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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별 그리고..그리움
세상의 모든 뿌리를 적시는 눈물
1.
4월의 꽃들은 경계도 없다.
경계를 지우며 피고 진다.
천지간을 넘나들며 자적하던 시인들도 4월의 도원 앞에서만큼은 몽유로서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고 무릉으로서 스스로의 빗장을 푼다.
아직 영육(靈肉)의 일치 없이 꿈의 존재인가 싶으면 현실의 존재이고 현실의 존재인가 싶으면
꿈의 존재임을 4월은, 장자의 나비를 띄워 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침묵을 지키게 한다.
나비가 날아가 앉는 꽃잎마다 꽃은 자기 온몸을 흔들고, 나비가 날듯이 마냥 스치기만 하여도
시인은 자기 온몸을 떨고, 그 온몸들의 떨고 흔들림으로 인해 삶과 죽음은
서로 껴안은 채 바다처럼 출렁거리고, 출렁거림으로써 그 무게도 똑같아져
마침내 공명을 불러 일으킨다. 이와 동시에 4월의 꽃과 시인도 하나로 포개져
서로 심연이 같아지듯 공명도 같아져 비로소 삶의 절정인 소멸, 바로 그 ‘울창한 미립’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 미립을 목전에 둔 어느 시인의 마지막 객혈 같은 동백꽃 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진달래가 수의를 연분홍으로 채색하고 그에 질세라 산천의 산수유꽃들도
급히 내려와 시인의 상여 그림자를 샛노랗게 단청한다.
땅에서는 또 이름 없는 온갖 풀꽃들과 쑥들이 지천으로 솟아나
먼 길 가는 님들의 발목 풀어주는가 하면, 넋을 실어가는
훈풍마다 여울지는 붉은 자운영이며 앵두꽃, 배꽃, 무꽃,
유채꽃, 민들레꽃 그리고 먼 발치 뒷짐지고 있다 한순간, 화끈하게 피었다가
화끈하게 지는 벚꽃들이며, 한겨울 눈보라에도 결코 팔지 않는다던
향기를 오늘따라 무상으로 뿜어대는 매화꽃들이 여기저기,
저 아득한 상여 그림자를 만장기처럼 뒤따른다.
그리하여 그 만장기들 물결 사이로 성급한 나비들이 향기에 취해
혼몽스런 천지간을 단숨에 넘나들고, 길섶 외진 구석에서는
쇠똥구리 한 마리가 탁구공만하게 똘똘 뭉친 쇠똥을 뒷발로 분주히 굴려가고 있다면,
굴려가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무심히 일몰을 쳐다보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장려한 봄날의 화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 삼엄한 봄날의 게송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4월은, 나에게, 나비같은 나의 生과 더불어 쇠똥구리 같은 침묵을 주었지만,
내가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다른 한 발이 벌써 허공을 짚고 있다는 사실에서,
난 이미 경계를 지운 꽃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내가 흔들리고 있음을,
흔들리며 떨고 있음을, 떨며 출렁이고 있음을 척살의 심정으로 확인하곤 한다.
나비도 쇠똥구리도 내 안에서는 경계가 삼엄한데 나는,
그 경계선에서 늘 흔들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의 감지는
또 얼마나 끔찍한 영육(靈肉)의 분리인가.
정호승 선배 시인을 찾아가는 길은, 4월의 꽃들에게 들키며 가는 그 길은,
그렇게, ‘도저한’ 길이었다.
서두의 우중 천지간 같은 수사의 글 역시,
실은 그런 내 마음 속의 난세 하나 평정하지 못한 검산검수(劒山劒樹)의 난맥상 탓이리라.
그래서 오늘 나는 ‘나비의 날개’가 아니라 ‘쇠똥구리의 뒷발’ 같은 마음으로
정호승 시인을 만난다면, 행여 돌아올 때엔 장자(壯子)처럼
나비의 등을 타고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날아다니는 ‘푸른툭눈 飛魚’를 타고 올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 나의 눈에는 4월의 꽃들이 지운 경계선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또한 얼마나 끔찍한 무릉인가.
“사랑할 원수가 없어서 슬픈” 정호승 시인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늘 한결같다.
몇 해 전에 마련한 대청역 근처의 집필실도 주인만큼이나 단정하고 정제되어 있다
. 그 집필실 안에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난(蘭)처럼 단아한 기품이 변함없고
밖으로 나오면 매화처럼 은은한 향기가 멀리 퍼져
사람들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것 또한 내가 10여년 전에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변함이 없다.(나는 정호승 시인이 나온 경희대 국문과의 10년 후배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엔 시 이외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어 보이며 큰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거둘 뿐 밖으로 흘러나가게는 하지 않을 듯이 보인다.
물론 누구나 겪는 큰 상처 몇 개 쯤은 50년이나 살아온 그에게도 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은, 그의 시나 소설에서 보듯 극한의 고통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특히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 7년만에 낸 5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보면,
어디를 펼치더라도 사랑의 고통과 절망으로 자신의 살점을 저며내고 있는데,
거의 ‘자학적’이라할 만큼 그 핏자국이 깊다.
사랑은 언제나 어머니를 천만 번 죽이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으나
때로는 실패한 사랑도 아름다움을 남긴다
─ <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부분
사랑이 깊으면 증오도 깊다
─ <갈대를 위하여> 부분
아직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
미나리 다듬듯 내 마음의 뼈다귀들을 다듬어
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 드리리
마지막 남은 한 방울 눈물까지도
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까지도
그대의 식탁 위에 토막토막 잘라 드리리
─ <모두 드리리> 부분
이제는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 <새벽 기도> 부분
나는 이혼하고 병들어 술 한 잔도 못 먹는데
죽음이 없으면 삶이 없구나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사랑해야 하는구나
사랑이 희생인 줄 모르는구나
─ <壽衣를 만드시는 어머니> 부분
미안하다
나도 내 인생이 박살이 날 줄은 몰랐다
─ <겨울밤> 부분
삶의 형식에는 기어이 참여하지 않아야 옳았던 것일까
─ <첫눈> 부분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 <폭포 앞에서> 부분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짓 앞에 서 있다
─ <洗足式을 위하여> 부분
멀리 첫눈을 뒤집어쓰고 바다에 빠지는 나의 기차가 보인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미움이 끝난 뒤에도 다시 나를 미워한 것은 잘못이었다
─ <첫눈> 부분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
─ <칼날> 부분
나도 이제 나를 속일 수 있는 놈이 되었다
─ <거리에서> 부분
다소 길게 인용한 이 시들은 정호승 시인의 후배이자 나의 동기인 문학평론가 하응백 교수의
지적대로 시인의 “내면이 사랑의 이율배반성으로 인해
얼마나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고통은, 그로 하여금,
시적 대상을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등과 같은 초기 시집에서
노래했던 소외된 도시 빈민이나 가난하지만 들풀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민초들로부터 이제 사랑의 벼랑에 처한 시인 자신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도
록 채찍질 했을 것이다.
그 채찍은 “달빛 아래……칼끝을 치켜세우고 / 자기의 목을 찌르는”(<개미>)
개미처럼 “뼈다귀를 다듬고 검은 혓바닥까지 토막토막 잘라내며”(<모두 드리리>)
마침내 섬세한 시인의 영혼마저 난도질 했을 것이다.
그 난도질 당한 영혼의 살점들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의
시집 도처에 흩어져 있고 그 ‘누더기’(<누더기별>) 같은 살점들을 하나씩 주워 모으며
다시 일어서려는 시인의 몸부림은
“어머니를 천만 번 죽이는 것”(<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이상으로 처절하다.
그렇다.
그 처절한 무늬들이 다시 온전하게 봉합이야 되겠는가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상처는 정면으로 보아야 한다. 정면으로 보지 않으면 또
다른 상처를 낳거나 더 큰 상처를 낳기 마련이다.
그럴 때야 비로소 “상처는 스승이”(<상처는 스승이다>) 되어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고 다시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그리운 부석사>) 지어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같은”(<안개꽃>) 무게로 시인의 영혼에 새 살을 돋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돋아나는 새 살을 보는 것은 또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눈물겹도록 할 것인가.
사실 난 그게 더 가슴 아리다.
.
‘팔자는 끌로도 못 판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팔자가 귀신처럼 집념이 강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정호승 시인의 시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때 동인지
《반시》를 통해서였다. 숨어서 김지하의 <오적>을 몰래 돌려가며 보던 유신 시절이었고,
스스로, 감히, ‘프로’라고 자부하며 되려 점잖게 ‘위엄’을 갖추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적당한’ 정치적 수위에 민중적 감성을 바탕으로한 정호승 시인의
빼어난 서정시들이 발표되었는데 그 ‘슬픔과 기다림의 시’들 중
몇 편은(이때는 아직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가 나오기 1~2년 전이다)
백여우처럼 나를 홀려놓았다. 아마도 ‘슬픔……’으로 시작되는 제목의 시들과
<혼혈아에게> <눈사람> <맹인 부부 가수> 등일 성싶다.
특히 <슬픔을 위하여>라는 시에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와 같은 귀절은,
무시무시하고 무지막지한 제목만으로 보기엔 언
뜻 ‘백정’이나 ‘조폭’ 출신 시인이 썼으리라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한,
조태일 시인의 <식칼론>과 같은 ‘과격한’ 시들에 비해 얼마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가.
칼은 칼이되 하나는 꼬부린 낫을 편 칼이었고, 또 하나는 슬픔을 꼬부린 칼이었다.
쇠로 만든 칼과 눈물로 만든 칼은, 같은 칼이지만 그 칼날과 찌르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그때부터 난 정호승 시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결국
그의 대학 후배 시인까지 되어 20여 년의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선배 시인에 대한 ‘커버스토리’마저 쓰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귀신같이 집념이 센 ‘팔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늘 정제되어 있고 시인으로서든 생활인으로서든 자기 관리 역시 엄격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늘 진지하고 자상하다.
그는 술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화기애애한 술자리 같은 데서
의당 있을 법한 그 흔한 농담이나 허튼소리 하나 하지 않는다.
경희대 국문과 출신의 선후배 작가들이 스승인 황순원 선생님을 계절마다 모시는 자리가 있는데,
거기서 난 그를 정기적으로 만난다. 그는 주로 황 선생님과 사모님 앞에
앉아 두 분의 건강을 염려하며 궁금한 것들을 묻곤 하는데,
황 선생님이 미처 하지 못한 내면의 소리에까지 귀 기울이려는 듯 시종 진지한 표정이다
. 황 선생님과 사모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그의 ‘젖은 눈’에서
난 팔순이 넘은 그의 ‘들깻잎 같던 아버지’와 ‘그날이 오면 입고 갈 수의(壽衣)를
손수 만드시는’ 어머니의 밭고랑처럼 주름진 얼굴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것을 본다.
……이태 만에
고향으로 밤기차의 차창에 마음을 기대고
나는 왠지 눈앞이 흐려왔다
고구마 넝쿨을 북돋우어 주다가 고개를 들면
고추 모종에 대를 세우고 계시던 아버지
논물을 대시느라 밤샘하신 얼굴이
키가 불쑥 큰 들깻잎 같던 아버지
태풍에 쓰러진 벼포기를 일으켜 세우며
개흙 묻은 하늘을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이 가을 빈손으로 찾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 <컬러텔레비전> 부분
낡은 재봉틀 앞에 앉아
늙은 어머니 수의를 만드신다
……
몇날 며칠째 정성들여 그날이 오면
아, 그날이 오면 입고 갈 옷 손수 만드신다
……
죽으면 썩을 것 좋은 거 하면 뭐하노
내 죽으면 장의사한테 비싸게 사지 마라
사람은 죽는 일이 더 큰 일이다
숨 끊어지면 그만인데 오래 살아 주책이다
처녀 때처럼 신나게 재봉틀을 돌리신다
─ <壽衣를 만드시는 어머니> 부분
막걸리에 취한 아버지와 산을 내려와
앞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 말씀
얘야, 돌과 쥐똥이 아니면
곡식이라면 뭐든지 버리지 말아라
─ <어머니> 부분
내가 그의 집필실에 들러 서로 얘기하고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시고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조금도 염려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아무 문제 없도록 제가 잘 알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걱정이 많아지고 큰 일 보다 작은 일에 더 신경 쓰게 된다.
사소한 문제 어느 것 하나 마음 놓이지 않는다.
아마 정호승 시인의 노부모님들도 그런 듯 전화가 잦다.
대치동에 사는 그는 분당에 사시는 부모님을 일주일에 한번 꼴로 찾아뵙는다.
가까이서 보살펴드릴 수 없는 그로서는 늘 걱정이고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집필실 바로 근처에 모시려는 준비를 해왔는데,
IMF로 인해 늦어졌고 이제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얼마 후면, 그는 수시로 부모님댁에 들러 무료한 부모님의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어깨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가려운 등도 시원하게 긁어 드리고,
그리고 날씨 좋은 날을 골라 양 팔에 두 분을 부축한 채 주위 공원 등지로
산보하는 모습을 그려보니, 그렇지 못한 나로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온다.
정호승 시인은 1982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의 연보에 따르면
그는 원래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나 성장은 대구에서 했다.
대구 계성중과 대륜고를 졸업하고 1968년 경희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들어갔다
. 당시 그는 경희대 주최 전국 남녀고교 문예현상 모집에
<고교문예의 성찰>이란 평론이 당선되었는데 수필 부문 당선자인
박해석 시인과 함께 입학하게 된다. 이후 박해석 시인은 지금까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지음(知音)이기도 했다.
군에서 제대해 복학한 1972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고
김요섭 시인에 의해 《현대시학》에 시가 추천되었다.
다음 해 그는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고
곧이어 동인지 《1973》에 동인으로 참여해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경희대를 졸업하던 1976년부터는 숭실고 교사로 있으면서
다시 《반시》 동인으로 참여해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한다.
그 결과 1979년 봄 마침내 그의 첫 시집인 《슬픔이 기쁨에게》가 출간되고
3년 뒤인 1982년에는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가 나온다.
그는 이 해에 장르를 넓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기도 했다.
1986년 경희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집 《새벽편지》가 나온 다음 해에는
《월간조선》 기자로 직장을 옮긴다. 2년 뒤인 1989년에는 제3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고
8년 후 <동서문학상>까지 수상하므로써 빼어난 서정 시인으로서의 위치가 재확인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그는 《별들은 따뜻하다》를 낸 이 후,
무려 7년만에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를
1년 간격으로 연달아 내면서 산문 작업을 왕성하게 한다.
물론 그 사이에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와
장편동화 《에밀레종의 슬픔》을 내기도 했다
지난 해에 낸 《당신의 마음에 창을 달아드립니다》는
시나 잠언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오히려 우화에 가까운 듯한 독특한 형식의 글모음인데,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빛이 들어올 창을 만들어 준다는 내용들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뒤이어 나온 《연인》은 진실을 찾아 세상 속으로
길 떠난 한 물고기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외로움의 본질을 맑고 잔잔하게
담은 ‘어른이 읽는 동화’다.
정호승 시인이 어느 날, 전남 화순의 운주사에 들렀을 때
의당 대웅전 서쪽 처마 끝에 매달려 있어야할 풍경의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당연히 궁금증을 낳게 했고 그 궁금증은
또 ‘연인’이라는 이 아름다운 동화 한 편을 낳게 했던 것이다.
“내 삶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날 사랑하는 너에 의해 형성된 거야”
주인공인 하늘을 날아다니는 ‘푸른툭눈 飛魚’가 고통스런 세상 순례를 마치고
결국 다시 대웅전 처마 끝으로 돌아와 연인인 ‘검은툭눈’에게 하는 말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미립’이다
. 다음의 시는 또 어떤가.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풍경 달다> 전문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닌 생각의 크기만큼 세상을 보듯 시인도 마찬가지다.
그 생각의 크기는 사물을 보는 눈의 깊이와 마음의 넓이에서 온다.
그리고 그 생각이 담긴 그릇의 모양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고 또한 시를 쓴다.
정호승 시인 역시 생각의 크기만큼 세상을 보고 그릇의 모양대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의 빛깔과 그 그릇의 무늬가 겉으로는 맑고 화사해 보이지만
껍질을 벗기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속살은 너무 어둡다.
너무 어두워 어둠조차 복면을 하고 있다.
“인간이 이루는 삶의 비극성에 나는 관심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존재이고 시도 인간의 비극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다만, 시를 통해 인간의 비극을 무위의 심정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와 더불어 진정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이해를 통해 혹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김종길 선생이 말씀하신
‘비극적 황홀’이라는 표현에 기대어 ‘비극적 기쁨’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인간이 이루는
그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물을 이해하기 위한
‘그 무엇’이 바로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그의 두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시적 지평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과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외로운 것이고
그 외로움은 존재의 깊은 우물 속에 사랑과 포개져 있어
두레박이 내려와도 서로 떨어지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의미와 무관하게 삶은 악착같이 삶이고 이해와 무관하게 인간은 악착같이 인간이다.
정호승 시의 본질에 닿으려면 깊은우물 속에 드리워져 있는
그 두레박의 ‘악착같은’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렇다.
두레박은 무엇을 담거나 건져내기 위한 그릇이 아니라 무엇을 보여주거나
무엇을 통과시켜 주기 위한 ‘거울’이자 ‘창’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죽음’의 이미지들은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다듬고
그 창을 통해 ‘삶’과 껴앉는다. 사랑, 슬픔, 그리움, 눈물, 외로움 등은
그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같은 것이고 설령,
그 시계추가 멈추더라도 시간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은, 본질적으로 하나였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시계추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한다. 변주는 변주하는 자의 몫이고 그 몫을 게을리하면
시계추는 멈춘다. 그의 시가 다소 대중지향적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 까닭은 이완된 변주의 탓도 있겠지만
변주의 속살에 ‘코드’를 맞추지 못한, 듣는 자의 탓도 크다.
코드는 삶과 죽음이라는 이 ‘불가해한 상징의 힘’에 맞춰져야 한다.
시간을 멈출 수 없는 정호승 시인으로서는, 그래서 비극적이고,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래서 내가 서두에서 “정호승 선배 시인을 찾아가는 길은,
4월의 꽃들에게 들키며 가는 그 길은, 그렇게, ‘도저한’ 길이었다”고 미리 고해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홀연, 그의 ‘게송’이 들려오는 사태는 또 무슨 조화인가.
침묵하라는 뜻일까,
일몰하라는 뜻일까,
사람은 죽을 때에
한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새들도 죽을 때에
푸른 하늘을 향해
한번은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나 죽을 때에
한번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길에 핏방울만 남기게 될까봐 두려워라
풀잎도 죽을 때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남기고 죽는다는데
─<종소리> 전문
돌아오는 길.
4월의 꽃들에게 들키며 돌아오는 길.
‘비어’(飛魚)를 타고 돌아오는 길.
정 선배님,
선배님은 이미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산하/필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