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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7일 [한가위]
루카 12,15-21
탐욕에서 벗어나는 법: “그래도 숙제니까!”
한가위는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왜 시스템적으로 매년 이렇게 하도록 모든 나라에서 명절을 지낼까요? 그 이유는 시스템적으로 감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탐욕에 시스템적으로 잠식되기 때문입니다.
1997년 수원지역 전교 1등 중학생 스스로 목숨 끊었습니다.
갑자기 오른 성적 때문에 수군거리는 친구들의 태도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 학교 가기가 무서워요.
애들이 무서워요. 말투와 눈빛이, 행동들이….”
300명 중 100등 하던 아이가 한 학기 만에 전교 1등을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렇다면 다음 시험으로 전교 1등을 할 실력임을 증명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시선보다는 다음 시험의 부담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이뤄낸 것들은 이렇게 잃을까 봐 불안합니다.
1997년 같은 해 성남시에서도 1등을 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1등일 때 죽고 싶다.”라는 말을 많이 했고, “나는 최고인 이 순간 자유를 얻었다.”란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습니다.
1등을 유지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내가 이뤄낸 것은 이렇듯 지푸라기처럼 잃어버릴까 봐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탐욕이 많은 부자는 자기 재산을 잃을까 봐 곳간을 넓히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부질없습니까?
내가 이뤄놓은 것이나 가진 것들이 부질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탐욕에서 비롯되는데 탐욕은 가만 있으면 저절로 나를 잠식합니다.
건물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허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탐욕을 이기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1946년 최초의 마취제 ‘에테르’가 발견되었습니다.
의대 2년생 모턴입니다.
그가 특허 신청 때 지도교수인 ‘웰치’와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이 자신이 특허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셋은 법정 싸움까지 갔습니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합니다.
나의 것이면 뭐 하겠습니까? 목숨을 잃게 된다면. 성경에는 ‘못된 소작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소작인은 추수철마다 소출 일부를 주인에게 봉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였지만, 주인은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감사의 봉헌 시스템 안에 자신을 넣지 못하는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선악과와 뱀 앞에 서 있는 하와와 같습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면 뱀에게 자기를 바치는 것이 됩니다.
선악과는 매년 열매가 맺힐 때마다 바쳐야 합니다.
부모를 기억해야 하는 명절이 규칙적으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잡초가 나고 건물이 허물어지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잡초를 뽑고 건물을 다시 재건하는 일도 규칙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시스템을 이기는 것은 시스템밖에 없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부모 공경 의무(키부드 아브 바-엠 Kibbud Av Va-Em)를 규율로 정해 실천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앉는 자리나 사용하는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는 자녀가 함부로 발언하지 않는다.
자녀는 부모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즉시 이를 제공하며, 필요시 부모를 돌볼 책임을 진다.”와 같은 규정들입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기에 유대인들의 부모 공경은 대단합니다.
그렇게 규율로 자신을 얽어매면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빠는 아이에게 과자를 사 주면 규칙적으로 하나만 아빠 달라고 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이는 아빠에게 하나를 주기도 아까워할 것입니다.
EBS ‘엄마가 울었다’는 어느 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번 칭찬하고 그 내용을
적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30번을 다 채우니 자신이 자랑스럽고 집이 좋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래도 숙제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7일 [한가위]
복음: 루카 12,15-21
남은 날들을 보다 품위있고 고상하게 엮어갑시다!
살다보면 가끔 죽음 체험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임사 체험, 죽음 유사 체험, 죽음 근사 체험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그쪽 세상을 살짝 맛을 보고 온 분들입니다.
요르단강을 건널까 말까 하다가 되돌아온 분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임사 체험은 끔찍한 불행을 겪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보통 사람들은 평생 발버둥 쳐도 하기 힘든 은총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분들이 임사 체험이후 보이는 특별한 변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변경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우선 가치들이 재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체험을 통해 일종의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목숨 걸고 추구했던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아니었구나.
다 지나가는 것들이었구나.
그렇게까지 목숨 걸 대상이 아니었구나.”
그런 깨달음을 통해 여러 대상이나 가치들에 대한 재구성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재물과 사회적 위치, 학벌과 스펙, 사람과 만남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이 더 가치있고, 더 고귀하고, 더 영원하고, 더 불변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결국 영적인 삶, 사랑의 삶, 봉사와 헌신의 삶, 주님 안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도 언젠가 그런 대대적인 삶의 전환점이랄까 분기점을 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먹고 즐기며, 그저 이 한 몸 겨우겨우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보다 이타적이고, 보다 영적이고, 보다 주님 마음에 드는 그런 방향에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공동체 형제들과 주변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부모님과 가족을 찾아 고향을 향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제 집도 절도 없는 영감님들만 공동체에 남아 있습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몇백년 만에 사무실에 편안히 앉았습니다.
몇 년전부터 순차적으로 주님 품으로 가신 아버지, 어머니, 형의 영정 사진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그 눈빛들이 뭔가를 말하고 계신 듯 했습니다.
“이제 자네 차례라네!” 어쩌다보니 저도 저희 가족 가계도 안에 최고 높은 꼭대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록 재물은 아니지만, 그 무엇인가를 모으고 또 모으고, 끝도 없이 쌓아 올리며 살아온 지난 날을 가슴 치고 있습니다.
이런 제게 주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민족의 대명절 한가위를 맞아 우리보다 먼저 떠난 조상님들,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의 영원한 안식과
구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다가올 우리들의 죽음도 생각하면서, 남은 날들을 보다 품위있고 고상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엮어가기를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가위 강론>
(2024. 9. 17. 화)(루카 12,15-21)
<참된 지혜를 얻는 지름길은 ‘회개’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내가 수확한 것’이라는 말과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이라는 말은, 그 부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얻은 것들을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원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부자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리석음’은 곧 ‘죄’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도 않고, 일꾼들에게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고, 겸손한 사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법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고, 교만한 사람은 은총을 받아도 감사드리지 않고,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꾼들에게는 주기로 한 품삯을 주었으니까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일꾼들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유에서,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하느님 말씀은, 목숨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목숨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인생 자체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셨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되찾아 가십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일 뿐입니다.
그 관리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실행되어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교만에서 인생을 막 사는 어리석음이 생기고, 그 어리석음에서 온갖 범죄가 생깁니다.
2)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이라는 말은, ‘시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이고, 죄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4-6).”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인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시간 동안에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면 좋을 것 같은데,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오늘만’ 살고 있습니다.
비유에서, “오늘 밤에” 라는 말씀은,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권한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즉시 떠나야 합니다.
3)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라는 말과
“모아 두어야겠다.” 라는 말과 “쌓아 두었으니” 라는 말은, 그가 ‘나눔’과 ‘사랑 실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라는 말은, 그가 ‘몸의 쾌락’만 생각하고,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네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4)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하느님 말씀에는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때가 되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자랑하는 것들, 무슨 학문이나 예술이나 업적 같은 것들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남아 있지 못하고, 그냥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지나간다.’는 말은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한가위’는 겸손하게 감사드리는 날이고, 사랑을 더욱더 실천해야 하는 날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하는 날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회개’인데, ‘회개’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참된 지혜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첫댓글 죄송합니다. 어제는 완전히 잊어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