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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
요일 4:7-11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7-11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고 친절을 베푸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증명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더 깊이 알 수 있게 됩니다. 8) 남을 사랑하지 않는 불친절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악한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줌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10) 이러한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 죄 때문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대신 사랑하는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주신데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입니다. 11)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기를 마다하겠습니까?
요한은 다시 사랑의 주제로 돌아와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한 번은 권면으로 또 한 번은 의무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중요성(7-9) 성격적인 결함으로 인해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자라는 과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누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지만 어려서부터 사랑이 결핍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고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셨습니다(9). 공로가 없어도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바라만 보면 모두가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듣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십니다(7).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여 아들을 내어 주셨고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여 심판을 참고 참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8). 물론 예외의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 원리에 나 자신을 비추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10-11) 사랑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랑이 강요된다면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미움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는 주님의 사랑 초대를 불쾌하고 버겁게 느낍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사랑할 능력이 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지로 사랑을 쥐어짜 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바라새인이 한 명 더 늘어날 뿐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부담스러울 때 우리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눈을 들어 예수를 묵상해야 합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조급함과 불안을 내려놓고 십자가에 흘러나오는 사랑의 멜로디에 집중하십시오. 구원의 확신을 말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것보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언젠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사랑에 눈이 멀 때 세상과 다른 사랑의 원천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셨고 또 계속 사랑하고 계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행함으로 주님과 동거의 기쁨을 누리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시간과 몸, 재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시간과 몸, 재물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에 낭비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간직한 성도로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을 나누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래야 내 자신이 살고, 이웃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일어서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사랑의 하나님
요한일서 4:7-11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랑의 하나님" 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교회는 지난주일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믿음의 여러 방면들 중에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들까지도 모두 가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들을 때 너무나 큰 감사가 있었습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나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다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 들을 때 어떤 사람이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는 표시는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이 마음이 많이 남았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새롭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각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믿음의 전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또 시간이 생길 때마다 책을 읽는 여러 가지 일들은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알기 위한 좋은 시도들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저는 특별히 제가 소홀히 하고 있던 "사랑"이라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올바른 지식은 자신을 차갑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굳건한 믿음은 다른 사람의 양심을 실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바로 주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
우리가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교회에 왔을 때 우리가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는 분명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는 17살 가량 되었을 때 20여명의 형제 자매님들과 복음을 전하러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10인 승 차량 2대를 가지고 다녔는데, 때로는 지방에 가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20여명의 형제 자매님들이 같이 다니면서 평소에는 서로 친절하고 상냥하고 천사 같던 지체들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는 깨워도 안 일어나고, 누구는 지저분하고, 누구는 눈치도 없이 많이 먹고, 누구는 텐트 정리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고, 누구는 더운데 차 창문도 못 열게 하고, 누구는 모이는 시간도 안 지킵니다. 누구는 말투가 기분 나쁘고, 누구는 고집이 세고, 누구는 혼자 서두르면서 다른 사람 괜히 재촉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형제 자매님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나로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들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또 한 구석에서는 "절대로 저런 모습은 사랑할 수 없다!"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작게든 크게든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친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지체를 만나면 쉽게 교제가 되고 금새 친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형제 사랑을 잘 하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편중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마 5).
저는 제 안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많은 영화와 노래가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온 세상이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이 세상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계산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손해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피해를 입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때론 멋지게 포장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포장을 풀어버리고 나면 상처를 받지 않으려 하고 결코 낮아지려 하지 않으며 딱딱하고 차갑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결코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수준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린 아이로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 저를 더욱 이끌어 주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저 사람이 이렇게 바뀌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천사 같이 바뀐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형제 자매들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셨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일서 4장 7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일 4).
사랑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으므로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며,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더 풍성해 지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9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9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나니 이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나타났느니라. 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우리의 사랑의 원천은 바로 복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이해했는지에 따라 우리의 사랑의 깊이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로 죽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른채 방황하며 헛되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재물의 염려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며 살다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귀를 닫아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습니다. 사망과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죄의 용서와 구원이란 값없는 선물이요, 공짜로 주어진 은혜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 구원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선물을 주고자 이 천년을 고민하신 하나님께서 갈보리 백화점으로 올라가시고 십자가라는 상점 앞에서 자신의 독생자의 피를 지불하고 넘치는 용서와 은혜라는 선물을 마련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었습니까? 조건을 걸지 않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먼저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다같이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처럼"이란 표현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이처럼"이란 단어를 볼 때, 우리 각자가 느끼는 사랑의 깊이가 각자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만큼 다른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에 아직 요구가 많고, 조건이 많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실한 형제는 게으른 형제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꼼꼼한 형제는 덜렁대는 형제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내가 얼마나 게으른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덜렁대는 사람인지 알려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전히 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하나님,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섬세한 사랑으로 이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게으르고 덜렁대는 형제를 조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꾸려할 때는 참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형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조건 없이 참되게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형제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많은 우리들을 변화시킨 것이 나의 결단과 굳은 의지와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었던 것처럼, 다른 지체들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 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기도
오늘 우리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우리 안에 흘러 넘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문제가 많은 우리를 조건 없이 한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 옆의 지체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에 푹 잠기게 하시고 나의 요구와 조건이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지체들을 대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빛을 주셔서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 "이처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더 알려주셔서 우리의 사랑이 더 온전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요일 4:7-11 / 이영훈 목사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랑’처럼 귀한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때 어긋난 길을 가던 아이들이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사랑을 통해 갈등과 반목이 있는 곳에 평화가 깃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 것도, 영혼육이 잘 되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는지,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랑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품성이 곧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풍성하신 차원을 넘어 ‘사랑’ 그 자체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못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불의하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지식을 뛰어넘는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품을 떠남으로써 인류의 역사 가운데 죄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죄의 결과로 두려움이 다가왔습니다(창 3:9∼10).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대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어두움을 두려워했고, 프랑스의 앙리 3세는 고양이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는 장미꽃을 무서워했고, 유명한 투우사 세잘 린콘은 1톤도 더 나가는 황소의 뿔은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담대했지만, 신발보다 더 가벼운 쥐 앞에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성에 대한 두려움, 약점이 공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불신으로 인한 두려움, 생각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두려움, 말실수에 대한 두려움,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일곱 가지 두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시시때때로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요일 4:18).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모든 사람은 각각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모순되어 보이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향한 완벽한 신뢰를 유지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려워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두려움을 내쫓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해야 합니다. 전쟁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두려움이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올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위에 굳건히 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질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요일 4:9∼10).
하나님의 두 가지 큰 특징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풍성하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죄를 용납지 아니하고 심판하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므로, 죄를 범한 인간은 마땅히 죗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셔서 인간을 처벌하지 않고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요 3:16). 하나님의 독생자요, 하나님의 본체이신(빌 2:6) 예수 그리스도를 범죄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 가운데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사랑할 의지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화목제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요일 4:10, 19).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 아래 비참하게 빠져 있을 때,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무조건적이요, 일방적으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문, 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선택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을 뿐 아니라,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요일 4:13).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3. 사랑을 실천하는 삶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요일 4:11).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특별히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요일 3:18). 사랑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 실천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랑 실천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2∼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축약된다고 말씀하시며(마 22:37∼40),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은 대개 예배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타협하지 않았고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여 우상에 절하기를 거부했고,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100세에 얻은 가장 사랑하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뜻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므로 전 재산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목숨을 바쳐 순교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마 5:23∼24),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2:3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이웃들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요일 4:20∼21). 그 형제, 자매 가운데 함께 계신 하나님,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존중해야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준철 집사님은 평소 ‘돈벌이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2001년, 경남 창원에 외과병원을 개원하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달 1회 교회 의료봉사단과 함께 봉사활동을 펼쳤고, 매년 자신의 휴가를 반납하고 해외 의료선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007년 하나성심병원 일반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그의 이웃사랑은 멈추지 않았고, 2009년부터는 국제 의료봉사단체인 ‘Mercy Ship(자비호)’에 한 달간 승선해 아프리카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런 박 집사님이 올해 10월,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죽음도 그의 이웃 사랑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외과 의사였던 그는 평소 이식을 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환자들을 보며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 어머니와 함께 인체조직을 기증하겠다는 서약을 했습니다. 인체조직 기증은 장기 이식에 비해 피부, 뼈, 연골, 혈관 등을 모두 기증하는 것으로 시신 훼손 정도가 매우 커서 2005년 이후 불과 600여 명만이 서약할 정도로 기증자가 희소했습니다. 박 집사님이 천국에 간 후, 그의 인체조직 기증 서약에 따라 150명의 환자에게 조직이 기증되었습니다. 그의 나눔의 사랑을 통해 150여 명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가난과 질병,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땅에서 환자의 병든 몸을 치료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으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을 내던져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던 박준철 집사님은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랑은 여전히 남아 세상을 살리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바 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치료의 은혜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은혜와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영혼육의 축복을 받는 통로가 됩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풍성한 은혜를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실천자로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더 크게 들어 쓰시는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기쁨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가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을 맞아 우리 모두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 모두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여생을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위의 불쌍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에게 찾아가게 하시고, 사랑을 베풀고 위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영훈 목사)
원초적 사랑의 속성
요한일서 4:7-11 / 곽선희 목사
요사이 유행하는 말 중에 '대책 없는 자'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하고, 도대체 구제할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인가 한번 봅시다.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L.A와 Los Angeles가 다르다는 사람. 으악새가 새의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 제가 사전 찾아보았더니 으악새라고 되어있지 않고 억새라고 되어 있어요. 으악새는 방언이랍니다. 어쨌든 으악새는 풀 이름이지 새 이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으악새는 새 이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 이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랑받고 살면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 구제불능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뉘우칠 때에는 또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하늘 아래 사랑이 있냐는 것입니다. 사랑을 부정하고 사는 사람,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대책 없습니다.
Cast Away 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나갔습니다만은 아주 명화입니다. 그 내용 중에 보면 두 남녀가 열렬히 사랑을 하고 약혼을 하고 결혼날짜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놀랜드' 라는 이 남자가 자기가 나가는 회사의 일로 인해서 그는 잠깐 출장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이 비행기가 추락되면서 그 비행기에 탄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이 '놀랜드' 라는 사람이 남태평양 어느 무인도에 표류됩니다. 거기서 그는 살아남고 감격합니다만은 그러나 전혀 사람이 살지 않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 이 섬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과일을 따먹고 바위틈에 은신하면서 이렇게 버티고 4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이 그로 하여금 이 많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뗏목을 만들어서 그 배를 만들었죠. 이렇게 띄워 가지고 나가다가 지나가는 상선에게 발견되어서 구출이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애인은 다른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어요. 이 나라의 법은 실종되고 1년이 지나면 사망처리를 합니다.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장례식도 치르고 그럽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결혼을 하고 어린 얘들까지 낳았어요. 이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지만은 사랑하는 사람, 모처럼 안정을 얻은 그 사람, 그 가정을 파괴할 수가 없어요. 그는 할 수 없이 물러섭니다. 그리고, 넓은 광야를 앞에 놓고 갈 곳을 잃었어요. '앞으로 가야하나? 뒤로 가야하나? 옆으로 가야하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리고 광야를 바라보며 방황하는 그런 장면으로 이 영화는 끝납니다. 여러분, 무인도에서 4년을 고독하게 가난과 고통과 어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었지만은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허탈감, 이제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렇게 딱 한 문장으로 기록된 곳은 성경에 여기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생명이다.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사랑 없이 생명 없습니다. 살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사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사랑의 계시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하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고요.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로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계시합니다.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했다고. 독생자를 주었다고. 왜? 그 속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가 죄인을 사랑하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희생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증거하고, 이제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믿으라'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믿으라, 이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행복하라고. 또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받고 이 사랑을 베풀라고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동물적 사랑과 인간적 사랑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동물이라는 것은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동물적 충동, 행복이올시다. 탄자니아나 케냐, 이런 데 가서 보면 넓은 벌판에 많은 짐승들이 사는 것을 봅니다. 짚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을 해보면 동물들은 정말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나는 그 들판을 지나가다가 사자들이 모인 곳, 잘 보기 힘든 곳이니까 사자가 한 30마리 있는 그런 자리를 그 소굴에 들어가보면, 전 재미있게 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자가 짐승을 잡아먹고 배가 부른 다음에 말이죠, 나무 밑에서 아주 벌렁 누웠어요. 벌렁 누워가지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낮잠을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옆에는 커다란 수놈, 왕 사자가 떡 버티고 앉아 있고 거기에는 여러 마리의 암놈 사자가 있고 그리고 새끼들이 이렇게, 그 가정을 거느리고 이러고 앉아있는데 꺼벅꺼벅 졸고 앉아있는데, 그 숫사자를 자세히 보니까요 얼굴이 만신창이더라구요. 그 가정을 지키느라고 죽을 고생을 한답니다. 그 왕권을 2년밖에는 지키지 못한답니다. 조금만 힘이 약해지면 다른 젊은 숫사자가 와서 점령을 해버린답니다. 그 사자도 편하지 않더라구요. 아주 힘든 생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저 '자네들도 별로 행복하지 못하겠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나와 봤습니다. 동물은 이 본능적 욕구를 충족할 때 편안합니다. 인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사랑을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보면은 어떻게든지 사랑을 확인하려고, 스킨쉽을 통해서 가까이 손을 잡고, 비비고, 안기고, 무릎에 앉고 잠깐이라도 이 사랑 옆에서 떠날 때, 무릎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밀치던가 해보세요. '엥'하고 울고 사흘 후에는 감기 걸립니다. 아주 힘듭니다. 순간순간 자신만만하게 '우리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사랑한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때만 행복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이고 원초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지 않고는 못 살고,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삽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확인하고 알고 깨닫고 느끼고 감사하는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설사, 좀 어려운 고난을 치른다 하더라도 사랑만 확실하면 살 수 있습니다.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질병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무너질 때,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지능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urg)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유명한 사랑의 삼각 이론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치 정삼각형처럼 삼각 균형이 잡힌 그 가운데에 참 사랑이 있다' 하는 것이올시다. 첫째 요소가 뭐냐하면은 Intimacy, 친밀감이올시다. 사랑은 친밀함을 느껴야 되요. '가까이 있다. 저와 나는 가깝다. 저는 나를 이해한다. 저는 나의 사정을 잘 알아주신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이렇게 친밀감을 느끼는 그런 정서가 이게 사랑입니다. '가까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비록 조금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다. 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친밀감, 그것이 사랑입니다. 두번째는 Passion 이올시다. 이것은 정열입니다. 사랑이 정열로 작용해서 로맨틱하고 어떤 때는 욕망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소유하려고 하고 꼭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사실은 그 뿌리에 사랑이 있어요. 세번째 요소는 Promise and Responsibility입니다. 이것은 약속과 책임이 있는 거예요. 책임을 지는 거예요. 약속이 확실하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나아가서 책임을 집니다. 저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요 저의 실수가 나의 실수입니다. 저는 나와 상관이 없듯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실수를 보더라도 그건 바로 내 책임이예요. 자식의 실수를 내 탓이라고 아내의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남편의 잘못도 그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책임을 지는 마음이 그게 사랑이요. 무책임하게 비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은 바로 동체의식이거든요. 일체 의식이요. 하나로 생각하게 될 때 책임을 집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자, 그러면 여기서 이것이 삼각형처럼 꼭 균형을 잡아야 된대요. 왜냐하면 친밀감에 치우치면 감상주의자가 되요. 요새말로 '마마보이' 같은, 이런 것이 된다 이거예요. 또, 정열에 치우치게 되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약속과 책임, 이 의무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아주 메마르게 됩니다. 냉정하고 메마르고. 요새 말로 정열이 없어요. 그런고로, 이 세 요소가 함께 합쳐서 정삼각형처럼 이 세 변이 같은 길이로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참 사랑이다, 라고 합니다. 이제 이 사랑의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순간부터 사랑의 성격을 떠납니다. 사랑은 받아들임에 있는 것이올시다. 받는 존재 의식이요 받는 감격이요 받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5장에 있는 말씀을 전 개인적으로 많이 사랑합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혹이라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의심이 생길 때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믿어집니다. '내가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기 사랑을 확증해 주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셨다'고요. 그 때가 중요합니다. 연약할 때, 또 죄인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때 벌써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어요.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해서 사랑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살고, 봉사한다고 이제서야 사랑을 받을 거라고, 보상적으로 사랑을 받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참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잘해서 사랑을 받는 겁니까? 그렇게 똑똑한 척 하고 계산 많이 하는 자녀는 사랑받지 못해요. 오히려 실수도 많고 부족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우리 아버지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그 깨달음과 그 믿음이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예요.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비유를 아시잖아요. 그가 집을 나가 버렸어요. 그리고 허랑 방탕했어요. 왜 안돌아 왔을까?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돈 벌어가지고 가야지, 출세해서 가야지, 내가 이 모양으로 갈 수 없지 않나? 체면, 위신, 생각하는 중에 그는 못 돌아왔어요. 바르게 돌아와 보려고 애썼겠지만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서 마지막에 굶어 죽게 되어가지고는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그를 환영하고, '소를 잡아라, 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잔치를, 환영 잔치를 합니다. 아들은 너무 부끄러워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에 저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기뻐하고,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이렇게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그때 탕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 걸.' 내가 집을 나갔으니 아버지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고, 내가 아버지를 잊었을 때 아버지도 나를 저주하고 호적에서 지워버리고 잊어버린 줄 알았지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 그 아버지는 사랑했고,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게 아닙니다.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동안 탕자는 너무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올시다.
오래 전에 읽은 책 한 권의 이야기를 저는 늘 잊지를 않고 종종 생각합니다. 캐시라고 하는 여성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주 발랄하고 연애를 했는데 연애에서 실패하고 배신당하게 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은 그는 집을 나갑니다. 넓은 세상에 가서 마음대로 살아버립니다, 그 젊은 육체를 가지고. 창녀가 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마지막엔 마약 중독자까지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나니까 몸은 시들고 병들고, 이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는 죽을 때가 되었다. 강가에 나가서 투신자살을 하려고 내려다 보는데 강물에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했습니다. '10년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늙었을까? 어떤 모습일까?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 뵙고, 그리고 돌아와서 죽을 것이다. 죽는 일은 바쁘지 않다.' 그래서 낮에 올 수가 없어서 먼 빛으로 보려고 밤에, 캄캄한 밤에 집에 돌아와 봤는데, 집안과 밖에 외등까지 불을 환하게 켜 놓았어요. '오늘 무슨 파티가 있었나? 왜 이렇게 불을 켜 놓았나?' 그런데 조용해요. '이상하다. 파티가 끝났는가?' 대문을 잠깐 밀어보았더니 잠그지 않았어요. '대문도 잠그지 않고 주무시누만.' 조금 더 미는데 '삑'하고 소리가 나자마자 안에서 어머니가 "캐시야" 그냥 맨발로 뛰어 나옵니다. 꼼짝 못하고 붙들렸습니다. "어머니, 어째서 이렇게 불을 많이 켜 놓은 것입니까?" 그때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 한번도 불을 끈 일도 없고, 문을 잠근 일이 없다." 케시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가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계속 나를 사랑하고 있었더라'는 것이에요. 돌아왔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그 아픈 마음으로 그 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이것을 모르고 방황한 것이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고, 그런고로 벌써 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내가 죄인입니까? 더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내가 병들었습니까?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지요. 내가 실패했습니까? 남보다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에요. 받고 있는 것이에요.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은 믿음입니다.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한 이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진실한 자세는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 영원한 세계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낙심함이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마땅하다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런고로 내가 남을 사랑하고, 또 나 자신도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엄청난 사랑 안에 있는 나, 사랑받는 나, 그 존재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를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오늘도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방황할 때에도 끝까지 사랑해 주시니 그 사랑, 깊이 깊이 깨닫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 충만함이 있게 하소서. 내가 처한 처지 이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랑의 사람으로 그런 사람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요한일서 4:7-12 / 이수영 목사
성경 전체의 말씀 속에서 가장 간결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말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은혜롭고 가장 큰 위로와 기쁨과 소망이 되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듣기 좋은 말씀일 뿐 아니라 사실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일 하고싶어 하시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만일 성경에서 제일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은 지혜이시라" 한다면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 지혜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낱낱이 다 드러나겠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경에서 제일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은 전능이시라" 한다면 우리는 겁에 질려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벌하시기 위하여 못하실 것이 하나도 없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장 열심히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그 어떤 것에 앞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사랑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바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부드러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확증하셨습니다. 본문 9-10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도 바울은 롬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가 기뻐하고 안심하며 소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성경말씀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요3:16의 말씀인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 이 하나님의 사랑은 많은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을 지으시고 친히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것도 사랑 때문이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자유로운 의지를 주신 것도 사랑 때문이며, 그 자유로써 하나님께 순종 대신 불순종의 길을 택한 인간을 구원하시려 하는 것도 사랑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려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힘입어 사랑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된 우리이기에, 이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오늘 본문은 힘주어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11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본문보다 앞서는 요일3:16에서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cf.요15:12). 사도 요한도 그것을 증거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3:23),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1).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인용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바로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본문 7-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증거입니다. 본문 12절에서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하며, 16절에서도 "...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말합니다. 요일3:24에서도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본문 뒤에 오는 20절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명과 진리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일3:14에서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했으며, 요일3:18-19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요15:13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3:17-18에서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3:4-7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내가 아닌,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진리 위에 기초한 이해와 용서와 인내와 섬김과 희생적 헌신의 실천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쪽에서의 양보와 희생을 필요로 할 때가 있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유익을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요일4:17-18에서는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했고, 요일3:22-23에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자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건강입니까? 재산입니까? 권력입니까? 명예입니까? 지식입니까? 아니면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 같은 것입니까? 그것들은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고전13:8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는 또 언제나 남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오직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며,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앞서 그는 고전13:1-3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간직하고 있는 프랑스어로 된 "사랑이 없으면"이란 글 한 토막을 소개 하겠습니다: 사랑이 없는 의무감은 무뚝뚝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책임감은 냉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성은 교활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령은 비열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힘은 난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명예는 오만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부는 탐욕스럽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이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미련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우리의 재산이요 자랑이 되게 합시다. 자랑하지 않으며 열심히 행하는 사랑이 우리의 진정한 자랑이 되게 합시다. 저는 얼마 전 "새문안적인"이란 단어가 사전에 오르는 일이 있게 되기를 꿈꾼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문안적"이라는 말이 갖게 되기를 바라는 여러 뜻들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이란 뜻이 포함되기를 꿈꾼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 이 것은 진정 제가 소망하며 기도하는 제목이며 제 목회의 비젼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만드실 때 가지셨던 목적이며 하나님나라의 본질 그 자체였습니다. 인류역사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건넨 최초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였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을 저는 "당신은 내가 강할 때에나 내가 약할 때에나 변함없이 나와 함께 할 나의 생명이요 나 자신입니다"라는 고백과 서약으로 이해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 말은 "건강하든지 연약하든지 언제 어디서도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라는 다짐과 선언인 것입니다. 인간의 함께 사는 삶은 이렇게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서로를 자기 자신과 같이 소중히 여기고 서로에 대하여 사랑과 성실과 헌신을 다짐하는 말과 함께 시작된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단지 부부사이에서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사람 사는 도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회복하고자 하셨던 일도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일으키신 오순절 초대교회도 그 무엇보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먼저 우리들 안에서 사랑이 충만하고, 그 사랑이 넘쳐흘러서 이 사회와 온 세상을 채우는 그런 교회를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첫 머리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는 사도 요한의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11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신다는 진술에 이의를 달 신자는 아무도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기에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이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에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 후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나름 열심히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선언했다. 하나님과 사랑을 완전한 동격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할 때는 인간의 사랑 행위와 마찬가지로 당신만의 뜻과 계획을 갖고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 된다. 그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있을 때도 있으며 심지어 미워하는 생각과 행위를 할 때도 있다는 뜻도 당연히 포함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사랑 자체가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에게 사랑 외의 속성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신자를 향해 행하시는 모든 보호, 인도, 간섭, 동역 전부에 사랑의 뜻과 사랑의 과정과 사랑의 결과가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 된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고, 아니 그 전에 택하시고 준비 양육하셨다가 성령으로 간섭하여 거듭남의 은혜를 통해 영생을 주시고 구원 이후의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오직 사랑으로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진술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된다. 인간을 포함한 어떤 피조물도 그 존재의 정체성을 한단어로 혹은 가장 잘 묘사할 때에 사랑이라고 할 수는 절대로 없다. 인간의 사랑만 해도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얄팍하고 치사하며 부족 부적절 불합리하며 비상식적인가? 일관성조차 눈 닦고 찾으래야 찾을 수 없고 상대와 여건에 따라 그저 럭비공처럼 제멋대로 튀지 않는가?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객관적으로 그 사랑의 특성을 아무리 잘 규정짓는다 해도 이미 불충분한 진술일 수밖에 없다. 또 어떤 진술이라도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심지어 그분에게 모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제한되고 어리석은 이성으로나마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감히 설명해보기로 하자.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그분의 사랑에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사랑 그 자체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궁한(無窮, everlasting) 사랑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무궁하려면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치의 가감 수정 왜곡 타협 포기가 없어야 한다.
그분 당신께서 사랑이기에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이 발현된 것이 아니다. 요한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해서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 것이다. 사랑은 먼저 아무 조건 없이 전혀 사랑할만한 상태가 아님에도 사랑해야 참 사랑이다. 바꿔 말해 당신을 사랑하는 자만 사랑해주면 사랑이 아니다.
영원하신 사랑은 그 사랑의 질과 양에서 변함이 일절 없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분이 사랑이라고 하는 말을 잘 음미해보라. 그분이 만약 사랑을 끊으신다면 당신의 당신 되심도 끊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잃기에 더 이상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우리도 더 이상 경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로 온전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전부를 바쳐 경배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끊으면 하나님의 정체성 자체가 상실된다. 그럼 우리가 문제, 실망, 좌절, 상처, 고난,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거나 침묵 내지 부재하는 것 같다는 의심 불만 불신은 아예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그분의 사랑이 실종 변색 퇴색 되면 이미 그분이 아니다. 우리 믿음이 존립 유지할 근거가 상실된다. 만에 하나 우리 고난 가운데 그분이 우리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손을 놓고 있거나 아예 침묵하고 있거나 외면하고 있다면 그분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죄인 즉, 당신을 배반 거역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당신의 독생자를 죽일 만큼 우리를 사랑했다.
인간도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다. 자식과 친구를 살리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자들이 많다. 심지어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어린이나 노약자를 대신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원수를 대신해서 죽는 것은 외부적으로 불가항력적인 강압이나 여건이 조성이 되지 않는 한, 다른 말로 결코 자의에 따라 기꺼이 죽지는 않는다. 원수는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한다. 도무지 그럴 형편이 안 되면 모른 척 외면한다. 아주 의로운 사람이라도 용서해주는 대상은 되나 원수 때문에 나아가 원수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다르다. 원수의 죄는 아주 미워하시나 원수인 인간은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또 그 원수를 반드시 거룩한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시킬 계획과 능력이 있기에 하나님은 원수를 대신해서 죽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어서든 만에 하나 정말로 원수 대신에 죽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원수를 완전히 새롭게 바꿀 능력은 인간에겐 없다. 그러기에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원수를 위해 죽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자원하셨다. 단순히 죽음을 자원해서가 아니라 그럼으로써 당신과 원수 된 자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기에 죽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또 바로 그런 사랑은 하나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사랑은 인간의 지성으로 한계를 지을 수 없다. 측정이 불가능하다. 증명도 할 수 없고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연약한 믿음과 너무나 어리석은 영적지혜로는 온전한 추적마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없기에 그저 은혜를 받아드리고 누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구체적인 측면을 헤아리려고 노력은 마땅히 해야 하지만 우리 이성과 믿음 안에 그분 사랑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그 전부를 완벽하게 포용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너무나 확고한 진리이다.
이 진리를 바탕으로 인간은 그 분 사랑을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 헤아릴 수밖에 없다.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헤아려야 한다. 또 그렇게 헤아린 만큼이라도 사랑을 제대로 절감하고 체험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 그냥 단순히 그분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너무나 평범한 믿음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하나님 그분이 사랑이라는 이 진리까지는 알지 못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만큼만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네 가지 차원에서 즉,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잘 깨닫게 되기를 바울은 기도하고 있다.
사랑이 넓다는 것은 주님이 사랑을 베풀 대상에 관한 차원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과 모든 장소에 그분의 사랑이 임한다. 주님의 사랑이 임하지 않는 사람, 사건, 장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의 사랑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피조물과 피조세계는 단 하나도 없다.
길이는 사랑이 미치는 시간의 차원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그 사랑은 유효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3:8 & 10:14)
사랑의 깊이의 차원은 그 질을 대변한다. 특별히 죄의 지극히 깊은 수렁에 빠진 인간을 구원해내시는 그분의 사랑이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40:2) 또 하나님의 인간과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과 섭리 또 죄인을 구원하시는 비밀의 경륜을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깨닫게 만드시는 사랑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마지막 높이의 차원은 우리가 도무지 도달은커녕 측정할 수조차 없는 사랑의 능력이다. 갈보리 정상 위에 우뚝 선 십자가를 넘어서 하늘의 보좌에까지 이르는 그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사랑은 바로 십자가상의 살인강도도 회심시켰듯이 어떤 흉악한 죄인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온전히 부어지면 그분의 거룩한 자녀로 변화되지 못할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1-6)
다윗은 하나님 사랑의 네 차원을 가장 정확히 표현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신 능력만 찬송한 것 같다. 그분의 앎에서 벗어날 것은 신자에게 단 하나도 없다고 했다. 앎이란 관심을 갖기 전에는 생길 수 없다. 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렇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분의 앎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에서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랑의 넓이, 길이, 깊이, 높이는 도무지 측정할 수 없다. 한계가 없다.
그래서 다윗은 이 지식이 내기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나를 아는 지식의 사차원은 우리가 상상도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와 동시에 그분이 나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 깨달음 하나만으로도 자신에게 너무나 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감히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한다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그분의 사랑은 그냥 너무 기이할 뿐이다. 너무 넓고 길고 깊고 높을 뿐이다. 그래서 도무지 능히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그분을 아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이 우리를 아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는 것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 이 진리 하나만 깨달아도 너무 귀하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출발이자 끝이다. 그 사랑은 바로 예수 십자가다. 그래서 예수가 처음이자 끝이다. 믿는 자의 전부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다윗의 고백은 너무나 정확하다. 그분의 사랑은 기이하다는 말 이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엄밀히 말해 사랑을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과학적 논문으로 분석은커녕 객관적 기사형식으로 설명될 수도 없다. 실험하여 원인과 결과를 알아내거나 자료를 수집하여 평균치를 계산해낼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사랑은 그저 느끼고, 체험하고, 누리고, 실현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는 사랑을 알 수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가 아니라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이 되신다가 옳은 표현이다. 그분은 사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두에 한 말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사랑에만 바탕을 둔다. 그분에게서 사랑을 빼면 그분이 안 된다. 어폐가 있지만 그분의 모든 속성에서 혹시라도 다른 것 한두 개 빠져도 그분의 완전하심에 하자가 안 생길 수 있지만 사랑을 빼버리면 그분다우심이 크게 손상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존재조차 못한다.
이런 그분의 사랑을 우리는 측정을 못한다. 계산을 못한다. 단순히 꿈꾸고 소망하고 기대할 뿐이다. 가슴에 가득 찬 기쁨과 떨림과 설렘으로 말이다. 그분의 사랑은 측정이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 한 가지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한 기준이 되는 잣대는 주셨다. 바로 골고다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넘어서 하늘에까지 올라가 그분의 사랑을 잴 필요는 없다. 십자가 사랑으로 당신이 사랑임을 완벽하게 보이셨다. 십자가 사랑 안에만 제대로 거하고 그 사랑을 누리고 주변에 실천하는 신자에게 두려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 앞에 세상의 어떤 죄악 흑암 사탄 사망의 세력이 바로 서지 못한다.
그 십자가 사랑을 정말로 받았다면 또 그래서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제대로 안 다면 이웃에게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요한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나눔이다. 사랑을 설명 설득 권유하지 말고 단순히 누리고 체험하고 나누라는 것이다. 실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을 그 외에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 그분은 사랑이다. 온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는 그분 외에는 이 우주에 없다. 모든 선한 것은 그분께로만 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를 넘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차원으로 그분의 사랑의 넓이 길이 깊이 높이를 잴 줄 알고 온당하게 반응할 줄 아는 실력이 참 된 영성이다.
요한일서 4:7-13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앞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음을 증거했습니다.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지를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절)]
[(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교회 공동체를 향해 사도 요한이 계속해서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하는 것은 실제로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사랑함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씀은 우리의 머리에만 머무는 말씀이 아닌 우리의 마음과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체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사랑'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지 못해 서로 무관심하고, 서로를 시기하며, 서로 경쟁하고, 서로 반목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 애타는 마음으로 "제발, 제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제발 좀 서로 사랑하자"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수만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다 덮고도 남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의 하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이 곧 '사랑 그 자체'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아닌, 사랑해야 하는 이유로 가득하십니다. 죄인 된 우리로서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다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은 이유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모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녀가 말썽을 부리고, 부모의 속을 썩여서 사랑하지 않을 수만 가지 이유가 있을지라도, 여전히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넘어 '사랑'이십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모든 참된 빛의 원천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의 시작 되시며, 원천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 즉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며, 진정한 사랑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께 속한 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은혜를 값싼 은혜로 왜곡시키시고, 조건적인 '사랑'으로 전략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인지,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인지를 구분하며, 사랑받을 대상을 구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받을 자격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본성도 사랑이기에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8~9절)]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버리신 행동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완벽한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좀 더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증거합니다.
'나타난 바 되었으니'로 번역한 헬라어 '파네로오'는 요한일서의 시작 부분에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묘사할 때 사용된 바 있습니다. '우리에게'란 문자적으로 '우리 안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가 부인할 수 없도록 분명하게 나타났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근거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엄청난 결정인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생자'라는 단어에서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독생자'는 '유일하게 태어난, 단 하나의'라는 의미를 가진 '모노게네스'와 아들이라는 의미의 '휘오스'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NIV 성경은 이를 'one and only Son', 즉 '오직 하나뿐인 아들'로 표현했습니다.
많은 아들 중 한 아들이 아닌 '오직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아들, 둘도 없는 아들, 나의 생명보다 사랑하는 아들, 유일한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지 않을 셀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이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이유로 인해 '오직 하나뿐인 아들', '유일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유일한 아들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기 위해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이삭과 함께 길을 떠났으며, 아브라함은 그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급히 막으셨으나 아브라함은 이미 마음에 유일한 아들 이삭을 죽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유일한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을 때 이미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이제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의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이유를 우리 안에서 찾으려 할 때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사랑의 이유가 없을뿐더러 우리에게서 나온 '사랑'이라는 표현은 늘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통해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사랑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고자 결심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덤벼드는 원수들과 반역자들 그리고 잃어버린 죄인들의 세상에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로 결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속해 있습니다.
유일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행하신 구원 사역입니다. 오직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범죄함으로 인한 형벌과 진노를 모두 감당하심으로 우리 안에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누가 십자가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신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뜻하지 않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고난이 우리에게 폭풍처럼 몰아닥쳐 올지라도,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며 안타까워하며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나에게 닥쳐온 것만 같고, 이별의 슬픔과 억울함과 비통함과 답답함에 함몰되어 눈물과 한숨이 우리의 주식이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를 위하여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화목 제물 삼아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11~13절)]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에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만 가지 이유가 가득할지라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만으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땅하도다'로 번역한 '오페일로'는 문자적으로 '빚지다'라는 뜻으로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혹은 '은혜를 입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서로 사랑함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추가적으로 행해야 할 요소가 아닌 사랑의 아버지 앞에 실천할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함으로 사랑을 쌓아가는 사람이 아닌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심으로 사랑의 빚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녀 삼으시기 위해 지불하신 무한한 대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만 가지의 이유가 내 안에 넘치고,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그때가 사랑해야 하는 때입니다. 먼저 사랑하십시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함께하심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나무에서 잘라져 생명력을 잃고 메마른 가지와 같았던 우리가 포도나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며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죄에 종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주신 넓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넘치며, 그 은혜가 크고 놀랍기에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하지 않을 수만 가지 이유가 내 속에 올라올 때에, 그래도 사랑해야 할 한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사랑함으로 사랑이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사랑이신 하나님, 우리는 참 다양한 이유로 서로 사랑하기를 거부하며, 사랑할 사람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 그리고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에도 우리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날마다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 포도나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사랑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랑하지 않을 수많은 이유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씀이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7-8절)?
2.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우리가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9절)?
3. 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의무가 됩니까(11절)?
4.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12-13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요일 4:7-11 / 이영훈 목사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일서 4장 7절로 11절 말씀을 가지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랑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 스스로, 우리 힘으로 하는 사랑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가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우리에게 임할 때만이 그 사랑을 가지고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바 된 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인류 역사 최대의 기적이요, 가장 큰 기쁨의 사건이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33년 반을 거하시면서 때때로 굶주리시고 때때로 피곤하고 지친 몸을 어디 쉴 때가 없어 많은 고생과 어려움을 친히 감당하시고, 또 우리의 아픔에 동참하셔서 그곳에 가셔서 함께 우시고, 마지막에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의 신분으로 붙잡혀서 옷을 찢기고 채찍을 맞고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아 오늘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갚을래야 갚을 수 없는 큰 은혜, 그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은 남은 여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아야 되고,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불쌍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을 우리 마음 가운데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 사랑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첫째로 사랑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로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적인 사랑은 굉장히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항상 사랑을 베풀면서 많은 기대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이렇게 해줄 것이다.’ 그런데 기대한 것이 자기에게 채워지지 않을 때는 사람에게 실망을 합니다. 또 불평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고 또 주고, 또 주고, 그리고 기대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구원받고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사랑하며 살아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하지 아니하면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언제 죄가 시작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났을 때 죄가 인류 역사 가운데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축복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지으셔서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며 살면 그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늘 함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났습니다. 죄짓고 불의하며 타락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와 절망이 들어오게 되었고 두려움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 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런데 주님의 품을 떠나니까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이 두려움입니다.
창세기 3장 9절로 10절을 보면, 야훼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 지은 인간에게 다가온 것이 두려움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마르코스 윗의 ‘두려움을 이기는 영혼’이란 책을 보면 세계를 재패했던 대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어두움을 두려워했다고 그랬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왕 앙리 3세는 고양이를 두려워했대요. 그 위대한 왕이.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장미꽃을 두려워했구요, 유명한 투우사인 세자르 린콘은 황소의 뿔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쥐 앞에서는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일곱 가지의 두려움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요, 셋째는 자기 약점이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이요, 넷째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두려움이요, 다섯째는 생각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두려움이요, 여섯째는 말에 실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요, 일곱째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시시각각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두려움이 골고루 다가오는 흑암의 세력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 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삶을 살던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그 사랑으로 회복할 때 두려움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문제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할렐루야. 이 세상 그 어떤 권세도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책인데 두려움에 떠는 그러한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그 절망의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 가장 먼저 붙들어야 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각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모순되어 보이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향한 완벽한 신뢰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모든 문제를 다 물리치고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을 이 시간 물 붓듯이 부어 주옵소서. 내가 그 사랑 안에 잠기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그 바다에 빠져 헤엄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으로 인하여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우리는 어떠한 문제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게 됩니다.
2.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둘째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왜?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손을 뻗어서 우리를 잡아 주실 때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우연히 온 것 같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그 사랑의 손으로 붙들어서 구원하셔서 오늘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죄와 절망 가운데 살아가던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절대 희망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사랑하셨다. 이 ‘이처럼’ 이란 말은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할렐루야.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구원의 조건이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우린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죄 지은 인간을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죽게 하시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를 그 사랑의 품에 안으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합니까? 물론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전혀 모르는, 아니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이 놀라운 사랑은 우리가 그 어떤 사랑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이 기적적이고 인류역사상 최대 은혜의 사건으로 예수님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죄와 절망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 주위의 사랑하고 병들고, 문제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4장 19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서 손을 뻗어서 우리를 붙잡아 죄 가운데 살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죄와 사망 가운데 살고 있던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이 사건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 구원받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사건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생은 그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일생이었어요. 모든 사람이 살기위해 태어났지만 예수님 한 분만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 위하여 태어나셔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셔서 죄 많은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 일생 다가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러시아에 우수리스크에 가서 선교하다 순교하신 김창식 선교사님 계십니다. 온 가족과 함께 선교에 꿈을 품고 1996년 러시아에 우수리스크로 건너가십니다. 열심히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4년 만에 2000년 8월 순교하셨는데요. 평소와 같이 교회에서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고 가족과 함께 나오는 중에 마침 그 교회 앞에서 현지 고려인과 싸우던 러시아인 안드레이가 그 고려인을 놓치고 목사님이 나오니까 같은 동료인지 알고 우리 고려인이 우리 한국사람들 아닙니까? 그 모습만 보고 칼로 찔렀어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해서 빈민을 위한 무료급식과 또 장학재단을 통하여서 거기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공부시키고 땅도 1천 평 마련해서 이제 교회를 짓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간지 4년 만에 그 많은 일을 한참 전개하실 때 그 안드레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칼에 찔려 순교한 것입니다. 바로 그 부인되는 박은희 선교사와 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칼에 찔려 죽은 거예요. 그 형님도 목사님이신데 동생의 순교소식을 듣고 급히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 그 김안식 목사님이 서울에서 날라왔습니다. 사랑하는 동생 김창식 선교사를 우스리스크 공원묘지에 안장하고 바로 그 감옥을 찾아가서 자기 동생을 죽인 그 죄수를 면회신청을 했습니다.
그 러시아인은 28세로 전과 2범이면서 약물중독자였어요. 그분이 나왔을 때 통역을 세워서 자기가 누군가를 그에게 소개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죽인 사람의 형이요. 그리고 묻습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건 죄가 아닙니까?’ 그 안드레이 살인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예, 제가 죄인입니다. 저의 어머님은 크리스찬입니다. 정교회 교인인데 제가 이렇게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감옥에 잡혀올 때부터 제가 엉뚱한 사람을 죽인 것을 알고 그 분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김안식 목사가 말합니다. ‘내 동생 김 선교사가 이곳에 가난하고 병들고 당신같이 방황하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그 안드레이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형 김 목사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아우를 대신하여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왔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신을 용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용서를 비는 한 강도를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김 선교사도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새롭게 살아가십시오. 김 선교사가 못 다하고 죽은 삶을 당신이 살아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위해 기도해드리겠습니다.’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하니까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습니다. 그분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니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마지막 그 죄를 예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니까 같이 아멘하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위대한 사랑이 한 죄수를 한 살인자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갑자기 남편이 순교했을 때에 참 순간적으로 앞이 아득하고, 모든 힘이 빠지고,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고통이 다가왔던 그 사모님 박은희 선교사는 슬픔을 뒤로하고 ‘이 땅에 뼈를 묻자 서로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나도 이 땅을 지키자’했던 남편의 말을 기억하면서 남편의 뒤를 이어 열심히 그 땅에서 남편의 사역을 뒤이어가면서 교회를 건축하고 선교센타를 세우고 선교열정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심한과로로 또 암이 급속도로 악화되서 남편을 떠나보내고 10년이 지난 2010년 9월 작년 9월달에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여기서 그 선교사역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 둘이 있는데 큰아들 21살 둘째아들이 18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어머니 아버지를 이어서 저희들이 이 땅에서 뼈를 묻겠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살아있는 곳, 부모님을 잃은 땅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 부모님 못다 이룬 그 일을 이어나가겠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이 한 가족을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이렇게 받은 자로서 이제 남은 여생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될 것입니다.
3. 사랑을 실천하는 삶
마지막 셋째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이 이같이 독생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데 말씀하기를 이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 입으로만 사랑사랑 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요. 말로는 사랑합니다. 뒤돌아서는 비판하고 흉보고 전혀 사랑과 관계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오늘 이후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기 바랍니다. 이제는 입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5장 2절로 3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주의 말씀을 지켜 행하려면 수고와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지, 이것이 우리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요.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라헬을 아내로 얻으려면 7년 일을 하라고 그 외삼촌 라반이 말을 하니까 7년을 몇일 같이 일을 했다 말했어요.
창세기 29장 20절에,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 돈 한 푼 받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가지고 사랑하는 아내를 맞이하게 됐는데 그 7년을 몇일 같이 여겼더라. 사랑에는 수고와 희생이 따르지만 그 희생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 인한 희생입니다. 감사로 인한 희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그 희생이 내 삶속에 희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쁨으로 하니까, 내가 감사함으로 하니까 할렐루야.
어느 부인이 결혼해서 남편과 살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고 빨래하고 저녁에 밥하는 것 때문에 ‘아이구, 지겨워 죽겠다. 남편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럴 부인이 어디 있어요? 사랑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도 짓고, 설거지도 하고, 또 맞벌이 부부로 나갔다와서 피곤하면서도 또 집에 들어와서 또 음식을 차리고 음식을 차린데 잘만 먹어주면 너무 고맙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이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희생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이 전국에 구세군 자선냄비 이제 모금활동이 시작되는데 많은 분들이 나와서 수고를 하고 또 많은 시민들이 기쁨으로 참여를 해요. 이것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참여를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올해에 그 이 모금한 분중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분이 1억천만원을 헌금을 했는데,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물질을 드렸을 것입니다. 왜? 주님 사랑하니까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드리고 또 드려도 아까운 것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진짜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부터는 주님 앞에 희생하고 베풀고 나누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던지 참 영적인 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않은 것을 알았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기념적인 일을 행할 수 있을까? 내 가진 것 전부를 주님께 드리자. 그래서 자기가 지금까지 모아왔던 모든 재산, 이스라엘 처녀들이 시집갈 때 꼭 결혼지참금으로 가져갖던 그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부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옆에서 꾸짖었습니다. 비싼 돈을 낭비한다 그랬습니다. 한 삼백 데나리온쯤 된다. 그랬으니까 일 년 동안 벌은 돈 먹지 않고 쓰지 않고 모은 돈 다 합친 금액 꽤 큰 금액입니다. 그걸 갖다가 예수님한테 부은 거예요.
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마지막으로 그 죽으심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복음이 증거 된 곳에 이 여인의 한 일이 기억되어질 것 이라고. 그 희생이 아주 귀한 희생이었어요. 값진 희생이었어요. 주님의 마음속에 큰 위로를 준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감격하시고 큰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됩니다. 먼저 우리 이웃과의 얽혔던 잘못된 관계를 해소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5장 23로 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가 이웃간에, 믿는 성도들 간에 갈등이 있고 아픔이 있고 미움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우리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되야 되는데. 오늘날 우리 교회문제가 무엇입니까? 부흥하는 교회마다 악한영이 들어와서 자꾸 교회를 흔들어서 싸우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이 매스컴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면 불신자들이 또 교회를 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여주옵소서. 서로 용서하고 화목하고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마가복음 12장 33절에,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요한일서 4장 20절로 21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러분 여기 형제는 우리 믿는 성도를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끼리 뜨겁게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됩니다. 뜨겁게 우리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지금 천국가신 외과전문의 박준철 집사님 계십니다. 이분의 간증으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하나성심병원에 일반외과 과장이었던 박준철 집사님, 평소 돈벌이 보다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집사님입니다. 2001년 경남 창원에서 외과병원을 개원하면서부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해서 매달 교회의료봉사단과 함께 나와서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매년 자기의 휴가를 반납하고 의료선교를 통해서 해외에 나가서 많은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2007년도 하나성심병원 일반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더욱더 열심히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2009년에는 국제의료봉사단체 Mercy Ship에 한 달 동안 승선해서 아프리카에 가서 환자들을 돌보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올해 10월 달에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긴 것이 있어요. “내 인체조직을 필요한곳에 다 나누어주어라”
그래서 15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인체를 나눠주었어요. 원래 장기이식을 하는 것은 신체 일부만 띠어줍니다. 그런데 이 인체 조직기증은 온몸을 다 해부하기 때문에 그 기증하는 걸 꺼려해요. 왜나하면 뭐, 피부 뼈 연골 혈관 온몸이 훼손되기 때문에 2005년 이후 인체조직 전체를 기증한 사람은 불과 600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의사로서는 처음으로 “내 몸을 다 해부해서 필요한 사람을 나눠주라고” 그래서 150명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 병원에 한 근무자가 말합니다. “박준철 과장님은 아프리카 해외의료선교에서 만난 아이들과 사람들을 위해 점심을 금식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전문의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19살인데요. 혜진이 이 딸도 선교훈련을 받고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아프리카 모잠비크에 봉사활동을 다녀왔습니다. ‘아버지가 삶을 통해 보여줬던 것처럼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가난과 질병, 꿈도 희망도 없는 그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선교를 행했던 그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뒤따라서 그 선교사역을 실천하고 있는 그 딸 혜진양, 이것이 바로 사랑실천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에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은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 십자가의 신앙을 마음에 붙잡고, 사랑의 실천자로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갚을래야 갚을 수 없는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남은 여생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위에 불쌍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웃고 울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모두가 이와 같은 사랑의 실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