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군 숙보(黃君叔輔.황주하)가 죽었을 때에 내가 곡하는 시기가 지나도록 곡하며 슬퍼하자, 뜻을 함께하여 종유(從遊)하던 선비들이 모두 와서 나를 위로하였고 나는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대하였다. 숙보를 모르는 이들은 간혹 내가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하였지만 나는 실로 지나친 것이 아니다.
늘그막에 도(道)를 탐구하던 나는 당대의 자질이 아름답고 뜻 있는 사람을 만나 함께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며 도리를 강론하여 밝힘으로써 학문을 성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깊은 산에 외따로 살며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드문 까닭에 숙보가 있는 줄을 모르다가 계유년에 그의 대인(大人.아버지)을 조상하러 들렀을 때에 처음으로 숙보를 보게 되었는데, 얼굴빛이 온화하고 용모가 공손하며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말이 차분하였으며 걸음걸이와 공경을 표하는 모습과 대답하는 일들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그래서 내가 본디 마음에 기억해 두고 있었는데, 뒤에 두세 번 보면서 그 뜻이 높아 세속을 벗어나 매일 독서와 행실을 검칙하기를 일삼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에 더욱 기뻐서 평소에 들었던 옛사람들이 학문을 했던 순서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 관한 설을 다 일러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비로소 숙보와 학문을 함께할 뜻을 지니게 되었는데, 숙보는 나를 보기 전부터 이미 나에게 뜻이 있었다.그러나 숙보는 당시에 양모(養母)의 복(服)을 입고 있는 중이라 즉시 나에게 오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야 비로소 책을 싸들고 미음(渼陰)으로 나를 찾아와 6, 7일을 머물며 흡족하게 강론하였는데, 그로 인해 나와 숙보는 서로에 대한 기대가 더욱 깊고 원대해졌다. 그해 겨울에 나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 8, 9인과 함께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문회(文會)를 가졌는데, 하루는 숙보가 갑자기 옛 관복(冠服)을 입고서 예물을 들고 책을 갖추어 섬돌 아래에 서서 제자의 예로 뵙겠다고 청하였다. 나는 놀라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사양하여 세 번을 돌려보낸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숙보는 계속하여 4, 5일을 더 머물렀는데, 아침저녁으로 나를 볼 때에 더욱 경건하게 예를 갖추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숙보가 나를 따라 강학하는 것을 보면서는 그가 스승의 예로 나를 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숙보가 스승의 예로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서는 그가 나에게 뜻을 둔 지가 실로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숙보는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옛날 스승을 섬기는 사람은 스승을 임금이나 아비와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나아가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스승이라는 말을 어쩌면 그리도 쉽게 하는지요. 길거리에 나도는 말만 듣고 어질다고 여겨 가서 따르고, 한 번 찾아뵌 순간에 즉시 스승이라고 부르는데, 따져 보면 실상이 없습니다. 옛날의 이른바 스승이라는 것이 어찌 본디 이와 같았겠습니까. 그렇다면 ‘백성은 임금, 스승, 아비의 세 가지에 의지하여 살아가므로 세 가지를 한결같이 섬긴다.’는 말과 ‘좌우에서 모시며 봉양하고 모든 일을 대신하되 있는 힘을 다 바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가 뭔가 까닭이 있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렇겠다고만 하고 자세한 까닭을 캐묻지 않았다. 훗날 숙보가 늘 이에 관해 나에게 질문하였는데, 나는 한자(韓子.韓愈)의 말을 일러 주면서,
“그대가 말한 스승은 도를 전수하는 스승을 이를 뿐이지만 한자의 말에는 실로 무의(巫醫), 백공(百工), 동자의 스승도 포함되어 있으니, 이를 미루어 보면 경술(經術)을 전수하고 문사(文詞)를 업으로 삼는 경우에도 모두 스승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을 비록 도를 전수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찌 스승이라고 할 수 없겠는가. 그러나 비록 스승이라고는 하나 그를 섬기는 것으로 말하면 어찌 도를 전수하는 스승을 섬기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스승이라는 것은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숙보는 이에, “선생님의 말씀이 옳기는 합니다. 그러나 선비가 도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스승을 구한다면, 무엇 때문에 굳이 스승을 구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는 지론(持論)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나를 대함에 있어서도 구차함이 없이 정중하였다. 비록 그가, 내가 용렬하고 무식하여 취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외람되이 나를 추중(推重)하여 사람을 잘못 본 실수를 면치는 못하였으나 사우(師友) 관계를 중시하고 옛 예법을 좋아하여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어찌 오늘날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수준이겠는가. 나는 그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을 어질게 여기고 나 자신의 불초(不肖)함을 잊고서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스승을 자칭하였으니, 이는 또한 나 자신을 길을 잘 아는 늙은 말에 빗대는 한편 그럼으로써 옛 예법의 자취나마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언행과 절조는 숙보에게 부끄러운 점이 많은데 어찌 감히 그의 스승이 되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숙보에게 아는 것을 다 일러 주었다. 숙보가 처음에는 간혹 동의하지 않기도 하였으나 물러나 생활하는 것을 보면 내 말을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정자(程子)의 이른바 “감히 자신의 소견을 믿지 못하고 스승의 말씀을 믿는다(不敢信己而信其師者).”는 자세를 숙보가 실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숙보의 뜻을 보면 그는 자신을 나에게 맡겨, 아무리 곤궁하거나 생사의 기로에 놓인 때라 하더라도 배반하지 않으려 하였고, 나도 오직 죽음으로만 숙보에게 누를 끼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숙보가 먼저 죽고 말았으니, 내가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숙보의 어짊으로 볼 때, 이치상 그는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죽은 것은 또한 나의 기박(奇薄)한 명(命)이 그에게 누를 끼쳐서일 것이다. 나는 애초에 나의 죽음으로 숙보에게 누를 끼치려고 했는데 이제 도리어 살아서 누를 끼쳐 그를 일찍 죽게 만들었으니, 어찌 더욱 슬프지 않겠는가.숙보는 이름은 주하(柱河)이고 본관은 창원(昌原)인데, 사람됨이 헌걸차고 빼어나며 풍채가 있어 여러 사람들 중에 특출한 것이 군계일학(群鷄一鶴) 같았다. 그리고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기는 데에 온 힘을 다 쏟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 지극히 공경스럽고도 신중하여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 해도 예로 대하고 자신을 낮추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등, 《소학(小學)》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행동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학(大學)》의 가르침으로 진전시키려 하고 있었는데 성취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 더욱 서글플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