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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원의 ‘마흔 살 이야기 ’
시작
불혹(不惑).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 다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알에서 깨어 난 연어치어가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가
깊고 푸른 바다에서 새로운 희망과 생명을 잉태하고
거센 물살 거슬러 모천(母川)으로 돌아오듯 저는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저에게 고향은 어머니입니다.
아! 어머니,
이름만으로도 목이 메어옵니다.
어머니는 제 삶에 본향이자 뿌리입니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옥동댁’으로 불리셨지요.
저는 옥동댁 둘째 아들내미였습니다.
평생 고생의 업에서 아등대다 둘째 놈이 이룬 작은 성취도 보시지 못하고
어머니는 허망하게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가시던 날, 세상 모든 불빛은 꺼지고 저는 절망에 겨워 작은 촛불도 켜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꾸리신 홑 열댓 평짜리 식당은 형과 저 우리 세 식구의 밥이자 미래를 여는 희망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내 오신 밥상은 수많은 노동자와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허랑한 배를 채워주던 소박한 행복이었습니다.
울 어머니 옥동댁은 그렇게 가난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살다 가난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아들 병원이가 그렇게 그리워하시던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
고향은 제게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한.
어머니의 소망,
어머니의 미래가 가닥가닥 찬찬히 직조된 희망을 싸안는 보자기입니다.
어머니께서 그러신 것처럼 고향의 아픔과 눈물을 보듬어
제 고향 고창, 부안에 희망의 봄을 심겠습니다.
어머니, 당신 아들과 손자손녀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살아갈 자랑스러운 고향을
‘옥동댁 둘째 아들’병원이가 꼭 만들겠습니다.
하나.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
내 고향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상복.
태봉산 자락 산굽이들이 동리를 포근하고 감싸고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 댁은 태봉산 줄기 이름도 없는 작은 동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까래 낮은 마루에서 까치발로 내려다보면 멀리 상복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사이로 육십 여 가구가 듬성듬성 군락을 이루어 마을이 되었다.
동구 밖 너머 양조장 삼거리 신작로에 흙먼지 뽀얗게 버스가 들어서면 마을 어귀
탱자나무 숲 울타리 위로 참새 떼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주민 대부분이 가난했다. 그렇다고 사람살이 인정마저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일도 함께 기뻐하고 큰일이라도 만나면 제 일처럼 나누었다.
상복은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유년 시절에는 초등학교를 다닌 아산면 소재집
옆 하갑마을에서도 잠시 살았다.
마을을 에둘러 실개천이 흐르고 초등학교로 가는 길엔 큰 방죽이 평평하게 나 있어
아이들은 그 길을 따라 사오(四五)리 학교 길을 토드락토드락 걸어 다녔다.
봄이면 불쑥불쑥 꽃뱀이 나타나 마음 여린 가시내들은 자지러지고 치기어린 머슴애들은
서로 용기를 뽐내려 뱀 꼬리를 잡아 빙빙 돌려댔다.
연두색 풀빛이 짙어지고 개울가 물소리가 커지는 여름이면 철만난 아이들은
멱을 감느라 까맣게 익어 갔다.
큰물이 지고 난 후면 아이들은 방죽에 고여 미처 냇물로 돌아가지 못한 물고기를 잡으러 허방지방 뛰어다녔다.
운이 좋은 날에는 팔뚝만한 가물치를 잡기도하여 아이들은 “내가 처음 봤네. 잡은 것은 나네.”실없는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나락 익는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아이들도 모두 한 몫 일꾼이 되었다.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거들어야할 농사일이 많았다.
한여름이 되기 전에는 수박밭에서 수박 수확을 거들고, 여름이 지나면 친구네 땅콩밭에서 용돈벌이 땅콩털기를 했다.
그리고 담배 농사철에는 친구네 사랑방에 모여 두런두런 얘기를 모아가며 담뱃잎을 새끼줄에 꼬기도 했다.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할아버지를 따라 눈을 치우다 보면 짧은 해거름 겨울햇살이 태봉산 자락에 길게 드리워졌다.
내 어렸을 적 부모님은 잠시 고창을 떠나 광주에 사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날품을 파셨고 어머니는 행상에서부터 좌판까지 한 푼 돈이라도 될라치면 닥치는 대로 일하셨다.
리어카에 채소와 야채를 팔기도 하고 골목길 모퉁이에서 아이들 주전부리와 튀김을 팔기도 하셨다.
하루 벌어 내일을 먹고 사는 처지였지만 두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에 힘드신 줄 몰랐다.
어쩌면 어머니에겐 네 가족이 오순도순 살 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줄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였다.
광주생활에 제법 터를 잡아 갈 무렵 아버지가 일하시던 건설 현장에서 사고를 당하셨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에 날 정도로 큰 사고였던 모양이다.
함께 일하던 인부 몇 명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아버지는 흙더미에 깔리셨지만 구사일생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뼈가 폐를 찌르는 바람에 제 몸을 가누기도 힘드셨다.
큰 사고였지만 보상은 뒤따르지 않았다.
갑자기 닥친 병마와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가난. 병든 몸을 건사할 곳은 고향 말고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찾은 고향에서 아버지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채 마흔이 안 된 젊은 나이였다. 그 때 내 나이 네 살이었다.
나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도 정이 담긴 따뜻한 눈길도 알지 못한다.
그저 빛바랜 낡은 흑백사진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젊은 나이에 홀로되신 어머니는 그 때부터 집안을 먹여살려야하는 실질적 가장이 되었다.
하지만
시골 오지에서 여자 홀몸으로 두 아이를 건사하며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것은 두 아들이 전부였다.
시골에서 젊은 과수댁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농사일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농사를 지을 논도 밭도 없었다. 품을 팔수는 있었지만 세 식구가 연명하긴 힘들었다.
게다가 당시 지아비를 잃은 한 아낙은 말 그대로 따라 죽지 못한 미망인이었다.
젊어 남편이 죽으면 드센 아내 팔자 탓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나와 형을 할아버지 댁에 맡기고 서울로 돈을 벌로 가셨다.
그나마 서울에는 어머니 언니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그
렇다고 서울에서 어머니의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어머니는 남의 집 살이를 하는 식모가 되었다.
어머니가 서울로 가시고 고향에는 우리 형제만 남았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마을 공터에 뛰어 놀다 어스름 저녁이 돌아오면 아이들은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마지막 남은 형과 나는 애써 깔깔거리며 텅 빈 공터에서 서로의 긴 그림자밟기 놀이에 열중해야 했다.
모두들 엄마가 부르는데 우리 형제는 불러 줄 엄마가 없었다.
목마른 짐승마냥 어머니가 간절히 그리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지만 어머니에 대한 갈증을 해갈시킬 순 없었다.
할머니는 자상하셨지만 할아버지는 엄한 분이셨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우리 두 형제를 더 엄하게 키우셨다.
할아버지는 두 자식을 떠맡기고 도시로 떠난 젊은 며느리가 탐탁치 않으셨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행여 할아버지께 그 속내를 들킬까봐 차마 내색도 하지 못했다.
설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으로 오셨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양조장 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아침 일찍부터 어머니를 기다렸다.
버스가 설 때 마다 “울 엄니가 저기 타고 있지 않을까”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러다 정작 어머니가 버스에서 내리면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어머니 품에 안기질 못했다.
우리를 두고 떠난 어머니가 야속해 일부러 심통을 부린 것이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와 함께 명절 장에 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라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행여 친구들이라도 만나면 일부러 크게 소리 내어 친구를 불렀다.
나에게도 이렇게 예쁜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게다.
장에 가면 어머니는 우리 두 형제에게 설빔을 해 입히시고 꼭 사진을 찍으러 가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커 가는 자식들을 사진으로나마 품고 계시고 싶은 주체 못할 모정 때문 일 테다.
그 아릿한 속내도 모른 채 나는 어머니에게 뚱한 모습을 풀지 못했다.
어린 시절 사진 속 내 모습은 항상 화가 나 있다.
그리고 사진 한 구석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며 포토샵이었다. 아버지 사진을 따로 떼어내 가족사진에 그려 넣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식구들 품에서 놓지 않으셨다.
어머니와 함께 먹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장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짜장의 풍미가 입안에 감돌면 그제야 심통이 풀렸다.
형과 내가 먹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어머니는 끝내 당신 그릇을 덜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다.
형이 어머니 기색을 살피다 한 마디를 건넸다.
“엄니는? ”
“엄닌 밀가리 음식이 안 좋아혀.”
그 후로도 어머니는 평생 동안을 자식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쉬운 명절이 끝나고 새벽녘이 되면 옆방에서 할아버지의 두런두런 지청구가 들려왔다.
어머니 낮은 울음소리가 끊일 듯 이어지다 잠잠해지면 난 이제 다시 어머니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일부러 눈을 꼭 감고 자는 척 눈을 뜨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다 방문을 열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
어머니 울음을 토닥거리는 할머니 소리를 듣고서야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아! 엄니가 간다. 엄니가 ······ ”
아무리 잡아도 어머니는 떠나실 수밖에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소리 내어 울면 어머니는 1년 내내 우실 것이라는 것도 ······
둘. 옥동댁 둘째 아들
어머니는 형을 먼저 서울로 데리고 가셨다.
형은 5학년이었는데 당시에는 초등학교 6학년생은 중학교 진학 때문에 전학이 힘들었다.
방을 구하면 나도 데리고 간다고 다짐을 받았지만 화가 나고 슬픈 건 어쩔 수 없었다.
형 역시 서울로 간다고 해서 눈칫밥이 끝난 건 아니었다.
형은 어머니가 방을 구하기까지 이모님 댁에서 더부살이를 해야만 했다.
결국 고향에 나 혼자만 남았다. 당시 난 대아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시골 마을 치고는 제법 규모가 컸다.
난 학교에서 제법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해 1학년부터 쭉 반장을 맡았다.
엄했던 할아버지도 손자놈 공부 잘한다는 소리에 너털웃음을 터트리셨다.
형이 가고 혼자 남게 되자 난 더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정말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무척 애를 썼다.
사랑받고 싶은 본능 때문이었다.
동네에는 동갑 친구들이 유난히 많았다.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함께 모여 학교에 가고 집에 돌아왔다.
학교를 파하고 산으로 들로 노루처럼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놀았다.
더러 일손이 필요한 친구네 밭에서 일을 거들어 주고 품삯으로 용돈을 받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군것질도 하고 아이스깨끼도 먹고 싶었지만 난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따복따복 모아 할머니를 드렸다.
할머니가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수박 밭에서 수박 따는 것을 도와 준일이 있었다.
그런데 수박밭 주인이 품삯 대신 수박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대신 가져가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다.
어린 아이가 가져가봐야 고작 두 통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속셈이었던 게다.
난 하우스용 버려진 폐비닐을 가져와 두툼한 썰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수박 여 다섯 통을 싣고 집까지 왔다.
아마 몰라도 수박 밭 주인은 골이 났을 게다. 덕분에 집에서는 물론 이웃들까지 수박으로 포식을 했다.
어머니와 가슴 아픈 이별이 끝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머니는 한 푼 두 푼 살뜰히 모으신 돈으로 겨우 한 칸 방을 마련하신 후 나를 서울로 불러들이셨다.
부엌도 없는 작은 방이었지만 우리 세 식구는 마냥 행복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이모님 댁 부근이어서 어머니가 일하러 가신 평일에는 하는 수 없이 이모님 댁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눈칫밥.
아이들은 말하지도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아이들 기가 죽는다는 말뜻을 안다.
밥을 먹는데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도 왜 그런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난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 편이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인지도 모른다.
무상급식을 하자는데 차별급식을 하자는 사람들을 보면 난 가슴부터 아파온다.
그들은 눈칫밥이 얼마만큼 어린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크고 오래 남는지도...
전학을 왔지만 말하기가 무서웠다.
입만 열면 튀어나오는 사투리로 아이들 웃음거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지’가 아니라 부엌이라 해야 하고 ‘개비’가 주머니며 ‘독’이 돌이라는 것을 외워야 했다.
서울 아이들은 고무신을 신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으며 모두 잘 사는 아이들만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이 피부가 너무 하얗다는 것이었다.
산으로 들판으로 뛰어 놀던 시골은 모두가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서울 아이들은 마치 별천지 아이들만 같았다. 그러다보니 친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형과 함께 동네를 쏘다니는 게 일이었다. 형도 나와 마찬가지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눈칫밥처럼 배고픈 밥은 없다.
이모님이 별다른 눈치를 준 것이 아니라 형과 나는 까닭도 없이 늘 그렇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사랑이 그리우면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
우리 형제는 배가 고파도 달리 먹을 것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마음껏 끓여 먹는 라면이 그렇게 맛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형과 난 우연히 동네 쓰레기장에서 라면스프를 주웠다.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라면스프를 나누어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난 정말이지 죽을 때까지 그 때 맛 본 라면스프의 강렬한 맛을 잊지 못할 것이다.
너무 맛있어 손바닥을 싹싹 핥아 먹었다. 지금 생각하니 가슴이 아린다.
우린 그렇게 가난했고 늘 그렇게 배가 고팠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는지 공부를 열심히 한 기억도 없는데 성적이 괜찮았다.
학년이 바뀌자 점점 서울 생활에 익숙해졌다.
나는 어느덧 서울말을 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서울내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식모살이를 그만두시고 구파발쪽에 다섯 평이 될까 싶은 작은 분식집을 열었다.
말이 분식집이지 아이들을 상대로 튀김과 떡볶이 따위를 파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제법 장사가 잘돼 우리는 큰이모집에서 완전 독립하여 구파발에 방도 좀 크고 부엌까지 딸린 월세방으로 이사했다.
그 집에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녔다.
우리 식구에게 제대로 된 집에 살게 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집 역시 연탄가스 중독이 두려워 겨울에는 문을 열고 자야할 정도였다.
한 번은 잠결에 인기척을 느꼈는데 눈을 떠보니 도둑이 들어와 있었다.
놀라서 소리도 못치고 도둑이 나간 후에야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물론 도둑맞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 한동안 형은 도둑이 나간 후 도둑 잡으라 소리친 겁쟁이라고 놀려댔다.
주인집에는 나와 동급생인 여학생이 살았는데 예쁘장한 소녀였다.
한 번은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 볼일을 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민감한 나이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그 이후 그 아이를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중학생이 되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학교성적은 여전히 상위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나게 잘한 것도 아니다.
어머니는 그 사이 분식집에서 식당으로 전업을 하셨다.
연신내 시장 쪽에 테이블이 다섯 개 정도 되는 열댓 평 식당을 개업하신 것이다.
‘행운식당’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의 이름이다.
후미진 골목길에 붙은 작은 식당이었다.
손님 대부분은 인근 건설현장 인부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목에 비해 장사가 꽤나 솔솔 했다.
어머니의 빼어 난 음식 솜씨 때문이었다.
난 아직까지도 어머니가 담근 깍두기보다 맛있는 김치를 먹어보지 못했다.
돼지등뼈에 시래기와 통감자를 넣고 푹 삶아 끓인 감자탕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한 번 맛을 본 사람들은 일부러 찾아와 먹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음식을 준비하고 늦은 밤까지 일하셨다.
늘 잠이 모자라 손님이 뜸한 오후가 되면 꾸벅꾸벅 조시곤 했다.
두통과 소화불량을 마치 병처럼 안고 살아 식당에는 진통제 물약과 소화제가 박스 채 준비되어있어야만 했다.
그런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워 나는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식당으로 달려왔다.
1분이라도 더 어머니를 빨리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대신해 배달을 하고 손님들 시중을 들고 물 잔을 날랐다.
저녁이 되면 하루 매상과 외상 장부를 꼼꼼히 정리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주무시고 형과 나는 집에서 잤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못했다.
그저 숙제를 열심히 하고 시험 때가 되면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이 다였다.
썩 공부를 잘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상위권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곧 고등학교 입시가 다가왔지만 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모두들 인문계를 가서 대학에 가고 싶어 했지만 난 실업계 가기를 원했다.
어머니에게 대학 등록금 부담감을 지워 드리기도 싫었지만 무엇보다도 빨리 사회에 진출하여 돈을 벌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를 고생에서 해방시켜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부도를 맞았다.
부도라는 거창한 말보다는 밀린 외상값을 못 받았다고 하는 게 옳은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가 느끼는 부담은 기업의 부도 보다 더 컸다.
어머니는 식당 부근 여러 공사현장에 밥을 해주셨는데 몇 달치 밥값을 무려 270만원이나 못 받게 된 것이다.
현장 소장은 도망가고 건물주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하루 서너 시간씩 자면서 몇 달 내내 벌어도 벌지 못할 큰돈이었다.
파출소 경찰서는 물론 누구도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소액재판을 걸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쓴 소장이 제대로 작성될 리 없었다.
법원에서 어머니는 모진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어린 마음에도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화가 났다.
왜 저들이 저토록 우리를 무시하고 어머니는 한 없이 작은 모습으로 머리를 조아려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학교에서 배운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결국 어머니는 판사의 권유에 따라 몇 십 만원 돈으로 합의를 보고 말았다.
배우지 못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힘이 없다는 이유로 열심히 일하고도 번연히 눈을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 입은 돈도 돈이지만 이 사회가 어머니에게 대하는 멸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분노했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처음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일한 만큼 보상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그 만큼 법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
만약에 우리 집이 힘이 있었다면 어머니가 저처럼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당했을까?
어머니가 당한 저 멸시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차마 꿈도 꾸지 못했다.
다만
이 험한 세상에 낙오되지 않고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어쩌면 그 때의 분노가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시발이었는지도 모른다.
고교진학을 앞두고 실업계를 가려고 했지만 담임선생님과 어머니의 반대로 인문계인 대성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사회에 빨리 나가 어머니를 도와야겠다는 내 꿈은 바뀌어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류대에 진학하여 사회의 엘리트가 되고 싶었다.
옥동댁 둘째 아들이 일류대에 갔다는 소리를 어머니의 자랑으로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굴레와 같은 가난을 이겨내는 방법을 현실적 출세에서 찾았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어머니 식당일을 도와드렸지만 꿈이 확실한 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다.
형과 단칸방을 함께 쓰던 때인지라 독서실을 끊어서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독하게 공부를 했다. 마치 사법고시 공부하듯 자리에서 뜨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나는 1989년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어머니는 너무 좋아서 동네잔치를 벌이셨다. 어머니의 한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좌판 행상에서 식모살이. 눈물어린 술과 밥을 팔던 옥동댁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옥동댁은 비로소 서울대를 다니는 아들을 둔 어머니가 되었다.
난 그 사실이 너무 벅차고 자랑스러웠다.
셋, 어머니 당신의 아들 딸, 투사가 되어
89년, 서울대는 학생운동 이론의 보급처이자 운동의 선두주자였다.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매일 교문 밖에서는 투석전이 벌어졌고 매캐한 최루탄 가스가 캠퍼스를 뒤덮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주위 어른들은 데모대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말했지만 학교를 가면 선배들은 독재타도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난 무엇이 선배들을 저렇게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과연 무슨 이유로 선배들은 목숨까지 바쳐가며 운동에 투신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그러한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운동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선배들 엠티를 우연히 따라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점점 우리 사회에 숨어 있던 부조리와 문제점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느꼈던 아픔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조국이 처한 현실과 대중이 당하고 있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분노기 치솟았다.
측은지심.
어머니에게 느꼈던 연민이 이 땅에 힘없고 가난한 모든 사람들에게 투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과 병폐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름다운 나라,
우리 아이들이 평화스러운 나라를 만들 수 없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난 시위대 맨 앞줄에 서게 되었다. 열혈 운동권이 된 것이다.
난생처음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인 것도 그 때이다.
어머니는 안락한 삶이 보장된 내일을 버리고 운동권에 투신하는 아들 모습이 안타까우셨던 모양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벋어나기 위해서 그 고생을 해왔는데 아들은 다시 그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왜, 니가 해야 하는 거시여. 워째 다른 사람도 있는디 니가 꼭 앞장을 서야 허느냐 말이여?
아가, 아가... 그거 니가 그거 안 허면 안 되는 거시여? ”
내 잘난 믿음직한 아들이 저처럼 열심히 세상을 바꿔보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으셨지만
단지 그 옳은 일에 당신의 아들이 희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우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간곡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난 점점 서울대 운동권 핵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서울대는 크게 보면 민족자주를 앞세운 NL 계열과 민중주의를 주장하는 PD 계열로 나뉘어 있었다.
이 논쟁은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논쟁 (사구체논쟁)으로 이어져 운동권 분열에 핵심 고리가 되었다.
서울대는 NL 계열이 다수파로 운동을 주도하는 총학생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는 운동권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과격한 폭력시위 보다는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설득하는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 생각은 생활진보 대중정치 대학생모임을 만드는데 앞장서게 했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당시 학생운동권은 소비에트와 동구의 몰락 그리고 과열된 시위문화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학생운동 방향성을 변화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이념 투쟁보다는 가난한 서민의 아픔을 보듬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과격한 시위문화 보다는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친대중적 운동으로 새로운 노선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운동권에서 새로운 방향성으로 이어져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학우들이 세력을 이루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나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내건 선거 슬로건은 ‘제3세대 대학창조’였다. NL이니 PD이니 하는 이념적 파벌을 하나의 힘으로 규합하고
과격한 시위, 최루탄 쏘고 화염병 던지는 시위를 없애자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나는 실제적으로 국민들 속에 들어가는 실천적인 학생운동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학우들을 설득했다.
선거 유세 과정 중 각 후보 어머니를 초청하는 시간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출마를 한사코 말렸지만 간청에 못 이겨 학교에 오셨다.
그러나 수많은 학우들이 내 이름을 연호하자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이윽고 사회자가 어머니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강병원 후보는 어떤 아들입니까?”
쭈뼛거리던 어머니가 희미하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시며 더듬더듬 말씀을 꺼내셨다.
“우리 병원이는요, 엄마 말은 다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에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죄송스러웠다.
당신의 착한 아들이 어머니 뜻을 어기고 지금 여기까지 와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 눈에는 둘째 병원이는 언제까지나 착한 아들이었다. 콧날이 시큰거렸다.
다섯 후보가 나온 총학생회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2위 후보보다 8백 여 표를 더 얻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표 차이였다. 그렇게 운동을 반대하던 어머니도 진심으로 기뻐해주셨다.
우리 아들이,
그 잘난 학생들이 다니는 서울대 학생 대표가 된 것이 못내 자랑스러우셨던 것이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어머니는 나를 얼싸안고 더듬더듬 말씀하셨다.
“빙원아(병원아) 집에 못 와도 좋응께, 아가... 절대 잡히면 안 디야. 알긋제!
몸이 질로 중한 것이여. 건강혀야 혀. 건강! ”
그렇게 건강을 강조하신 어머니.
그러나 당신 건강은 가난과 씨름하시느라 미처 돌볼 겨를이 없으셨다.
어머니 몸속에는 그 때부터서 이미 불치의 병균이 퍼져있었다.
총학생회장선거가 끝난 이듬해 94년 2월초였다. 집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만 꼭 집에서 자고 가라는 전갈이었다.
나와 같은 뜻을 가진 학생운동 세력을 결집하느라 전국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다.
피곤에 찌들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혼곤한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눈을 떠 보니 어머니가 내려다보고 계셨다.
곱게 목욕을 끝내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어머니가 잠든 나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엄마, 어디 아파요? 얼굴은 왜 또 그렇게 창백해?”
“빙원에서 검사를 한 번 해보자고 혀서.... ”
순간 긴장했다. 평생 소화불량과 두통을 안고 사셔도 진통제로 버티신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당신 스스로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심상치 않았다.
내 기색을 눈치 채셨는지 어머니는 서둘러 내 입을 막았다.
“괜찮애 엄니 암시랑토 안 혀. 그냥 검사나 한 번 받아 보는 거시여... ”
그러나 어머니는 괜찮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이미 당신 병을 알고 계셨다.
당신이 불치에 병에 걸리신 것도 그리고 이번 병원행이 어쩌면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사실을 자식들만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췌장암 말기였다.
그 모진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자식들 앞에서 끝끝내 아프다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병환을 숨기신 채 새벽에 일어나 식당 일을 하셨다.
TV에서 시위 소식만 전해져도 아들놈 안위가 걱정되어 하루 종일 애간장을 태우셨다.
자고 있는 우리 형제를 빤히 내려다보신 것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아들들의 모습을 눈에 담아가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당신 죽음을 미리 예감하고 염을 대비하여 목욕까지 끝내셨다.
뿐만 아니라 당신 장례에 쓸 음식 모두를 마련하여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얼마나 음식을 많이 해두셨는지 장례를 치르고
음식이 남을 정도였다.
아! 어머니. 어머니 그 아픈 몸으로 당신의 죽음을 묵묵히 준비하셨던 어머니!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은 기어이 적중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입원 후 바로 손 써볼 겨를도 없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수술실 들어가기 전 어머니가 형과 나에게 남기신 마지막 말씀은 “싸우지 말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례를 치르는 사흘 내내 미친 듯이 울었다.
불효자는 눈물이 많은 법이다.
넷. 운동권 문화를 바꾸다
나는 총학생회장이 되자 시위 문화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서울대 앞에는 상시적으로 전투경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교문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면 투석전과 최루탄 공방을 벌였다.
우리는 경찰의 벽을 단 1 미터도 뚫지 못했지만 습관처럼 매주 지루한 싸움을 이어갔다.
학교 주변 주민들과 상인들이 최루탄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시민들 시선도 싸늘해졌다.
나는 회장이 되고나서부터 거리투쟁을 전면 금지시켰다.
교문 밖 가투가 비효율적인 소모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열정으로 전단지 10만 장을 지하철에서 배부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비에트와 동구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혁명은 꿈꾸지 말아야할 이념이라고 확신했다.
혁명은 변화가 아닌 전복을 의미한다. 혁명은 피를 수반한다.
그리고 피의 본질은 폭력이었다. 나는 폭력으로는 그 어떤 새로운 세상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비폭력 시위문화를 만드는데 앞장섰다.
학생운동이 이제는 시민들과 함께 호흡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변화를 의미했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후배들을 조직하여 학교 앞 신림사거리에서 매주 금요일 마다 신명난 춤판을 만들었다.
학생들이 음악에 맞추어 율동을 하고 춤판이 끝나면 우리에 주장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부했다.
그리고 시민들과 거리 토론회를 열어 내년 대선을 어떻게 치러내야 하는지 시민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점점 시민들이 우리 주장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최루탄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시민들이 다시 우리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폭력 시위문화로 인해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가 학생회장이었던 내가 수배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대부분 대학교 학생회장은 의례 경찰에 수배를 받았다.
때문에 학생회장들은 별도 경호원까지 두고 삼엄한 경찰망을 뚫고 다녔다.
학생회장의 일정은 철저한 보완이 필요했으며 항상 주위의 감시를 피해 다녀야만 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학생회장을 마치고 나는 입대했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난 서울대 학생회장 중 군에 입대한 최초의 회장이 되었다.
오죽하면 현역 입대한다는 내 소식을 대부분의 일간지는 물론이며 9시 방송뉴스에서까지 다룰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병역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또래 대부분 젊은이들이 입영의 의무를 다하는 상황에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라고 입대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었다.
머리를 빡빡 깎고 남들처럼 입영전야를 부르고 훈련소로 향했다.
충북 괴산군 증평 37사단에 있는 신병교육대였다.
남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군 생활을 보냈다.
달랐다면 선임병들의 인습을 후임병들에게 전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부하에게 대신 시켜 본 적도 없다.
계급이 올라가고 소위 말하는 말년이 되어갈수록 군 생활은 늘어지기 마련이다.
요령이 생기고 대부분 잡역에서 제외 된다. 하급자들이 심지어 밥까지 타서 바친다.
나는 내가 할 일은 내가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 원칙은 제대 말년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전역을 몇 달 앞둔 97년 봄부터 전역일까지 결국 사고 아닌 사고를 치고 말았다.
병장이 된 97년 초, 언론들은 북한 기아 문제를 집중보도하기 시작했다.
각 사회단체에서는 북한 기아를 돕기 위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벌였다.
‘한 달에 만원이면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어린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식의 캠페인이었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군 내에서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하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격인지라 바로 행동에 나섰다.
병영 내 군인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군인 월급이라고 해봐야 고작 한 달에 기 만원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돈 만원을 내 놓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명령이 일반화 되어 있는 군 상황에서 부하에게 권유는 명령과도 같았다.
하지만 전역을 앞둔 군인들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돈 쓸 일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전역과 함께 전역비가 나왔으며 대부분 계급이 같은 동기생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단에서 제대를 코앞에 둔 선배 군번들을 찾아다니며 전역비가 나오면 만원씩 걷어서 북한 아이들을 돕는데
쓰면 좋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전역을 앞둔 군번들이 내 의견에 동참했다.
그들로부터 돈을 걷었다. 내 밑에 한두 달 차이나는 기수를 설득하여 천원에서부터 이천 원, 삼천 원까지 작은 돈들을
십시일반 모았다. 큰돈은 아니지만 두 달에 걸쳐 모금을 계속했다.
드디어 내 전역이 낼 모레로 앞으로 다가왔다.
전역을 앞둔 전역병들은 사단에서 전역병 교육을 받는다.
교육 내용은 예비군 등록과 절차, 군대 생활에 대한 보안 등 제대 후에 취해야할 일상적인 행동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교육을 담당하는 간부를 찾아가 다 아는 내용이니 동기들끼리 얘기할 시간이나 잠시 달라고 부탁했다.
“전역을 앞둔 동기 여러분 반갑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여러분께 제안을 하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나라를 위해 고생하신 동기 여러분 군 생활을 끝내면서 우리도 뭔가 뜻 깊은 일을 하면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뉴스 보도를 통해 아시다시피 현재 북한 동포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만원이면 배를 곪는 북한 어린이가 한 달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 계신 동기 여러분 전역비 만원씩만 모아도 수백 명 북한 어린이들이 기아를 면할 수 있습니다. 동기 여러분에 많은 동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부분 전역병들이 선뜻 주머니를 털어 성금 모금에 기꺼이 동참했다.
지금까지 모았던 돈과 합쳐보니 130 여 만 원이었다.
우리는 내일 전역과 함께 이 성금을 기탁하기로 뜻을 모았다.
다음 날, 전역과 함께 개구리복을 입은 동기 몇 명과 함께 ‘우리민족돕기운동’단체를 찾아가 모은 성금을 기탁했다.
뿌듯했다.
비록 사회에서는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군인들에게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액수가 아닌 우리 정성이 따뜻한 마음으로 전달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은 결과적으로 순진한 착각이 되고 말았다.
당시 연합통신이 우리의 모금을 두고 ‘예비역 군인 북한돕기 파문’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써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사단이 발칵 뒤집혔다.
남아 있던 부대원 전체가 두 달이 넘도록 정신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기관원들이 내가 있던 형의 집에 까지 찾아왔다.
형 집에서 조카와 놀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조카를 안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문을 열었더니 밖에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서너 명이 서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들이 나를 찾아 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강병원씨 계십니까?”
역시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그 녀석 제대를 했으면 집엘 들어와야 하는데 아직 오질 않고 있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 동생인데요. ”
그들은 조카를 안은 나를 살펴보더니 알았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만약 성금 자체가 불법이었다면 이후 나를 다시 찾았을 텐데 법적인 하자가 없자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학생운동을 할 때도 체포된 적이 없는데 제대와 함께 체포될 뻔 했다.
다섯. 청와대로 가다
참여정부가 탄생했다. 정말 꿈만 같았다.
처음 노무현 후보를 찾아갔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이 끝도 없이 추락해 민주당 안팎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스스로 캠프로 찾아가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캠프에는 이미 학생운동시절부터 알던 몇 몇 선배들이 정신없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나는 정책본부에서 일하다가 공식 대통령후보 선거운동기간에는 대통령후보 수행비서를 했다. 후보의 손과 발이 되는 일이었다.
후보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실 수 있게 그리고 방문현장에서 후보가 불편함이 없도록 사전에 자료를 체크하고 준비하는
일을 했다.
정말 최선을 다하며 성심껏 일했다.
나는 대통령님 옆에서 그 굴곡 많던 사건들을 지켜봐야했다.
내가 아직까지도 대통령님에 대한 존경심을 버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대통령님께서 보여 준 일상에서 모습 때문이다.
대통령님은 공과 사가 엄격할 정도로 또렷한 분이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과 사 언제나 한결 같았다.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섬세하게 사람을 챙길 줄 알았고 당신에 불편한 속내를 결코 아랫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으셨다.
대통령에 당선 되던 그 날 나는 역사의 진정성에 감동하여 결국 울고 말았다.
민심은 진심을 안다.
민심은 천심이며 천심은 곧 역사다.
참여정부가 출발하자 나는 청와대로 들어갔다.
내가 맡은 일은 청와대 관람 행정직이었다.
대통령님을 모시고 참여정부에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 어떤 직책도 기껍고 즐거웠다.
그런데 청와대를 출입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내 보직에 관해서 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명색이 서울대 총학생회장까지 지낸 사람을 관람직을 시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기실 내가 맡은 청와대 관람 행정직이 썩 마음에 들었다.
당시 청와대 내부는 경호실이 주도하고 있었다.
문 하나를 통과하려 해도 일일이 경호실 허락을 얻어야할 정도였다.
대통령 안위를 책임지는 최일선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과도한 경호는 일반인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다보니 이전까지 청와대 관람은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관례였다.
관람객은 그저 청와대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참여정부에 주인은 국민이었다.
그렇다면 관람 방식도 주인을 모시는 수준에 걸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관람 코스를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관람객이 직접 눈으로 보고 참여할 수 있는 관람이 될 수 있도록 코스를 변화시켰다.
녹지원 마당이 개방되지 않던 시절에 과감하게 녹지원 개방을 건의했다.
또한 경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어 있었지만 직접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밖에 관람 코스에서 천편일률적인 안내 멘트만 되풀이 하던 방식을 관람객이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안내가
되도록 안내 매뉴얼을 바꾸었다.
이러한 변화에 경호실이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경호실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청와대 관람이 관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님의 철학을 구현하는 관람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여
적극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경호실의 변화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관람객 코스 변화와 다양화 등으로 기존 경호 방식을 벗어나 새롭게 변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비서실과 경호실이 하나가 되어 청와대를 구경 오시는 어르신부터 초등학생까지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관람담당행정관을 맡은 초기에는 관람의 주인을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때로는 차분하게 설득하고 더러는 언쟁까지 벌여야 했다.
청와대 경내에서는 차량 이동이 많았다.
차량이 지나가는 경우 모든 관람객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차가 경내를 빠져나갈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만했다.
나는 이런 관행을 바꾸어버렸다.
관람객들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분들은 청와대의 실제 주인들이었다. 당연히 주인이 지난 다음 차가 지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차는 단 몇 명이고 관람객은 적게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었다.
나는 관람객들이 경내를 지날 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차량을 정지시키고 대기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의전실에서 전화가 왔다.
“강 행정관, 영애님 차를 대기시켰다면서요? ”
며칠 전 영애 노정연씨의 차를 대기시킨 적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전실에 보고가 올라 간 모양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 그랬습니다. 청와대 주인은 국민입니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전까지 모든 관람객을 일렬로 줄을 세워서 관람하던 방식도 바꾸었다.
일렬로 줄을 세우는 까닭은 관람객들의 돌발행동을 우려하여 관람객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일렬로 선 관람객들에게 “한 줄로 서세요.”“거기 나오시면 안 됩니다.
”“함께 행동해 주세요.”등 다소 고압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는 했었다.
전형적인 행정 편의적 발상이었다.
나는 직원이 편하기 보다는 관람객이 편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 지침은 그랬다.
삼삼오오 자유스럽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할 것.
유사시 준비는 직원이 솔선수범하여서 대비할 일이지 미리 통제하지 말 것.
나의 이러한 관람 방식의 변화는 그동안 꽁꽁 닫혀있던 경호실 입장에서 본다면 파격에 가까웠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대통령님의 국정철학이 청와대 전반에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또한 참여정부 청와대 참모들의 민주적인 생각들이 변화의 물결을 만들면서 결국 굳게 닫혀졌던 경호실 문도 차츰차츰 열렸다.
시간이 지난 후 청와대 관람객 중에는 운이 좋으면 대통령과 사진을 찍는 경우도 생겨났다.
일정상 지나치시던 대통령께서 차에서 직접 내려 관람객과 일일이 악수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하셨던 것이다.
대통령님의 소탈한 모습은 관람객들 사진에 그대로 노출되어 그 분들의 가슴에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들 이었다.
변화는 큰 것이 아니라 소소하고 작은 것부터서 서서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청와대 관람 행정관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다.
이후 나는 청와대 정무팀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과 한 마디 말도 보수언론의 왜곡을 거쳐 대서특필 되던 시절이었다.
신문을 보기 싫을 정도로 언론들은 청와대와 대통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거의 언론을 빙자한 스토커 수준에 가까운 행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불공정한 규칙이었다.
언론은 객관성과 중립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언론은 그렇지 못했다.
예컨대 그렇게 코드 인사라는 말로 참여정부 인사시스템을 비판하던 언론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 순한 양이 되어버렸다.
참여정부 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불법과 탈법을 저지른 국무위원들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내각에
기용되었지만 언론은 솜방망이 비판시늉에 그치고 만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에게 노무현 대통령에게 퍼부었던 식으로 언론 포커스를 맞추면 말 그대로 정권이 초토화 되고 말 것이다.
청와대 정무팀은 거의 대학원 연구실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다.
대통령께서 유난히 궁금하신 부분이 많아 이를 충족시킬 보고서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 내용들 대부분은 전문적이고 깊은 연구가 필요했다.
정무팀은 내각제에서부터 선거구제 문제 등 정치현안에 관련된 현안에 대한 꼼꼼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제대로 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니 보통 청와대 직원들은 회식을 해도 1차로 끝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시작되는 일과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2차를 가는 것은 체력적으로 힘들고, 참모의 입장에서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1차 회식 문화는 나중에 습관으로 굳어져 나 역시 1차에서 술을 마실 만큼 마시고 1차가 파하면 곧바로 집으로
가버리는 술버릇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연애 중이던 아내를 친구와 선배들에게 소개시키는 자리에서 나는 술에 취해 1차를 끝내고 아내만 남겨둔 채
훌쩍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아내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2차 자리에서 온갖 짓궂은 질문공세를 견뎌야만 했다.
나는 그 날의 원망을 아직도 듣고 산다.
마무리.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
천붕.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하던 모든 일을 팽개치고 봉화로 내려갔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는 대통령님의 서거가 마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랬다. 나에게 노무현 대통령님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문상객을 맞이하면서 눈물을 참으려 얼마나 이를 앙다물었는지 장례가 끝난 후 한동안 이가 아려올 정도였다.
마흔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정치인이 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울대 학생회장을 할 때도 세상의 변화를 통해 민중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지만 정치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난 지금 마치 운명처럼 정치와 마주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잃고 나서 나는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정치하지 마라’는 말씀을 되새겼다.
왜 당신께서는 스스로 몸을 던져서까지 불의에 항거하셨으면서도 정치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
대통령님의 그 말씀은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 한 정치를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갈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희생을 당신께서는 마지막 육신을 던지면서까지 실천하셨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는 자는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서 정치를 하려는 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자신과 자신 주변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려는 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정말 내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나는 정말 내 이익과 사적 욕망을 채우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수 없이 되물었다.
그 때 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의 눈물. 중학생 시절 세상의 부조리에 힘없이 울어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이 소화되지 않은 기억처럼
명치끝을 아프게 찔러왔다.
나는 우리 사회가, 우리 문화가, 우리나라가 좀 더 성숙하고, 좀 더 배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를 떠나 세상이 서로를 아껴주고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한 만큼 거두어가고 땀 흘린 만큼 보상 받는 사회. 법이라는 이름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사회,
빈곤한 부모는 있을지라도 가난한 아이들이 없는 균등한 기회의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회를 위해, 그런 국가를 위해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아름다운 사회를 위해 나는 기꺼이
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대통령님 저, 강병원이는 정치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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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둘째아들내미엿습니다가 아니고 "입니다"로 바꾸셔야 할듯..^^
항상 초심을 잃지않는 옥동떡 둘째아들내미이기를...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따뜻한 화이트 스마스 추카요 소비자, 대설, 동지, 성탄의 12월*^^**^^* 만복 축원과 함께*^^*더욱 건강 다복하시길 축원하며*^^**^^*<> 고창 고창 고창*^^*고맙습니다반갑습니다*^^*만사형통의 축원과 함께"고창" <고수고창공음대산무장부안상하성내성송신림심원아산해리덕>*^^*
대단하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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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강병원이 어느 날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늘 찬란한 변신의 귀재가 되어 2mb 같은 사람이 안되라는 법이 없다.
2mb도 얼마나 처절하게 과거의 배고프고 아픔이 있었던 사람인가?
이번 잘 하면 그에게 고창군민들이 날개를 달아 줄지도 모른다.
아마 그걸 위한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고 호소하는 글로 보인다.
광복 이후 많이도 보고 겪은 일이고 배반 당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제발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선하고 바보같고 순진 투박한 고향사람들 뒤통수 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성공을 빈다.
설마 아무리 변한다고 한들 서생원류 같이야 변하겟습니까?
지켜보십시다.
끝까지 다 읽어봤습니다
고창, 부안에서 큰 뜻을 이루시길............
相 恤 同 樂 (상휼동락)서로 도와 다같이 즐겁게!
어려움은 서로 나누고 기쁨은 함께 누리며 모두가 행복한 임진년 한 해가 되기를 소망 합니다.
고산(高山)에 착근(着根)한 민들레는 뿌리가 깊다. 나는 그 때문에 고창사람이라는 것이 참 자랑스럽다.
제 생각과 많이 닮으신듯 해서 반갑습니다..화이팅 하시길..
큰꿈을 이루시기를...
느낌이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