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1985)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 괜찮은 선율이라도 듣는 날에는 기어이 곡의
출처를 알아야 하고, 또 OST라도 구입하면 질리도록 듣고서야 다음 챱트로 넘어가
는 겁니다.
몇 년 전엔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를 보고선 그 묘한 선율에 빠져 무려 한 달간,
아예 아침을 깨우는 시그널 음악으로 틀었죠. 오죽했으면 아내가 “여봇! 아파트 입
구에서도 우리 집 전축소리 들려!” 라는 말을 들으면서 말이죠.
그래서 영화에 삽입된 클래식 음악으로 먼저 떠오르는 곡이 있다면 <엘비라 마디간>
에서 주제 음악으로 사용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C major 2악장의 안단테와 <아
웃오브 아프리카>에서 사용된 같은 작곡가의 클라이넷 협주곡 A major 2악장입니다.
영화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치란 여성에게 있어 메이컵하는 것 이상으로 분위기 연
출에 필수적일 것 같습니다. 영화를 더욱 영화스럽게 한다고나 할까요. <아웃오브 아
프리카> 이 영화에서도 클라이넷 음색이 주는 특유의 남 저음의 잔잔함은 케냐 초원
을 스케치한 아름다운 영상과 조화를 잘 이룬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번 영화의 흐름을 잡아주던, 4번의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바 있는, 존 베리
음악과의 환상적인 앙상블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대목이고요.
특히 세랭게티 초원 위로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와 카렌(매릴 스트립)을 태운 경비행
기의 활강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묘한 전율을 느끼기 충분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카메라 눈높이에서 바라 본 끝없이 무리 지어 달리던 누 떼, 그리고 비행기 아래로 펼쳐
진 홍학 떼의 장관, 그 때, 그 벅찬 감정을 억제할 수 없다는 듯 앞좌석에 앉은 카렌이 머
리 뒤로 손을 내밀며 서로의 감정을 소통하는 장면은 사바나 초원의 아름다움과 함께 쉬
잊기 어려운 장면일 것입니다. 거기에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주제 선율('I Had a Farm in
Africa)은, 더욱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으로 모두의 가슴에 심어 줍니다.
이 영화는 여자의 시선에 비친 남자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것으로 덴마크 출신 카렌
브릭센(필명:아이작 디네센) 여사의 아프리카 생활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을 영화
화했습니다. 또한 케냐에서 올 로케한 것으로 로맨스 영화에 강한 면이 있는 시드니 폴
락 감독이 채색을 하고 언제나 분위기 있는 남자 로버트 레드포드와 지적인 이미지의
매릴 스트립이 호흡을 맞추므로 그 해 가을을 더욱 더 로맨틱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합
니다. 같은 색깔의 <잉글리쉬 페이션트>라는 영화가 남자 입장에서 잊을 수 없는 여자
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과 상대적으로 이 영화는 여성에 의한 여성중심의 영화이기도 합
니다.
소유한다는 것이란
‘타라 농장’을 외치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연상케 하는 주인공 카
렌은 부모로부터 유산을 많이 받은 소유욕이 강한 여자죠. 그녀가 연인의 동생이자 자신
의 친구인 브릭센 남작과 결혼한 것도 사랑보다 남작 부인이라는 호칭에 대한 매력이 더
크게 작용했고, 남작 또한 그녀의 재산에 더 관심을 보이므로 이들의 결혼은 애초부터 일
종의 정략결혼이라고 할 수 있죠. 아니나 다를까 커피 농장을 건설하기 위해 아프리카
케냐로 오지만 결혼과 함께 늘 집을 떠나는 남자로 인해 그녀는 농장을 일구는 일 이상의
인내하는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난감한 상황에서 한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되죠. 시인 디킨
슨을 알고 모차르트 음악을 사랑하며 논리적인 여인이 말하는 것을 듣기 좋아하는 이 남자
는 매번 꼭 필요할 때면 나타나 힘이 되어 주지만 결코 추근 되거나 징징거리는 법이 없습
니다. 거기다가 선물까지 남기고 떠나니 여자들이 반할만한 남자의 전형이죠.
그런데 만남을 단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며 소유하기를, 아니
소유되기를 마다하던 이 남자는 매번 바람처럼 다가오지만 바람이 그러하듯 또 다시 날아가
는 영원한 자유인이었습니다. 마치 옛 연인을 잡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길을 터주던 <카사
블랑카>의 릭(험프리 보가트)처럼 힘이 되어 주지만 함부로 선을 밟지 않으려는 이 남자 데
니스는 여자라면 한번쯤은 꿈꾸었을, 아니, 만날 수만 있다면 일이라도 저질러 버리고 싶은
그런 남자였습니다.
사랑은 결코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나 농장경영도 실패하고 남편과 결별 상태에서 마지막 한번만 더 보고 싶어 하던 그녀
와의 약속을 지켜주지 못하고 그 남자는 영원을 향해 날아가 버립니다. 그녀가 아프리카에
서 소유했던 커피공장이 화재로 사라지듯...
‘그는 유쾌함을 주었고 우리는 그를 깊이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를 소유하지 못했고 나 역시
그를 소유하지 못 했습니다’ 라며 하우스만의 시를 인용한 마지막 조사(弔辭)를 읽어 내려가
던 카렌, 취토(取土)를 위해 움켜쥔 흙을 차마 뿌리지 못하고 자리를 물러납니다.
마음에 묻겠다는 듯. 길을 잃은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던 나침반도, 낭만이라는 즐거움을 알게
한 축음기도 모두 아프리카에 묻고, 밤이 맞도록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던 날, 남자가 주고
간 만년필만 가지고 아프리카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 만연필로
그 남자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거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그 남
자에 대한 기억만 가지고.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가운데 채워진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물론 실제 경험을 기초했다지만,
억지스러움이 없다는 것과 다소 여성 취향적임에도 불구하고 호소력이 있는 로맨틱 서사 구조
라는 점이 바로 이 영화의 생명력일 것 같습니다. 물론 유럽이 아프리카를 진정 소유하지 못했
듯이 그녀 또한 데니스를 소유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오늘처럼 햇살이 그리울 때면, 문득, 카렌의 마음속에 묻어 둔 그 남자가 싸한 바람을 몰고 나타
날 것만 같은, 가을을 실감합니다.
첫댓글 오래전의 영화 이야기 들려 주셨네요~... 이제야 닉을 이해하겠네요~ㅎ
참내..ㅎㅎ
가을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영화 한편을 소개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