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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면
요일 4:12-21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12-21 /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주려고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14) 더욱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구세주로 보내신 아들을 우리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사실을 온 세계에 전파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15)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16) 우리는 너무나도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또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랑 가운데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17)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우리의 사랑은 성장하여 더 완전한 것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심판의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주님의 얼굴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또한 주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8)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을 다 몰아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불안을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랑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20) 만일 누가 입으로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면서 믿음의 형제를 계속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있고 난 뒤 요한은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완전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의 완전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한 담대함이며 또한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령을 통한 연합(12-16) 진정한 사랑은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중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바라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자아에서 벗어나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소유나 지위, 다른 사람의 평가 등에 연연하지 않고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을 경쟁자가 아니라 생명을 나누고 섬길 대상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인간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확신을 통한 승리(17-21) 진정한 사랑은 염려나 걱정 대신 담대함과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룰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일체의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쫓긴다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면 심판과 정죄와 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연민이나 불필요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풍성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가득하다면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좇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적용: 예수의 사랑을 경험한 후 어떤 변화를 경험했나요? 당신 뜻이 아닌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일상의 어려움과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입니다.”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주신 그 깊은 사랑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곁에 가까이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을 섬기고 붙잡아주고 위로와 평안을 전하며 함께 기도함으로 사랑을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이를 계속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우리 성도들의 삶도 더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사랑이신 하나님
요한일서 4;11-21 /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올바로 살아갈 수 없는 지극히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절히 고백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보다 가까이 하길 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이 시작합니다.
문제는 철저히 무능한 죄인인 인간이 감히 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역설입니다. 본분 12절 전반부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원문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는 바로 앞 뒤에 있는 11절과 12절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과는 달리 관사가 없이 등장합니다. 이런 경우 ‘그분 자신으로서의 하나님’, 즉 ‘하나님의 절대성’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곧바로 이어서 ‘없다’라는 뜻을 가진 부정사가 나옵니다.
이와 같은 원문의 어순에 담긴 요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바로, 절대자이신 하나님 그분을 누구도 감히 볼 수 없다는, 결코 그분을 멋대로 자신의 경험 안에 가둘 수 없다는 확고한 강조입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곁에 서길 원하면 원할수록 무력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다가감과 멀어짐의 모순 앞에 몸부림치게 됩니다. 성탄은 바로 그 인간의 처참한 실존 가운데 주님께서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몸소 뒤집어쓰시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 세상 한 복판에 다가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속성을 생생하고 명쾌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요한일서와 전통적으로 동일한 저자의 기록으로 알려진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신 일곱 개의 자기 선언들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나는 선한 목자이다(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15:1, 5)’
이 일곱 개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볼 시간은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선언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정확히 알려주려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님의 계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해 절정에 이릅니다. 본문은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를 가진 요한일서 4:9-10입니다.
요일 4:9-10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악한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줌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10) 이러한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 죄 때문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대신 사랑하는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주신데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셔서 사람으로 살아가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요한은 단호히 외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감히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온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가장 위대한 계시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궁극적인 진리 앞에 나아갑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증언입니다(16절).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도무지 감당하기 벅찬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사랑이야말로 그분의 고유한 언어이자 존재방식입니다.
바로 이 진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나 나아갈 수 없는, 그분을 알고자 하나 알 수 없는 인간의 모순을 뚫고 하나님께 안길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20-21절).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섬김 못지않게 사람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 역시 성경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명쾌히 요약하셨습니다.
요한이 예리하게 지적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저마다의 곁에 두신 사람들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볼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남긴 사람들, 혹은 내가 함부로 대해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 그렇게 내가 쉽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가늠하게 하는 가장 정확한 기준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결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하게 하고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사랑이 넘쳐나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가 사랑을 충분히 연습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바로 사랑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한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포용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 사랑 없는 거짓된 하나님 사랑을 단호히 경계해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말씀처럼 인간은 결코 자신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살아갈 수도 하나님과 마주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 안에 함께하시려고, 그런 우리가 당신 안에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철저한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시다 마침내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디 그 사랑 앞에 온 몸과 마음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언어에 익숙해지시길 바랍니다. 그 사랑을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한없이 위대한 은혜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상호 내주의 기쁨, 온전한 사랑의 성숙
요한일서 4:13-21 / 도육환 목사
저는 그저께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을 산행에다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멀리서 산의 경치를 바라보며 감상하는 것과 그 산을 오르는 것은 차이가 크지요.
만약에 사랑이라는 지고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려고 하면 산행을 하는 것처럼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하고 피곤함을 이겨야 하고 쉽지 않은 장애들을 극복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산행에 비유한다면, 거의 깔딱 고개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가상 숨이 차고 포기하고 쉽고 가장 피곤함을 느끼는 그때, 바로 그 시간에 사실은 정상이 가장 가까이 와 있는 것이죠.
사람의 신, 하나님 그분께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그 사랑의 감동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힘겹지만 지속적으로 걸음을 옮겨놓다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랑의 자리에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13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상호 내주의 기쁨,
온전한 사랑의 성숙
요한일서 4장 13절에서 21절 말씀입니다.
본문말씀 더보기
요한일서 말씀을 묵상해 가는 동안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건 사귐이라는 단어입니다.
교재, 코이노니아이지요.
하나님은 요한일서를 통해서 우리와 영원하신 하나님 사이의 사귐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동시에 그분이 사랑이시듯이 우리가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사귐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교재, 곧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세 가지의 길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그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십니다(13절)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연합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는 영원하고 지고하신 그 하나님과, 죄 된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사이에 성령님이라는 그 매개를 통해서 하나와 연합을 이룰 수 있죠.
두 번째는 바른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15절).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 주님을 사모하는 동안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신비한 연합 교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 되시죠.
우리의 다리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그 사랑, 그것이 우리를 교재하게 한다 말씀하십니다(16절).
사랑을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 사귐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말씀하셨지요.
그 생명의 매개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관계적인 존재라는 의미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누구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천지 만물, 우주 사랑하시지요.
관상수, 우리가 좋아하는 반려 동물들 물론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시라 라고 말씀하실 때 그 교재의 대상이 분명합니다.
세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저와 여러분을 향합니다.
추적자가 되십니다.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해처럼 우리를 추격하시면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그의 사랑의 관계 안으로 끊임없이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그 영광과 거룩도 함께 경험할 수 있고,
동시에 그분이 사랑이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으로 살아야 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십시다.
주님의 은혜, 그 놀라운 신비가 연합 안에서 우리에게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사건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시고, 또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무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 으로부터 사랑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저와 여러분이 삶을 통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단순히 부담스럽고 짐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또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쫒습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두려움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한 염려나 짐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새로운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19-20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저도 자주자주 우리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형제를 살아가는 일은 때로는 쉽지 않고 또 마음에 큰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늘 우리에게는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 사랑으로 그 사랑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한 번도 우리가 육체로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면,
늘 우리 눈앞에 볼 수 있는 형제자매들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주신 사도 요한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이전에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성격이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불을 내려 저 성을 멸하소서' 그렇게 말할 만큼 사랑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이같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되었네요.
그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 가능성이 있는 거지요.
지금은 미숙합니다.
아직도 옛 혈기도 남아있고, 이전처럼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생각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변화되었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수양이 필요했을까요?
그가 많은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을까요?
물론 그런 것들도 원인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는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요한일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과의 그 코이노니아가 그를 어느 날 이와 같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새로워집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머물면 됩니다.
그 사랑 안에 늘 거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전염시키고 그 사랑 안에 언제나 지배받을 때,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21절).
부담스럽지만, 계속해서 이 길 멈추지 맙시다.
사랑의 길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우리 형제를 사랑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 사랑을 아는 자는 어떤 사랑을 나눌까?
요일 4:7-21 / by 조정의
성경에서 ‘사랑 장’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고린도전서 13장을 꼽는다. 하지만 ‘사랑’이 언급된 횟수를 고려하면 오늘 본문이 진짜 ‘사랑 장’이다(15구절, 27번 언급).
본문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진짜 사랑의 출처를 밝힌다. 바로 참 사랑이신 하나님이다. 많은 유행가가 사랑을 노래하고, 많은 시인과 작가가 사랑을 그려내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거나 감정 중심적인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영원히 만족시킬 참 사랑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어떻게?
참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요한은 그분을 보니 은혜(신적 사랑)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고백했다(요 1:14).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참 진리 그리고 참 사랑을 아는 자다.
그런데 본문은 참 사랑을 아는 자마다 보이는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서로 사랑). 우리가 나누는 사랑은 참 사랑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기준이다. 또 하나님과 누리는 영생의 사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방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이 나누는 사랑의 진실함을 검증하여 주시길 구한다.
1. 참 사랑의 출처(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사도는 주가 사랑하신 그리고 장로로서 자신이 돌보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부르며, 사랑을 권면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우리가 서로 실천해야 할 일이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현재형) 순종해야 할 명령이다(요일 2:7-11; 3:13-24). 21절을 보면 요한은 이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주께 받았다고 말했다(요 13:34; 15:12).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이 정의하는 ‘사랑’과 다르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물론 모든 종류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맞다(일반은혜에 따른 자녀 사랑, 부부 사랑, 불쌍한 이웃 사랑 등).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참 사랑에 주목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고(거듭나고), 하나님과 친밀한 앎, 친밀한 사귐을 누리는 자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랑, 곧 하나님께 속한 참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절). 하나님은 사랑이신데(본성), 하나님께 속한 그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사랑이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예전부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호스가 수도에서 끊어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나름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서 유독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오래 참지 못한다. 쉽게 화내고 거칠게 말하며 배려하지 않고 항상 자기 유익만 구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이 봐도 사랑 없는 자로 보인다. 이들을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 사귐이 있는 자로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2. 참 사랑의 시작(9-11절)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곧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한다(9절). 여기서 첫째, 우리가 받은 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둘째, 우리가 서로 나눌 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참 사랑의 크기를 헤아려 보자. 9절과 10절은 유사한 내용을 두 번 진술하는 것 같지만 강조점이 각각 다르다.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절).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뿐인 유일한 아들’을 말한다. 하나뿐인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뿐인 자녀를 희생시킬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일반은혜로 우리는 부모 사랑의 크기를 안다. 그래서 자녀를 내어준 사랑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정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후 요한은 하나님의 참 사랑의 시작을 바라본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10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열렬히 그분을 사모하고 찾아서 그 대가로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원수, 죄인이었다(롬 5:10).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수로 행하던 그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엡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의인도 선인도 아니고, 원수를 위해 자기 독자를 죽기까지 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롬 5:7-8).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엡 2:1),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를 영원히 회복시켜 자녀로 삼기 위해 당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 우리가 계속해서 받고 있는 참 사랑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누리는 사귐의 시작은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누릴 영생의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시작하신 그 참 사랑을 영원히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그러면 두 번째로 우리는 서로 어떤 사랑을 나눠야 할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요구하셨다(요 13:34).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사 우리의 필요를 채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다른 이의 필요를 보고, 먼저 찾아가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풀어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을 해야 한다(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은 우리 안에 부어져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특히 형제자매)에게 흘러가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 그분과 사귐을 갖는 자에게 마땅하다.
3. 참 사랑의 성취(12-18절)
어떤 이들은 당위성만 가지고 설득이 안 된다. 그들에겐 보상(약속)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참 사랑은 신자의 의무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런 축복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12절)
12절은 요한복음 1장 18절을 차용한 것 같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면 이제 세상에 하나님을 누가 어떻게 나타내는가? 요한이 말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절).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참 사랑, 하나님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그 관계 안에서 온전히—완벽하게가 아니라 계속해서 성취됨으로—나타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둘째, 성령께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게 하신다(13절)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알고 싶다면,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13절에 말하는 것처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완료형)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갈 5:22).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사랑을 맺으면 맺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으로 보증하시는 성령을 통해 더욱 확신한다(엡 1:13; 4:30).
셋째,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임을 증명한다(14-16절)
14-15절은 사도 요한을 비롯한 증인들이 보고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요한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고 말했다(14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자, 그분과 서로 사귐을 누리는 자는 반드시 사도들의 증언, 가르침을 믿고 시인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5절).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사도들이 보고 증언한 세상의 구원자, 통치자,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고 시인하지 않으면 엉뚱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사도가 증언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이 참된 것을 무엇이 증명하는가? 단순히 바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그의 믿음이 정말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인 것을 무엇이 확증하는가?(약 2:26)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절). 참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거하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 안에 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주신 하나님의 참 진리뿐만 아니라 참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사랑 안에 거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를 향한 자기 믿음이 지식에 머무는 죽은 믿음인지 산 믿음인지 알고 싶어 한다. 여기에 답이 있다. 참 사랑을 서로 나누는 것이 당신이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넷째,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한다(17-18절)
모든 것을 환하게 아시고(심지어 속마음까지) 내 입에서 나온 말과 행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신 분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을 기다리는 기분이 어떤가?
만일 두렵다면 그것은 형벌 때문이다.“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18절). 그러면 심판 날에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물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그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 3:18). 예수님의 행위가 하나님 장부에 적힌 모든 죄의 빚을 해결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참 증거가 서로 사랑임을 앞에서 살펴봤다. 그래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절).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셨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셨기 때문이다(요 15:10). 우리도 그러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고 심판 날에 오히려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18절).
4. 참 사랑의 적용(19-21절)
서로 사랑할 때 이처럼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에 실패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며, 우리 믿음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엔 심판 날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된다. 영생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삶을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해야 한다. 먼저 잊지 말라. 우리 사랑의 출처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절).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도에 대한 사랑 모두 참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공급받는 힘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은 쉬운데, 성도 사랑은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성경은 돌직구를 던진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말이 거짓말),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20절). 칼빈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기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할 때 그것은 거짓 자랑이다”라고 말했다(좁스, 233p).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더 쉬운 것을 못 하면서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사칙연산 못 하면서 미적분 풀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21절). 그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예수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45).
몇 가지 구체적인 적용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빌 2:4)
세상은 갈수록 지독한 개인주의로 변해간다. 말세의 특징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딤후 3:2).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자기희생 그리고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라. 자신과 가족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들의 유익도 추구하라.
둘째,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요일 5:16)
첫째가 ‘주는 사랑’이었다면 두 번째는 ‘구원하는 사랑’, ‘보호하는 사랑’이다. 성도가 주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세상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면, 진리를 점점 떠나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보호하고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가인처럼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불평할 수 없다.
셋째, 날마다 참 사랑을 채우라(요일 3:1-2)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힘은 참 사랑을 알고 거하는 데서 나온다. 그 사랑에 감격하는 자만이, 그 사랑으로 채워져 성도에게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사랑을 채우라. 하나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사 랑
요한일서 4:16-20 / 배통루지한인중앙교회
A. 들어가는 말: Give, Live, Love
저는 최근에 한 회사의 음료수를 마시다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요한일서를 통하여 주일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그 회사에서 자기들의 상품을 선전하기 위한 문구로서 다음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Give
Live
Love
그리고 바로 이 세 가지 말이 요한일서의 주제를 너무나 잘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을 자기들의 상품 위에 써서 팔고 있는 음료수가 무엇인지 기억나시겠습니까? 네, 바로 코카콜라입니다. 그래서 구글에서 찾아보았더니 코카콜라가 작년부터 크리스마스 시즌에 자사의 상품을 선전하기 사용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배경에는 북극곰(Polar Bear)도 그려져 있습니다.
혹시 이 문구를 생각해 낸 사람이 성경, 특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통하여 이런 광고 글을 생각해 내지 않았나하는 추측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에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to love),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는 것 (to give),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to live)이 어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또 요한일서 4:9에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to love),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시는 것 (to give),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시는 것 (to live)이 어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요한일서 4:16-21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으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B. 펼치는 말: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다 (16).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도 요한은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 아마도 예수님의 지상 사역 시기에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이 다 함께 체험한 사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확실한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더 알게 되고, 더 믿게 되고, 다시 더 알게 되고, 또 다시 더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 사람들은 그 사랑 안에서 머물러 살게 됩니다. 그 사랑 안에서 거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하나님도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다음의 몇 가지 명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3.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4.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주셨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3.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4.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더 알고, 또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더 알도록 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고, 우리의 이웃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는 거처럼 사랑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처럼 사랑 안에 거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17-18).
17 이로써 사랑이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안에 거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다시 창조하시어서, 우리의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의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체험적으로 그렇게 사는 것을 사도 요한은 “사랑이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사랑이 온전히 이룬 사람들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여 영원한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합니다. 쉬운 말로, 죽어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은 지금 여기서 가지는 것이지,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1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50년 후에도 영원한 생명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영원한 생명이었다가, 50년 후에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영원한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 사신 그 모습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예수님은 가장 먼저 성부 하나님과의 확고한 관계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셨으므로 육체적인 제한이 있으셨습니다. 한 가정의 가족으로 오셨기에 가족으로서의 의무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오셨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야 하는 종교세도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확고한 관계 가운데 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좀처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을 부르시는 방법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신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셨던 그대로 우리도 또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신 또 하나의 모습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그분의 모든 삶을 바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집에서 쫓겨날까봐 부모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 안에 거하기에 그러한 두려움이 없이 부모와 살아 있는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맺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려움으로 설정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그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또한 우리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 (19-21).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제 사도 요한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도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을 배워가는 삶입니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제 사도 요한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사랑을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적이고, 또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어딘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경건이 진실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성구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붕어빵도 아니고, 국화빵도 아니고, 판박이도 아니고, 로버트는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우리를 서로 다르게 지으셨기에 우리는 동일한 상황에서 서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우리를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서로 다름이 없다면, 우리는 풍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 점심식사 시간에 많이 먹는 비빔밥을 생각해 보십시오. 밥도 있어야 하지요, 나물도 종류대로 최소한 몇 가지는 있어야 하지요, 각종 양념도 들어가야 하지요, 계란도 적당하게 부쳐서 넣어야 하지요, 다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우리의 형제를 미워하게 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표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형제를 정죄하며,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며, 우리가 마음으로 형제를 살인하면서, 겉으로는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3-24 말씀입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래서 예배 시간에 일어나서 나가는 분들은 아마 형제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화목을 이루고 나서 다시 오려고 일어나시는 가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우리가 우리의 형제자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통해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 애틋한 것 같은데, 막상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미운 사람들이 더 늘어가고, 미워지는 일들이 더 많아 진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좀 더 예뻐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여유 있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잘못하고, 죄를 짓는 것이 분명한 우리의 형제나 자매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긍휼히 여기고,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모습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저 상대를 스포일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바르게 말해 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랑으로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매를 때린다는 말과 같이 사랑의 매로 사랑하는 자녀를 때릴 수도 있습니다.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주님께 받은 계명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 율법 교사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7-40 말씀입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그에 버금가는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은 이웃 대신에 형제라는 대상을 정하여 주었지만, 이웃은 형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을 사랑하기는 더 어려운 것입니다.
C. 끝맺는 말: 존 록펠러와 록펠러 재단
저는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그의 나이 53세 때에 세계에서 한 사람뿐인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탈모에 몸이 오그라드는 독두병(禿頭病, bold headed disease)에 걸려 의사로부터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웃음과 삶의 의미를 잃고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무덤으로 가지고 갈 것도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여, 교회를 짓고, 극빈자를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웃음을 되찾았고, 건강도 회복하여, 무려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신 순서는 To Love, To Give, To Live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었고, 그리하여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이제 그 사랑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어떤 순서로 우리의 형제와 이웃을 대해야 할까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To Love, To Give, To Live의 순서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무엇인가를 주어여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우리가 주고받는 일에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기만 하는 사람은 반드시 번 아웃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누구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예배와 성경 공부를 통하여, 목장 모임을 통하여 우리는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수요일에 말씀을 공부하러 교회에 오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분들은 한 분이 아이를 집에서 돌보시고, 한 분이 오시던지, 아니면 두 분 다 아이들과 함께 오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이 말씀과 사랑과 기도로 충만해지면, 우리를 통하여 씨가 뿌려지고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이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그들에게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나누어 주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그 생명 안에 더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요한일서 4:18-21 / 이승선
지난 수련회 기간 동안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저는 너무 더운 날씨 때문에 기도를 했었는데요.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가서 놀기로 계획했던 날 아침에 비가 오고, 낮에는 또 비가 그치고 구름만 낀 상태가 되어서 최상의 날씨로 모든 일정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게 또 세심하게 대해 주시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4장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21절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성경에 나타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장 첫째 되는 큰 계명은 바로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온 존재를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한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모든 일의 동기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또는 책임감이나 의무감 때문에 하기도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자기 자신에게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별로 없는지,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에 고민을 하고 있는 한 학생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그러한 고민을 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정말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그러한 어떤 충만한 마음이 아직 없다할지라도, 왜 나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을까를 고민하고 또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반하였던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다시 확인하신 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누누이 하나님께서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다른 사람들이 누구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고 또 질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를, 무엇을 사랑하는지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창조된 목적, 그리고 구원을 받은 목적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또 행복해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행복한 생활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와 비결을 19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는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잉크로 삼고, 온 세상의 나무를 다 붓으로 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정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우리가 아는 만큼 자라나고 깊어질 것입니다.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떠나 사람이 되신 것이 어떠한 사랑인지, 나를 대신해 고통과 수치와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신 것이 어떠한 사랑인지, 오늘도 더럽고 비좁은 나의 마음속에 사시며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시는 그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이제 장차 다시 오셔서 나를, 이 죄 많고 고생 많은 세상에서 건지고 주님의 왕국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가 그 깊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에베소서 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18-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성도들이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높고 큰 것인지를 알게 되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지식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넘어짐과 죄악됨에 상관없이 우리를 선하게, 따듯하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날마다 깊이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날마다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다시 요한일서로 돌아오셔서, 요한일서 4장 21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우리가 그분께 받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판단하려면, 내가 과연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사람을 동일한 대상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형제에게 찬 물 한 잔을 대접하고, 병든 형제를 방문하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모든 일은 성경에서 바로 주님께 한 것으로 계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학생은 선생님께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형제자매와 교제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형제자매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형제자매와 불편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과는 바른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마태복음 5장 24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오기 전에 형제와 불편한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주제로 수련회를 가졌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첫걸음은 불편했던 형제자매, 서먹했던 형제자매와 새로운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자매를 사랑한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읽은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믿음의 고백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대하는 마음과 실제의 삶 속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함께 누가복음 6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2-3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3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너희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34 너희가 어떤 자들에게 받기를 바라며 빌려 주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준 만큼 받으려고 죄인들에게 빌려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아이들이 되리니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
성경은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하되, 모든 형제자매,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제가 저 자신에 대해 살펴보고 생각해 볼 때도, 그다지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이래두 나 같은 놈은 좀 많이 심한 것 같다.”라고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별로 사랑을 받은 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지만, 조목조목 따져보면 그다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죄 많고,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형제자매들에게서 사랑스러운 모습들만 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형제자매들에게 허물이 없고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 뜨거운 사랑을 값없이 받은 자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을 방해하는 지식
그렇다면, 우리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미움도 될 수 있고, 무관심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형제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로 다음의 한 가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고린도전서 8장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의 반대말은 지식으로 인한 교만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은 우쭐대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높아진 마음입니다.
어떠한 정보나 지식 자체는 우리에게 필요하고, 또 알고 있으면 유익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무식해서 손발이 고생하는 경우도 있고, 정말 간단한 것인데 그것을 몰라서 포기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양한 지식과 정보는 매우 필요하고, 또 성경적인, 영적인 지식이라면 바른 분별과 판단을 위해서, 영적 성장과 강건함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지식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우쭐대게 하고, 높아진 마음을 가져오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많은 경우는 내가 옳고, 저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 때문인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8장의 말씀에 언급된 지식의 내용도 성경적으로는 너무나 옳고 합당한 내용인 것을 보게 됩니다.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시장에서 팔리는 거의 모든 고기들이 신전에서 한 번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일 만큼 실제적인 우상숭배가 생활화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주님을 처음 믿은,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들은 시장에서 고기를 사먹을 때 양심에 걸리는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우상 신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동참하고 참여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으로 보게 되면 우상들은 실제로 신이 아니고,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형상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떤 고기가 우상 신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할지라도 그 고기는 우상 신에게 속한 고기가 아니라 그냥 맛있는 고기인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하였습니다. 성경적인 정확한 지식을 가졌던 형제자매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장에서 고기를 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고기가 우상숭배에 사용되었던 고기든지 아니든지 아무 상관없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들은 양심에 죄책감을 가진 채로, 다른 형제자매들이 먹기 때문에 그냥 따라서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먹는 문제에서는 우상숭배를 해도 되는가보다, 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하든지, 또는 다 저렇게 죄를 짓는데 나도 그냥 대충 살자, 라고 생각을 하든지, 믿음의 생활에 여러 가지 양심의 순수성과 관련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8장의 몇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네, 성경은 정확히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7-8절을 보시겠습니다.
7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8 그러나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어도 더 낫지 아니하고 먹지 않아도 더 못하지 아니하니라.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고 안 먹고 하는 문제 자체는 하나님 앞에서 더 낫거나 못한 문제가 아니지만,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한 가운데, 양심을 거슬러 그 음식을 먹는 형제자매들에게는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12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내가 아무리 옳고 정당하다 할지라도 내가 형제자매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원칙에서는 죄가 아닐지라도, 형제사랑의 원칙에서는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여기서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기를 먹는 것이 결코 죄가 아니고, 성경적으로 오히려 합당한 일이지만,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아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옳고 그름의 원칙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칙으로 걷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 형제자매들과 갈등하는 이유는 내가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옳고 그름보다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사랑이,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부인한다든지, 진리를 타협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면, 내가 옳다 할지라도, 나의 정당한 먹을 권리가 있다할지라도, 형제사랑으로 인하여 기꺼이 손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식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옳고 그름, 지식, 판단을 우선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랑은 형제자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내가 감수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고, 오늘도 그렇게 대하고 계십니다.
흠이 많고 문제가 많은 우리가 서로 보기에도 문제가 많은데, 우리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 자신은 얼마나 흠이 많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옳고 그름으로 대하셨다면, 우리가 잘못하는 것마다 일일이 지적하고 책망하셨다면, 우리는 너무나 괴로울 뿐만 아니라, 아마 지금 살아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주님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가 그렇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는 한, 우리는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밖에 할 수 없고, 사랑할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의 길, 지식과 판단의 길이 아니라,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가운데 포기하고 손해를 감당하는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계산해주시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힘입어 사랑
먼저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감동하는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사랑을 힘입어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사랑인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결심으로는 사랑할 수 없지만, 주님의 영을 힘입어서 우리가 사랑하기 원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나는 온전히 십자가에 매달리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셔서,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랑하고 하나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요일 4:17-21 / 유기성 목사
대만 제자훈련 세미나에서 만난 중국인 목사님들, 처음 만났는데도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서로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훈련 섬김이로 가셨던 교우들도 대만교회 교인들과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나 흐뭇하였습니다. 사랑은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처음 교회에 오신 새가족이 주일에 교회에 오셨는데, 처음이라 두리번 거리자 안내하시는 교인 한 분이“어떻게 오셨어요?”하고 묻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돌더랍니다. 안내하시는 분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참 센스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왔는데 어떻게 오셨냐니요?
이처럼 처음에는 서먹하던 교인들 사이가 친해지게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이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7절에서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도 하나님 처럼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누가 가르셨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누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으며, 누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으며, 누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만드실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밥을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안하신 것이 아니라 못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기를 갈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우리가 사랑하도록 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우리가 사랑하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밥먹는 것 보다 더 갈망하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갈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을 때 가서야 깨닫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죽을 때 가서 깨달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생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산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하다고 했습니다.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워서 심판 날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죽고 난 다음 어떤 처지에 빠질지 주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특별한 죄가 나오지 않습니다. 날마다 잔치하고 산 것이 죄입니까? 부자의 죄는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자에게도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까? 그에게도 사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형제는 사랑했지만, 집 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나사로에게는 사랑이 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의 죄였습니다. 여러분,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에는 분명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썼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렸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요한 서신에서는 믿음을 “사랑”으로 바꾸었습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은 거짓말쟁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말만 믿는다고 했지 실제로는 믿지 않는 자입니다.
20절 ...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믿음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증거, 곧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기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믿음이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믿고 영접하여야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오셔서, 그의 삶을 바꾸셨다는 증거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도 의견 대립이 있을 수 있고 화를 낼 수 있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미움의 영은 사탄입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베드로는 사도 바울로부터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갈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이 일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랑하였습니다.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하나님처럼 사랑하여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18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증거가 있으니 세상에서 좋은 것 다 빼앗기고 바보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 온갖 것을 다 가지고 누려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어떤 교우들은 죽을 때 편안하게 죽고 싶다고 기도부탁을 하시지만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두렵기만 하고 가슴이 뛰어서 견딜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평생 편안하게 잘 살았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옳고 그른 것도 살펴야 하지만 사랑을 놓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단기 선교 여행을 가는 것을 부모가 반대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싸웠습니다.
선교회장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상식에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회장과 다투었습니다.
세례냐, 침례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다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언제나 사랑이 제일이며, 싸우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권사 취임예배를 하고 곧 장로 취임을 하지만 성도들 중에 봉사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해도 교회 중직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21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하나님처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하지 말씀하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희미할까요? 천국, 지옥, 심판에 대하여 듣기만 했지 자신의 현실 문제라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누구나 사랑만 하게 됩니다. 미워하고 원수맺고 싸우고 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싸이어에서 선교사로 평생을 사역하신 헬렌 로스비어 선교사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출신의 여의사입니다. 그는 선교지에서 일어난 반란 때 반란군에게 겁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곳에 남아서 미워해도 모자랄 그들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희생]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강사가 된 그녀의 얼굴은 보는 이들마다 천사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전히 하나님처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걱정이 왠 말입니까? 오히려 이기적인 여러분을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하실 주 예수님에게 기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해 달라는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면 반드시 주님이 사랑하게 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시고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말씀하셨습니다.
철저히 이기적인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The Passion of Christ] 영상 한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이 영상을 처음 보는 분들은 충격을 받고 회개하며 또 감사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야겠다, 결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번 이 영상을 본 분들은 ‘또 저 영상을 보여주시네.’ 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 흐릿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십자가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도 다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1만 달란트(5-6조원) 탕감받은 자가 어떻게 1백 데나리온(천만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습니까? 탕감받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영상으로 보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바라본다면 어떻겠습니까?
17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영상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바라보시는 장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정말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본다면 어찌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은 과거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을 24 시간 바라보는 자는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움과 판단이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저절로 사랑만 하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중에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중에만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천국과 지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살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처럼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사랑하게 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는 너무나 위험한 모험을 이제는 중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축복의 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담대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해 주시는 주 예수님이 왕이심을 고백하며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
요한일서 4:16-21
1. 삶의 여정
삶의 여정에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환경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상적인 환경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좋은 환경에서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와서 근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거운 근심조차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는 인내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는 최상의 조건인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도 타락의 길을 걷는 실수를 했던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불평불만 하지 말고,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사랑하는 삶
전장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제 본장에서 요한은 영들을 시험해야 함과 사랑이신 하나님과 그분을 사랑하는 성도의 행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누구든지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면 그의 사랑을 통하여 그것을 입증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 거짓 가르침들이 활개를 칠 때는 진리의 확실한 시금석이 필요하다. 무엇이 시금석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시금석들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믿는 태도일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이다(1-6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러한 사랑을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의 최고의 예는 우리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보내신 사건 속에 나타난다. 이 숭고한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다(7-12절).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도 사랑 안에서 온전해 가야 한다. 완전해진 사랑은 두려움을 물리칠 것이다. 그리고 형제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강력한 시금석이다(13-21절).
3. 사랑의 하나님(16-17)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 되시는가?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 사도요한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지시하는 윤리의 근간이다. 따라서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통하여 사랑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듯이 주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사랑의 관계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믿어,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살았던 다윗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다윗은 사랑의 하나님, 힘과 방패가 되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 18:1-3) 다윗은 자신을 건지신 하나님, 자신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와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노래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아 알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였다. 우리는 고통의 현장,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는 삶, 그분을 끝까지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반드시 경험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타인에게 흘려보내는 귀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믿는 자들은 어떠한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공동번역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일 4:17)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되면 예수님처럼 담대하게 복음으로 이 땅 가운데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삶 가운데서 예수님을 닮아 가며,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복된 자들이 될 것을 날마다 선포해야 한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늘 깨어 있어 주와 동행하는 자, 그는 복 받은 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또한, 우리는 날마다 주와 동행하고, 주님을 맞이할 그 날이 기쁨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3-14) 우리는 주의 제자 된 삶을 살아가며 받을 수 있는 핍박조차도 문제로 여기지 않는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매일의 삶 가운데 성령님의 위로와 인도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길 기도한다. ‘나’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을 결단하겠는가? 사랑의 하나님, 그분께서 ‘나’와 동행하심을 확실히 마음에 새기고,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높여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파하는 복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온전한 사랑(18-19)
믿음의 사람들 안에 무엇이 있을 때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주의 자녀들 안에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이 있게 되면,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히려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벌 받을 일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증거입니다.”(요일 4:18)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어떤 이가 벌 받을 일을 생각한다면 두려워해야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은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어떠한 신분의 사람들인가?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데, 이는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들로서 환경과 형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주의 사랑을 날마다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천국 시민이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 12:28)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복된 삶을 살 것을 결단해야 한다.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관계인데, 누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알고, 가슴 깊이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천국 백성의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아직도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면 있는 모습 그대로 십자가 앞에 나아와야 한다. 큰 죄, 작은 죄, 어떠한 죄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함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주의 사랑의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음을 알고,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삶,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우리 가운데 성령님의 큰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을 결단하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깨달아 알고, 날마다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 주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형제를 사랑(20-21)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그리고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위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함을 말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과 분쟁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곳에 평화와 복이 있으며, 서로 미워할 때 분쟁과 파멸, 저주가 있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어떠한 형제라도 사랑할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들로서 자신 앞에 있는 궁핍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우리는 나의 형제, 나의 부모, 나의 가족, 나의 친척, 나의 민족, 그리고 열방의 영혼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날마다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사랑임을 기억하고, 날마다 성숙한 모습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자, 사랑이 넘쳐나는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한마음으로 서로 동정하고, 형제처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 ‘나’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을 결단하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성경의 두 가지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절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다하여 주 여호와를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사랑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품어주고, 사랑으로 바라보고,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친히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친히 경험하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 죄인인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날마다 주의 사랑에 거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성령님의 은혜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 이러한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 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https://saerounchurch.tistory.com/1213 [광주새로운교회:티스토리]
확실한 증거
요한일서 4:12-13
우리는 지금 요한일서를 통해서 ‘사랑’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얘기할 때 자칫 초점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둘 위험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늘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지 못한 채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게 되면 결국 세상 수준에서의 사랑을 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독생자 아들을 죄인된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자신이 아닌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사망에 처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 사랑이 아닙니까? 이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교회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긴 자들이 모인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당연히, 마땅히 나타나지는 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점령당한 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나의 죄를 용서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가득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만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인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또한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사랑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에 거하고 사랑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아닌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은 곧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든 이 위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사람에 대해서는 의인으로 군리하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세상적 기준에서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지배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는 결과임을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요구로 이해하기 보다는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묻는 의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사도가 진심으로 의도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증거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조건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하나님과 1:1의 직접적인 관계에서의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직접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형제 사랑을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형제 사랑을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신자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을 증거하는 증거물이 셈입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사람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하나님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하나님을 봤느냐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봤느냐?’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이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9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으로 인해 알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랑이 나타나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인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버지와 사귐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12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확실한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외부적인 어떤 사건과 경험을 통해서 확실한 것을 얻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기도해서 감기라도 낫는 체험이 있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실함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합니다. 도마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이 어딘지 처소가 어딘지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주님이 가신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고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예수님을 안 것이 아버지를 안 것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가장 확실한 것은 너희들 앞에 있는 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확실한 분이라는 것이지요. 때문에 믿고 의지할 분은 예수님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면 따로 목격하고 체험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확실한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자되게 하기 위해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을 얘기하는 것도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라는 말은 예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나타나신 사랑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아가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와 사랑과 의의 행하심에 두어야지 자신의 체험이나 상식, 행함이 신앙의 근거가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신앙의 근거로 자리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증거를 형제 사랑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형제 사랑은 보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5절을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말은 형제 사랑은 성령의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십자가로 확증되어진 사랑과 은혜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 자로 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에서 형제 사랑이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오늘도 내일도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