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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7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마르코 2,1-12
용서하려는 노력이 은총을 받는 지름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보여주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나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항상 그렇게 한 일을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이익이 주어지지 않으면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일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기 위해 매일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용서의 힘을 주심을 넘어서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도 주십니다.
용서는 마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고 일만 탈렌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일만 탈렌트가 생기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수백만 원을 탕감해주고 수조 원을 버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오랜 자신과의 싸움을 전제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성령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성령의 힘으로 용서를 넘어서는 큰일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치고 이 용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존 프랜시스(John Francis)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를 목격한 후, 환경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모터가 달린 교통수단 사용을 중단하고, 걷기를 통해 환경 보호를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갈등과 오해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싸우다가 결국 침묵하기로 합니다.
침묵은 용서를 위한 기초작업입니다.
그 침묵을 그는 무려 17년간을 했습니다.
이러한 침묵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를 깊이 숙고했습니다.
인간관계도 환경의 일종인데,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또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침묵하면서 전 미국을 횡단하며 환경학 박사학위까지 땄습니다.
그리고 UN에서 일하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모두를 용서하고 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존 프랜시스의 이러한 경험은 용서가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에서 이러한 내면의 여정과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환경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전 세계에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대목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요하고 짧은 기도에 용서라는 작은 주제가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가 평생 해나가야 할 것이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의 양식인 성령께서 활동하게 하심을 알고는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용서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먼저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행동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지 못 할 일이 없는데, 성령을 얻는 방법에서 용서만큼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복음: 마르 2,1-12
오늘 우리에게는 아픈 동료를 향한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이 간단한 표현 안에 한 가련한 인생의 길고 고통스럽고 슬픈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깊어질 대로 깊어졌습니다.
오랜 병고의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힘으로 걷기는커녕 몸도 일으키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다 보니 매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심각한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증세가 겹쳐 죽을 고생을 한적이 있습니다.
삶의 질이 그야말로 심각히 떨어지더군요.
평소 식은 죽 먹기던 샤워하는 일, 옷 입는 일, 걸어다니는 일이 언제나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 양손을 들어 올리는 일조차 버거워서 정말이지 우울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서부터 화장실까지 불과 10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다녀오는데 10분이 더 걸렸습니다.
그때 저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고 다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실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병세가 심각해지다보니 돌아눕는 것조차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식사하는 일, 용변보는 일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버겁고 참담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암담한 상태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그에게 하루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그분 옆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그 어떤 불치병 환자이든 상관없이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난다는 데...
그러나 그는 사지가 마비되어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적같은 일이 그에게 벌어집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평소 그를 가엾이 여긴 네 사람이 그를 찾아옵니다.
네 사람은 즉석에서 그를 위한 간이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긴 막대기 두 개 사이에 천을 대고 묶었습니다. 들것 위에 환자를 눕힌 네 사람은 보조를 맞추어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환자와 함께 먼길을 걸어온 네 사람이 현장에 도착해보니, 산 너머 산이라고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안팎은 그분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완장을 어깨에 차고 질서 유지를 하고 있던 사도들이 번호표를 나눠주었는데, 순번에 따르면 이박삼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했습니다.
정문, 후문이 모두 봉쇄되었으니, 지붕 쪽을 공략하기로. 네 사람은 환자와 함께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유다인들 가옥의 지붕은 개폐식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공간의 지붕을 연 네 사람은 환자의 들것 네 귀퉁이에 긴 끈을 매달아 조심스럽게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해도해도 너무한 그들의 기상천외한 방법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향한 그들의 적극성과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네 사람은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환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 강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네 의인이 지니고 있었던 아픈 동료 인간 존재를 향한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는 이웃을 어떻게 하면 치유시키고 구원으로 인도하고픈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반성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주간 금요일 강론>
(2025. 1. 17. 금)(마르 2,1-12)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예수님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3-1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구원하는 권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이고, 동시에 “나는 너를 구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으라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죄를 용서받다.’는 ‘구원을 받다.’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 사도도 바로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이 말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과 ‘같은 말’이고, 여기서도 ‘용서’는 ‘구원’을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즉 ‘사람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2) 5절의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그들’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병자 자신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병자 자신의 믿음입니다.
만일에 병자 자신이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남들이 아무리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 외에도 ‘간절한 희망’과 ‘회개’와 ‘신앙생활’을 모두 포함합니다.
3) 9절의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사람의 힘으로는 둘 다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중풍을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즉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능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권한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증명하려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은, 율법학자들의 생각과는 상관이 없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4)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군중 때문에’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는 것은(4절), 군중이 예수님과 병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병자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건강해진 병자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예수님께 갈 때에는 군중에 막혀서 지붕의 구멍으로 갔는데, 병을 고친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위해서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었는데도, 군중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도 자비도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2절).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마음과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 그것은 복음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