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에 혼을 불어 넣은 위창 오세창 선생님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 고희동에게 소개 받은 유산 수집가 위창 오세창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명이었는데 불교계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 아버지 오경석은 역관으로 중국에 다니면서 세상 흐름에 일찍이 눈을 떴고
의사 유대치, 승려 이동인과 함께 김옥균 등 양반가의 젊은이들에게 개혁사상을 가르쳐
이들이 개혁운동을 추진하도록 이끌어준 선각자였다.
위창 오세창은 어린 시절 이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레 불교와 인연을 이어왔다.
이런 인연으로 현재 서울 봉은사 법왕루에 걸려 있는
‘선종종찰 대도량(禪宗宗刹 大道場)’
경북 구미 도리사 ‘태조선원(太祖禪院)’·
경남 진주 ‘비봉산 의곡사(飛鳳山義谷寺)’ 현판
전남 승주 송광사의 ‘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
오세창은 전형필이 문화재를 관리하던 보화각(葆華閣) 박물관을 관리하다
전형필은 간송 미술관 고쳐 문화재를 보관하였다
간송미술관에 보관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미술품 컬렉션 대부분이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선생의 감식안으로 이루어졌다.
(간송 사철 흐르는 산골 물 간, 사철 푸른 소나무 송 간송
‘세한연후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김정희의 세한도 같다)
변혁의 시대,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은 역관에 머물지 않았다.
1886년 박문국 주사로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고,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됐다.
갑신정변에 연루되면서 1897년엔 도쿄외국어학교에 조선어 교사로 체류하기도 했다.
이후 만세보와 대한민보 사장을 지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렀다.
한국 근대, 현대사 개화사상가와 독립운동가ㆍ언론인 경력이 광복 이후
서울신문 초대 사장에 오른 배경이 됐을 것이다.
위창 오세창은 서화 연구가로 더욱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 삼국시대 이후 서화가 기록을 한데 모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소장 자료를 글씨와 그림으로 각각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畫彙),
인장 자료를 집성한 ‘근역인수’(槿域印藪)를 참고하지 않으면 사화 연구는 불가능하다.
위창의 ‘근묵’(槿墨)이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정몽주 이후 근대까지 1136명의 필적이 수록된 국내 최대 분량의 서첩이다.
위창이 우리나라를 뜻하는 무궁화 근(槿) 자 돌림으로 자료 이름을 붙인 것에도
깊은 뜻이 느껴진다.
오천년의 한국은 글씨와 그림으로 세상의 빛이 되었다
오세창이 도움으로 간송 전형필이 문화재를 수집 보관하여 만족혼을 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