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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진행됩니다!
참고말씀: 신7:22; 삼상16:13; 18:1,3,4; 삼하3:1; 왕하24:15,16; 25:7-11; 단1:1,2; 막3:17; 눅9:49-56; 행9:3-6,15,16; 15:30-34; 16:1,2,10; 18:1-3,18; 갈1:17,18; 딤전1:3,4; 딤후1:5; 3:15; 딛1:5; 요일4:11
읽을말씀: 막8:22-26
주제말씀: 막8:24,25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을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첫째, 신앙생활의 변화는 서서히 진행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을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8:24,25)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갑작스럽게 진행됩니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확 바뀌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서서히’ 이루어지며, 또한 ‘점진적으로’ 진행됩니다.
어떤 변화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믿음의 성장, 신앙의 성장, 세계관이나 가치관의 변화, 인격의 변화나 성숙, 거룩해져 가는 것(성화)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갑작스럽게 되지 않고, 오히려 서서히 또는 점진적으로 진행됩니다.
물론 무엇은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습니까? 변화의 계기(契機)나 기점(基點), 동기(動機) 등입니다. 언제 찾아옵니까? 어떤 예배나 집회를 통해 은혜받았을 때, 즉 영적으로 크게 각성하거나, 마음에 큰 감동을 받거나, 강력한 동기부여를 받았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뱃새다에서 한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내용입니다. 특이한 점은 무엇입니까?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고쳐주시되, 한 번에 하시지 않고 두 번에 나눠서 그리하셨다는 점입니다.
“뱃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8:22-25)
왜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까? 능력이 부족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는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이런 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방 민족들을 급히 멸하시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쫓아 내셨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을 네 앞에서 조금씩쫓아내시리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신7:22)
하나님은 다윗을 바로 왕으로 세우시지 않고 서서히 왕의 자리로 이끄셨으며,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3) 하나님은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게 하고 다윗은 점점 더 강하게 하셨으며,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솔로몬은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이 점점 돋아서 한낮의 광명에 이르는 것으로 비유했으며,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8)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 백성을 심판하여 사로잡혀가게 할 때도 한 번에 하시지 않고 오히려 세 번에 걸쳐서 그리하셨으며,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이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창고에 두었더라.”(단1:1,2) / “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곧 용감하여 싸움을 할 만한 모든 자들을 바벨론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왕하24:15,16) /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장에게 속한 살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왕하25:7-11)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때에도 세 번에 걸쳐서 그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1차 스룹바벨, 2차 에스라, 3차 느헤미야).
신앙생활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장이나 신앙의 성장, 가치관의 변화, 인격의 변화나 성숙, 성화 등도 서서히 또는 점진적으로 진행됩니다. 불같은 성정을 지녔던 요한이 예수님과 한 삼 년 동안 사랑의 사도로 점점 변화된 것처럼 말입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3:17) /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의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눅9:49,50) /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눅9:53-56)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그러니 무슨 생각은 금물(禁物)입니까? 은혜받으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화되고 갑자기 바뀌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하루아침에 믿음이 급성장하고, 신앙이 가파르게 성장하며, 완악했던 성품이 하루아침에 온화한 성품으로 바뀌며,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급변하며, 단기간에 거룩해지는 일 등은 도무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혹 별다른 은혜를 받지 못했어도 크게 낙심하지 말아야 하거니와, 설령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당장에 아무런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당혹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석공의 백 한 번째 망치질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석공은 큰 돌을 깨기 위해 똑같은 자리를 백 번 정도 두드립니다. 돌은 갈라질 징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백한 번째 망치로 내리치면 돌은 갑자기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맙니다. 이처럼 큰 돌을 두 조각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은 한 번의 두들김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마지막 한 번이 있기 전까지 내리쳤던 백 번의 망치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벤자민 프랭클린 -
둘째, 신앙생활의 만남도 서서히 진행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우리의 비전도 갑자기 우리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 어떻게 찾아옵니까? 소위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함)라는 말이 있듯이, 일상의 자연스러운 기회를 통해서 서서히 자연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물론 바울처럼 극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즉 ‘갑자기’ 주님을 만나고 ‘갑자기’ 사명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9:3-6) /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바울은 극적인 만남을 가져 그런 것인지, 본격적인 사명 감당에 앞서서 일부러 어디에 가기도 했습니까? 아라비아 광야, 즉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야 지대로 나아갔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그곳에 있었습니까? 3년 정도입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갈1:18)
가서 개인적으로 어떤 시간을 가졌습니까? 멈춤의 시간입니다. 그 기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하여 복음 전파 사역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했을 것입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7)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런 극적인 만남 대신, 서서히 자연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즉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디모데는 모태신앙으로써,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주님을 알고 또 성경도 접하게 되었으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3:15 상)
전도여행 중인 사도 바울을 만나 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명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행16:1,2) /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1:3,4)
그러니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갑작스러운 만남을 기대하다가 섣불리 예단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천천히 다가오는 만남’을 기대하면서 인내함으로써 만나고 또 즐겨야 할 것입니다.
한편,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믿음으로 의기투합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18:1)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18:3,4)
대부분은 서서히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서 만나게 됩니다. 이를테면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안디옥교회에 전하러 갔다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의 전도단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어떤 사본에, ‘실라는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행15:30-34)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에서 추방당해서 고린도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다가, 같은 업에 있는 바울을 만나 그의 전도단에 합류했으며,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18:1-3) / “바울은 더 어려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행18:18 상)
누가도 전도여행 중에 자연스럽게 바울을 만나서 그의 전도단에 합류하였으며,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10) 바울의 믿음의 두 아들 디모데와 디도는 전도여행 중에 자연스럽게 만나 그의 동역자가 되었으면 전도 사역에도 합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1:5)
그러니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믿음의 동역자를 단번에 찾으려 하지 말고, 여러 사람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과정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서서히 동역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신앙생활의 만남도 서서히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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