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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땅은 흙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러나 하늘은 비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넓고 끝이 없는 공간인 것입니다. 땅은 꽃과 나무와 새들과 동물들 그리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내는 터전이라면 하늘은 해, 달, 별, 같은 천체들과 각종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 바람에 곡간,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 호흡을 공급하는 공기의 곡간이 하늘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이라고 하니까 높고 멀게 생각을 하지만 사실 하늘은 땅과 맞닿아 있습니다. 식물이 땅을 뚫고 나오는 순간 하늘이라는 공간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무뿌리는 땅 밑에 있지만 나무 가지와 잎과 열매는 하늘에 있는 것이며, 사람 또한 발은 땅을 딛고 있으나 그러나 몸과 머리는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은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높고, 넓고,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공간이 바로 하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발은 땅에 그리고 머리는 하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첫째,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고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하늘과
둘째, 해, 달, 별, 은하수와 같은 천체들이 운행하는 우주 공간으로서 하늘이며,
셋째, 천지를 창조 하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서 하늘인 천국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창 24:3) “하늘에 계신 자”(시 2:4) “하늘에 계신 주”(시 123:1) “하늘에 계신 하나님”(스 5:12; 단 2:19; 28; 애 3:41),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이며 바리새파 이였던 바울도 고후 12:2-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경험한 천국과 낙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그리고 해와 달과 별이 떠있는 공간, 온갖 새들이 날아다니는 눈에 보이는 공간인 하늘은 믿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으려고 하는 죄악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과학으로 증명된 것들만을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냄새가 없고, 느끼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안 보았는데 그걸 어떻게 믿어! 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 염려와 병 듬과 괴로움과 슬픔이 없는 천국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자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4복음서에서“하나님의 나라”를 52회나 말씀을 하셨으며, 사도 바울도 자신의 서신서에 16번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였으며, 그리고 마태복음 3:2절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인 “천국”이란 단어를 예수님께서는 무려 37번이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서 몇 주간에 걸쳐 피차 은혜를 받았던 산상수훈 팔복에 나타난 천국,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마 5:10) 등등 그리고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 살아도 천국의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의 실재를 조금도 의심 없이 신뢰를 하므로 인하여 말이 아닌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를 하는”(행 1:8)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시민권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마 24:14) 사람만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니까 구약의 선민사상을 가지고 살던 유대인들이 믿었던 파란 하늘, 셋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신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하늘과 땅, 우주에 모든 피조물들을 권능과 지혜와 공의로 통치 하시며 심판 하시는 무소부재하시고 시공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리고 온전히 신뢰하므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로 인하여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 고난과 수모와 고초와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붉은 피로 세우신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인 것입니다.
(눅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러니까 다시 말씀 드려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악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어떤 이들이 “우리 아버지”를 간절히 부른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들이 자식이 아닌 연고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응답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창세전에 택함 받은 사람(엡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된 사람(엡 3:11), 세상에서 택함 받은 사람(요 15:19; 사 43:10), 지명 받아 부름을 받은 사람(사 43:1), 하나님께서 낳았다고 하는 사람(시 2:7)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내용 없이 자기 행위로, 자기 열심으로 그리고 자기 의지로 믿는 종교인들이 하는 주기도문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술에 불과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 구절은 종교주의에 빠져 살던 유대인들의 상투적인 문학적 표현일 뿐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고 하면서 유대 종교 주의자들처럼 형식적이고 상투적이고 그리고 습관적으로 하나님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눅 11:1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유대인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일은 사실 놀라운 일이였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은 당시 종교 주의자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율법교사, 서기관과 랍비들이 가르쳐 준 기도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었던 제자들은 유대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하는 짤막한 형태로 된 기도문 “카디쉬”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높이 들리며...”를 낭송을 하던 사람들이였으며, 그리고 제자들은“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18번 축복기도라고 불리는“세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을 하루에 세 번, 아침과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 그리고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에 각각 드리는 사람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아 보니 지금 자신들의 기도가 방향이 잘 못 되었으며 주술적이라는 것을 안 것 이였습니다. 종교 주의자들에 의해 교육되어 자신들이 하였던 모든 기도들은 자신들만을 위해 하는 즉, 자신들의 치병기복과 만사형통을 위해 하는 주술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치 옛날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가 조상들이 한 것처럼 그리고 무당의 가르침에 따라 새벽에 부엌이나 장독대에 정한 수를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어떤 자세로 기도 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기도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는 것 이였습니다.
(마 1:2)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라고 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도 자신의 신학 사상과 그리고 종말론적 소망 등을 담아 기도문을 만들어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가르쳐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마태복음을 1장부터 읽어보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 출발을 해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서 애굽으로 피하셨다가 애굽에서 나오시는 기록이 나오고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3장 후반부터 4장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그리고 5장에서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팔복인 산상수훈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6장에 이르러 오늘 본문인 주기도를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름으로 은혜의 문을 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주의자들이 가르쳐 준 상투적이고 그리고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그런 기도, 주술처럼 외우는 그런 기도, 치병기복, 만사형통을 위한 그런 기도가 아니라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천국의 실재”를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 회복에서 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름으로 기도를 시작 하라는 것입니다.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막 책상에 앉았는데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파주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하는 사랑하는 아들 이였습니다. 아들! 웬일이야! 다짜고짜 아빠! 나 교통사고 났어! 라고 하는 것 이였습니다. 가슴이 철렁함과 동시에 몸은 다치지 않았느냐고 묻고 아빠가 갈 테니 기다리라 하고 차를 잘 아는 장로님께 연락을 하고 현장으로 가는데 아들에게서 연신 전화가 옵니다. 출발 했느냐! 지금 어디만큼 오느냐! 왜! 이렇게 빨리 안 오느냐 빨리 오지 않으면 자신이 견인차 불러 처리 하겠다고 하면서 성질을 부렸습니다.
저도 성질이 나서 그래! 니! 맘대로 해라 하고 싶었지만 참고 현장에 도착을 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몸은 조금도 다친데 없이 차만 왼쪽이 심하게 부서져 있었습니다. 차를 공업사에 맡기고 부대까지 아들을 태워다 주고 오면서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놈이 평소엔 전화가 없더니 사고가 나고 급하니까 아빠에게 전화를 하였구나!
저희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빠는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 나! 교통사고 났어요, 라는 말을 듣는 그 순간은 걱정과 함께 당황 하였지만 아들의 이 말 속에는 아빠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나왔습니다. 아들을 위해 내가 뭔가 할 수 있다. 라는 것에 대하여 주일 오후 피곤해 쉬고 싶은데 사랑하는 자식이 아빠! 나! 사고 났다는 그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나는 지체 없이 아들에게 달려 간 것입니다.
저는 아들의 이번 교통사고를 통하여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 아들은 뜻하지 않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아빠를 부르는 구나!
두 번째, 아들은 부른 아빠가 반드시 오실 줄 믿고 기다리는 구나!
세 번째, 아들은 아빠가 모든 문제를 처리하여 줄줄 믿고 있구나!
만약 저의 아들이 나를 불러 놓고 빨리 오지 않는다고 자신이 이 사고를 처리 하였다면 시간, 노력, 그리고 수리비가 배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공업사 사장이 일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에게도 살다 보면 갑자기 어떤 문제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김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찾습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 다음입니다. 하나님을 불렀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문제를 해결 줄줄 믿고 기다려야 되는 것인데 저의 아들처럼 아빠가 빨리 오지 않는 다고 조급해 하다가 마침내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문제를 해결 하고자 한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월요일 새벽에 이렇게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고 가운데 몸이 조금도 다친데 없이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인 저를 온전히 신뢰하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운전을 더욱 조심스럽게 할 것이니 감사합니다. 라고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누구의 아들, 딸인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름으로 인해 정체성이 확립되며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가 들어 있는 신앙고백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테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 “아빠”라는 뜻과 같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예수님 전후의 유대 그 어떤 문헌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파테르”즉, 아빠라고 부른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구약의 여러 곳에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 그리고 부모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시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 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사정이 이러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본질상 하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엡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당시 종교주의 유대인들은 아버지라는 말을 창조주요 메시야로서 표현은 하였지만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처음 이셨으며 그리고 혼자만 쓰시던 말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하나님을 “아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아빠라는 단어를 제자들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구원받은 우리에게 “아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신 일은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 받은 성도의 기도의 출발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름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시작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에서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자식 된 우리와의 사랑의 대화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우리와 사랑의 대화인 기도를 원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면서 능력 받았다는 산으로 기도원으로 올라가서 때론 생계도 접고 기도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위배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삶으로 기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이 기도 이셨고, 기도가 바로 삶이셨고 그리고 습관이셨습니다.
(눅 22:39-44)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간절히 기도하시니”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연약한 우리들처럼 시험과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는 창세전 아버지 하나님과 나누셨던 사랑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앞서 말씀 드렸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에게 있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부자관계 그리고 부녀관계가 먼저 전제가 되지 않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기도가 성립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믿는 자의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인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부자와 부녀간에 사랑의 대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사회학자들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므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경우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내세워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유대인들처럼 주술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문제를 안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 내용을 자세히 들어 보면 한결같이 모두가 자기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리고 치병기복과 만사형통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힘들어 하다가 에이! 예수 믿어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 원망을 하며 교회를 떠납니다. 야고보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기도의 문을 여는 순간,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온몸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육신의 아버지인 아버지를 부르면 가슴 뭉클 해 집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받는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받는 딸이다, 라는 느낌이 온 몸으로 느껴지며 그리고 가슴이 뭉클 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있는 기도의 시작은 먼저 자녀가 됨을 믿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름으로 기도의문을 열고 들어선 다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대한 요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구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무시하고 여러분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채우기 위해 치병기복, 만사형통을 위해 주술처럼 기도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 이전에 이러한 기도를 하셨다면 이제는 바꾸십시오. 이러한 기도는 악한 영들이 가르쳐준 사망으로 인도하는 주술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천연 사랑을 위한 기도,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기도, (마 26:39)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惟爺 金 鐵鎬 牧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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