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사찰] 39 부는 바람도 호국을 말하는 해남 대흥사
대흥사에는 왜 사천왕이 없을까?
천불과 함께 있는 목조 비로자나불, 문수ㆍ보현보살. 해남 대흥사 천불전 천장 빗반자에는 연꽃이 한꺼번에 출현한 듯 수많은 연꽃 봉오리와 그사이에는 거북이, 물고기, 개구리 등도 조각되어 있다.
➲ 서산 사명 뇌묵…임진왜란 ‘구국 삼화상’
대흥사에는 사천왕이 없다. 왜냐면 임진왜란 때 서산 휴정, 사명 유정, 뇌묵 처영 등 구국 삼화상(救國三和尙)이 부처님의 법을 받들어 나라와 백성들을 지켰기 때문이다. 1788년 정조대왕은 교지를 내려 특별히 ‘표충선사(表忠禪師)’라 하여 서산대사를 흠모했다. 정조대왕은 서산대사를 찬탄하길 “복된 나라 하늘의 도움이 많아(福國多祐) 높은 스님 때맞추어 결심했네(高僧應期). 주장자 세우고 한 소리 외치니(卓錫一喝) 마귀의 군졸 흩어져 쪼개졌네(魔軍離披)”라고 했다. 이렇듯 해남 대흥사는 부는 바람도 호국을 말하는 사찰이 되었다. 서산대사는 대흥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 하여 선조대왕이 하사한 교지와 금란가사, 옥발우, 신발 등을 대흥사에 간직할 것을 사명당에게 유언으로 남겨 현재 성보박물관에 있다.
담장으로 둘러쳐진 부도전에는 대선사, 대강백 등 80여기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그 가운데 인조 25년(1647) 건립된 서산대사 부도는 최고의 조각미를 자랑한다. 높이는 2.7m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하대에는 큰 연꽃잎이 아래로 펼쳐져 있고 모란이 조각된 중대는 네 마리 사자가 연화좌를 들고 있다. 연꽃 상대 사이에는 암수 한 쌍의 게, 피는 연잎, 두 마리 거북이는 물속을 보는 듯하다.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 없이 ‘청허당(淸虛堂)’이란 당호가 새겨져 있고, 팔각지붕 마루 끝에 용, 다람쥐, 두꺼비 등이 조각되어 특이하다. 특히 솟아오른 상륜은 서산대사의 주장자처럼 용이 솟아오른 보주를 휘감고 있고, 4면에는 용과 귀면이 지키고 있다.
임진왜란 구국 삼화상 중 한 분인 청허당 서산대사 부도. 솟아오른 상륜은 서산대사의 주장자처럼 용이 솟아오른 보주를 휘감고 있다.
➲ 천불과 함께 하는 비로자나불
길을 따라 오르면 문지방이 아름다운 가허루(駕虛樓)와 천불전(千佛殿)이 나온다. <수능엄경>에 “중생의 마음이 맑게 드러나 사무치면 안의 빛이 밝게 나타나 시방이 온통 염부단의 금빛이 되고 일체 종류가 여래로 변화한다. 그 때 천광대에 앉아서 천불에 둘러싸인 비로자나불의 모습과 백억 국토와 연꽃이 한꺼번에 출현하는 모양을 보게 되느니라”하였다.
가허루는 현겁천불을 만나려면 허공을 오르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이 맑고 밝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천불전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3년에 다시 지은 전각으로 목조 비로자나불, 문수ㆍ보현보살이 천불에 둘러싸여 있다. 천장 빗반자에는 연꽃이 한꺼번에 출현한 듯 수많은 연꽃 봉오리와 그사이에는 거북이, 물고기, 개구리 등이 조각되어 있다. 높이 25㎝ 안팎의 천불은 풍계 현정스님이 순조 17년(1817) 경주 옥돌에 회칠하여 조성했다. 현정스님이 쓴 <일본 표해록>에 따르면 이 천불은 경주에서 바다를 통해 배로 이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일본 나가사키현에 도착했다. 일본인들이 이 천불을 모시고자 하였으나 천불이 꿈에 나타나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라 하여 1819년 7월에 대흥사로 돌아온 영험 많은 부처님이다.
심진교를 건너면 ‘시내를 베고 누운 누각’이란 예쁜 이름을 지닌 침계루(枕溪樓)를 만난다. 편액도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 것 같아 원교 이광사의 안목이 드러난 글씨이다. 뒷면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편액은 대웅보전 부처님을 마주하고 있어 단정하게 쓴 이광사의 글씨이다.
원교 이광사가 쓴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 부처님이 큰 걸음을 내딛는 듯한 ‘大’, 영웅처럼 단단한 ‘雄’, 보배가 지붕을 뚫고 나올 것 같은 ‘寶’, 중생이 부처님을 따르는 듯한 ‘殿’ 등 힘찬 글씨이다.
➲ 대웅보전, ‘어! 이거야’
대웅보전(大雄寶殿)은 팔작지붕으로 크고 당당하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12년 태전스님 등 10명의 스님들이 조성하고 380여명의 불자들이 시주한 약사여래, 아미타불 등 삼세불을 모셨다. 두 협시불은 나무와 진흙을 사용하고 최종 진흙을 덧발라 조성한 특이한 형상불이다. 화재로 타버린 대웅보전을 짓기 위해 매천 황현은 1899년 법당 중수 모연소를 지었다. “아아, 보배로운 불전이 무너져 보답할 길 없는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절로 한탄합니다. 금부처님을 보호하고 지킬 수 없다면 세간이나 출세간에 피안을 바라는 중생들이 어디에서 도솔천을 우러러 예경을 하겠습니까? 이에 흙을 쌓고 모래를 모아 불사를 조성하는 큰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으로 대흥사 대웅보전이 탄생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어! 이거야’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대웅보전’ 편액이다. 부처님이 큰 걸음을 내딛는 듯한 ‘大’, 영웅처럼 단단한 ‘雄’, 보배가 지붕을 뚫고 나올 것 같은 ‘寶’, 중생이 부처님을 따르는 듯한 ‘殿’ 등 힘찬 글씨이다. 글씨만 보더라도 원교(員喬) 이광사는 22년간 계속된 유배지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귀양길에 들른 추사 김정희는 “원교의 대웅보전 편액을 한 번 훑어보았는데 만약 원교가 자처해서 써 준 것이라면 너무도 전해들은 것과는 같지 않고, 원나라 명필 조맹부의 서체를 타락시킴을 면치 못했으니 나도 모르게 아연 비웃을 밖에 없다”하여 떼라고 했다.
초의선사는 대웅보전 편액을 내리고 추사로부터 현재 성보박물관에 있는 ‘무량수각’이란 글씨를 받아 전각에 걸었다.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고통스럽고 힘든 나날을 10개의 벼루와 100자루의 붓이 닳아 없어지도록 글씨를 연마한 결과 추사체를 완성했다.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에게 지난날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하고 다시 이광사가 쓴 편액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다시 천불전 쪽으로 향하면 왼쪽 석축사이에 500여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높이 20m, 둘레 4.4m에 달하는 두 나무는 굵은 뿌리가 서로 뒤얽혀 한 몸처럼 붙어 있다. 서로 사랑하길 500년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500년을 사랑할 ‘천 년의 인연’이라 불리는 천년나무 앞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것 또한 또 하나의 재미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태극무늬 범종. 비천(飛天)이 태극기에 꽃과 향을 공양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 일제강점기 태극무늬 범종 ‘눈길’
또한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일제강점기 시절 주조된 태극무늬 범종이 있어 눈길을 끈다. 조국의 광복을 염원한 범종에는 비천(飛天)이 태극기에 꽃과 향공양을 올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부처님의 가피로 독립을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태극무늬 범종의 울림은 곧 ‘대한독립 만세’였다. 범종에 태극기를 새겨 넣은 것은 원수를 항복받고자 하는 의미이다. <증일아함경>에 “악마의 힘과 원수를 항복 받고 번뇌를 다하여 남음이 없게 하기 위해 건치(犍稚, 범종)를 치면 스님들은 듣고 모여야 한다”고 했다. 대흥사에 가면 표충사(表忠祠)와 함께 구국 삼화상의 호국정신을 느끼실 수 있다.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불교신문37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