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가 녹아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강렬한 더위가 도시를 태우고 있는 정오였다. 커다란 고층 빌딩들이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눈앞을 간질거리는 아지랑이가 결코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잠깐 신호에 걸려 멈춰 섰을 뿐인데도 시원스럽게 달리던 순간의 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차오른다. 원망과 땀이 질척거리는 주먹으로 반쯤은 기대를 하며 고장 난 에어컨을 두들겨 보지만 그런 것으로 에어컨이 온전히 작동할 리 없었다. 남모르게 품은 기대와 작은 희망이 여름날의 후덥지근한 열기에 익어 짜증으로 변질되었다.
“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는 열린 차창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었다. 그리 막힐 시간은 아닌데 좁은 길에 도로 공사가 겹쳐서 이래저래 진행이 더뎠다. 모자에 땀이 찬 것이 느껴지자 그는 약간 지저분한 느낌으로 길게 기른 머리를 긁적이며 ‘머리 자를까.’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무의미한 걸 알면서도 에어컨을 한 번 더 두드렸다. 애써 기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역시 별 성과가 없으니 짜증이 난다. 여전히 길은 뚫리지 않았고, 자동차 뿐 아니라 도로와 온 도시가 함께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괜히 회사를 원망했다. 택배 배달원이란 직업도 슬슬 지겨워 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다지 즐거운 일도 아니었다. 하품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또 하품이 나온다. 그렇다고 눈꺼풀이 감겨오거나 졸리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루한 하루에 대한 구토일 뿐이었다.
슬금슬금 기어가는가 싶더니만 또 굴러가던 바퀴가 멈춘다. 시계를 보면 불과 5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뒤편의 길을 보면 기껏해야 5m 나아갔을까 싶었다. 그는 엉덩이를 앞으로 빼고 비스듬히 걸치듯 누웠다. 습관적인 동작인지, 아니면 아직도 은근한 기대를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탓인지, 에어컨을 자꾸만 툭툭 건드렸다.
아스팔트가 녹아서 타이어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신기루가 언뜻언뜻 보였다. 졸려서라고 판단한 택배 배달원은 허벅지를 ‘팡’ 소리가 나게 때렸다. 이제야 차가 빠지기 시작했는데 졸려서는 곤란하다. 뒤쪽에 실린 택배물들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는 이제야 겨우 좁은 길목에서 빠져나온 것에 안도하며 제법 시원스럽게 달렸다. 이제 곧 도심을 벗어나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릴 것이다. 진작 이렇게 됐음 좋을 걸, 하며 그는 엑셀레이터를 꾹 눌렀다.
엔진의 구동소리와 바퀴가 길바닥을 차는 소리만이 들린다. 꽉 막힌 차에서 운전자들의 시끌시끌한 불평소리에 묻혀 있으려다 뻥 뚫린 도로로 나와 있으니 잠잠해진 기분이었다. 엔진이 토해내는 소리가 슬슬 질리고, 사람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탁한 목소리가 그리워질 즘이었다. 핸드폰이라도 꺼낼까 했지만, 오늘따라 길에 경찰들이 부릅뜬 눈이 자주도 마주쳤다. 얼마 전에 한 선배도 통화하다가 가벼운 사고를 당했다. 가벼운 사고여서 달리 다친 곳은 없었으나, 차도 망가지고 손해 배상도 하고 해서 상사에게 크게 혼나는 모습을 본 터라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었다.
조금은 소심하고 평범한 택배 배달원은 괜스레 주위가 쓸쓸하고 울적한 것이 섭섭함이 치밀어 올랐다. 괜한 헛기침도 해봤지만, 갑자기 튀어 오르는 사람 목소리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꾹꾹 눌러보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아쉬운 데로 일단 라디오 전원을 켰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라도 틀어주면 좋으련만 온통 들리는 소식이라고는 사람 냄새 덜 느껴지는 딱딱한 아나운서들의 또박또박한 음성뿐이었다. 연예인 이야기라도 나올까 싶어 잠시 멈추고 들어보았지만 그런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래도 기왕에 킨 거, 끄자니 내키지 않고 해서 택배 배달원은 그저 전원을 켜고 가만 듣고 있었다.
어디 가서 심심한 술안주 삼을 만한 뉴스거리라도 나오길 기대했지만 별로 그런 분위기는 아닌 듯 했다. 하긴 지금은 뉴스가 나올 법한 시간도 아니었고, 무슨 속보라고 하는 게 생각나고 보니 그제야 급한 일이라도 터졌구나 싶었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아나운서의 음성과 치직거리는 주파수 맞추는 소리만 들려야할 라디오 뉴스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스탭들의 목소리,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까지 섞여 있었다. 심상치 않은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전파를 타고 그의 심장까지 와닿는 기분이었다.
“속보입니다.”
발음이 어눌한 것이, 무슨 뉴스 패러디 프로그램이라도 시작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 자꾸만 반신반의하게 만들었다.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진 건지. 아니면 테러로 빌딩 하나 무너지기라도 했는지, 쿠데타라도 나서 나라가 망해먹은 건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나운서 목소리마저 물기를 먹은 듯 울먹울먹 거리는 모양새가 심상치가 않았다.
“…조금 전, 한국 천문 연구원에서 전해온 소식입니다. 무, 물론 아직 확정적인 것은 아닙니다만….”
버벅거리는 말투가 갑갑하게 느껴진다. 천문 연구원이라고 하니, 전쟁이라거나 하지는 않은가 보다 했다. 그럼 어디서 우주선 폭발이라도 했나. 그는 저도 모르게 뉴스에 몰입 해갔다.
“어제 저녁 예보해드렸던 데로, 천문학자들이 경고한, 태양의 소멸이… 아, 소멸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뭐라는 거야? 태양이 소멸, 사라진다니. 무슨 소리인지. 남자는 잠시 차가 멈춘 틈을 타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찌르는 듯 내리쬐는 태양빛은 여전히 강렬하기만 했다. 뭐가 사라진다는 거야.
“명확히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울먹거리던 여자 아나운서 대신 교체되었는지, 다소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딘지 힘이 빠진 듯한 허무가 섞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일주일 전부터 천문학계에서 예고되던 위험이 결국 상당히 유력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다고 하지만….”
차분하긴 해도, 그 또한 그다지 제정신은 아닌 듯 횡설수설해댔다. 뭐라고 말을 덧붙이든 명확한 것은 하나였다. 태양이 사라진단다. 방금 전 확실한 답이 전해졌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신 태양은… 야가 8분 20초 전의 태양입니다. 태양은, 태양계는 사라졌습니다. 지구도, 인류도 멸망입니다. 절망에 적신 갈라진 목소리가 탁하다. 그저 멀게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어디서 들어서 알고는 있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없던 그였으니, 아마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친구가 해준 얘기일 것이다. 어쩌면 졸기만 하던 지구과학 시간에 언뜻 들은 것이 의외로 뇌리에 굳게 새겨진 것일 수도 있다. 별이나 태양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보는 모습은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과 8분 20초라니. 이제 8분 정도 남았으려나.
인류의 종말이라니. 사실 돌이켜보면 꼬맹이일 적부터 종말론이라면 꽤 들어왔다. 무슨 옛날 예언가라는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양반이 멸망한다고 예언했다는 1999년도에 그는 열 살 쯤 되었을 거다. 99년도 1월 1일에 하루하루를 공포에 떨며 살아갈 생각을 하니 아찔한 것이, 괜스런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그런 걱정은 의외로 길지 않았고 무사히 그 해의 12월 31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연말에는 종말론이니 뭐니 잊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송년회를 보내고 있는 자신이 떠올랐다.
꼭 노스트라다무스가 아니어도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이야깃거리는 종종 있었다. 100년 후엔 혜성 충돌이 있을 것이란 예측, 쓰나미 지진, 언젠가 서울에서 강도 7쯤 되는 지진이 난다는 소리 등 그런 과학적인 분석 말고도 종말론은 많았다. 얼결에 ‘수행하는 분들’께 붙잡혀선 주워들은 얘기의 일부일 뿐이지만 세계적인 위험, 즉 자연재해나 경제 불황이 종말을 예고하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도 꽤 들어왔다. 돌이켜보면 알게 모르게 종말은 자주 접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무엇을 할까. 어릴 때는 그저 두려워하느라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구가 멸망하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더니 날아온 ‘너는 어떻게 할거니?’하는 엄마의 질문에 그는 그저 아무 말 못하고 가만있을 뿐이었다.
조금 머리가 큰 이후, 학창시절에는 치기 어린 마음에 당당히 자살해버리겠다고 떠벌렸다. 혹은 당장이라도 옆에 있는 여자를 잡아다 한 판 벌이겠다고도 했고, 짧은 가방끈에 어줍잖게 들은 대로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며 허세를 떨어 한 바탕 웃기도 했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었지만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느덧 소식이 꽤 널리 퍼졌는지 도로는 이미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차를 멈추고 엉엉 울며 가족들과 통화하고 있는 여자도 보였고, 알고 있는 온갖 욕지거리를 다 내뱉으며 소리치는 자도 보였다. 아직 소식을 모르는 듯, 그들의 격한 행동을 제지하려는 비교적 차분한 사람도 있었고 당장 길옆의 가게에 달려가 가져온 듯한 독한 양주로 병나발을 불고 있는 덩치 큰 남자도 보였다. 어디에도 남은 8분 동안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스피노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사 과연 스피노자가 이쯤에 다시 눈을 뜬다해도 하루도 아니고 8분여 동안 사과나무를 심을지는 의문이다. 사과나무를 심을 땅도 다 못 팔 시간이다.
지금은 틀림없이 우주 공간의 먼지가 되어 있을 태양은 아직도 지구엔 그 빛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렇게 강렬하게 살갗을 쪼고 있는 태양이 현실이 아니란 것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수많은 종말론을 들어왔고 그 때마다 가볍게든, 진지하게든 ‘멸망의 날’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답하려 해봤다. 하지만 그 종말이란 것이 참 머나먼 미래의 일인 것처럼 그런 고민은 언젠가는 생길 후손대로 떠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종말이 닥치고 보니 한 번도 제대로 된 답변을 내본 적이 없다는 게 뚜렷해졌다. 친구들에게 허세를 떨던 행동들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날 텐데도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지막인데 무언들 못하리, 싶은 마음도 들었고 거리에 널부러져 병나발을 불고 있는 사람들처럼 술이라도 들이 키고 나면 용기도 날까 했으나 결국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주변의 상황은 점점 더 묘해지고 있었다. 아줌마, 아저씨들은 덩치 큰 사내의 곁에서 술이라도 얻어볼까 싶어 얼쩡거리다말고 예수님부터 부처님, 공자맹자까지 찾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하나님 아버지께만 옹알거리는 사람은 제법 소신과 일관성을 갖춘 기도자였다. 저쯤의 골목에선 정말로 엉키어서 판을 벌이고 있는 남녀의 야릇한 음성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괴성을 지르며 속옷 차림으로 뛰어다니는 노파도 보였고,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아이들을 부둥켜안고서 꺼이꺼이 통곡을 하고 있는 유치원 선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를 따라 조그만 아이들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택배 배달원은 아직도 약간 멍해 있는 자신을 느꼈다. 하긴 그는 어제 피곤을 핑계로 일찍 잤고, 일찍 자지 않았다 해도 그다지 뉴스를 챙겨보는 형의 인간은 아니었다. 아마 이만한 사건이면 꽤 거창하게 다뤘을 텐데, 오늘 아침 지각하는 바람에 딱히 전해들을 만한 틈도 없이 차에 올라선지 이제야 뉴스를 전해 들으니 마음에 준비를 할 여지도 없었다. 미리 들었다고 이런 충격에 대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는 별개로 괜한 짜증이 울컥 들었다.
임종하는 순간의, 아니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아니 사형이 눈앞에 남은 사형수가 이런 기분일까.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지만 그것과는 또 다를 터이다. 내가 세상을 하직하는 것과 인류 전체와 함께 무덤도 없을 우주의 먼지가 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괜히 무기력이 드는 게 사지에 힘이 쭉 빠졌다. 아직도 태양 빛은 따사롭기만 하다. 나른한 오후도 어느새 8분도 남지 않았다. 이제 7분 57초까지 카운트다운 중이다. 의외로 시간은 느리게 간다. 죽기 직전의 순간에는 한 생애를 모두 돌아보게 된다는데, 불과 20여초에 꽤나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많은 생각들로 보낸 20초 마저 한없이 짧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차에 앉아서 마지막을 맞는다는 것은 암만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왔다. 광인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날씨라도 추웠다면 또 모를까,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온 속옷 바람의 백수들이 제법 당당한 모양새로 가게에서 술을 꺼내들고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한편 저 뒤쪽에선 철퍼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아아악!’하는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귀를 쑤셔왔다. 달리 갈 곳도 없어, 소중한 몇 초를 썼다. 실은 반사적으로 돌아본 것에 불과했으나 곧 괜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 자신은 치기어린 허세였다고 간단히 결론 내렸지만 정말로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 한 10층 조금 넘어 보이는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운이 좋은 건지 스스로 택한 길대로 즉사한 듯 싶었다. 이런 경우에는 주체적인 선택이라고 해야할 일인지, 현실 도피라고 해야할 일인지. 얼마 안 남은 시간에도 생각하고 싶은 철학자에게 맡길 일이었다. 이제 7분 40초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또 다시 몇 초를 시신에게 다가가느라 썼다. 멀찍이서 언뜻 보기엔 건물 경비 정도로 보이는 차림새였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은근히 다행스러워 하면서 - 괜한 상상에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발끝 즘에서 시작된 소름은 뜨끈한 태양빛에 녹아내렸는지 중간 즘에서 그쳐버렸다. 무더운 날씨에 땀이 셔츠를 적신다. 괜히 원망스런 눈으로 태양을 올려다보지만 그런다고 태양이 사라져줄 리 만무하다. 늘 그렇게 여겨왔다. 태양은 늘 그랬듯이 둥그렇고 쳐다보기 껄끄럽게도 환했다. 이제 7분 30초 남았다. 지금 보는 태양도 7분 30초 정도 전의 태양이다.
전화 통화로 재잘대는 낮은 목소리가 소란스럽다. 택배 배달원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보았지만, 달리 통화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핸드폰이 없다. 외아들이었고, 마지막을 고할 연인도 없다. 절친했던 친구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네들도 이 종말을 이제 다 깨달았을 텐데 자신의 폰이 울리지 않은 걸보면 자신이 아닌 그 나름대로 마지막 대화자를 찾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너그럽게도 그들의 마지막 대화에 끼어들지 않을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짖는 소리가 꽤 커져서 돌아보니, 무슨 광신도 마냥 제멋대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이 거리에 있던 자들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정확하게는 어느 교회에서 모여 있다가 걸어 나온 교인들이었으며 자신들은 구원을 얻었다면서 예수께서 천국으로 인도하실 거라며 소리 질렀다. 반쯤 넋이 나간 듯한 노인이라기엔 조금 덜 늙은 체격 좋은 아저씨는 ‘사탄들아, 지옥에나 떨어져라!’며 시시한 욕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는 남들 따라 독한 술을 들이켜 대던 왠 젊은 아가씨가 허연 위액을 올려대고 있었다.
“야이 새끼야. 예수가 니들 천국 보내고, 우리 지옥 보내려고 태양 없앴냐?”
맨 처음 양주를 꺼내와 들이켰던 덩치 큰 사내는 자신의 덩치와 맞지 않는 작은 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왔다. 이후로 신자들을 향해 폭언을 퍼부어댔다. 죽어버려, 그깟 신. 그에 응수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사탄의 무리다, 괴물,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구원받았다. 덩치 큰 남자는 조금은 누그러든 듯했지만 이내 다시 강경한 표정으로 교인들을 윽박질렀다. 꺼져버려, 사이비들. 누군가 덩치 큰 사내의 말에 무언가 자극을 받은 듯, 교인들이 들고 있던 성경을 뺏더니 몇 장을 찢어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먹과 발길질이 오갔다. 여자 교인들은 ‘꺄악’거리는 비명을 질렀고, 몇몇 용감한 교인들은 바닥에 널부러진 술병을 던져댔다. 당장은 깨진 술병의 목을 잡고 엉성하게 큰 동작으로 휘두르며 쭈뼛쭈뼛거리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냅다 찔러 버릴 폼으로 독기 어린 눈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어느새 거리는 패싸움의 무대가 되어 있었다. 사탄들아, 예수쟁이, 지옥, 사이비, 그 외에도 온갖 지저분한 소리들이 나왔다.
라디오에서도 아나운서들과 스탭들의 흐느낌 외에도 기도하는 소리 혹은 염불하는 소리, 심지어 처음 듣는 언어로 주문 비슷한 걸 외는 소리도 들렸다. 설상가상으로 거리 한쪽에선 북소리와 함께 무당이 춤을 추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교인들은 또 다시 발광하기 시작했고, 술 취한 덩치 큰 남자는 고래고래 고함을 쳐대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던 대다수는 영문도 모르고 싸움에 얽혔고, 난데없이 나타난 폭주족들은 대낮에 마지막 질주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이 무리한 턴을 시도하다가 꼬꾸라졌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최후의 폭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죽여버려!”
“닥쳐, 개자식아!”
“주님.”
“밟아!”
“저런 씹….”
거기에 라디오 소리와 잇달아 자살하는 사람들의 충돌음, 폭주족의 휘파람 소리와 오토바이 바퀴가 아스팔트에 생채기를 내는 소리가 뒤범벅이 된 거리는 무척이나 어지러워졌다. 소심한 택배 배달원은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있었다. 초시계를 맞춰놓은 그의 핸드폰이 그에게 이제 약 5분 정도가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도망치 듯 혼잡한 소리가 점령한 거리를 빠져나와, 첫 자살자가 경비를 서던 건물로 들어와 있었다. 이곳 사정도 그리 바깥과 다르지 않았다. 현관문 안쪽에선 언성 높여 싸우는 소리도 들렸고, 그런가 하면 속삭이듯 기도하는 집도 있을 것이다. 어디서 새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가스와 본드 냄새도 나는 걸 보면, 독한 양주를 마셔대는 바깥의 양반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으리라.
택배 배달원은 세계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물건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차를 몰까도 생각해봤지만, 좀 전까지 본 거리의 풍광을 통해 그것이 헛된 생각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무얼 해야 할까. 조그만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맨 위층인 11층에 멈추어 있었다. 경비가 자살하면서 올라갔던 그 때 그대로인 걸까. 택배 배달원은 묵묵히 올라가기 위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까지 내려오는 데 대충 1분 정도가 흘렀다. 그는 타자마자 11층을 누르고 다급하게 닫힘 버튼을 수차례 눌러댔다. 그의 최후가, 인류의 최후가 4분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맨 위층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3분 10여초가 남아 있을 뿐이었고, 이미 경비가 열어놓은 옥상 문의 낮은 문턱에 고개 숙여 들어갔을 때는 2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아 있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시간은 맞추었다.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사실 바깥의 광기를 피해온 은신처였을 뿐이지만, 우연하게도 첫 자살자가 뛰어내렸던 건물이었고, 거기에 이끌려 옥상에 올라왔다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라.”
택배 배달원보다 조금 앞서 온 젊은 여자가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조금 통통한 편에 상기된 얼굴로 울고 있었는데, 종이에 무언가 끄적끄적 쓰고 있었다. 막판에 뭐가 부끄러운지 눈물과 먼지가 덮인데다 구겨진 종이를 급히 몸으로 가렸다.
“뭔데요, 그게.”
택배 배달원이 물었다. 이제 1분 50초 정도 남았다.
“…유서요.”
1분 30여초.
“그런 건 이미 소용없어요. 봐줄 사람도 없어요.”
물론 그녀도 알고 있으리란 것은 알 수 있었다. 택배 배달원은 무력한 마지막 대화상대가 꼭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만큼은 동질감 속에서 보내고픈 욕구의 발현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유서란 것에 어처구니없어 멍하니 있느라 시간이 많이 지났다.
1분.
“죽을 거예요?”여자 쪽에서 빠른 말투로 물었다. 시간이 얼마 없음을 의식하는 듯 했다.
“몰라요.”
택배 배달원이 답했다. 그는 여자가 서 있는 옥상의 끝자락에 다가섰다.
54초.
“유서엔 뭐라 썼어요?”
“사실 유서가 아니예요. 편지예요.”
“받을 사람이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43초가 남았다.
“편지엔 뭐라고 썼는데요?”
“기도예요. 태양을 향한 편지고요. 저는 시인이거든요.”
39초 남았다. 과대망상증이던가, 심하게 산만한 여자다. 시간은 매우 촉박하다.
“아무도 봐주지 않으면 슬프고 미안할 거 같아서요. 태양의 마지막을.”
꽤나 낭만적인 여자다. 어쩌면 시인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꽤나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별의 죽음이나 유성은 꽤나 거창한 의미를 두면서 보는 주제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별의 죽음을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선인들에 대한 모욕이자 태양에 대한 실례인지도 모른다.
30초.
“함께 볼래요?”
여자가 제안했다. 나쁠 것 없다. 그는 난간에 턱을 괴고 섰다. 담배라도 물면 영화의 한 장면 같을까. 하지만 그는 담배를 피울 줄 몰랐다. 태양을 보기엔 아직도 그 빛이 너무 강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저 빛은 불과 23초 전의 빛이다. 멸망을 20여초 남겨두고도 아래에선 난리다. 누군가 깨진 술병으로 찔렀는지, 이빨로 물어뜯었는지 누가 피를 쏟고 있었고 폭주족들의 오토바이가 사람을 치는가하면, 건물에 쳐박으며 엉망이었다. 건물 1층에선 누가 가스를 마시다 끝내 폭발했는지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5초.
“고마워요, 함께 봐줘서.”
여자가 말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난생 처음 보는 여자와, 난생 처음 똑바로 바라보는 태양과, 난생 처음 지구를 소중히 해보며 맞는 죽음 또한 괜찮을 꺼라고.
4초
“괜찮아요?”
남자는 자신에게 묻는 말인지, 여자에게 묻는 말인지, 뱉어놓고도 애매하다 느꼈다. 그리곤 그녀의 떨리는 몸을 조용히 껴안았다. 3초.
“미안해요. 나대신 꼭 봐줘요.”
2초.
남자는 늘 결심을 오래 지키지 못하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이번 결심은 매우 굳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결심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할 수 있으면 되었다. 그의 시선은 진중하게, 하지만 재빠르게 위로 솟았다. 하늘에서 여름 대신 시리고 검은 어둠이 쏟아지는 광경이 왠지 한없이 천천히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첫댓글 앗! 이거 저번에 읽고 댓글 쓸라구 했더니 작가님께서 지워버리셨더라구요!! 어디 문예전에 내보내실거에요? 진짜 잘 쓰셨어요. 다만 종교 얘기가 상당히 좀 민감하긴 하지만...
지운게 아니라 리턴 당했다는 ㅋㅋ 어디 문예전은 아니고 그저 교양과목 과제로... ㄷㄷ 특정 종교에 대한 특별한 반감은 없지만, 상황에 적절한 단체라고는 종교단체밖에 안떠오르더군요 ㅠ
잘 읽었습니다. 8분 30초 전의 태양이라... 재미있네요.ㅎ
메피스토펠레스님 단편 보고 찾아왔어요. 정말 재밌었어요. 종말이 이렇게 과연 다가올까요? ^^;;;
글쎄요.... 사실 저로서도 8분이라면 지나치게 짧다 싶은 감이 있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