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과밀면 그리고 돼지국밥
1960년대 중반 부산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 앞 풍경. 시골서 갓 올라온 호기심 많은 소년에게 넓디넓은
시장 앞 광장은 신기술의 경연장이자 전통장인의 묘기집합소였다. 두 바퀴로 가는 은빛 자전거를 빌려탈
수 있었으며, 시원한 얼음냉차에, 솜사탕까지. 게다가 예쁜 누나들의 롤러스케이트 묘기는 말 그대로 도
회지적 엔터테인먼트의 끝판왕이었다.
한쪽에서는 그때까지 내가 본 가장 큰 건물인 조선방직주식회사(약칭 조방)를 허무는 신기한 기계가 연
신 거창한 앞이빨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포클레인이란 걸 안 건 한참 후였다. 그걸 운전하는 아저씨는
검정 선글라스를 쓰고, 지켜보는 수십여 명의 구경꾼을 의식해서인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광장 한쪽에는 어른 2, 3명은 족히 들어갈 것 같은 큰 솥에 그 당시 '민찌 아이씨'라고 부르던 아저씨들의
묘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솥에서 장화를 신고 이리저리 묘기를 부리듯 생선뼈와 살이 섞인 재료들을 꾹꾹 밟는 모
습은 추접다는 느낌보다는 신기하다는 느낌이었다. 그건 남사당패 외줄타기 이상의 전통묘기였다. 그렇
게 만들어진 어묵탕은 평범한 서민들의 저녁식탁의 인기메뉴였다.
그뿐만 아니라 내륙지방 출신인 선친마저도 처음엔 조금 주저하시다가, 낙지 등 약간의 해물과 함께 넣
어 끓인 어묵해물탕을 소탕, 육탕 다음 순서로 당당히 제사상 어탕반열에 등극시켰음에랴.이처럼 분명
부산을 대표할 수도 있는 어묵인데, 학교 앞 불량식품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건 어디서부터 실마리가
잘못 꿰어져서일까.
최근 부산의 몇몇 어묵회사의 활약에 힘입어 어묵의 명예가 다시 살아나서 반갑다. 그러나 그간 이 특색
있는 지역음식에 대해 지역사회나 학계, 연구기관이나 행정에서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대했는지 아쉬움
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밀면은 또 어떠한가. 전국 각 지역의 냉면이 전통방식에 궁중방식, 지역특화 등등
으로 다양한 자기진화를 해나갈 때 과연 부산 밀면은 어떠한 발전의 모습을 보였는지도 궁금하다.
지역의 몇몇 장인이 다양한 면발을 실험하고, 미묘한 육수의 맛을 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
과연 지역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의문이다. 그냥 피란시절 구황음식 정도로 혹은 여름에나 반짝
먹는 그렇고 그런 음식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돼지국밥은 부산에서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서민음식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돼지국밥에 대한 변변한 연구논문 하나 찾을 수 없다면 이건 또 무엇인가. 돼지국밥은
부산만의 전형적인 음식이다. 약간의 과장을 무릅쓰고 표현하자면, 돼지국밥의 북방한계선은 대구, 포항
을 가로지르는 선이었다. 묘하게도 한국전쟁기의 낙동강 방어선하고 겹치는 것도 바로 전쟁피란기에 확
산된 음식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십수 년 전만해도 대구 내에서 밀양, 청도 등 남쪽으로 오는 차를 타는 남부주차장 앞에는 돼지
국밥집이 있었다. 그러나 안동, 상주 등 북부지방으로 가는 북부주차장 주변에는 돼지국밥집이 보이지 않
았던 기억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경북 북부지방 사람들이 즐겨 먹고, 그 지역 출신임을 확인할 수 있는
상징음식인 무전과 배추전의 남방한계선이 바로 돼지국밥의 북방한계선과 겹치는 것도 오묘한 음식인류
학적 등고선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지역 간 인구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런 경계는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최근 서울의 부산어묵 가
게가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국밥하면 쇠고기국밥을 서울사람들은 당연시했다. 최소한 순대국밥
까지만 허용하던 서울의 입맛도 최근 문을 연 돼지국밥집의 성업을 보면 입맛의 혼종화가 이루어지는 듯
한 느낌이다. 이는 부산 돼지국밥이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서울에 진출했다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서울화한 돼지국밥이 우리나라 돼지국밥의 표준화를 주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사실
서울의 돼지국밥집에서 먹어 본 국밥의 맛은 적어도 나에게는 40년 이상 길들여진 부산의 돼지국밥 맛
이 아니었다. 팔도의 맛을 섞어놓은 것 같은 그런 혼합적 맛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이처럼 팔도 각 지역 출신의 용광로인 서울, 수도권의 2000만 이상의 인구가 자기들 입맛대로 음식맛을
변형 혹은 융합하여 그걸 돼지국밥의 표준이라고 강변하지 말란 법이 없지 않겠는가.
외국의 도시들이 각 도시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음식과 식품들의 브랜드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신경
을 썼는가는 여기서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다. 전 세계의 음식체험기만 별도로 올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
스(SNS)의 조회 수가 넘쳐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이제 그동안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던 부산
의 음식들을 제대로 챙겨보자. 변변하게 대접도 못 받았지만, 꿋꿋하게 서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어묵, 밀면, 돼지국밥에게도 당당히 부산음식 시민권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히 이들 음식에 대해 영영학, 식품조리, 요리법 등 기술적으로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음식은
기술 이전에 문화다. 따라서 이들 음식의 문화인류학적 인문역사적 바탕을 단단히 깔아놓아야 한다. 우리
가 방심하는 사이에 김치가 일본의 기무치로 그 기원이 바뀌는 역사적 혼선과 오류가 기술뿐만이 아니라
인문적 연구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음식과 관광의 시대에 걸맞은 부산문화의 정체성 찾기를 어묵, 밀면, 돼지국밥 음식인문박물관을
만드는 데서 출발해보면 어떨까. 이 박물관을 부산판 서민음식의 표준화, 국제화, 인문화의 전초기지로
만들어 보자. 당연히 시식, 체험, 판매시설과 연계되면 더욱 집객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연
간 50여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는 일본 아이치현의 메이지무라 음식박물관보다도 훨씬 극적이지 않겠는
가.
물론 국내 각 지역에 만들어진 어설픈 향토음식 박물관보다도 훨씬 파급력이 클 것이다. 부산 서민들의
애환과 역사를 담고 있는 이들 음식에 대한 지역사회와 행정의 관심과 배려는 시급한 일이다.
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센터장
첫댓글 겨울의 싸늘함을 날리는 야심찬 추억의 사치는
뜨거운 국물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어느 작은 골목
지나간 시간들
시린 손을 따뜻하게 해 줄
잠시 누리는 온기의
그 맛있는 기억으로,
한 끼로 선택되는
이 음식들을 제대로 즐기고 싶군요.
덜 짜고
조미료도 덜 들어간 착한 식당을 찾으러 떠나 보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