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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분처바위상(도마상)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경교) 전래의 흔적을 찾아서
1000년전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주 평은면 강동리 소재 도마상(분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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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도마상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백).hwp
백 일 기(소설가,교육평론가)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본말 가) 근대 기독교 이전의 또 다른 기독교 전파 1) 고대 동방기독교의 메소포타미아 지역 진출 2) 고대 동방기독교의 인도전파 3) 고대 동방기독교의 중앙아시아 진출 4) 고대 동방기독교의 중국 전파 나) 고대 동방 기독교의 한국전파 다) 영주 분처바위상의 의미 라) 영주지역에서 발견된 ‘분처바위상’에 대한 지역문화 및 경제적 의미 3. 맺는 말 |
1. 들어가는 말
한국기독교 역사는 1601년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성당(남당)을 설립한 후 당시 허례허식의 주자학과 당쟁에 시달리던 지식인들이 새로운 학문도입이라는 동기에서 ‘천주실의’(마테오리치 저)를 가져오면서 신앙적인 싹이 튼 이후 200년 정도가 흘렀다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로 알려져 왔다. 이 때 전해진 천주교는 바로 서방국가의 동점(東漸)과정에서 전해진 것 서방기독교였다.
그러나 1987년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 암각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기독교 전래에 대한 파장이 일고 있다. 이미 이 암각상은 지역민들에게는 오래전에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유우식씨(고교 교사)가 암각상의 존재를 언론에 알리면서 기독교 초기 전래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고대 동방기독교의 초기전래에 대한 논란의 단초가 되었던 돌십자가나 성모마리아 소상, 철제 십자가(1965년 경주출토, 7~8세기,통일신라시대 추정), 1988년 경북 경산 자인면 일원리에서 발견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당시 유행하지 않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평은면 강동리 암각상은 현재 학계에서는 암암리에 동방기독교의 전파의 증좌로 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초기 기독교의 일파인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초기 전파와 강동리 암각상의 의미를 천착해보고 그 암각상이 영주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 보고자 한다.
2. 본 말
가) 근대 기독교 이전의 또 다른 기독교 전파
1) 고대 동방기독교의 메소포타미야 지역 진출
고대 오리엔트 지역 팔레스타인에서 발상한 기독교는 예수의 제자인 사도들에 의해 소아시아 지방 안디옥(Andioch-현 터키지방)에서 교단이 조직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싸(Edessa)에서 국가종교로서 공인을 받았다. 이렇게 국가종교로서 입지를 굳힌 기독교는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포교활동을 펼쳐나갔다.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희랍어 권과 에데싸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권으로 나뉘어 선교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처럼 4세기 초 고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정치적 질서와 결합함으로써 라틴 서방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고대 기독교는 서방기독교와 동방기독교로 분리되면서 교리적 논쟁을 거듭하다가 1054년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상호파문조치를 계기로 결별하게 되었다.
이렇게 분파된 동방기독교는 동방정교회와 동방독립교회, 동방귀일교회로 분리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기독교 동전(東傳)활동으로 한반도까지 영향을 미친 교회는 동방독립교회 즉 네스토리우스파이다. 동방기독교(동방독립교회)는 여러 정치적 상황 속에서 부침하면서 인접지역인 아르벨라(이라크 지역) 북 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에 이르러서는 200여 교구를 가진 종교로 번창했다. 그러다 페르시아의 민족종교인 배화교(조르아스타교)의 부활이 기독교 동전을 부추겼고 인도지역으로까지 진출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2) 고대 동방기독교의 인도전파
동방기독교의 인도전파는 초대교회 전도시기로 예수의 제자 도마의 전도와 동방독립교회(네스토리우스파)의 일파인 예수의 문도 다데오(Thaddaeus Addai)의 전도로 대별할 수 있다.
성 도마는 예수 승천 2년 후 사도 도마가 전도사명을 띠고 인도와 극동으로 가던 도중 에데싸와 파르티아, 부하라(bukhara), 박트리아(bactria,大夏)에 들러 인도로 들어갔다.
도마의 인도 전도에 관해서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가장 널리 유행한 전설은 사도 도마의 인도 서북부 지역에서의 전도에 관한 전설이다.
예수가 승천한 후 오순절(五旬節)을 기해 사도 12명이 세계 각지로의 책임 선교를 분담하였는데 도마는 인도로 배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길이 너무 멀고 험악하자, 병약함을 구실로 이를 피하려고 한다. 이때 꿈에 나타난 예수가 “도마야, 두려워 말라. 나의 축복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너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라고 고무한다. 그래도 그는 주저한다.
때마침 인도 서북부 아라코시아(Aracosia)와 인더스 강 상류 지역을 통치(20년경)하고 있던 곤다포루스(Gondaphorus)왕이 건축공을 물색하게 위해 파견한 상인 압바네스(Abbanes)를 예루살렘에서 만난다. 도마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들여 상인과 함께 인도로 가 왕의 부탁으로 큰 궁전을 짓기로 한다. 그러나 도마는 받은 건축비로 궁전을 짓지 않고 불쌍한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는 일에 다 써 버린다. 대노한 왕은 도마를 사형에 처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급사한 왕의 동생의 영혼이 승천하여 도마가 지어놓았다는 찬란한 궁전을 보게 된다. 소생한 동생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크게 감동하여 그를 놓아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많은 신하들이 기독교로 개종한다.
3) 고대 동방기독교의 중앙아시아 진출
초전에서 기반을 다진 기독교는 중앙아시아 각지에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서방에서 이단으로 추방된 후 페르시아에서 독립 교단으로 출범한 네스토리우스파에게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다. 6세기 가량 네스토리우스파는 고대 박트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에프탈족과 돌궐족을 교화했다. 그들은 유목민인 두 부족들에게 계몽에도 힘써 에프탈 문자와 돌궐 문자를 창제토록 했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볼 때 고대 동방 기독교는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거쳐 천산산맥의 북록(北麓) 및 타림 분지로 확산되었고, 그곳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창에서는 시리아어,소그디아어,위구르어 등으로 씌어진 복음서와 교회당 유지(遺旨) 그리고 기독교 관련 벽화가 몇 점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그러한 동전상을 말해준다.
4) 고대 동방기독교의 중국 전파
기독교가 중국에 언제 처음 전파되었는지는 아직 정설이 없다. 경교(景敎)의 초기 전파의 기록은 비문(635년)을 통해 고증이 하나 그 이전 시기부터 중국과 서역간의 빈번한 교류 상황을 볼 때 일찍부터 기독교가 중국에 파급되었을 것으로 본다.
당시 기독교의 중국전도설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전설은 예수의 사도 도마의 중국전도설이다. 1세기 초반 에데싸와 인도 서해안 일대에서 전도하던 사도 도마가 인도로부터 해로를 통해 중국 한발리크(北京)에 이르러 전도하고 교회를 세운 후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는 전설이다. 이것은 “성 도마의 전도로 중국인과 에티오피아인 등 수 명이 개종하였으며, 그의 전도열은 천국을 중국에까지 확대하였다”는 인도 마라발 지방의 시리아 교회 기도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13세기경에 기록된 이 기도서 내용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기독교 신학자 트리걸트(Trigult)는 마라발 해안에 남아 있는 시리아 문헌에 근거해 도마의 중국 전도와 교회 건립을 확신하고 있으며 메저스트(Medhurst)도 면적이나 인구․문명 등으로 보아 그토록 중요한 중국이 최초의 전도자 도마의 시야 밖에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들어 도마의 중국 전도설을 지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에 의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라토레트(Latourette)는 도마의 중국전도설을 제기한 시리아 문헌의 연도설을 들어 시기상 도마의 전도설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3세기 말 로마 작가 아루노비우스(Arunbius)의 저서“이방 민족지(異邦民族誌,Adversus Gentes)”에는 ‘예수의 복음이 인도․중국․페르시아․아랍 등 태양이 뜨고 지는 모든 곳에 전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측 문헌 사료로는 547년 북위의 양현지(揚衒之)가 찬술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가 있다. 이 책에는 불교가 흥성하고 있는 낙양에 외국(百國)으로부터 들어온 ’사문(沙門)‘, 즉 승려가 3천여 명에 달하는데 그 중에는 멀리 서역, 심지어는 대진국(로마)에서 온 승려도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6세기 초 사마르칸드 대주교구(503~520)가 설립되어 중국에 대한 전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635년 당 태종에 의한 기독교(경교)의 공허는 고대동방 기독교의 대중국 공전의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중국 전파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
지금 중국의 서안(西安)에 가면 고대의 유명한 비석들을 모아놓은 ‘비림(碑林)’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 전시된 수많은 비문 가운데 특히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거대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것이다. 781년에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가 3m가 넘고 폭이 1.5m, 두께가 30여㎝에 이른다.
머리 부분은 두 마리의 용이 대칭으로 감싸고 있는데, 그 사이에 십자가를 새겨 넣고 그것을 구름과 연꽃무늬의 대좌(臺座)로 받치게 했다. 그 아래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글자가 세 줄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비의 의장(意匠)에는 불교나 도교적인 요소로 십자가가 연꽃과 부운(浮雲) 속에 명각되어 있다. 십자가와 그 아래에 3자 3행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란 표제문을 제쳐놓고 여의주나 연꽃(불교)․부운(도교) 그리고 거북의 좌대만을 보면 전래의 어느 비석 의장과 별로 다를 바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문은 모두 1870여개의 한자로 되어 있고, 40여 단어의 시리아문이 붙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사제 60여명의 이름이 한자와 시리아 문자로 동시에 적혀 있다. 문자 그대로 대진(로마)의 경교가 중국에 전파된 경위를 기록한 비문으로, 당나라 때인 781년 경정(景淨)이라는 이름의 ‘경교승(景敎僧)’, 즉 네스토리우스파 사제가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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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으로 이동한 기독교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몽골 초원과 중국 대륙에 남긴 수많은 묘비석들. |
이 비석이 처음 발견된 것은 1600년대 초반이었고 처음에는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없었던 것도 아니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것이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진품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 '대진경교유행중국비' |
. 그 뒤 여러 학자의 상세한 연구와 고증에 의해 경교란 동방기독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교 비문의 근간인 이 ‘송병서’문에는 주로 경교의 신앙적 교리와 의례 등이 간략하게 개괄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근 150년 동안(태종~덕종) 당 내 경교 전파에 관한 와치위본주의적(王治爲本主義的)인 기술이 점하고 있다.
경교비는 동양 최고(最古)의 기독교비로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실상을 증언하는 귀중하고 신빙성 있는 전거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파상 일단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에 의 고대 동서문명교류의 연구에 값진 증좌(證左)를 제공해 준다.
경교는 전파과정에서 타 조교의 융화와 타협을 시도했다. 우선 경교의 명명 유래를 보면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기독교가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것으로 알고 ‘파사교(波斯敎)’나 사사경교(波斯經敎)‘로 사원은 ‘파사사(波斯寺)’나 파사경교사(波斯經敎寺)‘로 불렀다. 극히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일부에서는 ’‘미시가교(彌施訶敎)’나 ‘미사가교(彌師訶敎-메시아교)’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교리적 개념도 불교를 비롯해 유교나 도교의 대응 술어들로 표현되고 있다. 대표적 예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삼위묘신(三位妙身), 천사(天使)→신천(神天), 팔복(八福)→팔경(八境), 구원(救援)→제도(濟度), 종교(宗敎,經敎)→법(法), 주교(主敎).감독(監督)→법주(法主),하느님→건(乾), 사원(寺院)→법당(法堂), 신(信).망(望).애(愛)→삼상(三常)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차용뿐 아니라 유물이나 유품에서도 그런 면이 보인다. 경교비의 의장을 보면 불교(여의주.연꽃.거북좌대) 도교(부운) 경교(십자가)의 상징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상이한 문화 속에서 자리잡아야 한다는 현실과 함께 경전의 한역을 담당했던 자들이 불교나 기타 종교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당나라에 전파된 경교는 신관이나 성관․ 구원관 등 기본교리에 준해 판단하면 정통기독교에 기초한 고대 기독교로 보이며 표면상 흥성했던 당대 경교는 외래적 이방 요소를 탈피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타종교와 융화․타협하고 왕치위본주의적 전도를 표방함으로써 ‘회창법란’(845)과 ‘황소의 난’(878) 등 일련의 배타적 소요에 휘말려 250년 기간 동안 토착화하지 못한 채 마침내는 중원에서 멸절되고 잔존세력이 몽골과 한반도의 인접지역인 만주 등 변방지역으로 흩어졌다.
나) 고대 동방 기독교의 한국 전파
6~7세기에 당나라에 전해진 고대 동방 기독교(경교)의 신라 전파에 관해서는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고대 동방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몇 가지 유물과 관련 자료를 통해 추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관련 유물이다.
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된 돌십자가(石十字架,Stone Cross,24.5×24×9㎝)와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십자문장식,Cross-based Design,5.5×5.6㎝, 2.4×3.2㎝), 성모 마리아 소상(Statue of Vergin of Mary,7.2×3.8×2.8㎝이다.(그림)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3점의 유물은 모두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형이어서 십자가의 5가지 유형 중 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스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그리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유물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유행하던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나, 간혹 유행하지 않았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다. 따라서 몇 점의 유물을 특정 시대의 어떤 사회 전반의 증거물로 삼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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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24.5×24×9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 (좌로부터) ▷경주에서 출토된 철제 십자문장식 2점(좌: 5.8×5.6cm, 우: 2.4×3.2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출토된 십자가 |
둘째는 <삼국유사>에 보면, 7세기 말의 고승 혜통(慧通)에 관한 글이 있는데, 그 속에 그가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의 ‘외도’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뜻하는데, 당시 새롭게 접한 다른 종교란 경교일 가능성이 높다. 혜통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의 조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의 천거로 고종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해준 덕분에 고종과 가까웠다고 전한다. 그런데 고종은 경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인 태종에 이어 당에서 경교를 중흥시킨 장본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주에 경교사를 짓도록 할 정도로 경교에 경도된 군왕이었다. 이러한 고종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혜통으로서는 당에 공전된 경교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그 내막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외도’란 곧 이 경교를 지칭하는 것이며, 그러한 외도를 ‘서울에서 멀리했다’는 것은 경교가 신라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은 일찍이 한국에 4년간 머무르면서 전국의 사찰을 돌아본 후 마지막 1년은 금강산 장안사에 체류했는데, 이때(1917년) 그녀는 절 안에 당나라 때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781년 건립)의 모조비를 세웠다. 고대 동방기독교(경교)의 한반도 전파를 상징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이와같이 비록 증빙사료는 아직 불충분하지만,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초전만큼은 그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언제 초전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시원 문제이기도 하다. 비교적 명확한 증빙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국사(751년 건립)에서 출토된 돌십자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초전 시기를 8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교가 중국에 초전(635년)된지 100여 년 후의 일이다. 물론 아직은 고증에서 불확실성이 적지 않고, 개연성의 범위를 크게 벗아나지 못하는 면도 없지는 않으며, 공식적 허가에 의한 공전(公傳)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그나마 초전의 증빙으로는 볼 수 있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더 많은 사료와 유물을 발굴하여 초전의 확실도를 더욱 높여야 하겠지만, 이만큼의 논증으로도 이제 한국과 기독교 문명 간 만남의 역사는 200년이 아니라 그 6배인 1200여 년으로 잡아봄직하다.
▷ 경주에서 출토된 성모 마리아 소상. (7.2×3.8×2.8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
셋째로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서 통일신라와 같은 시대에 남북국 관계를 유지해오면서 교류가 빈번했던 발해에서는 기독교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출토되고, 한때 수도였던 동경 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1926년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만주지방의 안산(鞍山) 부근에서 요대(遼代) 성종 때(11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로 만든 7점의 십자가가 출토되고,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를 방불케 하는 암각화도 발견되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이곳에는 상당수의 경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가 고려 초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이 지역에는 그 이전에 이미 경교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다) 영주 분처바위상의 의미
고대 동방기독교의 중국 당나라 전래는 앞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통해서 입증되었으나 동방 기독교의 신라전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유물과 자료가 제시 되었지만 완전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한 뒤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가 동방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인도에 와서 고대 동방기독교의 첫 선교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그가 지구의 동쪽 끝 한반도에 왔다간 흔적을 남겼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그럴 법한 일이 일어났다. 1987년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왕유동) 분처바위(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에서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간 암각상이 발견되면서 동방 기독교인 경교가 한반도(신라) 전도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암각상이 발견된 왕유동은 속칭 ‘왕머리’라고 하는 왕유동(王留洞 :왕이 머무른 마을이라는 뜻)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처들어온 홍건적의 난(1361년)을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암각상 서쪽 방향으로 경상도에서 죽령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는 옛날 국도(도로)터가 있고 그 곳에는 과거에 말을 갈아타던 역과 원이 있었다는 주민의 말을 종합하면 이 지역이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에 속했다가 죽령과 계립령(현충청북도 연풍소재)을 통해 북진해 온 신라의 영유가 되었으며 후에 고구려의 남하로 그에 속하였다가 신라가 다시 차지하는 등 삼국이 모두 이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2세기 중엽 신라의 계립령, 죽령 개척이 阿達羅王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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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평은면 강동리 분처바위에 있는 분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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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를 닮은 예수상.(투르판 출토) |
진흥왕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이 하나의 루트 할
을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신라는 진흥왕 이후 북방으로 팽창하던 시기에 조령과 죽령의 루트를 확보하고 선덕왕 6년 (637년)에 우수주로 하고 군주를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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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처상의 손모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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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출된 상의 발가락과 그 밑의 여러가지 꽃문양. |
이 암각상의 발견자인 유우식씨(고교 교사)는 이 문자를 히브리어로 단정 짓고 이것이 도마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라는 한자 명문의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며, ‘인도자’는 사도(제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도마의 상’이 되는 것이다.
상은 높이가 족히 5m나 되는 대형 암각상이다. 상면(像面)과 암면(岩面)에는 3점의 음각한 명문이 있다. 그 한 점은 상의 좌측 암면에 네모꼴로 새겨진 4자의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이고, 다른 두 점은 상면의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와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다. 이러한 명문과 더불어 특이한 조형기법과 문양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런 명문도 없는 불국사 출토 돌십자가나 경주 출토 성모 마리아 소상에 비하면 여러 모로 고증이 가능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이 낯선 상에 관한 학제간의 종합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무어라고 단정적인 결론은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상관 지을 수 있는 논의라서 더욱 주목된다. 고대문화의 특성상 우리문화의 대부분은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고등한 문화일수록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
유, 불, 선의 뿌리가 중국이고, 이들 대부분이 삼국시대 전후해서 들어와 민간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그만큼 한국과 중국은 가까웠고, 문화교류 또한 빈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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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의 왼쪽에 암각된 ‘도마’라는 희브리 글자 |
그렇다면 7세기경 당나라에 전래된 기독교가 교세를 확장하며 황실은 물론 지방에까지 파고들었다면, 당나라 유학을 필수로 여기던 신라 지식인들과 엄청난 물물교류의 선봉에 섰던 상인들에게 영향이 없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특히 당나라에 전래되었던 경교도들이 정부의 탄압으로 몽고를 비롯한 만주 압록강 일대로 피난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유물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한반도의 길목 압록강 주변(안산)에서 수많은 십자가 와편과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암각화가 발견된 것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
물론 도마란 명문이 현대 히브리어이고, 예수를 야소라 표현한 한자 역시도 명나라 이후의 일이므로 이 글씨가 석상 건립당시 쓰여 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석상 자체가 7~8세기 작품이 아니란 것은 아니다. 석상의 양식과 모양이 여타 불상과는 다르긴 하지만 당시 조각된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 명문과 글자는 나중에 새겨진 듯하다.
문제는 이것이 진짜 기독교 유물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주변 지역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지간한 석상 앞에서는 언제나 무속행위가 있게 마련인데, 이 석상 앞에서 만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또한 석상의 모양과 주변지역을 샅샅이 답사한 일부전문가들의 말도 분명 중국에 전래되었던 중국 최초의 기독교 경교양식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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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의 가슴 부위에 보이는 십자가 모양(점선) |
현재 분처상에 대한 학계의 답사가 이어지고 있고 기독교계도 개인 또는 단체로 매주 수백 명씩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분처상을 기독교와 연관 짓게 되는 근거는 첫째 조형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세인데, 왼손가락 끝은 빗장뼈에 댄 채 손등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외반(外反:바깥쪽으로 돌림)하고 있어 불상의 수인(手印)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세는 1908년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景敎)의 인물상(당나라 말 제작,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상이라고 주장)에 나타나는 수세와 비슷하다. 수세뿐만 아니라, 상의 구도나 복장의 화려함도 두 상이 서로 유사하여 불상과는 구별된다. 발가락의 노출도 기독교(예수)상의 보편적 기법이다. 특기할 것은 필자의 초보적 관찰로는 상의 가슴 부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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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景敎)의 영향을 받은 유물 ‘훈춘 삼존불상’의 십자가. |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보인다는 점이다.
둘째 문양에서도 그 근거가 엿보인다. 상의 옆구리와 하부에 음각된 문양 중에는 목단이나 장미 같은 꽃무늬가 보인다. 그리고 분처상의 고리형 목걸이 문양과 겉옷의 가로줄 문양은 둔황 경교화상의 목걸이나 겉옷 문양을 방불케 한다. 이와 함께 히브리어의 ‘토마’란 글자나, 한자의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은 비록 그 암각 시기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 상이 기독교와 관련된 상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셋째 인근 주민들의 전언도 기독교상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상을 지켜봐 온 주민들은 종래 이 상 앞에서만큼은 물상숭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일치하게 증언한다. 사실 현장에서 그러한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불상이나 기타 상서롭지 않은 대상물만 있으면 예외없이 불공을 드리거나 기복하는 한국인들의 전래 관행에 비춰보면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물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의 몇 가지 근거로 미루어 분처상이야말로 기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암각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아가 이 상을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를 시사하는 증거유물로 일단 추정해 봄직하다. 그러나 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서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포착되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명문의 내용이다.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토마’란 음각자는 현대 히브리어 문자라고 한다. 여기서의 ‘토마’는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시대인 1세기 중엽에 인도 서남부와 중국까지(중국까지 왔다는 설은 부정됨) 와서 전도활동을 했다는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일 것이다. 따라서 분처상을 도마상으로 본다면 히브리어, 그것도 현대 히브리어로 글자를 새겼다는 것은 시기상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의 조성 연대가 9~10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발견된 토마 관련유물 중에는 히브리어로 명기된 유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547년 남인도 서해안의 성 토마산에서 발굴된 석비에는 십자가와 함께 현지어인 펠레비어로만 비문이 씌어있다. 그리고 토마의 시대는 물론, 11세기에 이르러 동서 교회가 결별할 때까지만 해도 고대 히브리어가 상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토마’라는 현대 히브리어 암각문은 상이 조성된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토마‘라는 글자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이른바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이다.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칭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된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의 출현시기가 문제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다.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쓰게 된다. 한국의 경우, ‘원효문집’에서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法王子)’라고 칭한 실례는 있으나, ‘야소’로 한역하거나 음사한 적은 없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전무하다. 따라서 한자 명문도 히브리어 글자처럼 상이 조성된 후에 보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명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400년께 고구려 광개토왕이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황론적으론 그럴 법한 설이다. 그러나 전행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어서 단정은 이르고 숙고가 요망된다. 그밖에 ‘전행’을 ‘전차(향기나는 풀에 버금가다라는 뜻)’라는 석장 전행의 호로 해석하는 이도 있는데, 증거가 미흡하다.
분처상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은 짙지만, 아직 연구가 미흡해 무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분처상의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인 두부(頭部)가 떨어져나감으로써 실체를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몇몇 주민의 얘기로는 임란 때 왜군이 상의 목을 잘랐는데, 30~40년 전만해도 두부가 상 앞에서 뒹굴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곳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두부가 제비원미륵상(안동시 이천동 소재)이라고 하기도 한다. 앞으로 관련학계의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라) 영주지역에서 발견된 ‘분처바위상’에 대한 지역문화 및 경제적 의미
그간 고대 동방 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많은 논란과 함께 유적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영주 평은면 강동리의 분처상이다. 그런 점에서 매주 수십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고 현지 주민들이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중에는 고대사를 연구하는 대학교수로부터 기독교 단체 신학대학생들 주로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층들이 방문하고 있는데 가끔 기독교 모임에서 단체로 답사하는 경우도 흔히 보인다고 한다.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자 하나 안내 표지판 하나 없어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 먼저 방문한 사람들이 안내를 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직까지 분처상에 대한 분명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으나 강동리 분처상은 우리 나라 여느 암각상과는 분명 다른 양상을 띠고 있어 기독교 전래와 관련된 유적이라는 점만으로도 지역사회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이 지역이 기독교 문화유적으로서 제대로 알려진다면 이 지역 방문자들은 급증할 것이며 영주에서 강동리까지 낮게 드리워진 내성천과 주변의 아름다운 산야로 둘러싸인 자연은 바로 아름다운 명승지로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유교 문화의 발상지이면서 화엄불교의 성지이자 고대 동방 기독교의 기착지라는 정신문화의 본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경제적 제도적인 인프라가 구축된다면 천혜의 아름다운 소백산과 함께 영주는 명실 공히 관광의 중심지로 거듭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3. 맺는 말
1987년 영주 분처상이 발견되고 세상에 알려진 지가 20년이 흘렀다. 문화교류사와 고고학 종교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여기와 관련된 논문을 내고 있지만 아직까지 미약한 편이다. 더구나 그 연구의 단초가 고대 동방기독교라는 생소한 주제이기에 관련 자료들도 일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된 성과만으로도 우리는 영주 강동리 분처상이 기독교적인 유물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꺼낼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유적은 유교와 불교문화의 지역에서 기독교적 문화의 유적지가 스며있는 지역으로서 명실공히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본향이라 할 만하다.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기독교 단체와 연구자들(학자,신학생)이 이 지역을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영주시 안내 지도에 분처상에 대한 안내표시가 없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이 분처상을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이라는 안내표지판을 내건 것은 지금까지의 학술적인 노력과 논란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영주시는 보다 정확한 자료조사 및 학술조사 등을 통해서 자칫 문화적 가치를 매몰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1. <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사계절. 2002
2. <한국 속의 세계)상.하 정수일 창비 2006
3.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김호동 까치 2002
4.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권영필 솔 2007
5. <한민족기원대탐사:셈족의 루터를 찾아서> 김성일 창조사학회 1999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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