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다
―어느 선사 유적 발굴학자의 일기
이종섶
붓으로, 막대로, 땅을 긁으면 가지런히 드러나는 선사 유적들, 잠자고 있던 역사가 햇빛을 본다 잠자리에 누우면 등을 긁어달라는 아내, 원하는 곳을 긁어주면서 천년의 사랑을 발굴한다
긁지 않고 파내는 건 죽음과 파괴를 뜻하는 것, 가려운 곳이 많아 도처에 긁어달라는 소리 들리고 애원하는 몸짓 보인다 모든 싸움은 긁어주지 않아서 생긴 부스럼, 가려운 자들이 많은 시대는 불행하다 긁어주는 손이 딸려 신음 소리 들린다 긁어주는 사람이 사라져 땅속에서라도 긁어주기 바란다
긁어야 하나 긁어주는 사람이 없어 마음의 병이 도진다 신문과 방송이 대신 긁어주나 시원하다는 착각만 심어줄 뿐이다 가려운 곳만 긁어주려 돈을 긁어모으는 점쟁이들, 어떻게 하면 일확천금을 모을 수 있는지 안다 한번 긁은 곳을 더 긁고 싶게 만드는 족집게 무당들, 가면을 쓰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세상만사 순리가 그러하듯 겨울을 긁어 봄이 오고 밤을 긁어 아침을 맞이한다 별의 등을 긁어 빛이 나고 바람의 등을 긁어 세상이 돌아간다 뿌리가 흙을 긁고 잎과 꽃이 공기를 긁는다 햇빛과 달빛이 지구를 긁고 지구는 다시 우주를 긁는다
순리를 역행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 깊은 밤 돌아눕는 아내의 등을 긁으며 내일의 선사 유적 발굴을 계획한다
―《생명과문학》 (2022년 / 겨울호)
이종섶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 「책장 애벌레」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물결무늬 손뼈 화석』 『바람의 구문론』 『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이 있으며, <수주문학상>과 <시흥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