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믿지 않지만 교리는 잘 짜인 직물같다는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사바세계에 사는 인간은 성불하지 않는한 죽을때 까지 괴로움의 연속이며, 괴로움의 바다인 고해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고해에서도 인연은 질겨 사람은 인연따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는 것에 이르면 고개가 끄떡여 진다.
내가 그녀를 만난건 작년 10월 하순.낙엽이 질 때였다.
Y역인근 빌딩 2층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는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커피를 한입에 털어넣고 그녀의 뒤를 따가가며 왜쳤다.
"저, 한번 잡아 주실꺼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 그래요." 하며 그녀는 웃었다 . 나도 따라 웃었다.
얼마전인지 모른다.
난 그녀와 부킹이 되어 춤을 추었는데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있었던 터이라 그녀를 보자마자 쉽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40살이라고 했다. 키가 적고 아담했다. 잘생긴 인상은 아니나 날씬했다. 운동을 잘했다.
그녀가 운동을 잘하는 것이 나에게 큰 매력으로 닥아왔다.첫 만남에서 난 짜릿한 쾌감을 느겼다.
이렇게 잘 할 수가!
나와 손을 잡으면 그녀는 마치 나비와 같았다.
음악이 있고 율동이 있고 , 율동은 상호간의 미약한 신호에 의해 움직여 진다.
맞잡은 손과 발이 밀고 당김에 의해 움직여지고 박자가 딱딱 맞아 떨어질 때, 시계태엽이 맞물려 돌아 가는것 같다.
무도장엔 나보다 젊고 잘 생긴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기꺼이 나의 파트너가 된것은 그녀와 발이 맞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나의 매너와 정성에 감동한 탓이리라.
난 나보다 한참 어린 그녀에게 교과서처럼 깍듯이 존칭했으며,
그녀를 최대한 배려했고 마음 편하게 대해 주었다.
무뚝뚝한 내가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란 존칭은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왜? 그녀가 프로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회악이지 않는 한 모든 부문에서 프로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가 있다니! 그녀와 나는 너무나도 잘 맞았다.
한 번 쉬지도 않고 3시간 넘게 스텝을 밟다니!
나 자신도 돌아보고 생각하니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만남이후 안면이 익으면서 만나는 회수도 늘어 갔다.
그녀와 나는 일주일에 5번씩 만났다.
매주 수요일이면 오후 1시에 만나 식사 하고 탁구장에 가 1시간 정도 탁구도 쳤다.
그녀는 탁구도 잘 쳤다.
백 핸드에서 막힐뿐 포어핸드 스맷싱에서는 막상막하였다.
그러니 자연 긴장하지 않을 수없고 실수라도 하면 그녀는 깡충거렸고 나는 웃고 떠들었다.
특히 나의 웃음소리는 너무 커 탁구장이 떠나갈 둣하여 주위의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 오후 2시 반 쯤, Y무도장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시간에 입장해서 우리 둘이 손을 잡으면 오후 6시 사람들이 다 떠날때 까지 우리는 열중했다.
그리고 우리는 제일 마지막에 자리를 떴다.
그러면 무도장에서의 운동시간은 3시간 반 이다.
무도장을 나오면 그 때에 다리가 피곤하다는 것을 느낀다.
헤어지기전 커피숍이나 생맥주집에서 한 잔 하면서 쉬다가 집으로 갔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못해 내가 생맥주 마시는 동안은 마른 안주로 나의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나날이 즐거웠다.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하는듯 했다. 수근 수근 대는것도 같았다.
우리는 비 대칭의 한 쌍이었다.
나의 외모나 나이로 보면 그녀와 객관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50중반을 넘은 나와는 달리 그녀는 40초반 이었지만 훨씬 젊어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생머리가 그녀를 나이를 30대로 보이게 까지한다.
흔히들 말하는 아담사이즈였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 쉬지도 않고 춤을 추니 주변 사람들은 우리의 비대칭에 놀라고,
우리의 스테미너에 또 한번 놀랐다.
생각해 보시라 ! 3시간 넘게 쉬지않고 계속할수 있는 운동이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재미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 마시는 시간도 아까웟다. 탐닉했다는 말이 맞으리라.
난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생긴것도 없이 나이만 먹은 내가 이 무도장에서
제일 젊고 춤 잘하는 여자와 한 쌍이 되었으니 만족감은 충만했다.
사람들은 지켜보는 눈이 있어 우리들 사이를 애인이라고 하였다.
난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햇다.
일례로 우리들이 조금 쉬려고 나란히 앉아 있을 때면 젊은 남성이 나에게 닥아와서 묻는다.
" 저, 한번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그녀에게 묻지않고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내 두손을 그녀의 턱아래 받치면서 허락했다. 남자는 나보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녀는 일어나 그 남자와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예뻤다.
그러니 내가 잠깐만 자리를 비우면 그녀의 주변엔 남자들이 몰려 들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y무도장에서 댄싱 퀸이었다.
누구와도 발을 잘 맞춘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두 다 그녀를 원했다.
그녀도 나에게 실토했다. 자꾸만 귀찮게 추근대는 남자가 있다고.
어느날 그녀의 모습이 뾰루통해서 물었다.
"어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한참을 졸라대니 그녀는 말했다.
"스토킹하는 남자가 있어요. 싫다는데 자꾸만..."
그 날도 복도에서 만난 남자가 추근대길래 한 번 쏘아좃단다. 그래서 기분 나쁘다고 했다.
난 그녀에게 인기가 많은게 탈이라고 위로했다
.
나는 그녀가 하도 잘해 물어보았다.
"배운지가 얼마나 되었어요?"
" 얼마되지 않았어요."
나는 놀랐다. 얼마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잘할수 있단 말인가!
처음 1달 문화교실에서 기초를 배웠다고 했다.
그런 다음 이 무도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실습하면서 배운게 다라고 했다.
그래도 궁금해서 또 물어 보았더니 학창시절에 운동을 했다고 하였다.
"무슨 운동 하셨나요?"
하고 물었지만 부끄럽다며 정확한 언급은 안해 주었다. 그러나 달리기는 잘한다고 말했다.
어머니 배구대회에 나가면 주전선수로 뛰었다고 하나 키가 작아 전위에 선것 같지는 않았다.
"아,하, 그렇구나! "
운동신경이 발달한 분이니 역시 이 분야도 탁월한 운동신경으로 남자를 사로 잡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발의 위치가 정확했으며, 유연한 몸동작으로 남성파트너가 편안하고 재미있게 느끼도록 끌려왔다.
내가 그녀를 만난건 작년 10월 말 쯤이었다.
난 그 때 사업에 실패하고 백수생활을 하던때라 시간이 많았다.
백수의 삶은 무의미했다. 생각끝에 무엇엔가 도전 해보고 싶었다.
남아도는 시간에 TV시청이 많았던 나는 KBS의 3대 퀴즈프로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공영방송인 kbs는 1tv에 <퀴즈 대한민국> , <우리말겨루기>,
2tv 에 <1대 100>이란 퀴즈프로가 있었다.
평소 퀴즈 프로를 좋아하던 나는 이 3대 프로에 모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준비를 시작했다.
내 나름대로 과목별로 내가 알고자하는 문제를 노트에 적어나갔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원소기호, 세계 모든나라의 위치와 수도,
한국의 나무, 꽃이름, 한국의 새 ,
암석의 종류, 보석이름과 빛깔, 이런 식으로 추리다 보니 중학교 교과과정이 다 들어갔다.
역사,지리는 기본이고 음악,미술,체육, 거기에다 시사 문제, 영화까지 추가 되었다.
퀴즈 문제는 어디에서 출제될지 범위가 넓어 인문 교양과목의 총집합체나 다름없다.
난 차근차근히 색인하고 노트하여 대학노트 한 권 분량의 암기문제를 추려내 3번 정도 들여다 보았다.
기억력이 퇴보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부족함을 나이라는 경륜으로 대체코자 했다.
<우리말 겨루기>를 준비할때는 미농지로 두께 10cm의 국어대사전을 다 훑어 넘기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도 목표를 가지고 공부하는 시간은 삶이 충만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것 또한 보람찼다.
준비기간이 6개월 쯤 되었다.
드디어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예심을 보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공개홀을 꽉찬 젊은이들 속에서 나는
7번의 예심에서 나는 5번을 통과했다. 괜찮은 성적이었다.
<퀴즈 대한민국>과 <우리말 겨루기>에서 2번씩 예선통과하였으나 마지막 인터뷰에서 번번히 탈락했다.
나의 외모나 사연, 언변이 텔레비젼에 맞지 않은가 보다.
그것으로 그만 포기했다.
그러나 외모나 언변과는 별 상관없는 <1대 100>이란 프로에서는 성적순으로 선발되었다.
100인의 한 사람으로.
녹화당일 나는 양복 정장차림으로 45번 자리에 섰었다. 100명 중에 양복차림은 나 한사람 뿐이었다.
그런대로 젊음이들 속에서 실력을 겨룬다는것이 기분은 괜찮았다.
내가 텔레비젼에 출연하다니!
그러나 좋은 기분도 잠시 3번의 기회중 두번이나 1단계 쉬운문제에서 탈락했다.
<은하철도 999> 종착역은 어디?
<뜸뿍새는 어디에서 우는가? >
의 각 1단계에서 탈락해다.
겸연쩍기도 하고 허탈했다.
귀가길에 버스를 타고 오는데 스트레스가 쌓였다.
오늘로 도전은 끝인데 지나간 6개월이 허했다.
한강을 건너면서 강물을 보았다. 강물은 무심한 듯 흘렀지만 그 흐름이 멈춘듯 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y전철역에서 내리면 Y무도장이 있다.
거기 가보자! 10년전에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이거다 싶어 배웠다.
10년 전이면,
그당시 난 한국에서 잘나가는 화이트 칼라 샐러리맨 중의 하나였다.
년봉으로 따져 상위 10%안에 들어 있었다.
서울에서 중형아파트에 승용차가 있고 미인 아내와 중학교와 초등학교다니는 남매를 두고 있었다.
애들도 다 잘 생겼다고 주위에서 입을 모았다.
부러울게 없었고, 골프를 치고 스키를 타며 살았다.
상류층은 아니나 흉내는 내보며 살았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평생에 호기심이 많아 내면의 갈등과 싸우면서 이걸 배웠다.
사람은 도덕적이지 않으면 양심은 언제나 선악의 대치로 싸운다.
내가 배운건 운동스타일이라 그 당시 여성분한테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를 만나 춤을 추니 그렇게 잘 맞을 수 없었고,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아! 참, 느낌이 달랐다. 그녀는 내 몸에 착착감겨 들었다.
이렇게 재미있은 적이 일찍이 없었는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녜, 재미있어요."
반가운 대답이었다. 내친김에 물었다.
" 저,... 괞찮으시다면, 제가 저녁 한 번 사도 될까요?"
" 정말요?"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전화번호를 주고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윤희'라고 했다.
윤희는 내가 하는 춤이 동작이 많고, 신나고 재미있다고 했다.
우리는 통화보다는 주로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말이 서툰 나에겐 문자메시지가 오히려 편했다.
딩동"하는 휴대폰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고 휴대폰을 열면
"문자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란 문구가 밝게만 보였다. 비밀번호를 눌러 수신함을 열면
"뭐해요?"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이 찍혔다. 그러면 난,
"양치하고, 샤워하고 화장하고 준비끝, 시간을 죽이고 있슴."
이라고 전송하면 이내 답이 온다
" 저두요, 그럼 이제 출발하셈."
우리가 만나는 곳은 그녀가 사는 동네와 내가 사는 동네의 중간쯤이었다.
작년 10월에 만나 우리는 그렇게 신바람이 났다.
탁구도 치고 춤도 추며 산책도 했다. 산책은 주로 탄천을 거닐었다.
탄천은 경기도 용인에서 시작한 물이 성남시를 가로 질러 잠실운동장 어귀에서 한강물과 합쳐진다.
'숯'탄자의 탄천은 이름 그대로 물이 흐렸다. 물 가까이 가 앉으면 냄새도 난다.
산책길에 탄천의 유래라는 안내판을 읽었다.
글의 내용은 삼천갑자 동방삭이에 대한 전설이다.
중국사람들은 대국답게 스케일이 커선지 허풍도 세다.
삼천갑자라면 계산상으로 180,000년인데, 인간의 역사는 고작 10,000년 정도이다.
염라대왕은 동방삭이 너무 오래살아 잡아가야 되는데 어디 숨어 있는지 도무지 나타나질 않자,
사신이 궁리끝에 유인책을 썼다.
강가에서 검은 숯을 계속 씻고 있었더니 , 그제야 키 크고 건장한 체구의 동방삭이 나타나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 허허, 내가 삼천갑자를 살아도 숯을 씼는 사람은 처음보네."
그렇게 자신을 들어내는 바람에 잡혀갔다는 중국의 전설인데, 이름이 '숯'탄자의 탄천이라고 해서
중국의 것을 끌어와 썼다는 것을 내가 설명해 주자,
그녀는 홱 돌아서면서 "호호호"하고 웃었다.
가끔씩 우리는 운동을 마치고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난 후면 탄천변을 걸어서 그녀의 동네 가까운 곳에서 헤어졌다.
나는 그녀를 최대한으로 배려했다.
주위의 시선에 대한 배려도 했고, 먹고 싶은것을 물었으며,
식당도 깨끗한 데를 찾았다. 맛집을 골라 다녔으며 매번 메뉴를 바꾸었다.
어떤때는 사전 답사까지 했다.
그렇게 공을 들였다. 그녀를 위해 쓰는 돈은 아깝지가 않았다.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선물도 사주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만남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고민을 하는것 같았다.
우리의 만남에 대해 회의하는 것도 같고, 나이차에 대한 의문도 가지는것 같았다.
그녀는 나의 주민증번호 앞자리만 이라도 보여 달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나이를 속였기 때문이다. 15년 차이는 너무 많다싶어 5년을 깍었다.
아내의 나이를 내 나이로 둔갑시켰다.오년을 깍으면 내가 아내와 같은 나이인 50대 초반이 된다.
나는 50대 초반이라는 것과 50대 중반이라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녀와의 나이차는 10년이 된다.
남녀사이에 그 정도는 익스큐즈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나에게 사랑주면 보여 주겠노라고 했다.
그녀가 회의를 가질 대 나는 매달렸다.
나를 갖고 놀아도 좋으니 만나자고...
내가 당신을 즐겁게 하는 삐에로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자메시지로 연시를 날렸보냈다.
밤을 새워 쓴 자작시도 있으나, 근래 활동중인 젊은 시인의 사랑시를 연방 날려 보냈다.
모두가 그녀를 칭송하고 사모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 구절 소개하면,
"그대가 밀어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일이었다는 듯이 "
내가 그녀를 만나 느끼는 감정이 그랬다.
그랬더니 그녀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 시인이신가요? 아님 ,좋은 글인가요. 뜨거운 사랑이 느껴져....
마음의 표현이라면 접수하겠어요."
그렇게 위기를 모면하고 우리는 더욱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만나서 즐거워 했고 행복했었다.
헤어질땐 지하철에서 서로 마주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녀와의 6개월은 꿈같은 나날이었다.
이 나이에 20대 청춘의 사랑감정을 느끼다니...
고개숙인 나의 남성도 그녀를 만나면 불끈 솟아 오른다.
가슴이 뿌듯했다.
어느 날 어두운 공원 벤치에서 나는 그녀를 애무했다.
팔과 허리를 ...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가슴을 꽉 잡았다.
순간 내손에 물컹하는 무엇이 잡혔다. 난 그녀의 작은 체구로 보아
크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녀는 나의 두 손을 뿌리쳤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줄 모르고 다리 난간에 설치한
느리게 변하는 네온사인을 보고 있었다.
서로 이마를 맞대고...
그녀는 오늘은 늦다고 미리 허락 받았노라고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둘이라고 했다. 가끔씩 내 앞에서 남편과 애들에게 통화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도 가끔
"내가 이래도 되는가?'하는 생각에 젖는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하기 싫었다.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내 앞에 있는데 어디 가보는데 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인생이 얼마나 산다고...
우리는 탁구장과 무도장, 탄천과 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손을 잡고도 거닐었고, 어깨동무하고 걷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그녀에게 깍듯이 하던 존칭이 어느덧 '윤희 씨'에서 그냥 "희야"로 바뀌었다.
그것은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으면서 글자수를 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메시지 용량이 꽉차게 보냈다.
존경과 사랑의 표시를 담아...
윤희와 사귀면서 나는 엄청 부지런해 져 있었다.
양치질이 잦아졌으며, 매일 샤워를 했고 화장했으며, 손수 세탁기를 돌리며 옷을 자주 갈아입었다.
양복바지의 주름을 잡기위해 다림질하면서 흥얼거렸다.
외출하면서 향수를 뿌렸으며 내 구두는 언제나 반짝거렸다.
인생이 즐거웠다. 내 처진 어깨가 죽 펴졌다.
메시지를 주고 받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그녀는 등산을 가서도 메시지를 보내왔다
" 계곡물에 발을 담고 있는데, 차가와서 미치겠어요! 호호,"
그러면 난,
" 저 푸른 하늘에 웃고 있는 희의 얼굴이 보이네, 산행조심해!
내 귀염둥이! 다칠라,.."
라고 답해 주었다.
5월에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흘려 쏟아지는 광경을 보고는 걸으면서 문자메시지를 띄웠다.
"희! 꽃비 쏟아지는 길을 걷는데, 너무 아름다워!
희가 내게 있어서 그런가 봐!"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다.
오르 쪽 무릎이 이상했다.
처음엔 그저 근육이 뭉쳐 뻐근한 것이려니 했다.
목욕탕에 가면 열탕에 들어가 무릎을 주물러 보았다. 그러나 뭉친 근육이 잘 풀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지났다.
어느 날 무도장에서 그녀의 허리를 안고 스핀을 도는데 오른 쪽 다리 무릎부위에서 전기가 통하듯
"찌릇"한 감을 느꼈다.
그 이후 나의 다리는 약해졌다.
걷는것이 조심스러워 졌고,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힘이 들었다.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다.
의사는 엑스레이 촬영결과 뼈에 이상은 없노라고 하면서 연골의 이상을 의심했다.
그러면서 첨단 장비가 있는 큰 병원에 가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주면서 한 마디 했다.
" 다리를 너무 무리하게 쓴 것 같다."
그 말 한 마디에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 말 뜻이 무얼 말하는지 나는 알 것만 같았다.
" 아하, 그렇다면 ..."
스핀동작이라고 해서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안고 돌아가면 남자의 오른 발이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 들어가 중심축을 이루면서 회전하는데
재미있는 동작이라 지나치게 많이 했었다.
가속하면 엉겨붙은 남녀가 팽이처럼 돌아가는데 언제 멈춰야 할지 몰라
나 자신도 늘 오버 하기 일쑤 였다.
나도 어지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안단다.
결국 축으로 사용된 오른쪽 무릎이 과중한 짓눌림에 연골이 찢어진 것이다.
큰 병원으로 가서 MRI를 찍었다.
역시나 뼈에는 이상이 없는데 무릎연골이 수평으로 뜬 것이 사진에 보였다.
봄꽃도 다 지고, 나무에 난 새싹이 푸르름을 더할 때였다.
어느 날 그녀가 먼저 산책을 하자고 제의했다.
천변 산책로를 걸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있잖아요.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 전화번호 지우고 그만 만나요!"
나는 방심하다가 솜뭉치로 한대 얻어 맞은것 같았다.
" 아, 왜?"
" 더 이상 정들면 안될것 같아요!
우리 이제 헤어져요.그만 "
"안 돼!"
나는 단호히 거부했으나, 그녀의 표정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도무지 종 잡을 수가 없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내려와야 된다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닌것 같았다.
Y역이 있는 천변에서 그녀의 집 까지는 2K가 넘는 거리이다.
그녀는 평소 같이걷던 그 길을 혼자서 가겠노라고 했다.
난 그럴 수 없었다.
그녀를 지금 이 순간 홀로 보내면 귀가길에 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것만 같아서였다.
그녀는 나의 불편한 다리를 생각해서 말렸지만 난 괞찮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녀와 2k로 넘는 천변을 걸었다. 난 우울했다.
그녀의 그날 태도와 뉘앙스로 보아 그녀가 작심하고 한 말이라고 단정지었다.
난 결연히 말했다.
"희야! 지금은 안되! 10월에 보내주마..."
"왜 10월이죠?"
"10월이면 1년 되니까1"
그녀는 '픽' 웃엇다.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제가 지금, 일부러 하는 말인줄 아세요?"
"........"
"희야! 지금 내 다리가 불편한데 그런말 하면 서운하잖아..."
"어머, 전 그생각은 못했어요. 그래서 그렇건 아닌데......"
우리는 그렇게 그날밤 2K 넘는 천변을 걸어 그녀의 동네 가까운 데서 헤어졌다.
그 날밤 이후 나는 3일동안 열병을 앓았다.
" 아아, 어떻게 해야하나, 난 아직 아무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갑자기 무의미해졌다. 우울에 빠 졌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하나..."
그녀를 최대한으로 보호하고 싶었다.
그럼, y무도장에 내가 발길을 딱 끊는다 .
그러면 사람들은 또 뭐라고 수근거릴까?
그녀의 이미지는 어떻게 비춰질까? 속이 쓰라렸다. 모든게 허무했다.
빵빵거리는 차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 참자, 참아, 그녀를 위해서 참자."
괴로웠다. 땅속으로 푹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실연의 아픔이 이렇게 클수가 있단 말인가!
3일동안 앓고 있는데 오후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서둘러 수신함을 열어보니 그녀의 메시지였다.
" 원위치로 돌아가려는데, 길을 잃었나 봐요! 도와줘요! "
나는 벌떡 일어나 바로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래, 도와줄께 ! 거기가 어디야?"
그녀는우리 집 가까운 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3일 동안 내가 괴로워 한것 만큼이나 그녀도 괴로워 한것 같았다.
매일 주고받던 문자메시지가 끊어지고 막상 헤어진다 생각하니
그 때 너무 정 들었던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힘이 들어 못견디겠노라고 했다.
우리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탄천을 찾아 강둑에서 3일동안 서로 생각한 바를 대화로 나누었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탄천을 걸어 J역 인근 복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난 기분이 좋아 혼자 소주 1병을 깠다.
그 후 얼마간 더 만났다.
그녀는 다리아픈 나를 위해 무던히 신경써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고분고분했다.
그녀가 나에게 선물을 사주겠다고 했다.
난 항상 주머니에 넣고 쓸수 있는 손수건을 사 달라고 했다.
"손수건 선물하면 이별한다는데..."
그녀는 마뜩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난 그런건 미신이라며 내게 필요한 것이 손수건이며,
사용할 때마다 윤희를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제일 비싼 손수건 2장을 사 내게 주었다.
그 러는 동안 내 다리는 상태가 악화되 입원을 해야만 했다.
내가 상태를 설명해 주자 아내는 의심했다.
그 동안 나의 거동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여자의 육감은 정확하다고 하지 않던가. 6개월 동안 내 변화에 대해 눈치 채었을 것이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수술을 위해 입원을 하자 윤희는 문병을 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러지 않아도 아내가 의심하는 차에 그녀의 문병은 가당찮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나의 말뜻을 이해했다.
수술을 했다. 수술시간은 30분,무릎부위 3군데를 뚫어 하는 내시경 수술이었다.
병상에서 이틀을 보낸 나는 차분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픔은 사람을 성숙시킨다고 했던가.
지난 날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난 꿈에 부풀어 기관차처럼 무작정 돌진해 온 것이다.
오늘 하루에 만족하면서 미구에 닥아올 미래는 생각하기 싫었다. 그러나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면 , 지금이..."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때 열병을 앓은 것 만큼이나 난 차분해져 있었다.
그 녀를 사랑한 것 만큼은 진정이었다.
돌아다 보면 꿈같은 세월이었다.
작년 낙엽지던 가을에 만나 겨울지나 봄을 보내면서 우리는 분명 행복해 했었다.
많이 걸었고 , 많이도 웃었으며 ,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난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기억했다.
자연의 순환을 인간의 이별에 비유한 시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중략-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는 문자로 전문을 찍었다.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뒷말을 덧붙였다.
"희! 사랑했어, 부디 잘살아..."
나는 눈을 질끈감고 "확인'과' 전송'을 눌렀다.
그녀에게서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막 날아왔다
." 안돼요! 조금만 더..., 좋은 추억 만들었는데...조금만 더!"
그녀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다.
아내가 흔들어 깨웠다.
" 유진아빠!, 당신 오늘 출근하는 날이잖아, 일어나요, 빨리..."
"응, 뭐 출근..."
그제야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꿈을 ...
아아, 덧없어라.
꿈이 허무한 것인가,
인생이 허무한 것인가.
그 날은 내가 아파트 경비원으로 첫 출근하는 날이었다.
_ 끝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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