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어느 한 옛날,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어렸을 적 부모님을 잃고 지금은 작은 시골마을에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불쌍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소년이 6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어느 자그마한 성당으로 소년을 데려갔습니다.
소년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풍경에 두리번두리번 열심히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소년은 성당에 걸린 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은 어머니에게 안긴 아이의 모습이 담겨진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소년은 문득 자신의 어머니가 그리워졌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더 이상 그의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매일매일 성당으로 가 그 그림을 보리라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잠자리에서 감겼던 눈은 더 이상 떠지지 않았습니다.
성당에 걸린 그 그림을 보기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뜨려했지만 그의 눈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그 그림을 볼 수 없었습니다...
*맹인 네로와 그의 친구 파트라슈 이야기...*
"으음..."
온통 암흑으로 뒤덮인 어두운 방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꼼지락거리며 움직였습니다.
정체불명의 물체는 서서히 커지더니 웬만한 성인남자의 덩치만큼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약간 추위를 느낀 듯, 가볍게 떨고 있었습니다.
잠시 가볍게 몸을 떨면서 서있던 남자는
“산책이나 가야겠군...”
하고 조용히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곤 벽에 손을 짚은 채 더듬더듬 방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휘이잉~
“큭, 날씨 한 번 더럽게 춥군...”
밖으로 나온 맹인 남자의 첫 마디였습니다. 그리곤 보이지도 않을 눈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아직... 안 왔구나... 우리 할아버지...”
남자는 밖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요즘들어 기침이 늘은 할아버지... 내가 9살 때, 이 곳에 왔을 때, 처음으로 시작한 연탄배달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감기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쉽게 멈추지 않는 기침에 조금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잠시동안 아무 말 없이 서있던 남자는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눈은 안보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왔던 길입니다.
길을 볼 수는 없었지만 길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한참을 걸었을 때, 남자는 어떤 소리를 들었습니다.
삐거덕, 삐거덕.
할아버지의 리어카 소리인 듯 합니다.
남자는 아까보다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뭐하다 이렇게 늦었어... 할아버지... 몸도 아픈데...”
남자는 리어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리어카 소리가 멈추더니 곧바로 남자를 향해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로야, 쿨룩쿨룩! 빨리 얘 좀 옮기자. 이 추운 날씨에, 쿨룩쿨룩! 얼어죽겠다.”
늙은 남자의 기침 섞인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맹인 남자는 툴툴거리며 더듬더듬 리어카의 뒷부분을 잡고 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또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를 주워 왔나 봅니다...
멍멍~
개 짖는 소리가 저 멀리 공원까지 들려왔습니다.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한 남자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외쳤습니다.
“야, 임마! 파트라슈!”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왠 몸집이 큰 개 한 마리가 그의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왔습니다. 멍멍멍! 언제봐도 반가운지 그 거대한 개는 남자에
게 폴짝 뛰어올랐습니다.
“야! 이... 곰탱아! 니가 날 깔고 뭉개고 있잖아!”
남자의 외침에도 파트라슈는 아랑곳않고 그를 맹렬히 깔고 뭉개고 있었습니다.
이 작은 소란에 공원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잠시나마 만면에 미소를 머금게 되었습니다.
그 중엔 한 젊은 아가씨도 있었습니다.
아담한 체형, 갸름한 얼굴, 하얀 이가 가지런히 보이는 밝은 미소. 누가 봐도 반해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아가씨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 뒤에도 이 아가씨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맹인 남자와 파트라슈 곁에 계속해서 앉아 있었습니다.
남자는 겨우 그에게 붙어있던 파트라슈를 떼어내고 부끄러운 듯 다시 조용히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어떤 아가씨가 앉아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다시 조용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안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의 그림은 너무나도 훌륭했습니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여자는 더 이상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려요?”
갑작스런 소리에 남자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바로하고 툴툴거리며 말했습니다.
“이봐요, 아가씨. 좀 인기척 좀 내고 다녀요. 깜짝 놀랬잖아요.”
여자는 아랑곳않고 계속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맹인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냐고요?”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 당황한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싫지만은 않은 듯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꺼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잠시 그림을 옆에 놓고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를 향해 걸어가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려면 일단 사물을 만져야 합니다. 사물을 만져서 그 사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하고 그림을 그리죠.”
“우와~.”
여자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여자의 목소리에서도 놀라움이 묻어났는지 남자는 쑥쓰러운 듯 웃었습니다.
잠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여자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아저씨. 혹시 저도 그릴 수 있어요?”
헉! 남자는 정말 크게 당황했나 봅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파트라슈 위로 굴러떨어진 것입니다.
파트라슈는 남자가 장난을 하고 있다고 믿고 또다시 그의 위로 깔고 뭉개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순진한 모습에 여자는 그만 깔깔하고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만 웃어요... 갑자기 그림을 그려달라니...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요?”
남자는 얼굴이 빨개진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습니다. 여자는 그를 보며 말없이 웃었습니다.
“그... 그만 가자! 파트라슈!”
남자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파트라슈의 등에 달려있는 손잡이처럼 생긴 물건을 잡은 채로 말입니다.
남자는 보지 못했겠지만 그 이후로도 여자는 그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았습니다.
“후... 진짜 깜짝 놀랐네...”
남자는 길게 심호흡을 하였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젊은 여자가 그림을 그려달라니...
그건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다시 그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는 평소 때와는 달리 밖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고 말았습니다.
“어디 갔다 왔어?”
“잠깐 놀러갔다가요.”
“어디 이상한 곳으로 간 거 아니겠지?”
“제가 애에요? 왜 그런 걸 물어봐요?”
“남자를 만난 건 아니겠지?”
“안 만났어요...”
방금 전, 공원에서 남자에게 그림을 그려달라던 여자와 그의 아버지같은 한 늙은 남자의 대화였습니다.
늙은 남자는 그녀에게 매우 엄격한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일거수일투족을 그녀에게 다 물어보았으니까요.
“절대로 다른 남자 만나지마! 오직 내가 정했던 그 남자를 만나야 돼! 재벌2세에 얼굴 잘생겼지, 성격 좋지...”
또 시작이군... 여자는 생각했습니다.
늙은 아버지가 지금 하고있는 말은 바로 자신의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없는 남자... 사랑을 느끼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남자...
여자는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훌륭한 방이었습니다.
레이스가 달린 침대에 수십개의 화장품이 놓여있는 화장대, 붉은 빛깔로 화려하게 치장된 인테리어,
그러나 그녀는 이런 것들이 모두 지겹다는 듯 침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습니다.
쓱쓱쓱.
“휴, 드디어 다 그렸군.”
남자는 자신의 그림을 만족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이 그림이야 말로 진정 대작으로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었습니다.
비록 직접 그 그림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남자는 오늘도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파트라슈를 만나고 난 뒤, 그리고 그 여자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그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항상 산책을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책을 나가면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붙잡고 그 감촉을 느꼈습니다.
거칠거칠한 표면, 그 껍질에 둘러 쌓여있는 미끈한 나무 속. 혹은 풀이 자란 땅을 밟아가며 그 감촉을 느꼈습니다.
푸른 풀들이 밟혀 나는 소리, 떨어진 낙옆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소리,
그는 자신의 그림에 눈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손을 통해 느껴지는 그 물체만의 감촉, 그리고 자신의 귀를 통해 들리는 특유의 소리를 담았습니다.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데는 5일, 길으면 7일정도가 걸렸지만 그는 결코 지루해하지 않았습니다.
매순간마다 언제나 혼신의 힘을 다해 그 감촉을 표현해 내려 애를 썼습니다.
“또 만났네요?”
그 때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바로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자는 이번에도 화들짝 놀랐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굴러 떨어지는 망신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이번에도 툴툴거리며 답했습니다.
“인기척 좀 내면서 오라고 했죠? 진짜 깜짝 놀라서 죽겠단 말에요...”
여자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번엔 제 잘못 아니에요. 전 분명히 인기척을 내고 왔는데 당신이 혼자 자기 그림보면서 좋아하느라 못 느낀 거잖아요.”
이런, 남자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습니다.
“혹시... 봤어요?”
“네, 물론이죠. 아주 너~무 자랑스럽다는 듯이 보시던데요?”
여자는 짖궂게 그를 놀렸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말에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림 좀 보여줄래요?”
여자가 남자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그림만 살짝 그녀에게 건네었습니다.
“와~! 진짜 잘 그리셨네요?”
남자는 그녀의 칭찬이 나쁘지는 않은 듯 발그레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의 순박한 웃음에 그녀 역시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 아저씨. 혹시 그림 대회 같은 거 나갈 생각 없어요?”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어마어마한 상금을 노리고 전국에서 모이는 고수들의 대회말이에요.
거기 출전해서 1등하면 상금이 어마어마하데요!”
흥분한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저보다 더 잘 그리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전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아요...”
“정말요?”
여자는 뭔가 알고있다는 듯 그를 놀리듯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빈정거림이 느껴지는지 남자는 좀 더 강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거지가 아닙니다.
다만 전 그림이 좋아서 그릴 뿐이에요. 돈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건 그저 상업적인 목적으로 그리는 그림일 뿐입니다.
그리고 전 그런 상업적인 그림은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남자의 약간 화가 난 듯한 대꾸에 여자는 말을 잇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자 남자는 조금 두려워졌습니다.
혹시 내가 화내서 여자가 가 버린건 아닌가?
“좋아요. 만약 아저씨가 싫다면 싫은 거겠죠.
하지만 전 아저씨가 그 좋은 그림솜씨를 너무 묻혀두고만 있다고 생각해서 말해본 것 뿐이에요.
그래도 제가 너무 주제넘었다고 생각된다면 용서해주세요.”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남자가 듣기에는 화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어 정확히 화가 안났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습니다.
“미... 미안해요... 전... 전 그냥...”
그러나 그에겐 돌아오는 말이 없었습니다.
남자는 낙담한 표정으로 파트라슈에게 자신의 몸을 맡긴 채, 집을 향해 힘없이 걸어갔습니다.
“너, 또 그 남자 만나고 왔지!”
“아니에요, 아버지.”
“웃기지마!! 내가 혹시나 해서 사람을 붙여놨더니 역시나더군! 분명히 넌 그 눈병신놈을 만났잖아!”
세상에, 이제 다 큰 딸한테 사람을 붙이다니...
내가 무슨 중죄인이라도 되나? 그녀는 고집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한 이 늙은이를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여자는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약혼녀와 결혼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자기가 좋아하는 그 남자와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생활이.
딸 앞에서 몇 차례 훈계를 하던 고집 센 늙은이는 결국 그녀에게 엄포를 놓았습니다.
“절대 다시는 그 눈병신 놈을 만나러 가지마! 넌 반드시 그 약혼자와 결혼해야 돼!! 그래야 니 인생도 행복해 질 수 있는거야!!!”
그러나 그녀는 결코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시 그를 보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박한 남자에게 자신의 고민을 모두 털어놓으리라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하... 할아버지... 왜... 왜 그래?”
남자는 자신이 짚은 방바닥이 축축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축축함은 물처럼 맑은 것에 의한 축축함이 아니었습니다. 피처럼 걸쭉한 것이 묻었을 때의 축축함...
오래전부터 기침이 멈추지 않은 것이 걱정이 되었지만 그 동안 별탈 없이 잘 살아왔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직감적으로 지금 할아버지가 위험함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파트라슈가 이렇게 울부짖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는 곧바로 할아버지를 업었습니다.
파트라슈는 그가 빨리 달릴 수 있도록 계속해서 짖으며 남자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파트라슈와 함께 달렸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할아버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습니다...
삐~... 삐~... 삐~...
남자는 말없이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아나기를 기도하며... 파트라슈 역시 그의 곁에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기도하듯 고개를 숙인채로...
벌컥!
드디어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왔습니다. 남자는 황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선생님,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그의 말을 이해한 의사는 그에게 결과를 알려주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하지만 최소3개월 정도는 장기 입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연세도 연세거니와 무엇보다도 폐가 더 이상 제기능을 못해서...”
폐... 연탄배달 때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눈이 멀어 도저히 일할 수 없는 남자를 위해 늙은 나이에도 열심히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남자가 일을 해서 할아버지를 살려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남자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만약 내가 병원비를 내지 못해 할아버지를 입원시킬 수 없다면...
남자는 파트라슈를 끌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파트라슈에게 얼굴을 파묻고 숨을 죽인 채 한없이 울었습니다.
“벌써, 이 정도면 오고도 남은 시간인데...”
공원에 벤치에 앉아있던 여자가 하는 소리였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약혼자와 결혼해야하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자, 그 순박한 맹인 남자를 보고싶어 하는 한 여자였습니다.
그녀가 막 낙심해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녀는 보았습니다.
한 마리의 개에게 몸을 맡긴 채, 벤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습니다.
“맹인 아저씨! 어디갔다가 이제 오는거에요?!”
그러나 반가움이 넘치는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침울해 보이는 표정이었습니다.
말 없이 그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은 그는 한숨만 푹~ 내 쉴 뿐이었습니다.
“왜요,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남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 아직 그 대회... 참가할 수 있나요?”
처음에 그녀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기억해 냈습니다.
“네? 아, 그 그림대회요? 네! 물론이죠. 제가 그 대회 책임자니까요. 사실은 그 대회, 저희 아버지가 주최하시는 거거든요...”
남자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런 전국적인 대회를 열 정도면 그녀의 아버진 꽤나 높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그 대회에 참가하게 해주세요...”
“왜요? 상업적인 그림은 절대로 그리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거죠?”
남자는 갑자기 울컥 화가 치솟아 올랐습니다. 물론 궁금해서 한 이야기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그에게는
그저 쓸모없는 참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거 묻지말고 날 그냥 대회에 참여시켜줘요! 지금은... 상업적인 그림을 그려야 할 때니까...”
여자는 이 남자가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별다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이 남자가 그린 그림이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를 감동시켜 둘 사이의 관계를
인정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음... 사람이 정말로 많군...”
“긴장하지 말아요. 당신은 분명히 잘 해낼 거에요.”
“눈도 안보이는 화가가 어떻게 이런 멀쩡한 화가들을 이기겠어요...”
“괜찮아요. 당신은 그들보다 떨어지는게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는 것일 뿐이니까요.”
남자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등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생각하지 말자. 난 우리 할아버지를 위해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 할아버지... 조금만 기다려...
남자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자꾸만 약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하였습니다.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끝나는 순간, 대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대회의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이 광활한 배경을 바탕으로 어떤 것이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잠시동안 생각에 빠졌습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그리는 것이 좋을까...
저 들판에 서 있는 나무를 그릴까? 아니면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을 그릴까? 아니야... 그건 너무 평범해...
그 때, 그의 머릿속에선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에게 처음으로 밝게 다가와 주었고, 나를 위해 이 기적같은 기회를 준 이 여자,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가족처럼 살아왔고 내 눈이 되어주었고, 나의 곁에서 나와 함께 조용히 기도하던 내 친구 파트라슈...
남자는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을 담은 그 그림을...
"크하하하!”
쾌청한 햇빛이 밝게 들어오는 높은 고층빌딩 꼭대기층에서 한 늙은 남자가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이슬이 맺힌 채, 증오심과 분노를 담은 눈빛을 쏘아보내는 한 여자가 서있었습니다.
그녀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거... 아버지가 한 짓이죠... 그렇죠...?”
늙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당연히 내가 했다.”
“왜... 왜 이런 일을 하셨어요... 왜요!”
늙은 남자는 웃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곤 그녀와 똑같이 분노의 기색을 띄며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냐고? 당연히 그 건방진 눈병신 새끼 때문이었지.
빽도 없고, 재산도 없는데, 뭐? 1등을 해야지 우리 할아버지를 살려? 웃기시는구만.”
여자는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공정한... 심사의 기회는... 주셨어야죠...
제가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가족까지 미워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늙은 남자는 이제 분노나 증오의 감정과는 다른 잔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난 네가 그 눈병신 새끼한테 마음을 뺏겼든지 어떤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사람을 시키면 그 자식쯤이야 그냥 죽여버릴 수도 있거든.
하지만 난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없었다.
감히 내 손으로 키워 온 내 목숨같은 딸을 분수도 모르고 접근한 그 쓰레기 같은 놈을 편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그 녀석의 가족부터 차례차례 죽일 생각이다...
그래... 처음엔 녀석의 부모뻘 되는 그 늙은이를 죽일거야... 그리고 다음은 그 녀석의 눈이 되던 그 똥개녀석을 죽일거고...
녀석이 미쳐버릴 때까지... 네가 그 녀석에게서 완전히 정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말이야...”
여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대회장엔 이미 남자는 없었습니다...
그 날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 일주일이 흘러도, 그 남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늦가을이 지나 하얗게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눈덮인 벤치에 앉아 하루종일 그를 기다렸지만 남자는 결코 오지 않았습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그날도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기 위해 아침 일찍, 문을 나섰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저 풍경 앞에... 한 남자가 서있었습니다.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점퍼를 입었으며, 오른손에는 파트라슈에게 달린 손잡이를 꼬옥 잡은 남자...
바로 그녀가 기다리던 남자였습니다.
반가운 기색하나 없는 차가운 표정의 남자는 말없이 그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파트라슈의 등과 연결된 손잡이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어제... 결국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난 이제 여행을 떠나려고 해요...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도 될 곳으로의 여행을요... 파트라슈를 잘 맡아주세요...
그리고... 미안해요... 심사위원들이 다 말해주었어요... 모든 것이... 당신 아버지가 했던 일이라는 것을요..."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를 부르고 싶었고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저 같은 것은 아가씨에게 어울리지 않았어요...
이제 아가씨도... 아가씨에게 맞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말을 끝맺은 남자는 그대로 뒤돌아 걸어갔습니다. 파트라슈는 그를 따라 황급히 달려나왔습니다.
퍽!
깨갱!
남자는 그에게 짖으며 다가오는 파트라슈를 멀리 걷어찼습니다.
“이 바보야! 오지마! 난 나 혼자 여행을 갈거야! 더 이상 아무것도 잃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난 벌써 내가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고, 할아버지를 잃었어! 근데 왜! 너까지 나한테서 잊혀지려고 애를 쓰는거야!”
그러나 파트라슈는 다시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결코 그없이는 살 수 없다는 듯이...
“저리 가! 이 똥개 자식아! 난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파트라슈를 짓밟던 그의 발도 멈추었습니다.
파트라슈는 맨 처음 그를 만났던 그 때처럼, 상처투성이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한마디 말없이 눈발이 휘날리는 풍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그를 따라가려던 파트라슈는 몇 걸음 못가 털썩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그 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걸릴지는 몰랐지만 그는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맨 처음으로 그에게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한 장소, 그리고 그 날 이후 그에게 더 이상 어머니를 보도록 허락하지 않은 장소.
아침 일찍 출발했건만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이제는 해가 거의 질 무렵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추위 속에서 하루종일 걸어왔던 그는 너무나도 지치고 말았습니다.
이대로 그 곳에 가기도 전에 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쓰러지더라도 그는 그 그림을, 어머니를 본 뒤에 쓰러지고 싶었습니다.
몇 번이나 눈밭이 내뿜는 따뜻한 보금자리의 유혹을 받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댕~... 댕~... 댕~...
아, 그는 드디어 도착한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찾아온 바로 그 곳,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를 느꼈던 곳.
바로 성당이었습니다.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성가대들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습니다...
그는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대로 힘이 빠지면 안돼...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서려 애썼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어머니를 느끼지도 못한 채, 이대로 쓰러질 순 없어...
그러나 그의 기운은 이미 다한 듯 했습니다. 아, 이대로 끝인가...
그는 허탈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으려 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멍멍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 역시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 내는 소리인 듯, 매우 약한 힘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남자는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 목소리, 분명 그 목소리는 그가 늘 들어왔던 목소리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곁에 다가온 덩치 큰 개 한 마리... 파트라슈였습니다...
“파트라슈...”
그는 그를 꼬옥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온 것이 너무나 미안해서,
그는 그를 더욱 꼬옥 붙잡았습니다. 파트라슈 역시 그의 따뜻한 품에 안겨 힘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아, 남자는 지금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한없이 넓디 넓은 하늘, 그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있는 그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 까딱하기도 힘들 정도로 무겁게 느껴지던 자신의 몸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높이 하늘을 날았습니다.
더 높이, 더 멀리,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세상의 끝에 도달했습니다.
온통 황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을 지나,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의 밝은 목소리를 지나,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할아버지를 지나, 그는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그의 마음속에서 자리잡은 채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를 보기 위해,
지금껏 굳게 닫혀있었던 눈을...
살며시...
떠보았습니다...
아, 바로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토록 보고싶었고, 그만큼 나에게 그리움을 안겨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머니를 본 순간, 그는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보아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그림을, 어머니를 느끼게 해주는 그 그림이 보고 싶어 온 기운을 다 바쳐 온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저 위에서 천사들이 그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저없이 그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늘 위로 올라가면서 그는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멍멍짖으며 달려오고 있는 파트라슈를...
카페 게시글
인소닷단편소설
[단편]
[책읽는아이]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
책읽는아이
추천 0
조회 75
08.11.16 00:16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