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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나보니 침술사의집 )
등교 시간이였다
인천 신흥 국민학교 교정 오른편 포풀러나무 그늘 아래에는 어수선하게 널려진 봇짐들과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가 지쳐 널부러져 있는 큰무리가 있었다.
피난 나온 옹진 사람들이란다. 처음 듣는 "피난민"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가엾은 마음에 점심으로 가져간 도시락을 갖다가 누군가에게 주고 하교 시간에 찾아오기를 다음 날도 그리하고 우리역시 피난길을 떠났다.
2 학년 아홉살때. 우리가족의 고달픈 여정은 한달 거슬러 토건회사를 경영하시던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6.25 사변으로시작된다.
남편을 여의고 슬픔도 추스리지 못한채 천생에 여필종부로 선택권과 결정권을 모르시던 어머니는 네 남매를 이끌고 아버지의 사업도 정리하지 못하고 남들 따라 대충 짐을 꾸리셨다.
몇일만 떠나 있다가 상황 보며 돌아오리라는 마음으로 수인선 도로를 따라 타박타박 얼마를 걷고 또 걸어 군자 국민학교에서 머무르며 몇일을 지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교실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교사 주변에 그렇게 많던 양귀비 꽃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인천 앞바다를 멀리서 바라보느라 올라가든 산 언저리에 파란 애기 손바닥만한 가시잎 사이로 빨갛게 얼굴내민 산딸기들이 여기저기 덩굴져있어 그걸 따먹는 일이 재미있던 어린 나에게는 전쟁이 무언지 느껴질 리가 없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터지는 함포 사격 의 연기가 " 펑"하며구름 같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걸 보며 "우와" 하고 박수를치며 재미있어 할만큼 철부지였던 나는 고생을 모르고 평화롭게 살아왔었다.
차츰 엄마와 오빠들의 근심스런 얼굴이 불안을 느끼게 했다.
상황을 살피러 인천에 들어가셨다 돌아오신 어머니가 이미 인민군들이 아버지의 회사와 사택을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는것을 확인 하셨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고향 으로 갈것을 결심하셨다
보따리를 챙겨 어머니는 머리에 한짐 이시고 오빠둘과 언니도 힘껏 챙기고 나도 조그만 륙쌕 하나를 메고 군자를 떠나 피난민 대열에끼어 수원을 향했다.
예비지식은 쌕쌕이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길가 나무밑에나 풀숲이나 밭으로 빨리 납짝 엎드리라는 것이다
. 긴장된 두려움으로 종종걸음인 나는 큰 오빠의 손에 이끌려 한참을 걷는데 쌩 하고 귀고막을 찢는듯 쌕쌕이가 날라온다 .순간 무술도사 처럼 내 손을 꼭붙잡은 오빠는 다리를 힘껏 벌려 펄쩍 도랑을 넘어 삼밭으로 뛰어들었다.
초인간적인 힘이었다
.삼대로 몸을 가리고 엎드렸다
"탕 탕탕탕 쌔앵 탕탕 "퍼붙는 폭격소리.바로 옆에다 들어붙는다 .
혼비백산 하여 머리를 삼밭에 밖고 엎드려 있다가 소리가 멎은뒤 털고 일어나 보니 후둘후둘 온몸이떨렸다.
금방 오빠가 손잡고 건너 뛰었던 도랑이 너무 폭이 넓어 도저이 건너질 못했다.
한참을 둑길따라 올라가 나무다리가 있어 그리로 건너 식구들이 모였다.
어느 빈집에 들어가 정신을 가다듬어 밥을 지어먹고는 숨돌리고 있는데 조금 생기를 찾은 내가 왜 미리꾸 타령은 했는지.
긴 역사와추억을 지닌 밀크 캬라멜이다.
저쪽 마을에 가게가 있을듯 싶어 큰 오빠가 그걸 사러나갔을때 또 한 바탕 그쪽에서 쌕쌕이의 폭격 소리가...
하마터면 밀크캬라멜은 고사하고 나 때문에오빠를 잃을 뻔 했던걸 생각하서 다시는 밀크 캬라멜로 조르지 않았다.
또다시 떠나 한참을 걸어 긴 철교를 건너야 했다
아마 수인선 협계철교로 소래 철교였던것 같았다.
건너지 않으면 또 폭격 당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철교 가운데 얇고 좁은 널빤지를 깔아놓은 길을 살아남기 위해서는 건너야 했다.
거기서는 손을 잡을 수도 없이 좁은 송판떼기 라서 한 줄로밖에 갈 수없었다.
곡예하는 것 같은 모험이었다.
발밑에는 물쌀이 핑핑도는 철교를 어린 것들도 울음 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사력을 다해 한발짝 한발짝 오금 조이며 건넜다. 중간쯤에서 "첨벙" 하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주춤했지만 뒤에 오는 오빠의 호위를 받으며 죽을 힘을 다해 건넜다. 건너고 난다음 누가 떨어졌는지? 수근거렸다.
사람이라고도하고 개가 빠졌다고도 하고. 하도 폭격에 죽는 사람도 많다보니 경악하는 일도 없이 사람들은 질려서 멍 할 뿐이었다. 극한 공포와 두려움에 울부짓지도 못하고 침통한 담담함만 있었던것 같았다.
어느여인은 폭격에 얼이빠져 잠간 애기를 내려 놓고 쉬는사이 또 다시 공습해오는 소리에 우왕좌왕 애기를 들쳐없고 도망치다보니 베개를 없고 있드라는 말도떠돌았다.
모두가 넋이 나간 두려움 뿐이었다.
그러기를 하루에 서너차례 비행기의 폭격을 겪다보니 어린 나는 혼이 빠저 기절하였다.
소풍나오듯 메고나온 륙쌕도 다른 식구가 챙기고 나는 하나의 짐처럼 축 늘어져 간신히 맥박만 뛰는상태로 엄마 오빠들이 번갈아 엎고 갔다.
이러다가는 길에서 일 당하겠다는 판단에 어느 집에 들어가서라도 숨이 끊기면 거기서 묻고라도 가야 할 생각들로 수원 병점 사이의 어느 한 집으로 들어섰단다.
깨어나보니 손가락과 발가락에 침이 꼿쳐져 있었고 어느 아저씨가 침을 건드리고 계셨다. 침술사 이셨다.
식구들이 울면서 나를 둘러서 있다가 안도의 한숨으로 끌어 안았다 .
내생애에 가장 큰 기적! 살아난 내생명! 그 은인을 만나지 못했더면....
가지고 가던 귀중품의 일부를 그댁에 맡기고 평정되면 들리리라고 약속하고 떠났다.
폭격이 무서워 낮에는 숨어있다가 민가에 들려 밥을 얻어먹으며 밤을 틈타서 걸었다.
아이들 걸음 인데도 하루밤 100여리를 발이 부르터 물집에 시달리며 걸었다.
( 20여년전 까지 환청으로 들리던 개구리 울음소리 )
죽을뻔 했던 고비를 넘어 피난길은 이어졌다.
동네에 들려 그래도 인심좋게 대접하는 손길들 때문에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한참 감자철이라 껍질도 까지읺고 삶아낸 눈이 폭 폭 들어간 자주빛 감자가 포삭 포삭 분이 나는게 너무 맛이 있었다.
찬밥인 보리밥이라도 한그릇 곁들여 나오면 꿀맛이었다.
추적추적 비를맞으며 얼마를 걷다가 개일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냥 젖은옷인채 어느농가에 들어갔다.
시대 잘못 만나 고생들 한다며 인정있게 받아주는 집주인은 이번에도 하얀 감자를 한 바가지 쪄 주셨다.
손쉽게 대접 할 수 있든것이 감자뿐이였으니까.
대청 마루에 둘러 앉아 소금을 찍어 맛있게 먹는데 초가집 추녀밑에 제비들이 비 속에서도 먹이를 물어나른다.
저 만침 논배미로 미끄러지듯 날아가서 벌래를 채 가지고 돌아와 지저거리는 새끼입에 넣어주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한참을 날아갔다가 먹이물고 돌아오는 제비를보며 " 야! 저봐 또 온다" "또 온다" "또 와"하며 남의 집인 것도 잊고 떠들며 즐기던 동심은 피난길의 고달픈 애환을 잠시나마 삭혀주었다 .
다시 일 주일여를 저녘으로 걷고 걸어 이제는 한 이틀만 더가면 충청도 당진 순성 외가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마당가에 커다란 논이딸린 어느집에서 늦은 저녘을 얻어먹고 고단하여 사랑채를 잠자리로 짐을 풀고 나니 모두들 골아떨어졌다. 한참을 잤는지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그만 잠이깼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잠자는 네 식구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창호지 문풍지로 스며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바로 옆에 누워 잠드신 어머니를 자세히 들여다 보는 순간 어린 가슴에 밀려오는 연민을 그토록 짙게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
어머니가 너무 불쌍 했다. 40여일전 남편을 부평 묘지에 장사하고 경황중에 당하는 절박한 상황!. 어머니의 지쳐 잠드신 얼굴은 달빛이 희미하기 때문인지 유난히 초췌하고 창백해 보이신다. 너무너무 애처러워 어린맘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곁에 누워 있는데 문밖에 개구리 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울어댔다.
그때의 한없이 서글펐던 감정이 슬프지만 곱게 곱게 달래어 성기고 엉겨서 마음에 둥지를 튼것 같다.
20 여년전 결혼하여 아이들이 국민학교 중학교에 다닐 때인가보다. 그해 여름 따라 저녘만 되면 개구리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머리를 흔들어 소리를 털어 버리려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두 손바닥으로 귀를 비벼 보기도 하고.일부러 일찍 잠을 청해 보기도하고....논도 밭도 산도 근처에 있지 않은 도시에서 무슨 개구리 소리냐고? 어릴때 피난길에 들었던 그 개구리들 소리였다. 무어라 표현 못할 야릇한 느낌이며 안정이되지 않았다..
극한 슬픔도 기쁨도아니며 그렇다고 정신이 혼란한 것도 아닌 그저 들리는 선명한 개구리 소리들. 환청 같았다.
견디다못해 하룻저녁은 남편에게 부탁했다. 나를 도심을 벗어난 가까운 시골에 좀 데리고 가달라고,.기꺼이 초저녘에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40 여분 떨어진 시골에 동행해주었다 .
이 논배미 저 논배미에서 개구리들이 우는소리! 시끄러운 듯하나 너무도 정겨웠다 .
한참을 논뚝에 앉아서 새우깡. 맛동산 먹으며 개구리 합창을 듣고 돌아 왔다.
그 이후로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어쩌다 여름철에 개구리 소리만 들으면 떠오르는 슬펐던 장면은 그대로 어김없이 스쳐간다.
( 1.4 후퇴와 최악의 상황 )
6.25 피난 길은 한발이라도 가까운 외가로 갔다.
죽은 줄만 알고 마음 조여 안타까워 하다가 살아서 만난 기적에 감격하시는 외 할머니와 외숙내외분.
외사촌들 6남매와 우리4남매 대가족이었다. 외숙모님 말씀에그해 감자농사가 잘돼 몇가마니는 족히 먹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복숭아나 자두는 시거나 떫은 맛만 가시면 나무에 매달려 따먹었고 그많던 밤나무도 풋밤부터 발라 까먹어서 알밤농사를 제대로 못 하셨단다.
그난리통에 어머니는 잔등에 황소 눈만큼이나 크게 등창까지 생겨 큰 고생을 하셨다. 외가의 앞동네 구절산은 인민군의 아지트였던것같다. 밤이면 인민군이란 사람들이 마을을 뒤지고 다니며 숨겨진 반동을 색출한다고 횃불을 들고는 집을 둘러싸고 짚더미속이나 밤 송이 무더기를 날카로운 쇠창으로 찔러댄다 한번은 피난민 신분이라서 그랬는지 어머니를 마당으로 끌어내더니 가슴에 총뿌리를 겨눈다.
사람을 파리목숨같이 여겨 눈이 뒤집혀진 그들이 저 방아쇠만 당기면 어머니는 죽는데 이를 어쩌나....
밤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상황에 벌벌 떨고만있었다. 외할머니와 외숙이 매달려 아무 혐의 없는 가족들이라고 이러면 않된다고 애원하며 설득하고 난 담에 무리들은 돌아갔다. 간담이 서늘했던 밤을 모든식구들이 잠못자고 새웠던 것 같았다. 외가에 얼마를 머물다가 40 여리떨어진 큰 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한동안을 지냈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암닭이 병아리 새끼 몰고 다니 듯. 외가로 큰집으로 옮겨 다니던 어머니 심정이 어떠 하셨을까? 모두가 넉넉지 않은시절에 모두들 밥값이라도 하려고 열심히 일을 거들었지만 어머니는 가시방석 같으셨을 것이었다.
떠돌이로 왔다 갔다 정착도 못하고 전쟁이 빨리끝나 돌아갈 때를 기다리는 심정은 몸은 고향땅에 있어도 고향은 마음 붙일 곳 없는 타향이었고 마음의 고향은 아버지가 묻혀계신곳 피난을 나오던 인천 그곳이었다.
"고향을 떠나와서 고향을 떠나와서 오늘 밤은 이곳에서 밤을 새우고 내일은 어느곳에서 꿈을 꾼단 말이냐.형님은 북쪽으로 동생은 남쪽으로...누이야 울지미 라 누이야 울지마라 승리는대한에 있다 " 라 는 피난민들 가운데 퍼져 불려지던 구슬픈 노래로 눈물을 흘리곤했다... .
움막이라도 우리집이라고 식구끼리 들어가 오손도손 마주 앉을 때가 언제 오려나....
그러다가 9.28소식이 들려지자 다시 짐을 꾸렸다. 할머니가 이팥을 삶아 고물하여 만들어주신 인절미를 가지고 보덕포 선창에서 귀경의 배에 올랐다.
다시 돌아가 그래도 내집이라고 폐허된 집을 손질하고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을 버텨나갔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그 모진 추위를 무릎쓰고 모찌떡 목판을 놓고 신흥동 골목길에서 장사를 하셨다.오빠들도 하교 후에는 어머니를 도왔다. 그해 겨울 나박김치를 아껴먹으려고 얼마나 짜게 담으셨든지 한쪽 가지면 밥 서너 숟가락을 먹은 기억이난다 . 반찬은 고사하고 굶지 않고 연명하는 것 만도 다행이었다.
꿀꿀이 죽을 사다 먹거나 심지어는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허다했으니까.
큰오빠는 인중 5 학년. 작은 오빠는 인천공업중학교 2 학년.언니와나는 신흥학교와 축현학교가 병합되서 그곳으로 다녔다.작은 오빠는 하교후엔 날마다 은행에 들려 아버지가 전에 예금 하셨던 돈을 하루 출금 한도인 2 만원씩 인출 받았다고한다. 한문으로 이 만 원 정 이라고 쓰면 은행 여직원이 "너 한문 참 잘 쓰는구나"라는 칭찬을 받으며 1.4 후퇴가 나기까지 찾은 금액은 우리 가족이 넉넉히 살아 갈 수있도록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전 예치해 놓은 전 재산이었다. 당시 금 한돈이 80원 정도였고 웬만한 봉급이 삼천원 이었다니까 꽤 많은 재산이었던것 같다.
다시전쟁이 시작되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인중학교를 비롯해 인천시내 남녀 학교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나갔다. 눈이 쌓이고 매섭게 추운 날씨에 여학생 몇명은 미끄러지고 다시일어나 행렬 지어 나갔다. 우리 가족은 큰오빠 대열을 신흥동 사거리에서 작별하고 눈물로 집에돌아왔다.작은 오빠는 책상머리에 얼굴 박고 얼마나 통곡하던지...
밤마다 함포 사격은 울려 지붕의 흙들이 투득 투득 떨어지며 공포를 더해줬다.
아버지 친구분이 이제 피난길도 끊길 수 밖에 없으니 화수정 나무선창에 마지막 배 한척만 남았다고 서두르라고 재촉해 주셔서 또다시 피난 봇짐을 쌌다.
어머니는 제일 신경 쓰이는 화폐뭉치를 배다리 시장에서 비단 옷감을 많이 사다가 그 사이 사이에 넣고 보따리 처럼 꾸려 멜빵으로 엮어 작은오빠에게 짊어주었다.
화수동 선창의 바다바람은 살을 에는 추위였다. 모두가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마침 간조때라 배가 펄에 있는 상태여서 오랜 시간을 모래 사장에서 군데군데 피우는 토탄불에 손발을 쬐며 기다렸다.
몇시간을 떨다가 필사적으로 올라탄 배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선원들이 성이 나서 마구 이불짐 같은 것은 다 바다에 던져버렸다. 사람도 다 못 타는데 짐을 실을수는 없다는 것이다. 과적이되면 파선의 위험도 있기때문였다. 네 식구가 떨어지지 않고 배에 오른것만도 행운이었다. 배는 출항을했다.
어두워지고 파도가 심하여 얼만큼을 갔는지 짐작 못한채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지쳤다가 네식구가 간신히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판위에 웅크리고 둘러앉아 담요를 둘러쓰고 있다가 깜빡 잠이들었다.
화들짝 정신차려 깼을때는 이미 일을 당하고 난 후였다.돈보따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어둠속에서 몇바퀴를 돌아봐도 찾을 수 가 없이 속수무책이었다.
그 난세에 대책이 없었다.한참을 갔을 거라고 짐작한 배는 심한 바람때문에 제자리에서 출렁이고만 있었던 판이니 선원이 짐으로 알고 바다에 던져 버렸는지 아니면 그 북새통에서도 도둑이 훔쳐 배에서 내렸는지 알길 없었다.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인가?
남편도 없이 그래도 그 재산으로 자식들과 살아 갈 수는 있었는데 완전한 파산이라니~~.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깜깜할 일이었다.그래도 어머니는 침착하셨다. 오빠를 나무라지도 원망의 말씀도 없으시고 자신의 불찰이라고 여기셨는지 그저 담담하게 대처 하셨다
.언니와 나는 어렸기 때문에무슨 변을 당했는지도 잘 알수없었고 나중에 커서야 알았던 사실이었다.
물쌀에 밀려 간신히 그 다음날 도착한 곳은 행선지 당진이 아닌 영흥도 섬이었다 .
배에서 내려 영흥도 분들의 인정으로 집집마다 흩어져 들어가 밥을 얻어먹는것이다.
몇끼니를 굶었는지 소금에만 저려 담갔던 누렇게 익은기다란 줄기 무청김치가 얼마나 맜있었던지. 언니와 나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반찬이라고 말한다.
아버지 보호 아래만 계셨던 어머니가 그때에 심히 당황하셨거나 잃어버린 재산에 집착하셔 이성을 잃고 정신이 혼란 되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됬을까?
당시 돈짐을 맡았던 오빠에게 "오빠 그때 그렇게 큰 일을 당하고도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은것 정말 기적이예요" 했드니 "내가 그때는 어려서 돈의 크고 작은 개념이 없어서였지. 그러나 어머니는 대단 하셨어. 자식들 앞에서 함부로 눈물 보이지 않으셨거든" 하신다.
생각하니 세상 누구보다도 강인하신 어머님의 존재가 흔들림 없이 황폐한 사막에서도 거친 풍파 앞에서도 바람막이 되며 새끼들을 품으셨던 모습을 내가 어미되어 어머니의 세월의 길이를 살아가면서 그 느낌과 이해가 하나씩 더해지니 가슴이저려 걸핏하면 어머니 생각에 많이 울었건만 눈물은 여전하다.
( 휴전 이후 )
전쟁 발발 3 년이 지나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인해 불안감을 가지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느니 그대로 고향에 주저 앉았다.
아버지 생존하셨을때 사 놓으셨던 전답과 가옥을 큰 아버지께서 소유하고 계셨기에 논 한 뙤기 밭 한구석 나누고 아래채의 달랑 방한 칸에서 온 식구가 옹색한 살림을 꾸렸다. 솥 하나만 걸려 있고 부엌도 갖추어지지 않은채 그날그날 연명해갔다.그래서 동네에서 나의 별칭은 아랫방 작은언년 이었다
학도병 나갔던 큰오빠는 상이 군으로 제대하여 좁은 집에 거처가 마땅치 않으니까 여기저기 일터를 찾아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3 년을 넘게 중단했던 학교를 그제야 4 학년 2 학기에 편입했다.
전쟁으로 인해 닥쳐온 가난은 상처를 깊게 남겨주었다.여름에는 나무그늘에라도 피하지만 겨울되어 부엌이라고 문잩도 없는 헛간에 기둥 몇개 밖아 짚으로 이영을 엮어 두르고 가마니를 틑어 문으로 늘어뜨리고 들락날락하는 모습은 거지행색이었다.
둘러친 이영사이 새끼줄에는 사람 눈에 띄이지 않게 빨아 걸쳐 말리시던 어머니의 누더기 생리대가 두고두고 나를 서럽게 하는 가난한 아픔의 한 장면으로 머리에 남아있다.
땔감이 넉넉지않아 저녘밥 지어먹은 아궁이 불김이 금방 식어버린 얼음장 구들되면 어머니는 새새끼품듯 가랑이로 나를 덮으시고 가슴으로 품어 추운겨울밤을 재워주시던 그체취로 어린날을 건강하게 성장 했다.
모두가 기대에 들떠서 가는 한번의 수학여행 을 수덕사로 가는데 나는 스스로 선택 해야했다. 여행 비용으로 그렇게 갖고 싶어하든 동아 전과를 살 것인가 수학여행을 갈 것인가. 여행쪽을 포기했다.
철채로 멍석에 벼를 훑으시는 어머니 곁을 맴돌며 보낸 가을 짧은 하루가 내게는 얼마나 길고 지루한 하루였든지.
" 아이들은 지금 얼마쯤 갔을까? 다 도착 했을까? 수덕사는 어떤 곳일까" 어른되어 수도 없이 여행한 그곳을 . 여행사진엔 내 얼굴이 없었고 돈이 없어 찾지못했던 졸업 사진도. 철 없었던 나는 고사하고 그때마다 어머니 가슴에 못박아드린 일들.간신히 국민학교 마치고 합격해놓은 중학교를 보내지 못할 형편을 너무 잘 알면서도 통학하는 아이들 등교 하는 것을 보며 아침 밥을 먹는때면 말도 못하고 졸졸 눈물 흘리고 있는 나때문에 그날은 식구들도 그나마 먹든 상을 그대로 치우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이 아쉬워서" 네힘으로 돈을 벌어 내년에는 꼭 중학교에 가도록 하자"하시며 없든 급사자리를 일부러 만들어 몇분이 갹출하여 주시던 봉급도 .어린것이 그잘난 속알머리 없는 자존심 때문에... 진학한 이장집 딸이랑 신발가게 딸.중학교 교복입은 그아이들이 토요일날 하교시간에 모교에 와서 노는 것을 보면 급사 신분인 나를 스스로가 이기지 못한 것이다.
몇달후 그만두고 산으로 솔방울 주우러 논으로 우렁 잡으러 갯펄로 나무재 뜯고 바지락도 캐고 그러면 어머니는 그걸 읍내장에 이고 가셔서 팔아 오셨다.
전쟁만 나지 않았으면 열심히 공부만 할 때였다.국민학교때 여선생님 한분이 중학교로 전근 가신 뒤 저를 잊지 않고 계시다가 사람을 보내셨다. 입학을 하라고 교과서와 학용품까지 다 마련하여 보내셨다.하늘을 날듯이 기뻤다.사립학교라 가능했었다. 학업의 길에 다리 놓아주신 처음 은인이셨다.
족히 8 k m 넘는 학교 길은 논드렁을 지나고 들과 산길을 걸으며 나만의 자연 학습장으로 복습과 예습이 충분하였다.
열심히 하여 특대생 월반을 하여 선생님께 기쁨을 드린 것으로 보답했다..
학업은 더 이상 이어질 수가 없는 형편에 어쩌다 신문지 한쪽 굴러들어오면 마침 옆댁 집안 아저씨가 서당 선생님이시라 그걸 가지고 달려가 한자 한자 여쭈어 익히는게 정말 재미있었다
아저씨는 나무막대 꼬챙이로 고운 황토 마당에 한 획씩 또박또박 쓰시며 가르쳐 주셨다.그때 한문을 제법 많이 익혔다.
중앙 강의록을 신청해서 받는 날은 나도 학생 기분이라 끌어안고 어디서 인쇄 식자를 얻었던지 거의 강의록 책장마다 언간생심 꿈도 못 꿀 <대 학> 이라는 두자를 묶어 잉크를 칠해 꾹꾹 찍어놓았다.
신문 한장이 손에 들어와 그곳 광고란에 유한양행 의 무슨 광고였는데 중역 윤 누구 라고 인쇄된걸 보고 무조건 편지를 썼다. 어리지만 일감이 있으면 그자리에 저를 써 주시면 야간 학교라도 다녀 성공 하겠노라고. 너무 안쓰러웠는지 정성껏 보내주신 답장을 잊지 못한다. 우리 회사에는 그렇게 어린 사람을 고용할 일자리는 없으나 이양의 마음을 하늘이 안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 는다"고 낙심하지말고 열심히 살라는 격려가 얼마나 감사했든지.
"칠판 앞에서 공부좀 했으면....." 소원이었다. 그 말을 요즘 어느 스터디 그룹에서 했드니 40 여세의 사랑스런 멤버가
"왜요 ? 그때 는 키 가 크셔서 뒷줄에 앉아 잘 보이지 않으셨나봐요 ..."
"6.25때 왜 나면 끌여 먹으면 됬을걸 밥 없다고 굶으셨어요?" 한다는 말과 다를게 없는 시대 정서의 단절이다
그 뙤약볕에 콩밭에서 김을 매면서도 앞지락에 영어단어 를 죽 써가지고 옷핀으로 꽂고서 내 공부에 방해 받지 않으려고 어머니와 언니는 저쪽이랑에 나는 이쪽에 떨어져 김을맸다. 어쩌다 땀 닦으려고 일어났다가 지나가는 동네사람에게 들키면 "저러다가 아랫방언년 공부에 미치지. 저렇게 공부 하고싶어 안달이니"
그런 모습이 어머니를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 객지로나가 고학을 하며 고생 고생 끝에 자신들의 삶을 헤쳐나간 오빠들 에게도 어떻게 사는지? 굶기를 허다하게 할텐데 걱정이셨을 어머니의 마음 은 항상 응어리 져 있으셨을 겄이다. 그러고 보니 불량하여 속썩여 드리진 않 했더라도 떨어져 있었어도 자식들 곁을 항상 지키고 맴도는 어머니의 애틋한 천심때문에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주신 가슴의 한이 어머니 세상 떠나실땐 그저 속알이로만 알았던 풀수없이 맺혀졌던 그 암덩어리~. 이제야 절절히 느껴 눈물 범벅이된다.
몇날 몇밤을 눈물의 감사로 읊고 읊어도 못다 할 사모곡은 바쁜 일손 놓은다음 정성담아 어머니께 올리련다. 소리 한번 내어 우시지 못 하며 전쟁의 오랜 상처를 맘으로 몸으로 찍어당겨 꿰매며 사셨던 어머니!. 이 딸이 어머니 대신 길게는 말고 한번만 크게 울어드리련다. 사모곡으로..... .
어머니 후손들이 다 사람구실들 제대로 하며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내 두 손녀는 내가 6.25 를 만났던 딱 그나이이다. 사랑스런 손녀들을 보며 지나간 전쟁후 60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간다.
( 왜 싸워야 했나? )
전쟁이 왜 이러 났는지? 왜 우리가 이렇게 싸워야 하는지? 개념도 서지않은 어린 시절을 얼룩져 놓은 6.25전쟁!
우리민족은 참 불행하다. 한 핏줄 형제인 남북이 그렇게 죽도록 미워해야만 했는가?
이북은 우리보다 먼저 기독교가 들어온 곳이었다.
어느종교든 높은 도덕성과 자기희생적인 순화된 경건성이 유지된다.그런데 북한은 그걸 다 내몰았고 버렸다.
모두가 같이 잘 살자는 이념을 도용하여 희생을 요구하며 특권을 누리는 인간지도자 그들이 신과 같으니 빌어먹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들. 거기다 때로는 공갈 협박으로 국제사회와 겨뤄볼려고 하는 그들과 하나되기는 고사하고 평행선 유지조차도 점점 벌어지기만하니가슴아프다.
고생모르고 정신도 육체도 훈련이 덜된 약한 후세대는 이 숙제를 어떻게 감당할까? 요즘 우리 대한민국도 국회나 정치판.종교계.교육계 어느곳도 반목과 질시와 타락. 독기서린 오만함들.진실의 부재.눈만뜨면 죽도록 미워하기위해 태어닌사람들 소리에 신물난 국민은 이제 진위도 분별할 수 없는 혼란으로 너무 많이 빗나가 자손들에게 무엇이 물려줄 유산이 될지 겁이난다.
몇십년 피눈물 나는 고생을 생각도 하기싫어 자손들에게 가난을 대물림 해주지 않으려고 밤을 낮삼아 추위속에 속살조차 제대로 감추지 못할 입성과 목구멍 간신히 풀칠만 하면서도 끈질긴 생존의싸움 으로 오늘의 부요를 만드신 전후세대.
이제 우리세대의 책임이 너무 막중하다. 제대로 교육되어지지 않으면 우리들의 고생은 무가치한 넋두리로만 남는다.
전달하지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차세대엔 역사의 얼이빠진채 혹시 우려되는 닥쳐오는 장애에 어떻게 맛설것인가?
민족혼 애국의 심성을 봄날 꽃 모종하듯이 심어주어야겠다. 정성껏....
학원 몇군데 돌기에 바쁜 아이들. 남보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는 학과목이나 특기 때문에 그애들의엄마인 내딸들도 손녀들도 눈앞의이기적인 작은 목표에 목숨 걸지말고 거시적인 안목을 넓혀 모두 어린 애국자의 몫을감당하는 긍지가 더 귀한 것을 가르쳐야 할때다.
내가 6.25를 만났던 그때 나이인 손녀들 미래를 사랑하며 늦었더라도 옛이야기 속에서 장래가 잘 승계되도록....< 요즘 아이들이 들을까? > 그만큼 우리의 역사성 상실과 무지였음을 자책하며 맘이 무척 조급하다. 그래도 묵묵히 인생을 천명의뜻을 받들어사는 소수의 소중한 분들 때문에 그분들의 세월을 아까워하며 시대적인 정신유산이 건강하게 대를 이어 정말 좋은 나라 금수강산에 자손만대 이어지는 복을 소원한다.
위에 글은 70 을 바라보는 나의 인생여정에서 혹시 기억해야 할 소중한 것들을 그냥 흘려 버릴까 봐서 대충 사실적인 면만을 써 놓았지만 진실로 내가 기록해야 할 부분은 이제부터다.
우주만물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구속사적인 역사를 전세계와 우리 나라 가운데 펼쳐오셨듯이 인간 "나" 의 역사도 구속사적인 면에서 하나님 의 섭리와 이끄심을 회고 하며 "어찌 나를 위함 이었는지?" 벅찬 가슴으로 고백 해야 할 일들을 가득히 담고 있다.
어머니 라는 매체가 없으셨더라면 하나님이 그만큼 느껴지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하나님은 당신을 보여주시기위해 모든 인생에게 어머니를 주 신 사실이다.
인간 어머니는 한계성이 있으셨으나 영혼의 모체 하나님은 초월이시니 더많이 가까이 느끼며 더많이 깨달아 하나님으로 남은생애가 가득채워지기를 소원한다
2010년 6.25에 즈음하여 이 항진 69세 (서울 구로구 개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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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 졸필은 만 10년전에 썼던 것을 여기 성역과 같은 카페에 옮겨 올렸다
손주들 중에 늦둥이로 할미와 70 년 격차인 세월을 지나고 있는 손녀는 지금 전세계적으로 겪고있는 코로나 19를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급격한 변화에 대처해야만하는 인생의 주축을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 = 말씀자체=말씀암송 쉐마)에 세우고 그소용돌이 속을 감사와 기쁨으로만 누리다가 영생의 세계에서 만날것을 약속하는 간절함으로 자손들이 읽어 도움되기위해 기록으로 남긴다
간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