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 부려먹고도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본체만체하다가
두어 달 후 제법 싸늘한 늦가을 바람이 부니
모자는 씌우는 둥 마는 둥
옷은 입히는 듯 마는 듯
주인장이 먼지도 털지 않은 채 창고에 던져 넣던 날
친구들 중 몇은 이미 떠났다는 소식도 있었는데
아, 이제 마지막이구나!
불안이 엄습하고
어둠에 적응하며 주위를 돌아보니
에너지를 먹여도 기동을 할지 못할지 알 수 없는
불쌍한 동지들은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채
구석구석에 나뒹굴고.
아, 바스티유 감옥(*)이 따로 없구나!
아, 또다시 한줄기 빛을 볼 수 있을까? 절망하며
반은 포기한 채
그래도 반은 희망을 곱씹으며 인내하는데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이 가능한 쥐구멍을 통해
찬바람을 느끼면 겨울이구나
따뜻한 바람이 느껴지면 봄이 왔구나
조금 더 참으면 주인장이 다시 불러줄까
노심초사하는데
늘 미리 챙기는 성미의 주인장은, 입하가 지나자
곧 날씨가 더워진다며 어둠 속에서 나를 찾더니
"올해도 쓸 수 있으려나?" 혼잣말을 하며
내 코에 전기에너지를 넣어
1번, 2번, 3번 손가락을 눌러보고
목은 제대로 돌아가는지 키높이는 조절되는지
확인한 후에야 "한 해 더 써도 되겠구먼" 하고는
닦고 조이고 부산을 떤다.
("흑. 인간이란 지 필요할 때만 찾는구나!")
나, 2004년 생인 선풍기!
올해도 기사회생하였습니다.
만세.
(*) 바스티유 감옥
프랑스 왕 샤를 5세가 백년전쟁(1337~1453) 와중에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든 요새. 루이 14세(1643~1715) 때부터는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전제정치의 상징이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은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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