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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의 새로운 국왕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어린 소녀였습니다.
푸아티에 가문의 일곱번째 이야기입니다.
☆
따그닥. 따그닥.
오라드는 작은 입술을 오므리며 목마를 손에 꼭 쥐었다. 장식도 멋진 색칠도 없고 건장한 성인 남자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투박한 목마였지만 아이는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9월 생일에 맞춰 삼촌이 직접 만들어 보낸 생일선물이었으니까. 이제는 유품이 되어버린 목마를 보면서 길패트릭은 오라드를 자기 친자식만큼이나 예뻐했던 이 나라의 선왕 조슬랭을 떠올렸다. 오라드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고 아직 말조차 트지 못한 조카의 방을 선물로 가득 채우던 모습을. 오라드를 목말 태워 까르르 웃게 하고 철마다 제일 좋은 옷감을 골라 아이 옷으로 만들어 가져오던 모습을. 오라드는 삼촌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길패트릭은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신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너무나 사랑하셔서 더 일찍 데려가셨을까. 대리자를 보내 직접 통치를 인정하지 않으셨던가. 활짝 핀 꽃처럼 화려했던 수도 보르도는 선왕의 갑작스러운 승하와 함께 산비탈에 세워둔 수레가 그러하듯 진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쇠락하고 있었다. 겨울 보르도의 칙칙한 잿빛 색채에는 죽음이 가져온 짙은 그림자가 더해져 거무튀튀한 빛만 불길하게 내뿜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움직여 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궁성을 보았다.
“어머니가 오셨어요.”
오라드는 자주 꿈 이야기를 했다. 꿈에서 오라드는 한 달 넘게 만나지 못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전설 속의 신수를 만나러 가기도 했고 부모와 함께 바다 위를 떠다니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났어도 꿈과 현실을 종종 구분 못한다. 길패트릭은 오라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오셔서 뭐를 하셨는데?”
“머리를 빗겨주셨어요.”
파트리샤는 딸을 꾸미는 걸 좋아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고 긴 머리카락을 쫑쫑 땋고 꼬까옷을 입히면 아이는 햇살처럼 웃으며 빙글 돌았다. 그는 딸의 머리카락이 약간 뭉친 걸 눈치 챘다. 낮잠 잘 때 몇 번 뒤척이더니 그렇게 됐나.
“앉아보렴. 아버지가 빗겨줄게.”
아이는 목마를 든 채로 헤실 웃으며 쪼르르 다가왔다. 그는 익숙한 손으로 빗을 쥐고 딸의 머리를 빗겼다. 탑으로 옮긴 이래로 부녀는 모든 생활을 함께 했다. 정확히는 아버지 쪽이 딸을 돌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새근새근 잠들던 딸이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앞에 앉으면 머리를 땋아주며 꿈 이야기를 들었다. 장난감을 갖고 놀거나 그림을 그리다가 질려하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이야기나 시작했다. 다시 아이가 눈을 끔뻑이며 졸려하면 이불을 덮어주고 못 다 읽은 번역서를 읽었다. 행동의 자유가 이 탑 안으로 제한된다는 걸 빼면 턱없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떨어지고 나서야 허전함을 느끼게 되다니.
그는 여기 없는, 그렇지만 있었어야 할 사람을 떠올리며 느릿느릿 손을 움직였다. 파트리샤. 솔직히 10년이란 세월 동안 서로간의 정담을 나누는 것보단 정무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았다. 다른 부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대화는 주로 작황의 풍흉이나 도로의 정비 사업, 무역 수출입 품목 변동 등이 주를 이뤘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 이는 아키텐의 공주였고 국왕의 가장 큰 누이였으며 부왕이 신뢰했던 재무관이었다. 부부 사이이면서 같은 직책을 두고 전임자와 후임자라는 기묘한 관계가 되어버렸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일반적인 부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같은 목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동료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래도 보고 싶다.
강건하던 선왕이 흑사병에 걸리고 고작 나흘 만에 세상을 떠나자 파트리샤는 즉시 다음 왕위계승자인 오라드를 탑에 격리시켰다. 알고 있다. 부모 중 하나는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걸. 그러나 둘 중 하나가 안전한 곳에 남아야했다면 파트리샤가 남는 게 맞았다. 그러나 파트리샤는 선왕을 죽인 내전을 종식시키러, 이제 자신에게 넘겨진 왕의 의무를 다하러 가장 치열한 곳으로 향했다. 시종조차 시간을 정해 한두 명밖에 오지 않는 격리 생활은 바깥의 동정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무사할까. 잘못되진 않았을까. 쌓이는 한숨만큼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불안도 커져갔다. 낙관을 가지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
그는 빗을 든 손을 멈췄다.
돌계단을 밟으며 올라오는 발소리가 선명하게 많아졌다. 식사를 가져올 시간도 아니었고 때를 맞춰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으러 오는 궁내관의 발소리도 아니었다. 그는 발소리와 함께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보폭의 간격을 쟀다. 다행히 벽을 긁는 쇳소리나 비명소리 등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걸 눈치 챘는지 오라드가 먼저 일어서는 게 더 빨랐다. 길패트릭은 빗을 내려놓고 딸을 감싸듯 약간 더 앞으로 나섰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고 좁은 복도를 메운 사람 한 무리가 나타난 것은.
“…무슨 일인가?”
무장한 사람들이 아니다. 위협적인 기색도 없다. 그러나 한풍을 맞은 양 전신이 싸늘하게 식고 심장만 기분 나쁘게 쿵쾅거렸다. 가장 앞에 선 앙주 공작 풀크 드 앙주가 고개를 숙였다.
“두 분 폐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뭐?
“……다시 말해보게. 지금 뭐라고…?”
길패트릭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오라드의 귀를 막았다. 복도를 메운 무리는 그 자리에 서서히 몸을 숙였다.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상황은 마치 악몽처럼 그러나 확실하게 그들 부녀를 덮쳐오고 있었다.
“상왕폐하. 선왕께서는 조금 전 승하하셨습니다. 공주께서는 이제 아키텐의 새로운 국왕폐하이십니다.”
누가 상왕이란 말이냐. 누가 선왕이란 말이냐. 누가. 대체 누가…!
“……가라.”
목소리가 듣기 흉하게 갈라졌다. 딸의 귀를 막은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돌벽으로 가로막힌 실내였지만 황야에 거칠게 내던져진 것처럼 어지럽고 막막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던가.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가라. 가! 당장 꺼져버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지도 않았다. 말소리가 제대로 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길패트릭은 오라드를 잡아 자신의 뒤로 감추고 거칠게 문을 닫았다. 거친 소리에 놀랐는지 오라드는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길패트릭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리 가버릴 수 있습니까.
저 어린 것을 두고.
나를 두고.
아키텐을 두고.
기억에 맺힌 모든 추억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 피를 흘리는 것보다 더 쓰라린 아픔은 영원과도 같은 통곡이 되었다. 그는 딸을 달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울부짖었다. 바깥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방 안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
딸이 여섯살 난 아이라 아직 어리니 제가 대신 인사드립니다. 아키텐의 상왕 길패트릭입니다.
새해가 되었지만 아키텐은 전혀 밝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두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국왕을 두 분이나 잃었고, 흑사병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아이의 삼촌과 어머니와 할머니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의 이모들은 하난 발칸 반도에, 하난 알바라신에 있습니다.
제 딸을 지켜줄 어른은 부족한 저 한 사람 뿐입니다.
(*한국 나이 기준 길패트릭 28세, 오라드 8세)
현재 제1위 계승권자인 처제 필리파 공주를 제외한 2~5순위 계승권자입니다.
밑에 보이는 필립 드 푸아티에는 수감된 전 플랑드르 공작 위그 드 푸아티에의 아우인데, 위그의 작위가 몰수된 뒤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평소에도 형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런 순간에도 형의 구명을 돕기는커녕 제일 먼저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인 필립이 제 형과 함께 가지 않고 독립공작령인 피카르디로 간 것이 좀 의아하군요.
파트리샤 생전에 위그를 풀어주라는 요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왕을 죽게 한 반역자는 풀어줄 수 없습니다.
딸이 어리니 앙주 공작이 바로 섭정을 맡았습니다.
플랑드르 공작이 사라지고 부르고뉴 공작이 감옥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툴루즈 공작이 죽어 어린 아이가 계승한 지금, 앙주 공작 풀크 드 앙주는 명실상부한 아키텐의 2인자입니다.
장인이신 초대 국왕께서 그에게 조상의 땅을 돌려주고 공작위를 제수하실 때만 해도 19세의 어린 청년이었는데 그도 이제 30대 중반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앙주 공작이 부디 제 딸을 호의로 대해주길 바라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앙주 공작과 저 혹은 푸아티에 가문이 척을 진 적은 없으니, 부디 그가 나쁜 마음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딸이자 푸아티에 왕가의 4대 국왕인 오라드입니다.
모든 방면에서 고르게 성장하는 아이입니다.
처남인 선선대왕…은 이 아이가 오래 영화롭게 살길 바란다며 당시 68세로 장수하시던 제 딸의 증조모 이름을 붙였습니다.
처남의 바람처럼 딸아이가 자라길 바랍니다.
흑사병의 현재 분포입니다.
동방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역병은 대서양에 닿은 이곳 아키텐까지 장악하고도 북진을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지금 궁성의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오라드는 하나 남은 희망입니다.
"현명해지렴. 누구보다도 너 자신을 위해서."
오라드는 숙련공과 상인들에게서 검약에 대해 배울 겁니다.
자문회에 남은 인원들입니다. 다 죽거나 떠났습니다……만.
저 투덜이는 낯이 익군요. 장인어른 국상 중에 처남에게 땅을 요구했다가 쫓겨난 베아른 백작 가스통입니다.
재무관이었던 파트리샤의 전임자이기도 하지요.
그 외 조언자에는 (능력치가 애매한) 섭정 앙주 공작 풀크 드 앙주가 있습니다.
(*전 편에 등장한 데비는 조슬랭 시절의 궁정 사제였고 파트리샤 즉위 때에는 이미 사망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궁정 사제의 이름이 하필 공교롭게도 남매의 아버지 이름과 같은 기욤이라… 전 편은 수정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중요 인물도 아니고…)
그럼 빈 자리를 채워봐야 하는데…….
보이십니까. 머리도 나쁜 것들이 다 투덜이가 되겠다고 손가락을 밑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재무관은 다시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재상을…….
이것들이 진짜.
대장군을…….
처남에게는 죽음도 불사할 것 같았던 놈들이 그 조카딸에게는 기꺼이 투덜이가 되겠다고 하는 군요.
믿을 놈이 하나 없는 세상입니다.
"…관둡시다. 어차피 흑사병이 사라질 때까지 아키텐은 할 수 있는 게 없소. 불안함을 알면서도 굳이 자문회로 끌어들여 영향력을 주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공께서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소."
섭정과는 좋은 사이를 유지해야 합니다.
전세계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갑니다.
위그 드 푸아티에는 3월에, 아이메리 드 투아르는 4월에, 외드 드 부르고뉴는 7월에 감옥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죄인들의 시신을 내다 버려 행려병자의 시신과 함께 태워라. 오라드에게는 절대로 알려선 안 된다."
어린 툴루즈 여공작을 없애고 싶은 모양입니다.
푸아티에는 푸아티에 가문이 다스리는 것처럼 툴루즈는 툴루즈 가문이 다스렸으면 합니다.
거절합니다.
투덜이가 흑사병으로 사망하고 베아른의 주인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새 배아른 백작은 예전에 그가 왕실의 땅을 나눠주길 바랐던 셋째아들이었습니다.
장남은 이미 병사했고 차남은 성직자가 되어서 삼남이 후계가 되었군요.
잘 된 일입니다.
아르투아에서도 전 백작이 흑사병으로 사망하면서 주인이 바뀝니다.
전 첩보관 베아른 공작 가스통에게 필적하는 음모력을 가졌군요.
게다가 야망 있고 용감하고 근면한 성격입니다. 음모 쪽에 재능이 있고요.
어쩐지 이 여백작을 주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왕폐하, 급보입니다! 앙주 공작께서 그만…!"
아키텐의 섭정이 되고 불과 10개월만에 앙주 공작 풀크 드 앙주는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동안 왕국과 국왕을 위해 온 힘을 다한 선 앙주 공작을 애도하며, 상왕인 내가 국왕이 성년을 맞으실 때까지 섭정을 겸하겠다."
당신은 그래도 내 딸을 위했던 좋은 사람이었군요.
경계해서 미안했습니다. 편히 쉬세요.
이제 자문회는 제대로 붙어있지도 않은 추기경과 저 둘 뿐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힘이 센 공작은 없습니다. 다 어린 아이들 뿐입니다.
고만고만한 백작들 가운데 브뤼헤 백작이 가장 힘이 센 모양이군요. 누구에게 감히 빨간 주먹을 휘둘러?!
그 중에 저기 닥스 여백작 기랑드 드 닥스가 눈에 뜨입니다.
선대 닥스 백작 피르아르노 드 닥스의 여동생입니다.
마땅한 인물이 없으니, 아키텐 독립의 단초가 된 선대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긴 통치를 하는 현 백작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조언자를 맡기겠습니다.
그럼 이제 대장군을…….
1년이 지났는데도 참 한결 같은 무인들이군요. 아주 존경스럽습니다. 네.
그래도 이번에는 채워보겠습니다.
(*Jacme 이거 이름 어떻게 읽나요?)
그럼 이제 첩보관을……
그래요.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투덜이가 아닌 사람을 뽑자니… 아까 눈여겨봤던 아르투아 여백작 아르신드가 음모력이 우월하군요.
아르투아 여백작의 파벌 가입도 방지하는 겸, 첩보관으로 뽑겠습니다.
채운 김에 재상을…….
똑똑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군요.
어차피 전원 다 역병을 피해 피신 중인 거, 뤼지냥 백작 위그 드 뤼지냥을 재상으로 삼겠습니다.
이미 고령이고… 몇 년 지난 후에 교체하면 되겠지요.
그렇게 자문회를 다 채웠습니다……만.
채우자마자 이것들이 수작질이군요. 벌써부터 쎄쎄쎄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단 롤라드파가 오베르뉴 백작령에서 나타났습니다.
한참 젊은 베아른 백작이 흑사병과는 무관하게 스트레스로 죽어 베아른의 주인이 또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흑사병을 퍼트린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소요를 일으키면 불안만 커진다. 괜한 짓 할 거 없다."
파트리샤가 죽고 1년 반이 지나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레브라나는 천재에 파트리샤처럼 관리력이 탁월한 여성입니다.
문득 선왕비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부친이 그 사이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군요.
새 남편도 생겼습니다.
새 남편은 룩셈부르크의 대장군이군요.
전 아키텐 왕비였고 지금은 보헤미아의 공주인데 너무 기우는 결혼을 시킨 게 아닌가 싶지만… 이젠 아키텐과 상관 없는 일이겠죠.
"스코틀랜드에서 온 소식입니다. 상왕폐하, 삼가 조의를……."
"……바다가 흑사병을 막지 못했구나. 알겠다. 물러가라."
도버 해협과 칼레는 고작 40km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육지로 연결된 곳이 아니니 제 고향은 안전할 것 같았는데…….
저는 지쳐버렸습니다.
처음 툴루즈에 흑사병이 창궐한 이래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내일은 또 다시 찾아옵니다.
어제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내일입니다.
자꾸 고양이를 잡으라고 군중들이 야단입니다.
내버려두면 고양이를 잡을 테고, 고양이를 잡고도 흑사병이 끝나지 않으면 그 다음엔 개를 잡겠죠.
종국에는 사람을 잡을 테고요.
"고양이를 몇 마리 잡아와라. 다치게 하지는 말고."
원하는대로 고양이를 잡아옵니다.
그럼 살처분을 원하는 군중들을 소집합니다.
"이 고양이들은 성 안에 풀어두겠다. 만일 고양이가 흑사병을 옮기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와 내 딸은 곧 죽을 것이고, 우리 부녀가 무사하다면 고양이는 죄가 없는 것이다."
고양이는 이런 지경에도 건강하고 깨끗해보입니다.
하지만 말이라도 딸아이 목숨을 담보로 걸었단 걸 파트리샤가 알았다면 정색을 했겠지요.
"고작 두 달 만에 꺼질 관심을 두고 학살을 운운하다니…."
사람들은 이제 고양이에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궁성에서 고양이 털이 좀 날릴 뿐입니다.
"상왕폐하. 이제 고양이들은 안전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하명하시면……."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발도장을 찍고 다녀서 고충을 겪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털이 공처럼 뭉쳐 굴러다녀서 힘들다고도 합니다.
"그냥 둬라. 어차피 쥐를 잡는 데에도 소용이 될 테니. 그리고 무엇보다 오라드가 좋아하잖나."
아키텐의 어린 여왕은 친구 하나 없는 유년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가을은 깊어가고 또 다시 겨울이 찾아옵니다.
새해가 다가오기 전, 현재의 세계 정세입니다.
우리는 바로 옆에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대국을 두고 있으면서, 북쪽으로는 기존 영토의 30% 수준으로 찌그러진 프랑스가 있고, 브르타뉴 반도를 장악한 브르타뉴 왕국과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인 잉글랜드 왕가가 서북부를 짓누릅니다.
흑사병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 당분간은 이 형세를 유지하겠죠.
오라드가 성년이 될 때는 지금의 참담한 상태가 회복되어야 할 텐데….
신경을 못 쓴 사이에 알바라신에서 자기 멋대로 줄리아나 처제를 시집보냈습니다.
그것도 고작 여백작의 아버지일 뿐인 홀아비의 재취 자리로 보냈군요.
진작 데려왔어야 하는 건데….
"폐하! 오베르뉴에서 급보입니다!"
"사탄에게 영혼을 판 놈들! 어떻게 이 시국에 난리를 일으킬 수 있단 말이냐!"
적의 집결 병력은 약 3천.
현재 우리 아키텐 군의 절반을 조금 넘습니다.
그러나 출정을 감수하기에는 국왕군의 손실이 너무 큽니다.
지난 내전이 혈전으로 변모한 이유는 다름 아닌 흑사병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흑사병은 아직도 아키텐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전이 종식되고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당분간 내버려둔다. 어차피 오합지졸이다."
그 오합지졸을 모아 군대로 만든 실력자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분명 걸물일 테죠.
하지만 지금 상대하는 건 객기입니다.
개전 후 두 달이 지나 봄이 되었습니다. 전황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도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어차피 혼자서 싸우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그리 쉬울 리가 없지요.
대서양과 맞닿은 아름다운 해안은 묘비만이 가득합니다.
햇살이 뜨거운 한여름이었습니다.
아이가 몸이 좋지 않은지 맥이 없습니다.
설마 흑사병은 아니겠죠.
그저 좀 불편한 것 뿐이겠죠.
바로 좋아지겠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어떻게…!!"
9월 25일 생일을 조금 앞둔 9월 14일, 오라드를 괴롭히던 병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저 작은 아이가 암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의사를 찾아야 합니다.
전 궁정 의사는 이미 죽었습니다.
파트리샤는 새 의사를 부르기 전에 저와 딸아이를 보호하려 성문을 폐쇄했습니다.
밖에는 아직도 흑사병으로 사망한 시신을 태우는 연기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딸이 괴로워하는데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 답 한 번 돌아오지 않는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습니다.
"들리십니까! 차라리 절 죽이시고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제 단 하나뿐인 자식입니다!"
오라드를 살려야 합니다.
이방인이라도 배교자라도 아니 악마라도 좋습니다.
누구든 제발 제 딸을…….
☆
2019년 마지막 날에 (암울한 이야기로) 인사드립니다.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Normandie_CaT 님의 의견대로 이번에는 서술자를 주인공의 아버지로 잡아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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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리고 나니 가독성이 영 별로여서 엔터만 좀 수정했습니다. 해피 뉴 이어. 크킹 하고 싶어요……
철인이 아니시면 치트로 딸한터 걸린 암을 지워주고 아버지가 암에 걸리게해주는걸로 하죠.
사신:ㅇㅇ오라드는 살려주지!대신 너가 죽어야지?
8ㅁ8…… 너무하셔요………
연대기 쓸 생각 하고 나서 charinfo 외엔 치트 없이 플레이했는데, 그래서 위에 말씀하신 것보다 더한 역설신의 안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치트면.. 사신이벤트를 근본으로 삼아 가문원, 가족들을 저당잡히고 질병제거후 더 사는건 어떠신지?
악마와의 거래
비록 역설신의 가호가 없을 지라도 삼촌과 엄마가 하늘에서 지켜줄 겁니다……
와! 이렇게 해서 가문이 망하고! 왕국이 망하고! 교회가 망해서~ 게임오버가 되는구나~! 하고 알 수 있었던 좋은 연대기었습니다. ^^
다음 연재 기다릴게욧!
그나저나 글자가 깨지는거 보니, 한글모드만 쓰시고 한글 에드온이나 별다른 모드 사용 안하시나 보네요?
바닐라 게임성에 영향을 안 주면서 비주얼을 향상 시킬 수 있는 모드가 많아요.
문장 모드인 Patrum Scuta (Ironman) 추천드립니다.
뭐예요ㅋㅋㅋㅋㅋㅋ 정성스러우시잖아ㅋㅋㅋㅋㅋㅋ
조슬랭은 무성애자일수도 있겠다 싶고(단순히 정체성 혼란 중이었을수도) 길패트릭은 이성과의 결혼을 원한 거나 자식이 있는 걸로 봐서 바이섹슈얼인 거 같은데…… 원인을 따지고 보면 초대 기욤이 제일 잘못한 거 같고 더 원인을 따지자면 게임 진행속도를 바짝 올린 제가………
+)저거 적용하면 푸아티에 문장이 원래 역사적 문장인 붉은사자기(*게임상 푸아티에 공작령 문장)로 바뀌는 거 같아서 이거 쓰는 동안은 걍 가겠습니다… 푸아티에는 행복하고 싶다……
진짜 붉은 사자 보다 바닐라 푸아티에 문양이 더 멋지네요...!
으으.... 가문원이 오라드 하나 정도 남은 거 같은데, 어떻게 헤쳐나갈지 엄청 궁금하네요.
좋은 연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ormandie_CaT 아키텐 문장은 붉은 바탕 황금사자(세로 사자) 푸아티에 가문 문장은 흰 바탕 붉은사자 잉글랜드/노르망디도 황금사자 다른 곳도 황금사자 백사자 적사자 등등 나오는 거 보면 사자 한 마리 안 뛰어노는 동네에서 왜 이리 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_(.ㅁ._ )_
다음 편은 (어쩐지 1월 1일을 맞추고 싶어서) 곧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한 해 되세요 :D
(*실제로도 아키텐 대공 기욤 9세의 직계손은 엘레노오르 한 명만 남아 헨리2세의 왕비가 되었지만 이런 재현을 바란 적은 없지 말입니다 흑흑)
그래서 1월 1일에 올려보고 싶었는데 이것저것 겹쳐서 망했습니다 흑흑……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잼게 봣슴다. 필력에 감탄.. 연대기 써볼 동기부여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__) 뱀발을 붙이자면 '오 이거 연대기 각이다(=이번 플레이 재밌었어요! 공유할래요!)' 생각했을 때는 이 정도로 마상을 입을 줄 몰랐습니다 엉엉…… 조슬랭과 파트리샤 남매를 죽이면서 멘탈이 파스스 되고(플레이 일지만 올린다면 상관 없겠지만 글도 쓰다보니)…… 멘탈의 보호를 위해서는 인생에 약간 고난이 있는 창업형 주인공이 좋은 거 같습니다. 비극 서사 주인공은 보는 사람은 재밌지만 쓰는 사람은 데미지가 극심합니다(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