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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일본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은 경제 엘리트? 지금의 일본에 필요한 '시대정신'에 대해 생각해 본다 / 12/22(일) / 야후!뉴스 오리지널 THE PAGE
2013년 5월 개정 공직선거법이 시행되면서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이 해금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금년 11월의 효고현 지사 선거에서는, SNS로 난무하는 허실 뒤섞인 정보가, 유권자의 행동을 크게 좌우했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건축가로, 문화론에 관한 다수의 저서로 알려진 나고야 공업대학 명예 교수·와카야마 시게루 씨는 「SNS가 있든 없든, 정치적 혼미의 시대에는 민중의 열광이 생기는 법」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지금의 일본에는 「시대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와카야마 씨가 독자적인 시점에서 말하는 뉴스 에세이의 연재의 최종회입니다.
◇ 시대 정신의 결여
한국은 큰 정세로 미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정치의 혼미가 계속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효고현 지사 선거에서 사이토 모토히코 씨가 복귀해,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 기존의 매스미디어는 SNS라고 하는 새로운 툴이 낳는 정치적 열광을 전해, 그것을 규제하는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어떨까. SNS가 있건 없건 혼미의 시대에는 민중의 열광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대학분쟁의 시대도, 미일 안보투쟁의 시대도, 노동쟁의 빈발의 시대도 정치적 열광이 생기고 언론은 이를 부추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시대의 정치사상이 충돌하는 형태로 민중과 권력이 대립했던 것이다. 이른바 시대정신의 충돌이었지만 SNS로 움직이는 지금의 민중은 개인적 불만을 원동력으로 삼아 일시적으로 몰려든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일본에는 시대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서방국가에 공통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는 문명 개화라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전후 일본에는 부흥 성장이라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어쨌든 '밥 먹기'라는, 다른 선택지의 부재도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던 것이다.
전에 지금의 일본에 필요한 것은 중흥이 아니냐고 썼다. 중흥이 '성숙기 혹은 쇠퇴기를 다시 성장기로 전환시키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이를 위해 필요한 '시대정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 건축 모더니즘에 있어서의 기능주의
지금은 과거 사회주의였던 나라도, 아직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나라도 대도시에는 유리로 된 초고층 건축물이 들어서 비즈니스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 대도시의 그것과 같은 광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건축 전문가들이 볼 때 거기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앞서 중국과 일본의 건축 차이를 논했던 것과 겹치지만 사회주의를 경험해 현재 권위주의로 불리는 나라의 건축에는 모더니즘 정신이 결여돼 있는 것이다.
건축의 모더니즘 정신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아르 누보나 윌리엄 모리스의 그것을 초기 모더니즘이라 하고, 바우하우스나 르 코르뷔지에의 그것을 성수기 모더니즘이라 한다면 초기의 모더니즘 정신이란 과거의 양식을 벗어난 자유로운 조형이며, 성수기의 모더니즘 정신이란 양식도 장식도 부정한 기능에 기초한 조형이며 기능주의(펑크셔널리즘)라 불린다.
전쟁 전 일본 근대 건축가들은 '자유'의 건축을 추구했고, 전후 일본 건축가들은 '기능'의 건축을 추구했다. 그것은 그 때의 「시대정신」에 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나 르 코르뷔지에는 그 기능주의의 선구자였고, 그들의 작품은 그 시대정신 때문에 빛났다.
이런 나도, 배운 대학에서도, 근무처의 설계 사무소에서도, 그 모더니즘 정신을 빼앗겨, 그 후, 교편을 잡은 대학에서도, 그것을 학생들에게 내리쳐 왔다. 그러나 지금 건축의 모더니즘 정신은 빛을 잃고 있다. 권위주의 국가의 건축이 사회주의의 모럴을 버리고 경제효율주의화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서방 선진국의 건축도 모더니즘의 모럴을 버리고 경제효율주의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양자의 차이를 보기 어렵게 하고 있는 원인이다.
◇ 근면과 도전의 자본주의에서 욕망과 투기의 자본주의로
또한 건축의 모더니즘 정신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논한 근면, 금욕, 혁신, 도전이라는 정신과도 부합했다. 모더니즘과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가 일체가 되어 서구와 북미로 확산되고, 그 정신이 근대 일본의 진보적인 층에도 보급되었던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구조가 종식된 뒤에는 과거 사회주의였던 나라들이 한꺼번에 자본주의화하면서 세계 시장에 혼란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변화의 본질은 오히려 자본주의가 근면과 도전의 자본주의에서 욕망과 투기의 자본주의로 변질된 데 있지 않은가.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사상의 영향일까, 지금은 일본의 정부나 경제전문가들도 개인소비의 욕망을 부추기고 투기에 가까운 투자를 부추기고 있다. 「투자의 본질은 도박」이라고 말한 경제학자는 괴짜처럼 평가되지만, 나는 이 과감한 발언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도전과 투기는 전혀 다르다. 도덕성을 잃고 있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와 전문가 쪽이 아닌가. 내 주위에는, 제조 전성기를 지탱한 기술쟁이가 많다. 경제에는 어둡지만 숫자에는 강하기 때문에 모두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를 걱정하고 있다. 전쟁 전의 「군국 일본」을 멸망시킨 것은 군사 엘리트였지만, 전후의 「경제 일본」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은 경제 엘리트(관료, 학자, 이코노미스트)가 아닌가.
◇ 중흥 정신으로서의 새로운 근대 정신
시대정신이 뚜렷할 때는 국민 대다수가 그 정신에 따라 노력했다. 물론 정부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그것도 포함해 사회 전체에 시대의 에너지가 가득했다.
안전망이 튼튼하지 못해 도전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제도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사회의 공기, 즉 시대정신의 문제가 아닌가.
그렇다고 중흥은 경제지표를 올리는 것만이 아니다. 확실히 일본의 국력을 나타내는 지표는 조락일로이지만, 숫자에는 나타나지 않는 생활과 문화의 퀄리티라는 것은 있다. 전통의 문화와 기술의 정묘함, 방방곡곡의 싸구려 술집에 있는 듯한 세심한 서비스, 이 섬나라에는 그런, 한쪽 구석의 아늑함이 있다. 그런 것들이 다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의 복권이라고 해야 하나.
제조에 관해서, 일독이의 신삼국동맹을 결성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과거의 군사동맹이 아니라 제조문화동맹이다. 이 삼국에는 숫자가 되지 않는, 만들기의 기술과 힘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가 있다. 과거 그것은 경제지표에 강하게 반영되었지만, 지금은 빅테크라고 불릴 만한 정보산업의 그늘에 가려 지표의 숫자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제조 복권은 반드시 온다.
지나치게 복잡해진 사회제도는 과감히 디지털화해야 하지만 인간의 생활과 문화에는 아날로그가 필요하다.
지금 일본이 필요로 하는 중흥정신은 모더니즘 건축창성기의 자유와 기능의 정신, 혹은 자본주의 창성기의 근면과 도전의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과거 근대정신에 있었던 자유, 합리, 과학, 근면, 기능, 개인, 도전 같은 가치를 다시 한 번 재검토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현재 여러가지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 근대 문명을 예찬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탈탄소를 기조로 근대문명을 방향 전환하는 근대정신이다.
◇ 지구냐 국가냐 인류가 안고 있는 모순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트럼프라는 사람은 세계 인류보다 미국 국민 우선이기 때문에 이민을 배척하고 수입품에는 고관세를 부과한다고 한다. 지구 환경의 문제에도 무관심하다.
나는 온난화 가스에 의한 이상 기상의 문제는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고, 인류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와 같은 논란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공명정대할 수 없다. 세계가 국가 단위로 운영되는 이상 지구나 인류보다 국가가 소중하고 국민이 소중하다는 논리는 쉽게 부인할 수 없다. 즉 그는 지금의 인류가 안고 있는 모순, 지구와 국가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인 것이다.
지구냐 국가냐. 당분간 인류는 이 모순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일본은 그 지구와 국가의 모순을 중흥정신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잔손의 정책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지금 화제인 「00엔의 벽」이라고 하는 문제로, 세수가 줄어든다며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긋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의 중요성은 그 벽이 근면과 도전의 의욕을 꺾는 것이다.
◇ 먼 타인을 향하여
기자의 피라미드를 상공에서 본 적이 있다. 사막의 대지에 대한 인류의 지식의 각인은 아름다웠다.
옆에 펼쳐진 카이로의 거리는 인류의 삶이 사막을 더럽히는 듯했다.
그때 나는 고대 이집트인들은 미래의 인간이 하늘에서 볼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림과 상형문자를 통해 방대한 이야기를 기록했지만 그들은 먼 타인을 향해 발신하지 않았는가.
이후, 나는 「먼 타인」이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가까운 다른 사람에게는 피곤하다. 이해가 얽혀 애증에 사로잡힌다. 인간에게는 먼 타인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글을 썼지만 그것도 먼 타인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야후! 뉴스 'THE PAGE'에 쓰기 시작한 지 8년. 처음에는 몇 번 건축에 대해 써달라고 했지만 중간부터 어떤 주제라도 좋다고 해서 뉴스 에세이 같은 것을 계속 쓰게 됐다. 그것이 이 정도로 지속될 줄은 몰랐다.
점차 정치적인 발언이 많아져 비방 중상적인 코멘트를 받기도 하였다. 원래 「문화 내셔널리스트」라고 해 우열을 자인하고 있었지만, 많은 중국인 유학생을 길러, 친중파라고 하는 사람도 나왔다. 자신도 흔들리고 있지만 세상이 더 요동치고 있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더 젊은이가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을 써라. 어려운 말을 너무 많이 쓴다」
많은 고전을 읽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려운 말을 쓰는 버릇이 붙었던 것 같다. 젊은 사람의 언어감각과는 차이가 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서 붓을 놓는다, 아니 키보드를 내려놓는다.
졸문을 읽어 주신 많은 분들과, 편집의 수고를 받아 주신 이이다 카즈키 씨에게 사의를 표하고 싶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6123c3d8fd092e8713574474e9a99838e5dacbdd?page=1
経済日本を滅ぼそうとしているのは経済エリート? 今の日本に必要な「時代精神」について考える
12/22(日) 9:02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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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hoo!ニュース オリジナル THE PAGE
2013年5月に改正公職選挙法が施行され、インターネットによる選挙運動が解禁されてから10年以上が経過しました。今年11月の兵庫県知事選挙では、SNSで飛び交う虚実入り混じった情報が、有権者の行動を大きく左右したと考えられています。
建築家で、文化論に関する多数の著書で知られる名古屋工業大学名誉教授・若山滋氏は「SNSがあろうがなかろうが、政治的混迷の時代には民衆の熱狂が生じるもの」と指摘する一方で、「今の日本には『時代精神』が欠如している」と考えます。若山氏が独自の視点で語るニュースエッセイの連載の最終回です。
時代精神の欠如
[写真]韓国では「非常戒厳」を宣言(その後解除)した尹錫悦(ユンソンニョル)大統領の辞任を求める声が強まっている(Lee Jae Won/アフロ)
韓国は大変な情勢で、アメリカもフランスもドイツも、政治の混迷がつづいている。日本では兵庫県知事選挙で斎藤元彦氏が返り咲いて、テレビや新聞など既存のマスメディアはSNSという新しいツールが生む政治的熱狂を伝え、それを規制することが話題になっている。
しかしどうだろうか。SNSがあろうがなかろうが、混迷の時代には民衆の熱狂が生じるものではないか。大学紛争の時代も、日米安保闘争の時代も、労働争議頻発の時代も政治的熱狂が生じ、マスメディアはそれをあおった面がある。
とはいえこれまでは、その時代の政治思想が衝突するかたちで民衆と権力が対立したのだ。いわば「時代精神」の衝突であったが、SNSに動かされる今の民衆は、個人的不満を原動力として一時的に群れただけのように思える。今の日本には「時代精神」が欠如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それは西側諸国に共通することかもしれない。
明治時代の日本には「文明開化」という時代精神があった。戦後日本には「復興成長」という時代精神があった。とにかく「飯を食う」という、他の選択肢のなさもひとつの時代精神であったのだ。
前に、今の日本に必要なのは「中興」ではないかと書いた。中興が「成熟期あるいは衰退期を再び成長期に転じさせること」だとすれば、ここではそのために必要な「時代精神」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
建築モダニズムにおける機能主義
今は、かつて社会主義であった国も、まだ社会主義を唱えている国も、大都市にはガラス張りの超高層建築が建ち並んで、ビジネスセンター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ている。それは先進資本主義国の大都市のそれと同じ光景のように見える。
しかし建築の専門家から見るとそこには少し違いがある。
前に中国と日本の建築の違いについて論じたことと重なるが、社会主義を経験し、現在権威主義と呼ばれる国の建築には、モダニズム精神が欠如しているのだ。
建築のモダニズム精神とは何か。たとえばアール・ヌーボーやウィリアム・モリスのそれを初期モダニズムとし、バウハウスやル・コルビュジエのそれを盛期モダニズムとするなら、初期のモダニズム精神とは、過去の様式を離れた「自由な造形」であり、盛期のモダニズム精神とは、様式も装飾も否定した機能にもとづく造形であり「機能主義」(ファンクショナリズム)と呼ばれる。
戦前の日本の近代建築家たちは「自由」の建築を追求し、戦後の日本の建築家たちは「機能」の建築を追求した。それはそのときの「時代精神」に合致していたのである。ヴァルター・グロピウスやル・コルビュジエはその機能主義のパイオニアであり、彼らの作品はその時代精神ゆえに輝いていた。
かくいう僕も、学んだ大学でも勤務先の設計事務所でも、そのモダニズム精神を叩き込まれ、その後、教鞭をとった大学でも、それを学生たちに叩き込んできた。しかし今、建築のモダニズム精神は輝きを失っている。権威主義の国の建築が社会主義のモラルを捨てて経済効率主義化しているように、実は西側先進国の建築もモダニズムのモラルを捨てて経済効率主義化しているのだ。それが両者の違いを見えにくくしている原因である。
「勤勉と挑戦の資本主義」から「欲望と投機の資本主義」へ
[写真]資本主義が「勤勉と挑戦の資本主義」から「欲望と投機の資本主義」に変質した(GYRO_PHOTOGRAPHY/イメージマート)
また建築のモダニズム精神は、マックス・ヴェーバーが『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の倫理と資本主義の精神』において論じた、勤勉、禁欲、革新、挑戦という精神とも合致していた。モダニズムと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と資本主義が一体となって、西欧と北米に広がり、その精神が近代日本の進歩的な層にも普及したのである。
ベルリンの壁が崩壊し、冷戦構造が終焉を迎えたあとは、かつて社会主義だった国々が一挙に資本主義化し、世界のマーケットに混乱が現れているのだが、この変化の本質はむしろ、資本主義が「勤勉と挑戦の資本主義」から「欲望と投機の資本主義」に変質したことにあるのではないか。
アメリカの新自由主義的な思想の影響だろうか、今は日本の政府もまた経済専門家も、個人消費の欲望をあおり、投機に近い投資をあおっている。「投資の本質はギャンブル」といいきった経済学者は変わり者のように評されるが、僕はこの思い切った発言に好感をもっている。挑戦と投機とはまったく異なる。モラルを失っているのは国民ではなく、政府と専門家の方ではないか。僕のまわりには、ものづくり全盛期を支えた技術屋が多い。経済にはうといが、数字には強いから、みな天文学的な財政赤字を心配している。戦前の「軍国日本」を滅ぼしたのは軍事エリートであったが、戦後の「経済日本」を滅ぼそうとしているのは経済エリート(官僚、学者、エコノミスト)ではないか。
中興精神としての新しい近代精神
時代精神がハッキリしていたころは、国民の多くがその精神に沿って努力していた。もちろん政府に対する反発もあったが、それも含めて、社会全体に時代のエネルギーが充満していた。
セーフティネットがしっかりしていないから、挑戦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意見もあるが、それは社会制度の問題というより、むしろ社会の空気すなわち時代精神の問題ではないか。
とはいえ中興とは、経済指標を上げることだけではない。たしかに日本の国力を示す指標は凋落の一途であるが、数字には表れない生活と文化のクオリティというものはある。伝統の文化と技術の精妙さ、津々浦々の安酒場にあるようなきめ細かいサービス、この島国にはそういった、片隅の居心地の良さがある。そういったものが再び評価されているのだ。アナログの復権というべきか。
ものづくりに関して、日独伊の新三国同盟を結成すべきだと書いたことがある。かつての軍事同盟ではなく「ものづくり文化同盟」だ。この三国には数字にならない、ものづくりの技と力がある。それを支える文化がある。かつてそれは経済指標に強く反映されたが、今はビッグテックと呼ばれるような情報産業の陰に隠れてあまり指標の数字に表れていないのだ。ものづくりの復権は必ず来る。
過剰に複雑化した社会制度は思い切ってデジタル化すべきだが、人間の生活と文化にはアナログが必要だ。
今日本が必要としている中興精神は、モダニズム建築創成期の自由と機能の精神、あるいは資本主義創成期の勤勉と挑戦の精神に近いものではないか。かつての近代精神にあった、自由、合理、科学、勤勉、機能、個人、挑戦といった価値をもう一度見直すことではないか。とはいえそれは、現在さまざまな問題が露呈している近代文明を礼賛することではない。むしろ逆に、脱炭素を基調に、近代文明を方向転換する近代精神である。
「地球か国家か」 人類が抱える矛盾
[写真]フロリダ州の自宅で記者会見した米次期大統領のトランプ氏(ロイター/アフロ)
アメリカの大統領に選ばれたトランプという人は、世界の人類よりアメリカ国民優先ということで、移民を排斥し、輸入品には高関税をかけるという。地球環境の問題にも無関心である。
僕は温暖化ガスによる異常気象の問題は思ったより速度が速く、人類喫緊の課題であると考えている。しかしトランプ氏のような議論が出てくることも理解できる。人間はそうそう公明正大ではありえない。世界が国家単位で運営されている以上、地球や人類より、国家が大事、国民が大事という理屈は、簡単に否定できない。つまり彼は、今の人類が抱える矛盾、地球と国家の矛盾をハッキリさせる人物なのだ。
「地球か国家か」。当面、人類はこの矛盾とともに生きるほかはない。
今の日本は、その地球と国家の矛盾をこそ中興精神とするほかはない。
小手先の政策ではどうにもならない。今話題の「〇〇円の壁」という問題で、税収が減るといって反対している人たちもいるが、ズレているのではないか。事の重要性は、その「壁」が勤勉と挑戦の意欲を削ぐことである。
遠い他者に向かって
[写真]ギザのピラミッド。砂漠の大地への人類の知の刻印は美しかった(ロイター/アフロ)
ギザのピラミッドを上空から見たことがある。砂漠の大地への人類の知の刻印は美しかった。
となりに展開するカイロの街は、人類の生活が砂漠を汚すかに見えた。
そのとき僕は、古代エジプト人は、未来の人間が大空から見ることを予測してい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気がした。古代エジプト人は絵と象形文字によって膨大な物語を記録したが、彼らは「遠い他者」に向かって発信したのではないか。
以来、僕は「遠い他者」という言葉を胸に抱いて生きている。
人間は他者を求める。しかし近い他者には疲れる。利害が絡み、愛憎に囚われる。人間には遠い他者が必要だ。長いあいだ文章を書いてきたが、それも遠い他者に向かっていたのだろう。
Yahoo!ニュース「THE PAGE」に書きはじめて8年。最初は何回か建築について書いてくれということだったが、途中から、どんなテーマでもいいということで、ニュースエッセイのようなものを書きつづけることとなった。それがこれほど続くとは思わなかった。
次第に政治的な発言が多くなり、誹謗中傷的なコメントを受けることもあった。もともと「文化ナショナリスト」といわれ右寄りを自認していたが、多くの中国人留学生を育てたので、親中派だなどという人も出てきた。自分も揺れているが、世の中がもっと揺れ動いている。
あるとき友人にいわれた。「もっと若者が元気になるようなことを書け。難しい言葉を使いすぎる」
たくさんの古典を読んできたので、自然に難しい言葉を使うクセがついていたようだ。若い人の言語感覚とはギャップがあることを意識せざるをえない。この辺で筆を置く、いやキーボードを手放す。
拙文を読んで下さった多くの方々と、編集の労をとっていただいた飯田和樹さんに謝意を表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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