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개봉돼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관객 수 9000명을 채우지 못한 독립영화 '빅 슬립'(김태훈 연출 113분)이 넷플릭스에 올라와 반가운 마음에 감상했다.
거칠다. 남자주인공 기영 캐릭터와 이를 완벽하게 소화한 배우 김영성에 홀딱 반했다.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거칠고 투박한데 누구나 그의 눈동자와 시선에 빠져들게 된다. 영화가 시작한 지 1시간 17분쯤 시작해 1분 30초 정도 똘끼 가득한 욕설을 한바가지 퍼붓는데 그야말로 압권이다. 한국영화에서 이처럼 통렬한 욕을 듣고 시원한 느낌을 받았던 때가 있었나 돌아보니 없었다. 욕할머니 수준의 천박한 욕설과 조롱만 난무했지, 정말 이렇게 찰지고 찰진 욕설은 처음이었다.
지난 4일 유튜브 채널 '매불쇼'에 매주 금요일 고정 출연하는 전찬일 평론가가 '왜 (지난해 개봉했을 때) 안 봤는지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 것'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랬다. 박영성이란 배우는 압권이었다. 새벽 좌판에서 살려고 바둥거리는 생선 같은 느낌을 안겼다. 배우가 연기 잔치를 벌일 수 있게 판을 깔아준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시상하는 부일영화상 남자 신인 연기상이 김영성에게 돌아간 것이 아주 당연하게 느껴진다.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공장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가는 기영이 어느날 집앞 비닐로 두른 평상에 찾아든 가출 청소년 길호(최준우)를 집안에 불러들여 마음을 열어 세상을 살아갈 따듯한 구석을 찾는다는 얘기다. 기영은 병들어 누워 지내는 아버지를 돌보는 새엄마(김자영)가 한없이 불편해 죽은 엄마가 물려준 집에서 화초를 키우며 혼자 지내다 길호를 맞는다. 회사에서는 비용을 어떻게든 줄이려는 사장의 지시를 받고 불법 폐기물과 폐기름을 땅 속에 묻느라 힘겨워하며 세상을 원망한다. 그에게 마음이 있는 듯한 여직원 초은(이랑서)의 눈길 하나 받아내지 못하고 제대로 데이트도 신청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과의 관계를 영 불편해 하기만 한다.
길호는 새 아빠에게 툭하면 두들겨 맞고 욕을 들어 집을 나왔다. 체구가 작은 영범(김한울)이 우두머리 오현(현우석)에게 괴롭힘을 당하곤 하는데 불쌍한 영범이 곤란하지 않도록 오현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어느날 잠만 자고 가라는 기영의 거친 구석에서 따스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오현 패거리가 기영의 집에 들이닥치자 문을 열어주고 만다. 영범이 오현에게 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영은 자꾸 나쁜 친구들에게 끌려다니는 길호가 애처로웠지만 본인도 막막하기 이를 데 없어 갈등하고 속을 태우다 마침내 그 녀석들에게서 길호를 떼내어 집으로 데려온다.
보통의 독립영화라면 불량한 아이들을 가르치려 들텐데, 이 영화의 기영은 욕 한 사발로 모든 것을 대신한다. 마치 너희들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나처럼 나쁜 녀석이 되고 말 것이란 사실을 시전하는 듯 보인다. 날것이다. 살아있다. 생생하다. 어느 독립영화도 갖지 못한 펄펄 뜀, 퍼득거림이 느껴진다. 대다수 관객이 반하는 지점도 이 대목일 것이라고 본다.
알고 보니 김태훈 감독은 문화센터에서 이들 드롭아웃(학업 포기)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호흡했던 경력이 있었다. 집 없이 거리를 떠도는 불량한 아이들 대사가 그들의 언어, 욕설, 표현 방식을 오롯이 전달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태훈 감독의 실제 외모는 기영과 달리 완전히 곱상해 놀라웠다.
노동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지나왔을 법한 열일곱 살, 그 위험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답습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마음의 한자락을 여는 것이 갑갑한 우리 사회의 해독제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기 전, 겁부터 내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독립영화를 관람할 때 일정 몫의 도덕률, 도덕과 윤리에 합당한 내 몫의 답을 들려줄 의무를 느끼는 불편함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연히 길호와 같은 아이를 마주쳤을 때 당신은 집안에 그런 아이를 들일 수 있는가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기영처럼 손에 쥔 것이 별로 없는, 그보다 더 험하고 거친 세상을 경험한 자만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용기를 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싶다.
굉장히 잘 만든 독립영화가 넷플릭스란 플랫폼을 키다리 아저씨처럼 만나는 것이 영화의길호와 기영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은 넷플릭스 자본이 독립영화 제작 단계에부터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지만 김태훈 감독과 이 작품을 계기로 협력의 질적 단계가 높아질 가능성을 발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으로 제목을 왜 '빅 슬립'으로 붙였을까? 마지막 장면이 답이다. 영어로는 숙면, 깊은 잠을 의미한다.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지샜던 밤을 끝내고 퍼질러 늦잠을 자는 기영과 길호의 안식을 상징한다. 아주 현실적인 방법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독립영화를 건져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