해서 돈을 기꺼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이런 극치의 사랑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상하지요?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가 곧 사랑을 담보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사랑과 요한이 말하는 사랑이 다르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왜 이렇게 상대화하는 것일까요?
이웃 사랑은 윤리의 문제입니다. 윤리 앞에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실존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행위가 순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실천을 욕망의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많이 일어납니다. 장애시설을 모범적으로 운영해서 국가에서 훈장도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은 인물이 실제로는 수용된 장애인을 학대하고, 기금을 착복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둘째, 사람은 사랑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들은 다 사랑으로 한다고 말을 하지만, 부모의 행동이 오히려 아이의 삶을 파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완벽한 이웃 사랑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만한 행위만으로 그 사람이 사랑을 실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사랑이 없으면 ... 자기 희생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사람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은 인류 역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인간의 모든 사랑 실천은 곧장 교만으로, 탐욕으로, 자기 과시로 떨어질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에 자기의 몸을 불사른다고 해도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부활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런 삶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너무 일방적이고, 너무 극단적인 주장일까요?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한다면서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기록한 요한도 사랑만을 따로 말하지 않고 믿음을 함께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요한이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말할 때 사용한 접속사 ‘과’(헬라어 ‘카이’)를 좀더 넓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도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교회를 잘 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에 대한 답과 실천 능력까지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당신 말이 옳지만 실제로는 게 잘 안 된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속 시원한 대답을 제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평생 연구하고 그 성경의 중심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했던 설교자로서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건성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믿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 사실을 경험한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며,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형제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일반적으로 불교는 자비의 종교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종교의 특성을 한 개 단어로 뭉뚱그릴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0:25-37절에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유대교 신학자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묻자 예수님은 ‘당신이 평생 연구한 율법은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소?’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신학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하게 보살펴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신학적인 이론보다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44절에서는 ‘원수사랑’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사도들의 편지에도 흔하게 나옵니다. 그중에 요한일서가 대표적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요일 4:7-21절은 사랑의 신학적 특징을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두 군데만 인용하겠습니다.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좀더 격하게 반응하는 분들은 이 구절들을 공책에 쓰기도 하고, 외우기도 합니다. 이런 말씀을 접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를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와 다르게 반응하는 기독교인들도 없지 않습니다. 뭔가 그럴듯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실제 삶에서는 실감이 가지 않는 겁니다. 더 나가서 뭔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기까지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설교 본문인 요일 3:16절을 읽어봅시다. 이 말씀이 실제로 어떻게 들리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에는 흔쾌하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간혹 그런 감동적인 동화를 듣기는 합니다. 사형수 친구가 사형 집행되기 전에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대신 감옥에 들어갔다가 돌아오기로 약속된 날짜에 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기꺼이 대신 사형장에 끌려 나간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한 겁니다. 목을 치려는 그 순간에 친구가 돌아와서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왕이 이들의 우정을 높이 평가해서 사형수마저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면서 이웃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매스컴에 오르내립니다. 본문을 쓴 요한도 이런 경우를 머리에 그리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고 말한 것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부담을 느낄만한 진술입니다. 이런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이웃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카페를 운영하는 기독교인이 이 말씀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손님들을 이웃 카페로 다 보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한은 이어지는 17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강도를 약간 낮추어서 설명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목숨에서 돈으로 단계가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가난한 교우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시다. 돈의 액수에 따라서, 그리고 그런 부탁을 받은 이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지겠지만 입장이 곤혹스럽다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돈 관계는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돈거래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돈도 잃고 사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교우가 직접 돈 이야기는 하지 않더라도 그런 신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사를 비롯한 모든 신자들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신자들을 도와 줄 마음이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운운할 수 있느냐 하는 오늘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난감합니다.
저는 요한일서 기자가 우리의 영혼을 불편하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형제사랑을 단호하게 언급해야만 했던 어떤 상황이 요한일서 공동체에 있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잘못된 사상을 염두에 두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요일 2:26절에서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 했습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오늘 설교 본문 다음에 나오는 요일 4:1-6절에서 자세하게 언급됩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1절)이고, ‘적그리스도의 영’(3절)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한다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만연했던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영지주의는 1세기 말과 2세기에 걸쳐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플라톤 철학의 아류입니다. 이 철학은 영만 최고의 가치로 보고 육과 물질은 악한 것으로 봅니다. 영육이원론에 기초한 사상입니다. 이런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영향을 끼친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요소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보통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살았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곤란합니다. 육체는 본능적인 속성으로 움직입니다. 식욕, 성욕, 자기 성취욕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게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 천사나 귀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된 신이었던 예수님이 이런 육체로 살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일부 기독교인들은 영지주의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았던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산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로 살았다고 말입니다. 그걸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이런 영지주의의 변형된 형태는 현대 기독교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회만 거룩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성속이원론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개인이나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신약성서 기자들과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과 격렬하게 투쟁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을 이단으로 단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성육신 교리가 이런 신학 투쟁의 결과입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요한도 그들 교회 안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요한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악하고 썩어버릴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순수한 영혼 구원의 신비를 깨닫고 허무한 세상에서의 삶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만 한다는 겁니다.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교우들을 향해서 ‘그게 아니다.’ 하고 설득하는 중입니다. 실제 육체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과 그 삶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리신 것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형제 사랑은 영지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모른 척하고 살아도 좋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만 성서가 말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이해 없이 무조건 ‘사랑합시다.’ 하고 외치기만 하면 그것은 공허한 주장이 되고 맙니다. 더 나가서 설교 앞부분에서 짚었듯이 우리의 영혼을 오히려 불편하게 하는 또 하나의 율법이 되고 맙니다. 다행스럽게도 형제 사랑을 피력하는 요한의 이 편지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형제 사랑을 말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계명을 언급하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겁니다. 요한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중입니다. 형제 사랑도 그런 삶의 일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본문에서 계명은 두 가지로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를 줄이면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을 수직적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수평적인 겁니다. 우리가 흔하게 들었던 구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계명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겁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고, 사랑은 육적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 해결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실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성적이고 인격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형제 사랑을 온전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일은 하지 말고, 오히려 칭찬받을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구제와 봉사와 자비와 긍휼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려고 애를 씁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입장을 귀하게 여기지만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의 생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그분들의 이해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문제를 바울의 가르침에 기대서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일명 사랑 예찬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본질, 또는 사랑의 능력을 피력했습니다. 그중에 고전 13:3절만 읽겠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극치의 사랑 실천입니다. 요일 3:16, 17절이 말하듯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 주는 것이며, 가난한 형제를 위해서 돈을 기꺼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이런 극치의 사랑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상하지요?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가 곧 사랑을 담보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사랑과 요한이 말하는 사랑이 다르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왜 이렇게 상대화하는 것일까요?
이웃 사랑은 윤리의 문제입니다. 윤리 앞에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실존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행위가 순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실천을 욕망의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많이 일어납니다. 장애시설을 모범적으로 운영해서 국가에서 훈장도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은 인물이 실제로는 수용된 장애인을 학대하고, 기금을 착복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둘째, 사람은 사랑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들은 다 사랑으로 한다고 말을 하지만, 부모의 행동이 오히려 아이의 삶을 파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완벽한 이웃 사랑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만한 행위만으로 그 사람이 사랑을 실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사랑이 없으면 ... 자기 희생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사람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은 인류 역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인간의 모든 사랑 실천은 곧장 교만으로, 탐욕으로, 자기 과시로 떨어질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에 자기의 몸을 불사른다고 해도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부활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런 삶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너무 일방적이고, 너무 극단적인 주장일까요?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한다면서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기록한 요한도 사랑만을 따로 말하지 않고 믿음을 함께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요한이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말할 때 사용한 접속사 ‘과’(헬라어 ‘카이’)를 좀더 넓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도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교회를 잘 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에 대한 답과 실천 능력까지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당신 말이 옳지만 실제로는 게 잘 안 된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속 시원한 대답을 제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평생 연구하고 그 성경의 중심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했던 설교자로서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건성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믿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 사실을 경험한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며,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형제 사랑입니다.
확신의 용기
요일 3:19-24
오늘 말씀은 ‘확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난 주는 ‘사랑의 용기’를 말씀드렸고, 오늘은 ‘확신의 용기’에 대한 설교입니다. 사랑에도 용기를 붙였고, 확신에도 용기를 붙였습니다. 둘 다 쉽지 않기에 ‘용기’를 붙였습니다.
각설하고 말씀 드립니다. 19절에 나오는 사도 요한의 말씀이지만 저도 동일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도, 하나님도 믿기 힘들어졌지만 우리 모두, 주 앞에서 ‘굳세게’, ‘깊은 확신’으로 살아 가십시다.많은 말씀 드리지 못하고 제가 묵상한 확신의 소중함, 확신이 필요한 이유를 나누겠습니다.
(1) 의심보다 확신이 좋다.(21절)
확신이 필요한 이유 첫번째입니다. 의심보다 확신이 좋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좋으십니까? 확신이 좋으십니까? 의심이 많으십니까? 확신이 많으십니까? 의심보다 확신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의심도 필요하지만 의심보다는 확신이 좋습니다. 21절에 보면 확신이 주는 선물이 나옵니다. ‘담대함’이라는 단어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의심보다 확신이 좋은 이유입니다. 의심은 불안하고 흔들리지만 확신은 견고하고, 담대합니다. 여기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책망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말이 아닙니다.책망할 것이 있고, 부끄러운 모습이 있지만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기에(20절)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담대함은 진리이신 예수님께 속함(19절)을 확신하는 자들이 얻는 선물같은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가 넘치는 세상에서 담대함을 가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해도 든든합니다. 이 귀한 담대함과 굳셈이 ‘하나님 앞에’ 있을 때 생깁니다. 성경에 나오는 확신에 찬 고백 몇 구절 뽑아 왔습니다. 먼저 욥의 확신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다윗의 확신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사도 바울의 확신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하나같이 대단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담대합니다. 얼마나 담대합니까? 하나님이 있으니 무너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과 담대함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확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확신은 담대함을 줍니다. 담대하면 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단단해집니다. 의심은 긴장을 주고, 생각을 주지만 이런 힘은 없습니다. 의심보다 확신이 좋습니다.
(2) 실패에 무너지지 않게 한다.(20절)
확신이 필요한 이유 두번째입니다. 확신은 실패에 무너지지 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실패가 없으면 좋겠지만,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20절에 있는 사도 요한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신자의 삶을 살아가도 자신을 볼 때 부끄럽고 책망할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새번역) 자신의 실패와 부족으로 가책을 받고, 자책을 하더라도 크신 하나님, 모든 내막과 상황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이 있으니(=확신) 무너지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확신이 주는 중요한 힘입니다.
확신을 말하고 있지만 확신은 한번에, 한순간에 강해지지 않습니다. 확신은 수 많은 인생의 반복을 통해…올라라고, 내려가고, 의심하고, 신뢰하고, 불안하고, 평안하고, 아프고, 건강하고, 실패하고, 성공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구체적인 정황을 말씀드리지 않지만 이같은 인생의 우여곡절과 희노애락의 반복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신뢰를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하나님을 믿게 됩니까? 잘 나갈 때 믿지 않았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습니다(롬4:18). 캄캄할 때, 두렵고 불안할 때 ‘그래서’ 믿습니다. 우리 같으면 ‘속았구나’, ‘가짜구나’ 이러기 쉬운데,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보면서도,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줄 것을 ‘확신’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좋게 보십니다.
확신이 언제 필요합니까? 잘나갈 때, 환할 때, 편할 때도 필요하지만 확신은 캄캄할 때, 실패할 때 두려울 때 더 필요합니다. 큰 불안과 염려가 올 때 하나님 확신하십시다. 확신은 위험을 무릅쓸 용기를 주고, 새로 시작할 용기를 줍니다. 반대와 난관에 무너지지 않게 하는 단단함을 줍니다.
노아가 방주를 오랫동안 만듭니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방해했습니다. 모든게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끝까지 합니다. 어디서 나온 뚝심입니까? ‘확신’입니다.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난관과 위기를 헤쳐 나갔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옥중 찬송도 확신에서 나온 찬송입니다. 우리도 ‘확신’하면 무너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3) 꽃피는 인생을 살게 한다(23~24절)
그래서 세번째 입니다. 확신은 확신을 가진 이들에게 꽃피는 인생을 살게합니다. 황무지에 장미꽃 피고, 마른 땅에 샘물 터지고, 사막에 물 흐르는 놀라운 장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역사와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을 ‘확신’하십시오.사막에 물 흐르고, 황무지에 꽃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장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유하면 믿음은 확신의 뿌리고, 확신은 그 믿음의 뿌리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뿌리에서 꽃을 피게하는 것은 내주 하시는 성령(24절)이십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심으로 꽃피우게 하십니다. 23절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두 가지입니다. 믿는것. 사랑하는 것. 인생을 꽃 피우게하는 삶의 기본, 신앙의 기본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극심한 박해의 두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준 처방입니다. ‘굳게 믿고, 사랑하라’
흔들릴수록 신앙인들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깊게 확신 할 때 사랑이 나오고, 그 사랑이 서로에게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우고 이겨 나갈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최후 보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백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46:2~3)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불안의 파도가 몰려올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① 멀리 보시기 바랍니다. 멀리봐야 합니다. 눈 앞에 있는 불안의 현실만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셨던 과거,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까지 다 봐야 합니다.
② 깊게 봐야 합니다. 깊게 보면서 의심을 털어내야 합니다. 깊게 보면 은혜가 보이고, 감사가 보입니다. 고난의 뜻도 볼 수 있습니다. 내 눈물을 모으시는 성령의 위로하심이 보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③ 넓게 보십시오. 나만 아프지 않구나. 더 아픈 사람도 많구나. 하나님을 품고 견디고, 이겨냈던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 보십시오. ④ 확신이 흔들릴 때 높게 보십시오. 땅의 현실만 보면 안됩니다. 생명을 품은 자연을 보고, 밤 하늘 가득한 별을 보면서 경이로운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멀리 보고, 깊게 보고, 넓게 보고, 높게 볼 때 불안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확신과 믿음이 생겨 날 것을 ‘확신’합니다. ‘확신의 용기’를 가지고 두려움과 불안을 이겨 내십시다. 성령께서 담대함과 이길 힘 주셔서 꽃 피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확신을 보고 주님께서 많이 기뻐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