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기독교역사연구회 31회자료(090413) 전원곤 장로 나의 고향 평북 선천(宣川)의 기독교
들어가는 말 강화 기독교역사연구회 발표회에 참석 할 때 마다 나는 몹시 부러웠다. 발표자나 듣는 이 모두가 지금도 바로 자기가 출생한 이 고장에 살면서 선진들의 이야기들을 직접 들려주니 얼마나 실감나고 보람된 일인가. 나는 아득한 초등학교시절에 이미 고향을 떠나 고향에 대한 향수나 별 추억꺼리도 없고 이제는 갈래야 갈 수없는 금단의 땅이 되고 말았으니 그저 궁금증 만 더해질 뿐이다. 그러나 내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좀 흥미를 가지면서 우리고향 선천이 근세에 와서 교계나 교육계, 나아가 독립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창기지만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있었고 거기서 전국총회를 두 번이나 열렸고 특히 선천 읍의 경우 대표적인 두 교회(남,북교회)의 등록교인수가 5,000명 인구의 절반이 넘는 2,700명에(북한교회사) 이르러 선천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평북에서는 두 번째 큰 도시이고 이렇게 전국적으로 비중 있는 기독교 중심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천 출신중에서 3·1운동 33인중 한 분등, 많은 독립운동가와 일개 지방소도시의 중학교에 불과한 신성학교에서 해방 후 초대 서울대총장(주미대사)과 연세대총장(문교부장관), 경성전기사장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을 또한 확인 할 수 있었다. 1911년 8월, 일제 총독부는 양전백, 최병헌, 이상재 등 29명의 당시 한국 교인들의 지도자들을 일본에 초청 했다. 환영회 석상에서 선천의 양전백 목사가 대표로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사는 선천이란 고장엔 인구가 3천명 가령 밖에 안 됩니다. 인구의 5분의4가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5분의 1인 비신자는 대부분 일본사람입니다.”라고 선천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이번에 나는 우리 고향의 전반적인 것을 파악키 위해 개괄적인 것을 다루다보니 너무 광범위하고 복잡하여 정리가 잘 안 되었다. 그러나 점점 흥미가 생겨 기독교 역사뿐 만 아니라 일반역사, 지리, 인물 등 관심분야를 광범위하게 접근하게 되었다. 또 다시 발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주제를 가지고 세부적으로 들어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하간 저에게 감히 이렇게 발표할 기회를 주신 회장님과 여러 회원님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더욱이 나의 사수되는 황원준 장로님을 따르자니 너머 벅차다. 우리 목사님이 수난 주일에 좀 굶으며 고통을 나누라 하셨는데 나도 수난주간 동안 모든 것을 전폐하고 이 원고를 작성하느라 내 나름대로 고역을 치렀다. 또한 고향과 뿌리를 점점 잊어가고 있는 후세들에게 이렇게 정리하여 전할 수 있게 되니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마치 큰 숙제를 끝마치는 기분이다.
1. 나의 고향 선천의 연혁 1.1 고조선의 영역 우리 민족이 최초로 건국한 나라는 단군 조선 이다. 1,000년간 지속 후, 이어서 기자조선, 위만조선에 이어 BC108년 한 4군이 설치될 때까지 주로 한반도의 서북해안 지방에 우리나라 고대의 부족국가가 형성 되어 있었다. 대동강 유역이 그 중심이었는데 선천군도 이 영역의 일부였다. 1.2 고조선의 변천과 선천 BC300년경 기자조선은 중국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요동지방을 상실하고, 남하하여 청천강을 경계로 삼게 되었다. 얼마 후 진나라의 중국 통일에 이어 한나라가 건국되는 등 급변하는 정국에 밀려 중국 북부에 있던 민족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요동에 있던 위만이 이끄는 한 부족이 북방으로부터 조선으로 들어와 BC190년경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침략을 받아 건국 100년이 안되어 BC108년에 위만조선은 무너지고 한 4군이 설치되었는데 선천은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 1.3 한 4군과 고구려 1) 한 4군과 선천 BC108년 한 나라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낙랑군을 비롯한 한 4군을 고조선 영역에 두어 통치하게 되었다. 전, 후 한 나라의 교체 등 중국 본토의 왕조가 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에서도 낙랑군만은 400여년이나 명맥을 유지하여 중국의 전초기지로서, 또는 한반도 남부와 고구려 세력이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문호의 구실을 담당하는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2) 고구려와 선천 서기 312년 고구려(BC37~AD668:705년간) 미천왕(15대)이 한반도에서 420년간 존속하였던 한 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게 되자 선천군은 고구려의 영토로 되었다. 당시 이곳을 안화군으로 불렀다. 1.4 신라시대와 선천군 당과의 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BC57~AD935:56대,992년간)는 문무왕 11년(671년)에 평양성을 함락시켜 당을 축출하였다. 한편 당은 황후인 측천무후가 전권을 쥐어 내정이 소란하여 677년 평양도호부를 당의 요양으로 이동하였으며, 735년에는 신흥 발해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대동강 이남의 영지를 신라의 영유로 승인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100여년 후 신라가 왕건에 의해 서기935년 멸망하였는데 당의 패망 후 28년째 되는 해이다. 그간 선천은 고구려 유민의 활거지로 정치적 공백상태에서 버림받은 땅으로 내려오다, 발해의 전성시대에는 압록부 또는 조공도에 영속케 되었다.
1.5 고려시대와 선천 고려(918~1391:413년간)가 신라에 이어 건국하여 개경에 도읍한 뒤, 평양에 대도호부를 두고(918년) 서경으로 승격시켰으나 이때의 영역도 통일신라 때와 같은 청천강 선에 머물렀다. 1) 서 희 의 강동6진 수복(거란 1차 침입) 고려 성종 12년(993년), 발해(699~926:227년간)를 멸망(926년)시킨 거란이 침입하여 청천강을 도하하여 안융진에 임박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내사시랑 서 희를 시켜 거란의 수장 소손녕과 정치적 절충을 벌리게 하였다. 서 희는 친조와 거란의 연호를 쓴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성립시켜 거란 군을 회군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란과의 교통로의 확보를 구실로 청천강 이북의 영유권을 인정받아 우리의 영토를 일거에 압록강까지 확장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강동6진의 수복이며, 이때 통주(선천)를 포함한 흥화진(의주)에서 곽주(곽산)까지 수복되었다. 2) 강 조와 선천(거란 2차침입) 고려 목종12년(1009년) 서북면 도순검사였던 강 조 는 김치양과 목종의 모후(천추태후)를 숙청하고 목종을 살해하여 폐위시킨 다음, 현종을 옹립하였는데, 그해(1010) 거란의 성종은 以臣伐君(신하가 임금을 치는 반역행위)을 문죄한다는 명목으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하였다. 이를 맞아 통주(선천) 청강 부근에서 싸우던 강조가 패사하였고, 그 후 개경까지 점령되었다. 조정에서 하홍진을 보내어 담판에 임하게 하였다. 거란은 국왕의 親朝와 강동6진의 환부를 요구하고 물러났다. 3) 양 규와 쑥 고개 흥화성(의주) 별장 양 규는 거란의 2차 내침 시 자기 성병과 통주(선천)성병의 지원을 받아 적의 퇴로를 막아 거란 군을 쳐부수어 강 조 의 통주 참패를 설욕코자 하였다. 양 규는 선천 쑥고개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적의 귀로를 노리고 있다가 현종2년(1011년)정월19일에 석현에 이르러 3,000여를 격살하였다. 한편 적의 선봉은 구주가도에 들어섰다가 구주성 별장 김숙흥의 기습으로 만여의 군사를 잃고 패주하였다. 이들 양 규와 김숙흥의 군사는 28일에 쑥 고개에서 적의 선봉을 기습, 천여 명을 베었으나 갑자기 밀려든 거란왕의 친솔 주력부대의 공격을 받아 분전하였지만 중과부족으로 전 장병과 더불어 전사 하였다. 4) 우리 田씨 村부락과 쑥 고개 ‘담양 전씨 선천파 세보’에 의하면 우리 원적지,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田村부락을 ‘쑥고개(艾田峴)’파로 기록되어 있다. 잔인한 적은 양규가 전사한 이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인적이 끊기고 쑥만이 자라게 되어 이때부터 이곳을 ‘쑥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여기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거란 군에게 멸족 당했단 말인가? 이를 규명키 위해 우리 田씨의 선천 정착 연대를 알아보았다. 결론적으로 쑥고개 사건은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일어났던 일로 우리 선조들은 그 후 약 500여년이 지난 이조 시대에 이 쑥고개에 정착하였으므로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정착사를 요약하면 우리 田씨는 전득시(고려인종8년,1130~강정1년,1212)가 담양에서 창시한 후, 고려말 서북방 이주정책에 의하여 우왕8(1382)에 전봉우(9世)가 과천에서 강계로 이주하여 서북방 국경선의 개척자가 되었고, 전덕룡(13世)이 이조 초에 좀 더 따듯하고 비옥한 선천으로 남하하여 13곳의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그 중 전영록(18世)이 우리원적지에 정착하여 비로써 쑥고개파 田씨인 나의 직계 조상이 되셨다.(필자 31世) 우리나라 영토를 실질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선으로 확대시킨 것은 이조 세종대왕(1418즉위~1450)때에 이르러서이다. 6진을 보강하고 세종15(1433년)에 자성군을 신설하며 각도의 야인들을 강계로 많이 보내고 남아있는 여진족을 포섭하는 등, 적극적인 안정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5) 강감찬의 귀주대첩(거란 3차 침입) 고려 국왕의 친조가 실현되지 않자 거란은 현종9년(1018년)에 소 배알이 10만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왔다. 이 때 상원수 강감찬은 개경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는 거란 군을 귀주(정주)에서 맞아 이를 잔멸하였다. 거란은 그 뒤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고려도 국력이 쇠진 하였으므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어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끝내는 동시에 요(거란)와 화친을 맺게 되었다. 1.6 기타 선천의 역사기록 1) 몽고군의 침입 고려 고종 18년(1231년) 선천의 관부는 몽고병란을 피해 인천 영종도에 들어갔다가 강화가 성립된 원종 12년(1271년) 40년 만에 섬에서 나왔다. 2) 임진왜란 이조 선조25년(1592년)에 일본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선조는 4월 13일 경복궁을 떠나 5월 18일 선천에 당도하였다. 당시 선조는 이곳 선천에서 처음 명장을 만났다는 설이 있다. 또한 행주산성 싸움을 비롯하여 진주성 싸움에서도 선천 사람들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기록들이 남아있다.(정유재란 1597~1601) 3) 후금을 토벌키 위한 명의 원병요청 광해군 8년(1616년) 명의 요지를 공략하는 후금(후, 청)을 토벌하기 위한 원병을 명은 조선에 요청하여 13,000명의 원군(도원수 강홍립 )을 편성하여 요동으로 출정시키게 되었다. 이때 선천부사 김응하를 포함한 선천군 진보에서 수군들이 많이 참전케 되었다. 3만 여의 명군이 심하의 부차령에 이르렀을 때 적의 기습을 받아 일시에 전군이 궤멸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선천부사 김 문하를 위시하여 많은 조선의 원병이 전사하였다. 이때 선천 수병의 전사자는 337명이 넘었다고 한다. 4) 정묘호란과 선천군민의 용전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친명반청을 명백히 하니 청 태조는 광해군 폐위를 구실삼아 5만 대군으로 인조 5년(1627년)에 침입하였다. 조정은 더 이상 대전할 수 없어 청의 요구에 순응, 강화조약을 맺고 회군, 철수 시켰다. 이 와중에서 선천부사 기협이 능하 산성에서 여러 군수와 더불어 청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한 가족, 9명 모두가 바다에 몸을 던진 절의충신, 계지문(선천태산면 출신)이 있고, 선천 군민 1,000여 명 중 부녀자만 검산 굴속에 들어가 있게 하고 나머지 장정들을 모아 적을 쳐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지휘자들 중, 田세록, 지득남 등 8명을 월봉 8의사로 불렀고 조정에서 포상과 벼슬을 내렸다. 5) 병자호란과 선천 인조가 청나라와 단교하고 계속 通明정책을 쓰므로 인조14년(1636년) 청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일주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왕이 피난 간 남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수성 45일 만에 왕은 삼전도(송파)에 나가 청 태종 앞에 항복을 하였다. 청의 양 호란의 2회에 걸친 침입이 있었을 때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명군이 주둔하였는데 이들의 약탈과 노략질은 본 도민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이 의주나 선천등지에 출몰하면서, 금나라 사신을 습격하여 그 때마다 금은 군사를 청북지방으로 출병시켜 이곳 주민들이 난리소동을 피우고 피난 가는 일이 빈번하였다. * 청강의사와 병자호란 병자호란 시 선천부사 민응한은 田세록을 병방군관 겸 좌 영장으로 하고, 지득남을 우영장으로 하여 거산성에 들어가 수성하게 되었다. 그 때 적의 기병이 철수 회군하여 청강 벌판에 주둔하였다. 이 때 부사는 좌우 영장 등으로 하여금 매복 기습케 하여 적을 패퇴시켰다. 이때 천여의 포로가 된 부녀자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조정에서는 상을 내리고 이들을 청강의사와 능한의사라 불렀다. 6) 임경업과 선천의 검산성 인조2년(1624년) 평안병사 이 활이 모반하여 서울을 침입, 점령하였으나 임경업이 참가한 관군에 의해 반군을 소탕하였다. 그 때 용산의 금은보화와 귀 서적들을 적도들에게 빼앗겼다가 임경업 형제에 의해 도로 찾아 무사히 강화로 보내져, 이로 인해 공신이 되었다. 임경업은 인조 8년(1630년) 평안감사였던 민성휘에 의해 중군영장으로 임명되었다. 감사는 선천군의 검산성이 피폐해져 임경업을 검산성 방어사로 임명하여 성을 다시 수축케 하였다. 한편 가도에 투항을 가장하여 있던 금군들이 육지로 도망쳐 나왔으나 임경업의 군사에게 모두 잡혀 옥에 가두게 되었다. 그런 참에 금군이 가도의 내란을 핑계로 자국인의 구출을 위해 금군 6,000이 몰려들었는데 임경업이 300여명의 금군을 내어주어 그들을 곱게 회군시켰다고 한다. 병자호란이후 임경업은 왕명에 의해 청의 지원병으로 요동반도 일대를 진격 중 명군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조정에서는 삭탈관직하게 되었다. 또 명에게 보내는 밀서가 발각되여 임경업은 체포되어 심양으로 압송 도중, 탈출하여 명으로 망명하였으나 명군이 청군에게 모두 항복하여 결국 임경업도 청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 후 고국으로 압송되어 김자점의 모진 고문으로 인조24년(1646년) 향년 56세로 옥사하고 말았다. 7) 홍경래 난과 선천부사 김익순 세도정치하의 부패, 3정의 문난으로 농민의 동요와 반항의 기세가 날로 높아가고, 옛 부터 서북인을 천시하여 높이 등용치 않는 ‘서북인 기색(?塞:해할기,변방색)’이 불평의 근원이 되어 반발하는 기운이 차츰 높아졌다. 그리하여 관서 각지의 관속을 포섭하여 100여명의 지도급인사와 광부, 농민으로 구성된 5,000여의 군사를 편성하였으며, 일부 송상(개성)의 군자금 조달을 얻어 순조 11년(1811년) 12월 18일에 본거지인 가산 다복동에서 무장봉기가일어 났는데 이것이 서북도민의 홍경래 란이다. 선천부사 김익순(김삿갓의 조부)은 검산성으로 도망하였다가 22일에 홍경래의 북군 600여명이 선천을 점령하여 항복을 재촉하니 성을 나와 항복하고 말았다. 다음해 정월 15일 관군의 삭주 병에 의해 선천이 수복되자, 김익순은 홍경래의 모사였던 김창시의 암살수급을 사서 정주의 본영에 바쳐 자신의 죄과를 사면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밝혀져서 도리어 포박 되여 서울로 압송, 다음 해 3월 9일 서울 서문 밖에서 참수 되었다. 이에 앞서 선천의 별장이었다가 홍경래에 가담한 최봉관도 2월 6일에 처형되었다. 관군이 선천을 수복한 후, 나의 고조부(전승념)가 선천 좌수로 새로 부임하여 반군에 투항한 김익순을 체포하였다는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에게 종종 들어 왔다.(‘나의 고조부 선천좌수’ 및 미 하바드의 종신교수 김남선의 ‘조선의 홍경래 란’ 참조) 한편 정주성에서 농성하던 홍경래 군은 마침내 4월 19일 관군에게 함락당할시 전사하고 나머지 반군과 함께 성에 거주하였던 민간인 까지 2,000여명을 참살하였다. 일제 때 발간된 평북도지에 의하면 홍경래 란에서 죽은 도민의 수가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그 당시 본도 전체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로, 다소 과장된 수자 라 하더라도 여하간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선천의 지리 2.1 위치, 면적 및 지세 1) 위치 선천은 평안북도 서군해안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신미도를 비롯하여 홍건도, 접도등 산재한 많은 도서로 형성 되어 있다. 동쪽은 동래강을 경계로 정주군에 접해 있고 북쪽은 락히산과 향산령, 부흥령을 경계로 구성군과 인접하고, 그 북부는 문수산, 자운령을 경계로 위주군과 인접한다. 서북쪽은 입봉을 비롯하여 영암산을 경계로 철산군과 인접하여 청강의 하구에서 철산반도의 돌출부와 서해에 만곡부를 이루고 있다. 본 선천군의 남북간 최장거리는 36km 이고, 도서를 포함한 남북간의 최장거리는 59.1km 이다. 동서간의 최장거리는 27.2km 이다. 2) 면적 선천의 총면적은 641평방km이고 신미도는 면적이 52.9평방km이다.(참조: 강화군 전체 411.27평방km, 교동46평방km) 3) 산악 락히산 882m, 검산 345m, 대목산 349m, 가물남산 495m를 포함하여 26개의 산이 있다. 4) 현령 자운령 630m를 포함, 11개가 있고 고개는 부시재 고개, 수청 고개를 포함 9개가 있다. 5) 평야와 제방 청강평야, 고군영평야, 길량평야, 가물남평야를 포함 28개의 평야가 있으며, 청강제방, 당 모루제방, 가물남제방, 길성제방을 포함 19개의 제방이 있다. 6) 하천 동래강, 청강, 대서강, 월천강, 대동천, 고읍천, 보강천, 굴강 등 8개가 있다. 7) 도 서 선천군의 서남해안과 연안 및 신미도 부근에는 30여개의 도서가 널려 있다. 주위가 500m이상의 도서는 12개나 된다. 2.2 인구 1) 주민의 기질 평안도 사람의 기질을 일러 猛虎出林이라고 한다. 이는 사리판단이나, 의식구조가 적극 적이며 진취적인 기상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선천군은 고구려에 속한 한 지방이었고 씩씩한 고구려 무사들의 활동무대였다. 이후 한 때 청강 이북지방이 버림받은 땅으로 방치되다가 고려 성종 때 수복되어 발해의 유민을 중심으로 새롭게 개척되면서 어엿한 우리 강토가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외침 속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거란족과 싸우면서 옛터를 지켜냈다. 이조시대에도 변방의 접경에서 무수한 전화를 딛고 국토를 보전하면서 생을 영위하여야 했다. 조정에서는 백성의 생활보다도 변경의 수비에만 급급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서북인 기색(?塞)의 차별대우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터전을 지키면서 삶을 개척해야 하였으므로 일단 유 사시에는 집단의식이 강하게 발동하여 단결하였으며, 신명을 바쳐 앞장서는 진취적인 적극 성을 숭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기주의나 계급의식보다는 문벌과 지체를 초월한 이타작인 평등주의적인 인심과 풍습의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다. 더욱이 개화기를 전후하여 선천군이 기독교의 선교거점으로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부를 정도로 전도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일찍부터 서양문물과 신교육이 도입되면서 평등주의적 민주화 경향이 새로운 의식구조로 등장케 되었다. 잔악한 일제의 식민지의 질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 세차게 일어남 에 따라 빈부나 귀천반상(貴賤班常), 적서(嫡庶)의 관념은 더욱 희박해지고 민족단결로 승화되었다. 2) 주민의 구성과 동태 신증동국계지승람(1530년)에 보면 선천에 거주하는 주민의 성씨는 9성으로 기록(田 씨 없음)되어 있으나 철종5년(1836년)의 선천읍지에는 22성(田씨 포함)이 나열되어 있다. 융희원년(1907년) 평북도지에 보면 전씨는 태산면 길성동, 동면 노하동, 심천면 마성동, 인두동에 집단 지역을 이루고 있다. 같은 해 군의 인구동태는 총8,124호에 총인구는 32,268명이었으며, 면별로는 10개면에서 산면이 1463호 5,094명, 남면1,051호 5,091명으로 가장 많다. 우리고향 태산면은 705호에 2,900명이다.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수청면 가물남동에 연안 차씨가 217호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남면 삼봉도에 죽산 박씨가 210호, 동면노하동에 담양 전씨가 178호, 태산면 길성동(나의 원적지)에 담양 전씨가 150호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1943년도 조선통계연감에 의하면 선천군 총 인구는 17,277호에 99,638명으로 집계 되어 있고 최근 월드비죤 발표에 의하면 1997년도 현재 선천(읍?)은 100,893명의 인구 가 살고 있다고 한다.
3. 선천의 행정 3.1 행정구역의 역사적 변천 선천은 본래 고구려 영토로 안화골이라 불리어 왔으며, 치리하는 관청이 있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심천면에 고군영동이라 하여 오랜 옛날부터 고유한 지방 명으로 전래되어온다. 고구려시대 중엽부터 압록강하구를 통해 수도인 국내성까지 필요한 물품이 중국과 교역되는 문호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선천도 이러한 교역과 조달지역의 일원이었음이 분명하다. 또 고구려가 평양에 천도한 후에도 중요한 변경의 요충인 요동과 통하는 길목을 이루는 요지였기 때문에 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주거하였음은 사실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한 때 당에 의해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어 청북지방이 잠시 당에 귀속되기도 하였으나 발해 전성시기에는 압록부 또는 조공도(朝貢道)에 속하게 되었고, 발해가 멸망한 다음에는 이들 지방은 오랫동안 여진의 잡거지로 방임되어 왔다. 3.2 고려의 행정구역과 관제 현종8년(1018년)에 4경에 4대도호부와 8목, 56주, 28진, 20현으로 개편함에 따라 군, 현의 이름도 고쳤다. 이때 통주(선천)에는 방어사와 판관이 있어 군사와 행정의 임무를 맡아 보고 있었다. 현종21년(1030년) 선천군은 군사면에서 북계 안화도호부에 속한 진보로써 통주성에 진장을 두었고, 군현의 이름을 선주로 고쳐 관청을 지금의 자성 이남 목사대와 고읍부근으로 옮기게 되었다. 원종 11년(1270년) 서북병마사의 기관이었던 최탄은 무반정권 타도를 구실삼아 서북면 60여성을 들어 모반하였다가 여의치 않아 몽고에 항복하였는데, 몽고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비령 이북의 땅을 빼앗아 몽고(원)의 영토로 삼게 되어 선천군을 비롯한 서계가 이들의 속령으로 되었고, 서경에는 몽고의 동녕부가 설치되어 통치하게 되었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그 후 30여년만인 충열왕 34년(1308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고려에 귀속되었다. 3.3 이조시대의 행정과 선천 1) 갑오경장 이전의 행정 태종13년(1413년) 전국 지방제도를 개혁하여 전국을 비로써 8도로 개칭하였다. 세종11년(1429년) 본군은 선주군에서 선천군으로 개칭되어 치소를 고부면 백록동으로 옮겼고, 명종18년(1564년)에 선천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다음해에 선천군으로 강등되었다. 인종원년(1623년) 다시 선천부로 승격하였고, 병자호란 후에는 임반부와 통합하여 치소를 임반역에 두고 6년간 청북수군 방어사가 겸직하였다. 2) 선천군의 수령 1대 조존세(선조18년, 1538년)부터, 60대 田雲祥(영조12년,1736년..영조29년,1753년.3도통어사,교동부사,경기수군절도사), 185대 주석균(1945)에 이르기까지 명단이 선천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3.4 갑오경장 이후의 행정 고종32년(1895년) 총리 김홍집이 ‘지방제도에 관한 칙령’으로 종래의 8도제를 폐하고 23부제를 공포하였다. 관제도 개정하여 읍을 군, 군의 장을 군수로 통일하였으며 각부에는 관찰사를 두었다. 이듬해인 건양원년(1896년)에 전기한 칙령을 폐하고 전국을 13도, 1목(제주), 한성부와 7부, 329군으로 개편하였다. 선천군은 평안북도에 속하였다. 융희원년(1907년) 지방행정구역과 명칭 변경을 공포하여 도, 부, 군, 면, 동, 리 등 각급 구역의 폐기조치, 분합으로 재조정 되었다. 3.5 일제 시대의 행정 평북도는 일제 강점(1910한일합병)초기 도 밑에 1부(의주) 21군의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었다. 1914년 본도는 1부 19군으로 줄었다가 1917년에는 면제를 실시하였고 선천군은 11개면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해방되면서 일제 시 사용하던 분동 명칭(町)을 동(洞)으로 모두 바꾸어 1읍, 8개면 76개동이 되었다.
4. 교육과 종교 4.1 선천의 교육기관 1) 군내 각급학교 (1) 남자중학교 :선천 신성중학교를 포함한 3개교 (2) 여자중학교 :선천 보성여학교를 포함한 2개교 (3) 전문학교 :선천 사범전문학교 (4) 초등학교 (ㄱ) 사립학교 : 명신학교를 포함한 11개교 (ㄴ) 공립학교 : 소화국민학교를 포함한 20개교 (5) 유치원 :영락유치원을 포함한 2개원 2) 명문학교의 연혁 (1) 신성중학 1906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와 양전백, 김석창 목사 등이 합동발기인이 되어 설립. 선천 남교회를 빌려 학생 26명으로 개교. 1906년 미주 북장로교 선교사 위대모가 초대교장 취임. 1909년 미국 자선사업가 휴오닐 부인에게서 $15,000(5만원)을 기부 받아 학교 경영 권이 한인들에서 재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단에 이관됨. 윤산온(맥큔)이 2대 학교장으로 부임하여 교사 신축. 1910년 3학년제에서 4학년제로 바꿈.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시 휴교. 1913년 중등학교과정의 학교인가취득. 1921년 윤산온 교장 강제 추방. 위대모 3대 교장으로 재 취임. 1925년 함가륜 선교사 4대 교장으로 취임. 1927년 학교운영권 이양(미국 북장로파 선교회에서 평북, 의산노회및 미국교회대표에 게). 장리욱 교장 취임. 1928년 신 교사 낙성(현 건물). 1931년 지정학교의 인가(5학년제)를 받음. 1937년 장리욱 교장, 일제에 의해 강제 사직 1938년 최득원 교장 취임, 1941년 순직. 1942년 오 장 교장 취임, 일제에 의해 선천중학교로 개명. 1944년 일인교장 부임. 1945년 오 장 교장 재취임 후 1946년 사직. 해방 후 안양에 신성중고를 재건. (2)보성여학교 1907년 위대모, 노세영, 샤록스 선교사와 양전백목사, 이성삼장로 등이 발기인으로 설 립. 최미례 선교사 교장취임. 1913년 서애온 선교사, 제2대 교장으로 취임. 1916년 10여 년간 일제의 억압으로 인가를 못 얻어 보성학원으로 개칭. 1917~1921년 보성여학교 폐쇄, ‘The Louise Chase Inst. for Women'으로 변경운영 1921년 선천 여자성경학교와 통합, 보성여학교 재 개교. 1922년 사립학교로서의 정식 인가취득. 1928년 선천여자성경학교와 다시 분리 운영. 1935년 교명을 ‘사립 보성여학교’로 개칭하고 3년제의 학칙 변경을 인가 받음. 1938년 서애온 교장 퇴임. 1942년 4년제 선천여자상업학교로 개편. 1950년 한경직 목사와 여러 동창들의 노력으로 서울해방촌에 보성여중고교를 재건. 4.2 기 독 교 1) 선천의 초대교회와 부흥기 1894년과 1904년에 있었던 청일, 노일전쟁은 우리 고향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조시대가 퇴조하면서 봉건주의의 구질서도 붕괴되었고, 개화의 신풍조와 더불어 문명의 빛은 스미어들고 있었다. 선각자들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드리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가 서양문명의 전부인양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대중들은 외국선교사들이 전하는 종교에 다수 귀의하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평안도 전역에 널리 퍼지고, 신도 수는 국가의 위기가 높아 갈수록 더 증가되고 교육열도 따라서 가세되고 있었다. 1896년에 노효준과 다음해인 1897년, 나병규가 평양에서 최초로 신자가 되어 고향 선천으로 돌아와 향우인 조규찬의 협조를 얻어 전도에 나선 것이 선천에 기독교를 전파케 된 계기가 되었다. 불과 수개월에 13명의 남녀신도가 입교 하게 되었다. 당시는 예배당이 건립되지 않은 때이고 남녀의 유별이 엄격했기 때문에 이두찬 집에서는 여신도가, 이창석 집에서는 남자들이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그 해(1897년) 성탄연보금 600원을 기금으로 석장동에 예배처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다음해 여신도 김기반 여사의 800량(80원)으로 천북동에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선천읍 북교회가 서있던 장소이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평안북도에 전도의 전략적 기지로 교통이 편리한 선천읍을 그들의 주거지로 정하고 1901년에 위대모가 와서 정착함으로써, 선천이 평북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초기 교계 지도 인물로 양전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본래 유생이요, 서당 훈장으로 만주로부터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된 분인데 위대모의 조사가 되어 인근 각지에서 전도하다가 위대모와 같이 선천에 이주하여 북교회를 돌보게 되었던 것이다. 선천 인근 각 군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감을 느껴 시내 교회 유지들이 중학교를 설립하기로 합의를 보고, 전일 석잠동 예배처 건물을 교사로 정하고 신성중학교를 건립하니 주도인물은 양전백, 김석창 목사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1909년과 1910년에 각각 9인, 모두 18인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모두가 한인 신도들의 애국심과 신앙심의 결정이었다. 1909년 윤산온이 신성의 학교장이 되는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단에서는 휴오닐부인에게서 15,000불을 기부 받아 본격적인 신성학교의 부흥 발전에 기여 하였다. 이 신성학교의 존재는 선천의 기독교부흥의 진원지가 되었고 나아가 독립운동의 발원지가 되었으며 큰 인물을 배출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 2) 선교사업과 노회 선천군은 북미장로교파의 선교구에 속하여 계속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1912년에 선천읍 북교회(2,000명수용)에서 평북노회가 창립되었고, 여기서 강계, 용천, 평동노회가 발전 분립되었다. 그래서 평북노회 주역은 이웃 철산군과 구성군 영북 각 면 구역내의 교회들로 망라하게 되었다. 1941년도 집계에 의하면 81교회, 목사 27명, 장로 153명, 교인총수는 2만 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천 읍에서 전국장로회총회(남교회: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예배당)를 2회나 개최한 것을 비롯하여, 전구적인 집회가 수다했다. 선천의 남북 두 교회의 등록교인은 5,000명 인구의 절반이 넘는 2,700명에 이르러 선천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울 정도가 되었다.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신성중학(1906년), 보성여학교(1907년), 성경학교등 교육사업에 힘쓴 결과 일반인에게 새로운 사조와 더불어 종교적 신앙심으로 받아들여지게 된것이다. 또한 선교사업의 하나로 미국인에 의한 종합병원 규모의 미동병원(평북지역에서 제일 유명)이 개설되어 운영되었으며, 1919년경부터 선천기독교청년회가 농촌선교를 위해 조직되었다. 이러한 의료기관이나 교육기관은 부대사업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선교활동이었다. 선천 지역은 위대모 선교사와 최미례 여선교사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1940년 마지막 스미스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44년 동안 총 48명의 선교사가 선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5. 독립운동 5.1 105인 사건 일제의 민족말살의 흉계는 한일 합병 다음해인 1911년 11월에 거행되는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였다 귀경하는 데라우찌 총독을 선천 역에서 환송나온 신성교장 윤산온과 악수시 평안북도 지방의 항일인사들이 암살하려는 음모조직을 하고 있다고 조작하여 신민회 간부와 기독교요인 600여명을 체포 투옥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중에서 105인만 유죄 판결했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흉계의 목적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흥사단의 전신)와 유기적인 관련을 가진 기독교 중심인물인 반일지도자와 한민족에 협력적인 배일 외국선교사를 동시에 탄압하자는데 있었다. 그때 선천에서도 100여명이 체포되었는데 그중 신성학교에서 검거된 교사는 9명이고 학생은 30여명이다. 당시의 기록들은 1912년까지 전국적으로 5만 명에 달하는 무차별 검거로 공포정치가 감행되었다고 한다. 이 허구 날조된 음모사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 있는 선교사 대표들이 데라우찌 총독에게 각서를 제출하게 되고, 미국 장로교 외국전도국에서 워싱톤 주재 일본대사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영국 에딘바라 종교회의 상치위원에 진정서를 내는 등 세계적으로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5.2 신민회와 국권회복운동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1907년)하고 일본의 강압에 의해 군대가 해산된 후 전국에서 의병활동을 벌어졌으나 이것도 일본군에 의거 열세에 몰리고, 대한자강회도 강제 해산되자 윤치호, 안창호 등의 주동으로 신민회가 창설되었다. 이 신민회는 조직은 비밀히, 활동은 합법적인 것을 표방하면서 민족주의와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학교를 세워 청소년의 교육에 전력할 것을 강령의 하나로 내 세우고 있었다. 선천의 총지점도 이러한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신민회와 은밀히 연루된 가운데 설립된 기관이었다. 총지점은 이들 학교에 신 교재를 제공하고 교원을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선천에서 문화의 계발과 사상계몽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불운하게도 105인 사건으로 경영주였던 양준명과 김일준이 연좌되어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자 점포가 폐쇄되고 석방된 후 이들이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5.3 전국적인 3·1 운동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강화회의에서 1918년 1월 미국 윌슨대통령이 14개조를 발표하였는데 그 가운데 민족자결주의가 세계의 피압박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국내외의 정세가 독립운동의 시기가 성숙 되가는 가운데 독립운동을 제일 먼저 행동화한 것은 동경유학생들이었다. 최팔용, 백관수 등이 1919년 2월 8일 동경기독교청년회관에서 600여명의 유학생 전원을 모아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가운데 현장에 급거 출동한 왜경에게 60여명이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또 많은 학생들이 속속 귀국하여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의 가슴을 흥분케 하였다. 이와 같이 3·1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국내외에 팽창했던 민족자결주의 사조와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이 직접적인 동기를 조성하였으며, 고종에 대한 일제의 암살설도 반일 감정을 격화시켜 거족적으로 기미독립만세를 일으키게 한 커다란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계 국내외에 넘쳐나는 민족자결주의의 신기운 조성과 더불어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기회를 주시하던 천도교내의 간부들은 1918년 12월 하순, 일본의 조야와 조선총독부에 대해 국권을 반환하는 요구서를 제시하는 한편 미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서도 항구적인 평화를 토대로 한 신세계가 건설되려는 이때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압정 하에 있음을 만방에 호소하여, 국제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국권의 회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천도교 단독으로 일으키는 것보다 외국과의 소통이 쉬운 기독교와 함께 통일된 지도부를 이룩함이 거족적 궐기에 유리할 것이라 여겨, 정주의 이승훈(오산 교장, 33인의 한 사람)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도 그러한 취지에 적극 호응하여 먼저 평안도지방의 기독교 인사들을 포섭하였다. 서울에서 천도교 측과 회동하여 이 운동에 대한 협의를 끝내고 선천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선천에서 사경회에 참석중인 이명룡(민족대표33인의 한 사람), 유여대(의주,대표), 김병조(대표), 양전백(대표) 등에게 서울에서의 회담내용을 설명하고, 이들에게서 찬동을 얻었으며, 평양에서 길선주(대표), 신홍식(대표), 손정도(후, 임정요인) 3인에게도 동의를 얻었다. 다시 서울에서 기독교계통의 청년학생회의 박희도(대표)도 거사에 동조할 것을 확약 받았다. 그리하여 2월 24일 양 교단은 거사에 대한 완전 합의를 보았다. 5.4 3·1운동과 선천 1) 선천의 3·1운동 상황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주동세력이 서울 중심이었으나 선천의 일각에서도 중추세력으로 역할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선천출신의 양전백(북교회목사)과 길선주(평양교회목사)를 위시하여 이승훈과 같이 선천사경회에 참가하던 중 같은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된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등도 물론 기독교인이며 선천 인근 군 출신이었다. 3.1운동 33인중, 장로교 출신 7명 가운데 결과적으로 선천에서 4명, 평양에서 2명, 정주출신 1명이 서명한 것이 된다. 선천은 평북에서 신의주 다음으로 큰 도읍이며 일찍이 선교사가 전도를 위해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신문화의 물결을 타고 많은 신교육기관과 현대 의료시설이 들어와 선진문화에 젖으면서 일제를 배격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민족의식이 한결 고조되어 있던 고장이었다. 따라서 서울에서 3·1운동에 대한 기독교 참가권유를 받은 이승훈이 교계의 중심세력을 참여시키는데 필연적으로 선천을 중심삼아 많은 기독교 인사를 포섭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천읍내의 3·1독립운동의 봉화는 신성학교의 학생들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승훈도 평양과 선천을 중심으로 독립만세 운동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승훈은 홍성익(남교회장로, 신성 성경교사)에게 이번 거사에 신성학교 학생들을 총동원할 것을 부탁하였다. 홍 교사는 김석창(남교회목사)과 동료교사인 김지웅, 양준명이 수차에 걸쳐 회합을 가지면서 시위운동에 대한 준비를 하였다. 홍 교사는 특히 신성 교내준비는 김지웅 교사에게 일임 하였는데 2월 26일 학생인 장일현, 고병간(연세대총장), 박찬빈 및 김봉성에게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한 장을 건네주면서 등사하게 하였다. 이들 학생들은 신성학교 기숙사인 캐롤린 홀 3층 지붕 밑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냈다. 한편 홍성익 교사와 김창석 목사 및 양준명 교사 등은 누차 회의 끝에 3월 1일 오후2시 신성학교의 종소리를 신호로 학생들과 교인들이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정오가 되자 전교생이 집회실에 기도회를 위해 집합하게 되었다. 이때 홍성익 선생이 등단하여 자신의 품에서 태극기(동년11.18상해임시정부전달)를 끄내 자신의 무명지를 깨물어 흐르는 선혈로 ‘대한독립만세’라고 혈서를 쓴 다음, 학생들에게 보였다. 이때 학생들은 일제히 “홍 선생님! 알았습니다.”라고 절규하고 장내는 감격에 넘쳐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마침내 종소리가 울리면서 이를 신호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한 아름씩 안고 거리로 나가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사전에 연락해 두었던 자매학교인 보성여학생 60여명도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 이와 같이 신성학교 교직원 및 학생 150여명과 보성 여학생들은 뛰면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남교회 앞을 지나 북교회를 거쳐 시 중심가로 진출하였다. 이때 시민들은 나누어 받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대열에 가세 합류하였다. 시위대열이 천남동 장터에 도달하니 시위 군중 수는 1,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때 김지웅 선생은 손수레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하였다. 이 선언서는 전날 밤 천도교의 김상설이 서울에서 은밀히 가지고 온 것이다. 선두에 대형 태극기를 든 기수는 강신혁 이었다. 계속하여 시위대열은 선천군청과 경찰서 방면으로 행진하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물론 학생들은 독립가를 높이 부르면서 행진 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1시간 반쯤 경과했을 때 일본군 선천수비대와 기마경찰대가 함께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저지하여 해산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어 마침내 일본 군경과 시위군중은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왜군은 즉각 군중에게 발포하였다. 그리하여 시위대열은 수라장이 되고 기수 강신혁이 흉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정상인 선생과 김하현 학생은 부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시위군중 약 60여명이 검거되었으며 또한 신성학교, 교회 등을 수색하여 더 많은 사람을 검거한 결과 모두 170여명에 이르렀는데 대부분 신성학생과 교직원이었다. 검거된 사람 중 실형을 받은 사람은 33명에 이른다. 3월 3일은 고종의 인산 날이었다. 이날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던 날이다. 일반 시민들도 가담하여 시위군중은 약 3,000명에 이르렀다. 이 때도 40여명이 체포되었으며 그날이후 일요일 이외에는 일체 집회를 금지시켰다. 3월 4일은 읍내 장날이었다. 전날 시위에 자극을 받은 군내 각 면의 주민들은 장보러 옴을 가장하여 3~400명씩 계속 읍내에 집결하게 되었다. 당시 선천 읍의 총 호수는 약 2500여 호에 인구가 15,000에 불과하였는데 이때 군내 각 면에서 모여든 군중의 수는 1만이 넘었다. 이날은 장날이었으나 시가의 점포는 폐문철시하고 노동자들도 파업상태에 돌입한 가운데 모두 시위에 가담 하였다. 만세소리를 들은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들도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급박한 정세가 지속되자 다급해진 도지사가 신의주경비대에 군대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이정도로 선천에서 감행된 시위운동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항일사상이 투철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5월까지 총 17회에 연인원 35,000여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2) 선천 보성여학교의 3.1운동 1주년기념 만세시위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3월1일에는 보성여학교 주동으로 만세를 재현하였다. 당일의 시위는 강기일(윤산온교장의 양녀)과 김성모 교사(105인 안준 지사의 자부, 안병균 교사의 부인)가 주동하였다. 이날의 시위투쟁은 남교회 새벽기도회에 학생들이 참여했다가 끝나 나오는 교인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군중을 이끌고 선천가도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이른 아침시간 이었지만 급보에 접한 일본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강, 김, 두 교사를 체포하였다. 그후 신의주로 압송되어 징역 6월의 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다. 이 사건이 터지자 서울에서 당시 조선독립과 애국지사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던 스코필드 박사가 선천까지 내려와 실정을 면밀히 조사하여 대외 선전자료로 수집하여 갔다. 1920.6.29 선천기독교여자청년회(YWCA)가 회장 김성모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이들은 농촌각지의 교회를 중심하여 기독교선교와 아울러 부녀자들의 사회참여의 기반을 조성하여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려고 한 것이다. 위와 같은 만세사건과 해외독립운동단체와 비밀접속으로 자금조달과 연락활동(김신의)을 계속해 왔다. 또한 지방 순회강연도 활발히 진행하고 1935년부터는 여자체육대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또한 야간 강습소등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와 여성계몽에 주력하였다. 이는 전국적인 기독 청년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이었다. 5.5 임정수립과 활동 3.1독립운동 전후로 망명한 많은 독립지사들이 국권회복의 실질적인 투쟁을 위해 1919.3.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임정은 정부조직과 함께 국내에 聯通制를 조직하였다. 연통제란 지하조직망을 펴서 통신연락과 군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가를 임정으로 보내거나 국내에 잠입하는데 안전하게 보장하는 제반연락 업무를 맡아보는 교통기관 설치가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1919년 7월10일 임정 제1호로 공포 발동되었다. 그 후 신의주 대안에 있는 만주 안동에 교통부를 두어 국내외의 중요한 연락망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당시 임정 안동지국의 교통국장에는 홍성익이 취임하고 차장에는 선우혁이 임명되었다. 홍성익은 신성의 성경담당 교사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8개월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당시 옥중동지 이승훈과 협의 신성학생을 동원하는 총책임을 맡아 만세시위를 주도한 분이다. 시위 후 외경에 쫓겨 바로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안동에서 활약 중 1920년 1월22일 왜 헌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신의주 형무소에서 1월 24일 참살당하니 그때 나이 37세였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선우혁은 신성학교 수학교사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7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그 후 사건의 날조 사실이 들어나 1912년 3월 석방 되었다. 출옥 후 그는 상해로 망명, 조국 국권회복에 매진하던 중 1918년 말경 민족자결론과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여 운형, 장덕수 등 여러 동지들과 협의 국내에서의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성숙시키기 위해 1919년 1월 그와 서병호 두 투사는 국내에 밀파되어 이승훈을 만나 독립운동계획을 세울 것을 협의, 이승훈은 즉시 상경하여 3·1독립만세 시위계획을 추진하였고, 그들은 다시 상해로 돌아가 이광수, 여운형등과 함께 세계 각국에 독립선언서를 발송하는 등 국내와 보조를 맞추어 맹활약을 하였다. 그 후 임정 교통차장, 신한청년단(서병호 이사장)을 조직하고, 상해 대한 거류민단(단장 여운형) 총무, 인성학교 설립, 국민대표, 흥사단 지도위원, 공평사(경제합작운동) 감사를 역임하며 조국광복에 신명을 바쳤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어도 그의 행방이 묘연, 생사를 몰랐다. 아마 왜헌에 의해 극비리에 희생된 것으로 추리된다.
5.6 미국 국회 의원단 내한과 윤산온(매큔)선교사 미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1909년 이대위 등이 국민회를 창설하고, 1913년 안 창호가 흥사단을, 1917년10월 대한인 국민회에서는 박용만이 뉴욕 세계약소국 동맹회에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현실을 호소하고 독립을 역설하였다. 1919년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미 의회에 상해임시정부의 합법성을 주장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도 일본의 대중국 침략을 비난항의하고 이의 시정을 미국에 기대하는 등 국제여론이 비등해지자 미국의회는 그 실정을 조사하기 위하여 시찰단을 동양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국내요인들 마저 접촉을 제지하는 가운데 한국시찰을 마쳤다. 그러나 미국인 선교사 윤산온은 선천 역에서 대한독립승인요청서를 의원에게 전달한바 있다. 그들이 도착한 1920년 8월24일부터 25일까지 서울시내 전상가가 철시를 단행함으로써 무언의 저항 표시를 하였다. 그들이 귀국 후 시찰보고서에는 일본 침략의 현실을 그대로 기득권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독립하기에는 미흡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고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시 미국과 일본이 맺은 가츠라테프트 비밀조약(필리핀과 한국의 식민지 상호 양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다. 5.7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사건 상해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광복군총영 결사대원 임용일 등 3명이 미국의원단이 선천도착 전에 거사하기위해 1920년 6월4일 선천에 밀파되어 신성 중학생 박치곡을 소개받아 협의한바 거사 후, 만주 귀환 비용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 만주로 되돌아갔다. 그 후 거사자금(100원,김응선)을 수령하고 연락한바 시찰단이 한국을 떠난 8월30일 선천에 재 잠입하였다. 결사대가 망을 보는 동안 박치곡이 수류탄을 선천경찰서에 투척하였다. 이로 인해 선천서는 대파되고 그 자리에는 ‘최급경고문’이 4~5매 뿌려졌다. 1920월 9월7일 박치곡은 관련인사들과 더불어 거사 1주일 만에 체포되어 1921년 9월30일 평양감옥에서 모교 신성의 교장 윤산온의 사형 영결기도를 받고 성경을 외우며 찬송가를 부르고 대한민국만세를 외치고 18세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다. 재판과정에서 김병로(전 대법원장) 등 여러 변호사들이 변론을 폈다. 이때 같이 실형언도를 받은 분들은 김성호(신성졸) 징역15년, 김 창석(선천남교회목사) 징역8년 등 9명이다. 임정 결사대원들은 만주로 무사히 도피하였다. 5.8 총독부와 종로 경찰서 폭파 미수사건 미 의원단 내한에 맞추어 광복군 총영이 공작대원 3명을 서울에 잠입시켰다. 대원은 김최명(선천출신)외 3명이다. 거사목표는 조선총독부와 종로경찰서를 일격에 폭파하려 했던 것이다. 8월 21일 최후의 계획타진을 위해 아사원에서 회동 중 왜경의 습격을 받고 전원이 체포되어 대사건이 미수로 끝났다. 그러나 도하 각신문은 이 미수사건의 전모를 크게 다루어 사실이 널리 알려져 큰 충격을 주었다. 5.9 대한 보합단 선천에서의 활동 1920년 3월경부터 활동하던 대한청년결사대를 대한보합단으로 바꾸고 단원 수백 명을 포섭하여 동년 8월 근거지를 의주 동암산으로 옮기고 평북지방의 부호를 방문 82회에 걸쳐 군자금 6,750원을 모집하고 일제의 중요기관을 습격 파괴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20년 10월14일 선천출신 김도원은 경성 부호, 변석연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으로 3만원을 받으려고 혼자 집으로 찾아 갔다가 종로경찰서원과 부딪쳐 총격전 끝에 왜경 3명을 사살하고 도피하였다. 그러나 얼마 않되 왜경에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옥사하였다. 5.10 6.10 만세운동 1926년 4월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한 후 40일이 되는 6월10일 인산일에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세차게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대한독립당 명의의 격문이 선천 금광주 안정식 집에서 발각되었고, 관련 국외 인쇄물의 반입 시 선천출신 김항준이 연루되어 있었다. 또한 경성에서 시위하다가 송치된 선천 출신자는 다음과 같다. 김세진(22세 연전1학년), 김윤근(24세), 최창익(21세 연전1학년) 5.11 선천이 낳은 병인 의용대 대장 선천 출신 김석용은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흥사단에 가입, 상해에서 여러 가지 무력투쟁을 한바 있다. 순종의 인산일(6·10)을 기해 일제요인을 암살하려고 김석용은 병인(1926년)의용대 대대장으로 부하 3명을 이끌고 국내에 잠입하기 위해 상해에서 영국기선에 승선하여 항해도중, 무기류를 은익 휴대한 사실이 영국수상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일본영사관에 인계되어 5년 징역 후 출옥하게 되었다. 1926년 7월14일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였다. 5.12 선천 학생만세 시위사건 1929년 10월30일경 광주에서 조, 일 중학생사이의 집단적인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편파적이고 부당한 왜경의 처사는 그동안 쌓여온 민족차별에 대한 울분을 폭발시켰다. 그리하여 광주고보, 농업, 사범학교 학생들은 가두시위에 나섰고 이와 관련, 왜경은 수백 명의 학생을 체포하였고 이들 중 170여명은 옥고를 치렀다. 이 운동은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계속되었으며 총 194개교에 6만여 학생이 참가하였다. 제일 먼저 동조하여 만세시위를 벌인 곳은 역시 선천이었다. 1929년 11월13일 선천 신성중학과 보성여학교 학생 일동 800여명은 전원 동맹휴학에 들어가고, 양일간에 걸쳐 동정 시위운동을 감행하였다. 이때 왜경과 충돌하여 다수의 중상자를 내고 고두열, 김창시, 유인규, 이춘배, 황종만 등 4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어 왜경의 강압적 지시에 따라 전원 퇴학처분을 받게 되었다. 5.13 선천지방 수양동우회사건 동우회란 흥사단 한국지부를 말하며 안창호가 미국에서 민족독립을 목적으로 세운 단체이다. 나라의 독립은 폭력에 의해 얻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務實力行으로 실력양성과 각계에 민족의식을 계몽하여 공고한 단결이 이루어져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1929년 11월 상해, 서울, 평양, 선천, 안악에 동우회를 설치하여 단원 약 300명을 확보하였다. 회원은 사회에 지도적 입장에 있던 민족주의자로 평양 및 선천에 있어서는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1937년 7월에 왜경은 소위 ‘불은계획’의 확증을 얻었다 하여 평양, 선천 관계자 93명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총 181명을 구속하였다. 이 때 안창호(1938년3월사망)도 서울로 압송되었고 1940년 8월 41명이 실형언도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선천출신 관계자는 백영엽, 장리욱, 주현측등 10명이었다. 다음해 11월 고법에서 무죄를 언도받고, 전후 4년여 만에 동우회 사건은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5.14 선천군 태산면장 총살집행사건 태산면장 김병준은 왜경과 내통하여 그들의 주구가 되었다. 면민들은 역적을 우리면장으로 두는 것은 수치일 뿐만 아니라 타도에 면목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면유지 박 인항, 박규명은 압록강 건너에 주재하던 독립군 결사대와 모의하여 면장에 대한 총살을 결정하게 되었다. 1920년 2월15일 낮에 백운한, 함백일, 이들 결사대원은 태산면(나의 본적지)사무소를 급습하였다. 여기서 면장과 그의 조카인 서기를 독립단과 민족의 이름으로 총살집행하고 군자금으로 749원을 거두어 가지고 귀대하였다. 이로 인해 10명(6명궐석재판)이 대부분 사형언도를 받았는데 이때도 김병로 등이 변호를 담당하였다. 5.15 선천여성의 독립운동 선천은 일찍부터 신문화의 영입과 신교육 덕분에 많이 개화되어 있었고, 종교의 보급과 개화운동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도가 높아 거의 문맹이 퇴치되고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을 계기로 자주적인 항일운동이 대두되었다. 3·1운동 이듬 해, 또 한 번의 보성여학교의 3·1독립 1주년 기념만세사건은 앞서 설명하였거니와 선천이 낳은 많은 여류 독립운동가중 한분을 소개하여 당시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3·1운동시위 때 김신의(보성출신)는 군산면 당공동교회 대동학교 제자들을 인솔하여 선천읍내에 들어와 보성여학교 학생들과 합류, 만세 시위를 벌였다. 현장에서 검거되었다가 석방된 후 지하운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비밀통신을 동지에 전하든가, 인근유지들을 방문, 금품을 모집하여 독립군과 상해임정요원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처녀가 곱게 시집이나 갈 일이지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비꼬는 왜경에게 김신의는 면박하기를 “내가 시집을 가고 싶어도 일제의 앞잡이 노릇하는 너 같은 아이를 날까 두려워 시집을 못간다”고 대꾸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그 후 여성독립지사의 일화로 남게 되었다. 그녀는 또 여성 강연대를 조직하여 폐쇄 직전에 있는 학교를 10여 군데나 부흥시킨 일도 있다. 그 후 상해 임정의 적십자부장을 맡은 바 있는 의사 김성겸과 결혼하게 되었다. 해방 후 월남하여 애국부인회 및 여성전도회 회장등을 역임하였다. 6. 선천의 초창기 대표적인 인물 6.1 김석창 목사 1902(28세)년 선천에서 위대모 선교사의 전도로 신자가 됨. 신성학교 창립에 공헌. 1910년 평양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 받음.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당인 선천 남교회를 설립(1910.8). 1920년 8월 선천경찰소 폭탄사건에 관련되어 8년간 옥고 치렀다. 평북노회장을 세 번에 걸쳐 역임. 1950년 10월 유엔군 철수 시 인민군에게 총살당함(75세). 1963년 3월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 추서. 6.2 방효원, 방지일 목사 부자 1) 아버지 방효원 목사 신성 1회 졸업생, 1916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방 목사를 중국 산동성에 초대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내양성에 남관교회를 세워 중국인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교세가 확장되어 1932년 한국 선교부는 독노회 내양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평생을 외국선교사로 일한 한국교회사의 유일한 외국선교의 개척자가 되었다. 2) 아들 방지일 목사 신성 21회 졸업생, 숭실전문을 마치고 193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후 잠시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길선주목사를 보필했으며, 1929년 학생신분으로 평양 정오리교회를 개척하였다. 방목사는 27세 나이에 중국 산동의 아버지 방효원 목사의 후임으로 갔다. 거기서 다섯 교회를 개척하였다. 청도에 진주한 미군의 도움으로 많은 한국인을 귀국시키고 자기는 남아서 중학교를 세워 교육에 열을 올렸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그들의 강제추방으로 1957년 8월 귀국하게 되었다. 그가 산동선교에 나선지 21년, 한국선교가 시작한지는 45년에 걸친 중국의 선교는 끝나고 말았다. 귀국 후 영등포교회 위임목사로 시무, 197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역임. 2008년 9월24일 장로교 4개 교단이 ‘제주선교 100주년기념 장로교 연합 감사예배’에 98세의 방목사가 “우리가 주 앞에 하나 될 것을 기대해본다”라는 제목으로 격려사를 하였다. 6.3 백영엽 목사 남경 금능 신학교 졸업, 남경중화교회 목사, 왜경에 미움 받아 울릉도 1년간 유배, 1919년 왜적 桂太郞 암살음모 사건에 연좌되어 1년간 복역, 1922년 안병철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 상해 임정에 전달한 협의로 1년간 복역, 1931년 7월 길림 만보산 사건의 한교대표단의 통역을 맡아 왜적의 흉계를 폭로, 재만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년여 복역. 해방 후 선천인민위원장, 평북도민회장에 취임하였다가 월남. 초대 평북도지사, 평북도민회장등을 역임. 1963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 수상. 6.4 백낙준 박사 교회 건축을 위해 집과 전답을 다 바친 백사겸 씨는 갈 곳도, 할 것도 없어 교회를 돌보며 살았다. 그러던 중 그의 됨됨이를 좋게 본 선교사가 볼품없는 그의 아들을 데려다 공부를 시켜 주었다. 그 선교사는 선천 신성중학의 교장 윤산온(매큔)이요, 그 아들은 초대 문교부 장관이요,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정주군1895년생) 박사다. 1913년 신성졸업, 중국천진新학원 수업, 미국 파크대, 펜실바니아대학, 프린스턴대학원, 예일대학원에서 박사학위, 1927년 목사 안수 받고 귀국. 교육의 기본을 기독교적 인격완성과 민주주의 구현에 두고 홍익인간과 실사구시를 도모했다.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 저서로는 한국 기독교역사의 원본이 되는 ‘한국개신교사(1832~1910)’를 남겼다. 6.5 문창모 장로 우리 감리교의 초기 대표적인 장로님(1907년생)이시다. 세부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1931)하고, 해주 구세병원, 평양 홀 기념병원, 인천기독병원, 인천도립병원, 국립마산요양원, 세부란스병원, 원주기독병원 원장을 역임. 국제대학장, 대한의학협회대의원총회의장. 연세대학에서 의학박사 취득. 해방 후 크리스마스 실 발행. 6.6 양전백 목사 26세 때에 기독교에 입교, 모펫에게 세례 받음. 1897년 장로교 전도사가 됨. 1907년 평양신학교 1회 졸업.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 선천 북교회에서 시무, 신성 및 보성학교 등을 창립한 설립자중 한 사람. 양노원, 고아원을 설립. 1911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복역. 1916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되고,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분, 그로인해 2년간 복역. 1934(65세)년 소천.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6.7 장리욱 박사 미국 콜럼비아 사범대학 졸업, 신성중학교 교장으로 취임, 흥사단 사건으로 투옥, 해방 후 서울대하교 총장, 흥사단 이사회장, 주미 전권대사 등을 역임. 6.8 차재명 목사 188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05년 기독교에 입교, 1910년 당시 기독교 명문 선천신성중학을 졸업 후 상경, 새문안의 조사로 봉직, 1912년 장로(31세)에 피택, 교회의 지원으로 1916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 1920년 말에 새문안교회 첫 한국인 당회장 목사로 부임. 이후 차 목사는 21년(1920~1941년)간, 포악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자행되던 형극의 시대에 전 생애를 새문안 강단에 헌신하였다. 차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흥사단 단원이었다. 닫는 말
이번에 우리 고향의 역사, 인물을 조사하는 가운데, 내가 좀 유감스러웠던 것은 그 많은 인사가운데 전멸하다 싶이 우리 田씨 가문의 이야기는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우선 크게 봐서 예수를 외면하였다는 것이다. 교회를 안다녔기에 기울어가는 국가와 민족을 살려야겠다는 그 애절한 마음이 좀 부족했고, 남들은 생명, 재산을 바쳐가며 독립 운동을 하다가 부득이 해외로 망명하여 전화위복으로 선진국에서 새로운 문물과 교육을 받아 해방된 조국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였다고 생각한다. 어른들 말씀에 옛날 고향에서 북치며 돌아다니는 예수쟁이들도 우리 집 가까이로는 감히 못 오고 멀찌감치 동네 어구에서 혼자 북치고 장구 치다가 가버리건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田씨같은 양반가문에게 예수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같이 선조가 선천 좌수를 한, 뼈대(?) 있는 집안은 외래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예배당은 아래 것들이나 다니는 정도로 이해하였는지 모르겠다. 너무 안이한 우리 선조들에게는 구태여 예수가 누군지 알 필요도 없었고 무사태평하여 당시 세차게 불어오는 신사조는 관심 밖이고 다 남의 일로 치부 되지 않았을까. 자고로 부자 3대 못 간다고 하였는데 좌수영감, 즉 고조부로 부터 우리 선친까지가 3대요 나는 4대, 우리아들은 5대이므로 이를 역으로 해석해 보면 나부터는 그 양반, 부자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대에 진입 하였다고 주장하고 싶다. 과거를 깨끗이 회개하고 청산만 하면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기대 해본다. 또 다행히 그런 징조도 보인다. 해방 후 우리일가는 지주계급으로 김일성에게 제일 먼저 쫓겨나 월남하여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다. 나는 고향을 등지면서 과거의 가문과의 인연은 이미 단절 되였다고 본다. 이북에서는 가족 중 한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았는데 해방 후 월남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일가 모두 인가귀도 되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말씀같이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우리는영적으로 새 세대가 되었다. 이렇게 영육 간에 우리가문은 옛것과 단절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나의 일생도 고비고비 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였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나를 스스로 ‘철 늦은 호박’으로 치부한다. 호박 같은 미물도 조금만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도 서둘러 열매를 맺느라 야단인데, 인생의 한풍을 맞고 있는 내가 비록 시간에 쫓기어 호박다운 호박은 못 맺을망정, 행여 못나고 모자란 것이나마 많이라도 거두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것이다. 중도이폐(中道而廢:일을 하다가 중간에서 그만둠)하더라도 한 것만큼은 남지 않겠는가. 어느 노 목사님의 말씀같이 “육체가 닳아 없어질지언정 결코 녹슬게 하지는 아니 하겠다”를 명심하며 새삼 각오를 다진다. -끝- *참고문헌: 선천군지, 신성학교사, 새문안교회100년사, 여명2000년, 한국의 역사(태극), 보성100년사, 담양전씨 선천파세보
전원곤(田元坤) Wongon Jeon 강화텃밭 우 417-832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284-6 (032)937-5287 011-203-1290 *나의 관련 싸이트 E-Mail : jeonwg1290@hanmail.net blog. daum. net/jeonwg1290 행복한실버들 cafe. daum. net/H-SILVER-C 강화도알림이 cafe. daum. net/oldkanghwa 강화도매직영어 cafe. daum. net/HolloEnglish 인천대강화사진창작회 cafe. daum. net/IGF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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