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대책] 벚꽃이 피는 이즈음, 사랑하는 이에게 2017-04-03 (월)
죽은 남편을 그리며 띄운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첫사랑 향한 애틋함 담은
윤대녕의 편지 ‘상춘곡’
왜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누군가 그냥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할 때요. 같이 대화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잠깐 옆에 있어 줘요, 조금만 더 있다가요, 말하고 싶어지는 때.
그런 책이 있지 않나요. 그저 옆에 두고 싶어지는 책. 굳이 다시 읽지 않더라도 책장에서 꺼내 머리맡이나 책상 위이거나 눈 닿는 곳에 두고 싶은 책. 한 계절만 지니고 있고 싶은 책. 특히 어떤 계절에는요.
이 계절에, 이 책들이 제겐 그래요. 당신도 이미 읽으셨을지 모르겠네요.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과 윤대녕의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각각 네 편과 일곱 편을 품고 있는 이 단편집은 편편이 다 아껴 읽고 싶은 아름다운 글들의 모음이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편지글 형식의 ‘환상의 빛’과 ‘상춘곡’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두 편 다 애틋한 지난 사랑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네요. 아, 그리고 모두 벚꽃이 피는 이즈음이 배경이고요.
‘환상의 빛’은 바닷가 마을로 재가한 유미코가 전 남편에게 띄우는 편지, 혹은 독백입니다. 이 글에서 유미코는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라는 중얼거림을 되풀이합니다. 그건 오랜 세월 그녀를 괴롭혀온 질문이지요. 그래요. 그녀의 남편은 7년 전,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 위로 몸을 던짐으로써 그녀를 떠났습니다. 그렇다고 그들 사이가 나빴던 것도, 자살할 만큼 특별히 절망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태어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있던 결혼 초기였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스물다섯, 수많은 생의 가능성을 꿈꾸기에 더없이 적당한 나이였죠.
그러나 남편은 떠났습니다. 어떤 암시도 없이. 재혼하고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중에도 유미코는 그가 자살한 이유로부터 달아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봄날, 아름답게 빛나는 잔물결을 보며 어렴풋이 생각합니다. 일 년 내내 음울하게 울어대는 바다의 어느 일부분이 한순간 너무 아름답게 빛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는 것.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삶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거친 바다 가운데에도 그토록 빛나는 물비늘을 두어 그 아름다움 속으로 홀린 듯 걸어 들어가게 하니까요. 그리고 사람이란 더욱 알 수 없어서 그렇게 불가해한 선택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조차 그래서 영원한 타인이지만 우리 역시 유미코처럼 그저 어렴풋이 ‘당신’을 짐작하고 가늠해볼 수밖에요.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당신께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오래전부터 나는 당신께 한 번쯤 소리 나는 대로 편지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막걸리 먹고 취한 사내의 육자배기 가락으로 말입니다.’
☜ ‘상춘곡’은 한 남자의 이런 편지로 시작됩니다. 남자는 지금은 인옥이 형이라 부르는 고교 시절 담임에게 이끌려 산정호수를 찾았던 것이고요. 거기서 첫사랑 란영을 만났던 것이지요. 그들은 산정호수에 벚꽃이 활짝 피는 4월 말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집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는 남자는 고창으로 내려갑니다.
알려진 대로 그곳은 미당 서정주의 고향이자 그녀의 고향. 그리고 그들이 처음 사랑을 나눈 곳. 그는 그곳에 내려가 북상하는 벚꽃의 등고선을 따라 한 걸음씩 그녀를 향해 올라갈 작정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사랑은 10년 전 끝난 게 아닌 모양입니다. 그들의 곡절과 남자의 사연 모두를 들려드릴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아름다운,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만은 당신께 꼭 소리내어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벚꽃이 피고, 그 아래 뽀얀 막걸리라도 놓여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나는 문득 내 얼굴에 감겨 드는 이상한 빛의 속삭임을 듣고 있었지요. (…) 가만히 듣고 있으니 머리맡 문살 창호지에 바늘 끝 같은 것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 같았습니다. 오래 그 소리에 귀를 던져두고 있다가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보았지요.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요. 그것이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둣빛 봄 햇살 소리였다는 걸 (…) 그리고 곧 나는 알게 됩니다. 그것이 멀리서 당신이 오고 있는 소리이며 색깔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두 소설 모두 ‘이상한 빛’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네요. 그 빛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기도 하고 사랑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하아, 그런데 이 봄빛은 또 어쩐답니까.
허은실 시인
◆ 환상의 빛(미야모토 테루, 바다출판사) ☞
◆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윤대녕-(문학동네)
출처 / 한국교직원신문 2017-04-03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