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 주거지 유적과 무덤 출토 유물 실크로드(Silk Road)는 중국 서안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 사막과 초원지대를 지나 페르시아를 거쳐 로마의 비잔티움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고대 이래로 동.서 교역로이자 문화교류의 통로였다. 실크로드 상에 존재했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니야, 누란, 호탄, 투르판 등지에서는 많은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당시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중앙아시아 사막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종이, 나무, 직물과 같은 유물들이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온전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중앙박물관이 소상.전시하고 있는 투르판 지역 유물 중에는 오타니 컬렉션이라 불리는 유물들이 많다고 한다. 이 유물들은 20세기초 일본 교토의 니시혼간지 주지승인 오타니 고즈이가 총3차에 걸친 중앙아시아 원정을 통해 구입하거나 약탈한 유물들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재벌이 데라우치가 총독이었던 시절 조선총독부에 기증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오타니가 수집한 5천여점의 유물중 1/3이 중앙박물관에, 1/3은 일본에, 1/3은 중국 뤼순에 있다고 한다. 오타니는 혜초가 신라의 승려였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아시아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아시아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옛 ‘소련령 중앙아시아’에 속하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가리킨다. 우리른 이 지역을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나라)’ 또는 ‘서역’이라고 부란다.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서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여러갈래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동서교역로를 장악하려는 주변 여러 세력의 침입과 지배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교역로는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가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중요한 통로로 작용했다. 그 결과 이 지역의 문화는 고대 지중해, 인도, 서아시아, 중국 문화의 요소가 복합된 독특한 모습을 띤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소장품은 대부분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동투르키스탄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지역은 텐산산맥 이북의 초원지대에서 전개된 유목세계와 그 남쪽으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단과 북단을 지나는 서역남도와 서역북도를 통해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인도, 서아시아, 중국간의 교류가 본격화 되었다. 그 길목에는 여러 오아시스 도시가 세워져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지중해 동안 무역항 아티오크에서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이어지는 긴 교역로이다. 장안에서 신라의 수도 경주까지 교역로는 실제적으로 연장되며, 한반도를 거쳐 유라시아대륙 동쪽끝 일본열도까지 이어진다. 당나라 현장법사의 서역순례 이야기를 전해주는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많은 왕국들과 기나긴 여정에 등장하는 고장들은 실제 실크로드상에 존재했던 곳들이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곳으로는 뜨거운 화염산과 고창국이 등장하는 투루판이 있다. 한나라가 천산산맥 북쪽 유목민족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둔전을 경영한 이래로 한족이 지역토착민과 함께 거주하면서 당나라때까지 실크로드에서 중요한 역학을 했다. 또한 남북조시대에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는 중요한 경로이기도 하다. 투루판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타림분지 남부에 위치한 호탄은 옥의 생산지로 고대 월지국이 있었던 곳이다. 고대 이래로 동.서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으로 대승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거지 유적과 무덤 출토품 극도로 건조한 기후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종이, 나무, 직물과 같은 유기질의 유물이 천년의 세월을 지나고도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슬람화되기 이전 이 지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니야, 누란, 호탄, 투르판 등지에서는 많은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문서, 가구, 직물과 같이 일상생활에 사용된 물건을 비롯하여, 죽은자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그릇, 옷, 인형, 그림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사용된 여러 문자와 언어, 다양한 풍습, 그리고 안락하고 풍요로운 내세에 대한 바람을 찾아볼 수 있다. 무덤에서는 때때로 미라가 된 시신이 발견되기도 한다.투루판 분지. 천산산맥 북쪽 초원지대가 끝나고 남쪽으로 드넓고 타클라마칸 사막이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천산산맥에서 관개수로를 통해 물을 끌여들여 농업을 하고 있다. 고대 이래로 중국이 흉노를 비롯한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요새를 중심으로 한족이 들어와 살던 지역이다. 지금은 위그루인이 주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다. 로프노르 지역 소하(小河) 무덤과 유물(Xiaohe Tomb in Lop Nor). 중앙아시아 사막은 메마른 건조기후 덕분에 사막에서 수천년이 지난 직물, 가구, 문서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소형 인물상의 단편에 해당한다. 이 중에 얼굴이 하트 모양인 여인상의 경우 완형으로 남아 있는 예가 있는데, 이는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긴 옷을 입고,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 전시된 예에서도 높이 올린 머리모양과 동그란 머리장식이 보인다. 호탄 지역에서 발견된 테라코타 조각은 세계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특정 유적의 발굴품이 아닌 경우가 많아 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 장난감이었거나 부적과 같은 기능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양한 얼굴표정과 자세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졌다. 원숭이가 자주 등장하는 점이 특징이다. 여기 전시된 다양한 인물, 동물의 얼굴이 묘사된 조각은 뒷면이 평평하여 용기에 부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공통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으며, 얼굴표정에 생동감이 넘치는 점이 특징이다. 거울 뒷면에는 나무, 산, 냇가를 배경으로 두 인물이 등장한다. 왼쪽 인물은 물가에 앉아 있으며, 오른쪽 인물은 소를 끌어 가고 있다. 이는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왼쪽 인물이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는 것을 듣고 귀를 씻었다는 허유이며, 오른쪽은 그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어 위쪽 개울로 소를 끌고 가는 소부(巢父)이다. 표면이 검게 칠하여져 있고 바닥에는 ‘금사사(金沙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금사사는 쿰트라에서 살았던 당나라 사람이 운영했던 사원으로 여겨진다. 쿰트라의 GK제7굴에도 이를 언급한 글씨가 남아 있다. 봉니(封泥)에 문양을 찍는 데 사용한 도장이다. 봉니는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서를 봉한 부분에 진흙을 붙이고, 그 위에 문양을 찍은 것이다. 중앙아시에서는 나무 편지를 봉할 때 사용한 봉니가 자주 발견된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시, 로마 신을 비롯하여, 페르시아 문양, 중국의 한자와 이를 변형한 문양 등이 보인다. 청동으로 만든 등잔으로, 서아시아 이슬람 문화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벽면에 걸 수 있게 만들었느데, 걸개의 한쪽은 떨어진 상태이다. 그리스의 암포라(amphora)를 연상시키는 기형을 지닌 항아리이다.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길상문인 연주문 형태를 따로 만들어 표면에 부착했다. 이외에도 선이나 점으로 이루어진 장식을 새겨 넣었다. 입체적인 장식이 많은 점을 고려할 때, 실용적인 용기보다는 부장을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큭다.
누란, 즉 크로라이나 왕국이 언제부터 성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에서 발견된 타림 미라들 중 하나인 누란의 미녀를 통해서 기원전 19세기부터 사람들이 초기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18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800년 전인데, 심지어 상단의 누란의 미녀의 경우는 누란에서 발견되어 누란 미녀란 별명이 붙은 거지 실제 DNA 등으로 연대조사를 해 보나 그보다 더 전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누란 대접, 시루 기둥, 국립중앙박물관, 오타니, 혜초, 조선총독부, 투르판,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초원지대, 페르시아, 나무, 직물, 종이, 선선국, 로프누르호, 차사국,구자
https://youtube.com/shorts/4yzKfjLnN_s?feature=share
이들이 처음 문헌에 '누란'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사기 '흉노열전'에 수록된 기원전 2세기 편지 중에서 발견된 것이 최초이며, 그 사이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해당 편지는 당시 흉노의 지배자였던 묵돌이 전한의 문제에게 보내온 것으로, 이 편지에서 선우는 월지와의 싸움에서 이기면서 누란·오손·호게 및 근처의 26국을 평정했다고 선언하는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이 편지는 문제 4년인 기원전 176년에 보내진 것이므로, 누란은 적어도 BC 176년 이전에 형성되어 월지의 세력권에 있던 것이다.
그리고 BC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서 ‘서역전’에 의하면, 서역을 전체를 지배하에 둔 흉노는 언기, 위수, 위려의 사이에 동박도위를 두어 누란을 포함한 서역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고, 하서회랑 지역에 수만의 군세를 두어 그 교역을 지배했다라고 기록되어있다.2.2. 전쟁[편집]
한나라는 흉노에 조공하는 속국에서 강경한 태도로 대응하게 되었다. 이때 흉노와 전쟁하기 위해 월지와 손을 잡고자 장건을 특사로 서역으로 보냈다. 그 여정에서 장건은 2번씩이나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 당시 서역에 대한 흉노의 지배가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나라는 기원전 121년에 곽거병의 지휘로 대규모의 흉노 정벌군을 출정시켰고, 기원전 119년에는 막북의 흉노 본거지를 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이 결과로 한은 본격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2]
이렇게 실크로드를 통제할 수 있게 된 한나라는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서방까지 견사나 대상을 많이 파견하였다. 그러나 교역의 증대로 인해 한나라 사람들[3]과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의 사이에서 사사건건 충돌이 발생하면서 서역 여러 나라에서는 반한 감정이 증대했다.
특히 누란과 고사는 한의 진출을 싫어해 흉노와 가깝게 지내고 한나라 사신의 왕래를 방해하는 등의 온갖 반한 정책들을 펼쳤다. 그러자 한 무제는 기원전 109년, 종표장군 조파노(趙破奴)와 누란에 견사로 파견된 경험이 있는 왕회에게 명하여 군사 수만명을 동원해 누란과 고사를 침략했다.
약 기병 700기와 함께 선행한 조파노의 공격을 받아 누란은 점령되고 국왕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에 누란의 왕은 왕자 1명을 한나라에 볼모로 보내고, 한나라에 복속당했다. 서역의 요충지 누란이 한나라에 복속되자 흉노는 이를 좌시할 수 없었고, 흉노도 누란을 재차 공격해오자 다급해진 누란은 흉노에게도 또다른 왕자를 볼모로 보낸 뒤 두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형식으로 해당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어쨌든 서역 주도권을 둔 한과 흉노의 싸움을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누란의 정치 또한 그런 상황에 따라서 와따리갔따리하는 상황 또한 지속되었다.[4]
그런데 한의 군사 개입을 부르는 사건이 또 한번 발생했다. 무제는 대원의 한혈마를 얻고 싶어 사자를 대원으로 파견했지만, 한나라 사신의 무례한 태도로 인해 되돌려보내졌다. 그런데 그 사신은 귀향하던 길에 대완 동쪽의 욱성성에서 습격을 당해 살해당하고 재물까지 전부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열받은 한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이광리의 지휘 아래 두 차례에 걸쳐서 대군을 파견했다. 한나라의 대원 원정길에서 누란왕은 또다시 사로잡혀 한나라로 끌려가고 거기서 무제의 질타를 받게 된다.
무제는 누란이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 복속된 일을 가지고 왕을 꾸짖자 누란의 왕은 "소국은 대국의 사이에서, 양속되어 안심할 수 없다"고 답한 뒤 양속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나라 영토에 이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누란왕은 누란으로의 귀국을 허락받았다. 한나라가 누란 방면의 군세를 계속 강화시켰고 이에 따라 흉노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92년에 상술의 누란왕이 사망하자, 누란 측은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진 왕자의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자는 한나라의 법을 어겨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귀국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인물이 왕위에 즉위했고, 그도 한나라에 왕자 위도기를 인질로 보내고, 흉노에게도 왕자 안귀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이 왕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흉노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왕자 안귀가 누란으로 귀국하여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한나라는 입조를 요구하고 사자를 보냈지만, 안귀왕의 후처 등은 한이 인질로 보낸 왕자를 귀국시키지 않았던 사실을 이유로 들며 입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변함없이 계속되는 한나라 사신과의 충돌로 인해 누란에서 한나라 사절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그러자 한나라는 신하들에게 누란을 정벌하라는 명 대신 다른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누란의 왕인 안귀를 암살하라는 명이었다. 한은 대장군 곽광의 지시를 받은 평안감 부개자를 포함한 사절단을 누란으로 파견시키고, 부개자는 누란의 왕 안귀를 위한 금은보화를 선물로 가지고왔다고 속여 누란 안으로 입성한 뒤, 안귀가 취한 사이를 노려 그를 칼로 찔러죽인 다음 그 머리를 잘라 북문에 위치한 탑에 효수했다.
한은 인질로 장안에 있던 왕자인 위도기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시켰고, 국명 또한 선선(鄯善)[5]으로 바꾸게 한 뒤 한군이 누란에 주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도기에게 인장과 함께 궁녀를 아내로서 주었다.[6] 누란이 한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 흉노의 일축왕이 당시 정길을 통해 한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7] 한은 날개단 호랑이마냥 서역 남도에서 북도까지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고, 새롭게 서역도호를 두고 정길을 도호로 삼았다.[8]
한나라의 서역 지배는 왕망에 의해서 전한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 선선으로 이름을 고친 누란도 괴뢰국으로서 그 지배하에 계속 놓여있었다.
서역 도시국가 중 가장 강세였던 사차국의 국왕 현은 독자적인 대도시호를 칭하고 흉노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주변 도시국가들을 정복해나가기 시작했다.[9]
하지만 정복한 서역 18국에게 무거운 세금을 때려버리자 서역 18국은 한나라로 복속되길 요구했으나 왕망에 의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후한의 광무제는 내정이 불안정하단 이유로 서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자 사차국은 당시 한과 가까웠던 누란(선선국)에게 한나라 국경 교통로를 차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누란은 한나라와 토하리스탄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먹고살았기 때문에 사차국의 사신을 참살하는 식으로 해당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사차국은 누란을 공격하여 약 1,000명을 살해하는 식으로 이에 보복하였다. 선선국의 국왕 안은 남쪽 산악으로 피해 한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광무제가 군사파견을 거절하는 답신을 보냈기 때문에 선선국은 다른 서역 도시국가들과 함께 흉노와의 동맹을 재개했다.
기원후 61년에 사차국왕 현이 우국과의 싸움 도중 암살당하면서 서역의 정세는 일변했다. 사차국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은 대부분 독립해 서로 싸웠지만, 선선국은 이 싸움에서 여러 나라를 병합해 서역의 일각에 세력을 쌓는데 성공했다. 같은 시기에 우국, 차사국, 구자국, 언기국 등이 강국으로 할거했다. 이 시기에 선선에서 작성된 한문 문서에는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세력을 확대한 누란은 로프누르 호에서 서쪽 정절국까지 서역 남도 변경 영역을 동서로 900km 이상을 지배하게 되어, 1세기 말엽부터 전성기를 맞이했다. 교역도 활발해져서 발견된 이 당시 유물들은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을 반영하고 있다. 누란의 번영은 3세기까지 쭉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력의 증대로 정치적 지위는 상승했지만, 아직까지도 한과 흉노라는 거대한 두 맹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그 후 한나라의 개입이 본격화되면 그때 누란은 그 패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광무제의 뒤를 이은 명제의 시대가 되면서 다시 한나라는 서역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서기 73년에 한은 흉노를 공격하였고, 거의 같은 시기에 서역에도 출병해 지금의 투르판에 위치해있던 차사국을 제압하였다. 서방견문록을 남긴 걸로 유명한 감영을 파견한 것으로 유명한 반초가 활약한 것도 이 시기이며, 그의 일화로 알 수 있는 당시 누란의 상황은 복잡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후한서의 반초전에 의하면 73년에 반초가 36명의 부하들과 함께 누란에 파견되었을 때, 누란의 국왕 광은 처음에는 반초를 정중하게 대접했다가 흉노측 사자가 누란에 방문하면서, 국왕은 흉노 사자의 심기가 불편해질까봐 반초의 대우를 떨어뜨렸다. 이에 제대로 열이 오른 반초는 밤중 은밀하게 흉노 사자의 숙소에 불질러 급습해 흉노측 사신 33명과 하인 100여 명을 학살했는데 이때 남긴 말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