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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
터키 앙카라에서 발견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일부
바티칸 미술관에 있는 프리마 포타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시기에 수립된 정책들은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지속하였다. 양부로부터 이어받은 성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1400여 년간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카이사르는 여러 언어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아우구스투스 동상과 흉상이 제작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 신앙(Divus Augustus)은 391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을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서, 자신이 직접 쓴 《아우구스투스 업적록》(Res Gestae Divi Augusti)의 동판을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정면에 걸어 놓기를 원했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사본은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
터키의 앙카라에서 발견된 사본의 경우, 라틴어로 되어 있는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공건물에 부착하였다. 테오도어 몸젠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금석문의 여왕”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작품은 여러 편이 알려졌다. 이 중에는 시칠리아에 대한 시집 《시칠리아》, 〈브루투스의 《카토론》 반박〉, 13권에 걸쳐 기술한 《자서전》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분석하여 작품에 대한 추가 정보를 연구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정책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였던 기간에 계속 사용되었고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Pax Augusta)라 칭송받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셋째 아내인 리비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지혜와 결단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게다가 그의 정책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많은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도인 로마 시에 “경찰청”(Praefectus urbi)과 “소방청”(Praefectula vigilum)을 만들었으며, 지방 자치 단체들에 상주하는 장관들을 파견하였다. 경찰청은 대대별로 500명씩이었으며, 소방청은 대대별로 500에서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7개 대대가 14개 구의 치안과 화재 진압을 담당하였다.
내전이 끝난 후, 아우구스투스는 28개 군단, 총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한다. 이들은 각 속주의 주민들로 구성된 보조병과 함께 국방을 담당하였다. 또한 역참 제도를 창설하여 “관찰장관”(praefectus vehiculorum)이라 불리는 장교들이 감독하도록 하였으며, 자비를 털어서 도로를 유지 및 보수하였다. 동시에 추가로 가도를 더 건설하여, 더욱 더 빠른 통신 체계를 갖추면서 군대가 신속하게 행군할 수 있게 되었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는 현역 및 퇴역 군인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하여 “군인 연금 기금”(aerarium miltare)을 만들었다.
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의 경호를 목적으로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근위대는 훗날 원로원에 압력 넣기, 새 황제 추대, 기존의 황제 제거 등 로마의 역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근위대는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할 때까지 존속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언제나 공화주의자로서의 미덕과 규범을 실천하려 애썼다. 언제나 서민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보았던 그는 관대한 정책들과 과다한 지출 삭감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기원전 29년에는 25만 명의 시민에게 개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씩 지급하였고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12만 명의 퇴역병에게는 1,000세스테리우스씩을 지급하였으며, 약 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들여 자신의 병사들이 땅을 사서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로마의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 82곳을 복구하였다. 기원전 28년에는 검소하고 관대한 모습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은상 80여 개를 녹였다.
누비아의 신전에 묘사된 이집트풍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긴 통치 기간과, 이 기간에 로마 제국에 남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산들도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14년 당시의 젊은이들은 원수정 외의 정치 체제는 알지 못하였다.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었더라면(예: 기원전 23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동안 사실상 군주정이었던 로마에서 옛 공화정 지지자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추종자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경험과 인내심, 치밀한 전략과 정치적 통찰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조율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잘 훈련된 군대가 전선에서 주둔하는 것, 제위 계승에 대한 원칙, 황제의 자비를 털어 수도를 꾸미는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로마 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최고의 업적은 이후 2세기간 이어진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에게 매우 좋게 남았고, 이는 제국 시대의 정치적 풍조 아래 좋은 황제의 패러다임으로 남게 된다. 이후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를 사용하였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점차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칭호로 더 많이 사용된다.
동시대인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의 수호자, 도덕 규율을 바로잡은 자, 제국을 짊어지고 갈 의무를 기꺼이 진 자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통치 기간에 원수정을 확립한 것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동시대의 법학자, 공화정의 추종자인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 ~ 서기 10년 또는 11년)는 공개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체제를 비판하였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의 서문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교활한 방법으로 공화정 로마를 노예처럼 만들었다고 서술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에 티베리우스가 이 자리를 물려받았고, 로마의 사람들은 노예 매매와 같이 계속하여 다음 주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타키투스는 네르바가 “원수정”과 “자유”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생각을 잘 조화시켰다고 믿었다. 3세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친절하고 관대한 통치자라는 점은 인정하였지만, 동시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를 전제군주로 보았다. 시인인 마르쿠스 아나에우스 루카누스(39년 ~ 65년)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소 카토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로마의 전통적 자유가 끝난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역사가인 체스터 G. 스타 2세는 루카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은 이유가 그러기엔 너무나도 신성불가침의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썼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Discourse on the Contests and Dissentions in Athens and Rome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에 전제군주제를 도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였고 대영제국의 입헌군주정을 기원전 2세기경의 로마 공화정에 비유하였다. 장군이자 역사가였던 토머스 고든(1658년 ~ 1741년)은 아우구스투스를 올리버 크롬웰과 비교하며 비판하였다. 토머스 고든과 몽테스키외는 아우구스투스가 전장에서는 겁쟁이라고 평하였다. 스코틀랜드의 학자인 토머스 블랙웰(Thomas Blackwell, 1701년 ~ 1757년)은 Memoirs of the Court of Augustus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마키아벨리 성향의 군주라 보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세제 개혁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전 시대에는 널리 행해졌던 속주민에 대한 특별 징세를 하지 않았으며, 새로 정복한 지역의 기반을 닦고 고정 세율로 직접세를 징수하였다. 세금을 불시에 임의로 거두어 속주민의 분노를 불러오는 대신에 고정 세제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세입이 증가하였고, 돈의 흐름이 안정되었으며, 해마다 속주가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일정해졌다. 세금 징수를 위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각 속주마다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정해졌다. 속주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권자의 경우 간접세만 납부하였다. 노예 매매 시 가격의 4퍼센트를 세금으로 냈으며, 경매 시에도 1퍼센트를 납부하였으며, 재산 상속 시에도 가까운 친척이 아닌 이로부터 1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상속을 받으면 5퍼센트의 세금을 납부하였다.
또한, 세금도 민간 징수원이 징수하던 기존 방식에서, 세금 담당 공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공화정 시대의 민간 징수원들은 세금을 과다하게 걷어가며 힘을 불려나가, 점점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많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세금을 추가로 더 걷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었다. 이들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세금 납부자들에게서 부당 징수를 일삼았고, 이는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직접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점과 로마 정부 형태의 변화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의 비옥한 땅을 재정원으로 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아닌 아우구스투스의 사유지처럼 간주되었고, 이후에도 이집트는 황제들의 사유지로 취급된다. 이집트는 원로원 계급 출신이 통치하는 대신에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 기사 계급(equestrian)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다. 아우구스투스와 이후의 황제는 이집트의 농경지에서 벌어들인 많은 수입을 복지 정책, 공공 정책과 군사 원정의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8월(Augustus)
이전에는 로마의 역법에서 “여섯 번째 달”(라틴어: Sextilis)로 불리었던 달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이후부터 8월(라틴어: Augustus, 영어: August)이라는 지금의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8월이 31일이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8월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7월(July)이 똑같은 날짜 수를 가지길 원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13세기의 학자였던 사크로보스코의 요한네스(Johannes de Sacrobosco)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8월은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뀌기 전부터 31일이었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 마크로비우스에 따르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뀐 것은 로마 원로원의 결정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0년 8월에 알렉산드레이아를 함락한 뒤 권좌에 오르자, 이를 기리고자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편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제정했던 율리우스력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역법에 혼란이 왔는데, 이를 바로 잡으면서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명명하였다고도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았고,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줬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 발언이 황제의 권력에 대한 은유라고 분석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전의 시대에도 건물을 지을 때 대리석을 사용했고, 그 후에 대리석의 사용량이 갑자기 증가하지도 않았다. 화재의 위험이 높았던 건물이 많았던 수부라 지역의 건설에 대리석을 많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마르스 광장(Campus Martius) 근방에 평화의 제단(라틴어: Ara Pacis Augustae)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많이 세웠다. 평화의 제단 앞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놓여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 따르면 평화의 제단에 새겨져 있는 돋을새김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를 이룩한 것을 경축하고, 앞으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 돋을새김에는 집정관, 여사제뿐만 아니라 로마의 시민들도 함께 새겨져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카이사르 신전, 아그리파 목욕탕을 지었으며, 마르스 신전이 딸려 있는 아우구스투스 포룸도 건설하였다. 다른 건설 사업들도 장려하였는데, 대표적인 건물로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 아우구스투스가 건설 자금을 지원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붙인 옥타비아 회랑, 마르켈루스 극장 등이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가족을 위한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건설하였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여 기원전 29년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근방에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이 건립되었고, 기원전 19년에는 이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건설 사업은 제국 전역에서 행해졌는데, 현재까지도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여러 곳에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건설된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이후 로마 제정 시기 동안 그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코린토스 양식의 건물이 주를 이루었다.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에 죽은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개인 재산까지 기부해 가며 책임지던 수도 유지·보수 업무를 정비하여야 했다. 그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 지정한 3명의 원로원 의원이 로마의 수로교의 유지·보수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에는 다섯 명의 원로원 의원이 “공공사업청”(curatores locorum publicorum iudicandorum)이라 불리는 공공건물과 신전의 유지·보수를 맡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도로청”(curatores viarum)을 창설하여 정기적으로 각 지방의 가도 유지·보수를 담당하도록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