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계신 하나님>
시련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할 때 신자는 어디서 위로를 얻어야 할까? 종교개혁자 루터는 알쏭달쏭한 출구 전략을 가르친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도망가라!”(ad deum contra deum: WA 5, 204,26f. in: Operationes in Psalmos 1519/21)
무슨 말일까? 루터에게 하나님은 두 얼굴을 가진 분이다.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 드러내신(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이 그것이다.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될 것 없지만, 문제는 숨어계신 하나님이다. 루터 말대로 하자면, 숨어계신 하나님은 때론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로선 악마의 얼굴과 구분이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루터는 창22장 강해에서 아브라함에게 닥친 시련을 다룬다(WA 24,379,25). 일명 ‘아케다 사건’으로 불리는 이 단락은 후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대목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문제는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끔찍한 하나님’이란 사실이다. 백 세에 낳은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라는 하나님을 어느 누가 ‘선한 하나님’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이 끔찍한 하나님도 참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루터는 그 끔찍한 하나님을 '숨어계신 하나님', '낯선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숨어계신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을 즐기는 신인가? 아니다. 루터가 관심을 두는 하나님은 그 끔찍한 하나님, 어쩌면 악마의 가면을 쓴 하나님이 아니다. 루터는 신자에게 거기서 도망가도록 촉구한다. 그 곳은 바로 계시된 하나님, 즉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재촉한다. 그래서 언제든지 숨어계신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으로 향하게 하는 발판이 된다. 루터는 이런 식(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시련 당한 그 순간엔 그 누구도 악마 같은 현실을 긍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시련의 한 가운데선 그저 암흑일 뿐이다. 그 때문에 루터는 그 자리를 가능한 빨리 일어서 또 다른 얼굴의 하나님, 계시된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한다. 그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도망가라!’는 루터의 언명은 ‘시련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향하라!’는 뜻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끔찍한 시련은 새로운 의미 체계가 된다. 이것이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만으로’(sola Christus)의 원리이다.
‘그리스도에게로 도망치라!’는 말이 추상적이라고 피식 거릴 수 있다. 그러나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이념적 그리스도를 뜻하지 않는다. 이는 곧 ‘그리스도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뜻한다. 거기서 시련 당한 사람은 서서히 위로를 얻고, 살아갈 힘과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련 당한 이를 외면하거나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세월호의 비참함 가운데 던져진 유가족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할 것인가? ‘그건 하나님의 뜻이니 걱정 말고 툴툴 털고 일어나라?’ 아니다! 시련 당한 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립서비스나 다름 없다. 일단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 슬픔에 동참하며, 함께 만나는 것이다. 회복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그건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그저 그곳에서 우는 자와 함께 진심으로 울 수 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도망가는 첫 발자국 떼기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긴다. 시련의 종류에 관한 문제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시련이 비껴가지 않는다. 기도한다고 해서 시련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앙인에게 시련은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맞서 관통하는 것이다.
특별히 자연재해로 인한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은 우리의 힘으론 어쩔 수 없다. 이 때 ‘그리스도에게로 도망간다.’는 말은 교회 공동체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시련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 확실하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시련도 있다. 악한 정부나 악한 지도자로부터 오는 시련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면을 쓴 악마다. 문제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숨어계신 하나님과 악마를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때론 악당으로 생각했던 지도자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욥기에서 사탄도 역시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의한 시련을 당할 때 신자는 그냥 당하기만 하고 기도하며 현실을 도피하는 게 상책일까?
그렇지 않다. 명백히 불의한 지도자를 만나 시련을 당할 때, 루터는 ‘저항’을 가르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Theologus dicit quod res est). 루터가 악하다고 선언하는 지도자는 색깔이 분명하다. 대교리문답서 십계명 해설에서 나오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자'가 가장 악하다.
예를 들면,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의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고 하거나 사리사욕을 취하는 자들이 악한 지도자이다. 그런 지도자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다보니, 교회와 세상의 공동체는 더욱 우습게 여기면서 입 안에 든 껌 정도로 여기고 씹어댄다. 정치적 사익을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교활한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악한 것들이다.
신학자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악한 지도자가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 분명한 사실을 직시하고 교회 공동체에 있는 사실 그대로 알려야 한다. 이것이 이들의 예언자적 임무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함께 저항해야 한다. 이는 히틀러에 저항했던 본회퍼의 신학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도망’가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저항은 필시 희생을 수반한다. 그렇기에 저항에 동조하고 힘을 보태는 사람을 찾기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악을 알고도 방조하거나 침묵하는 일은 악마의 일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며, 그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어쩔 수 없는 시련(자연재해 등)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견디며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도망갈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명백한 시련(불의한 정부, 불의한 사회 구조, 불의한 지도자, 불의한 언론권력)에는 저항해야 한다.
종교 개혁자가 보여준 신앙적 저항의 자세는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엿볼 수 있다. 루터는 자기의 모든 서적과 주장을 철회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며 이렇게 최후 진술을 한다.
‘지금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내 양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복(承服)시킬 수 없는 한 나는 내 말을 거두지도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여 제가 여기 서 있나이다. 저는 그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아멘”
*3년 전 오늘 글
#단상 #루터 #저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