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그는 이곳에서 10여 년간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다산 초당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다. 경내에는 정석(丁石) 약천(藥泉)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다조(茶竈),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다산의 생애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후손이다.
다산은 어릴 때부터 이치에 밝았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멀고 가까움이 서로 달라서이다.” 일곱 살 아이가 쓴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다산은 15세에 서울 회현동 풍산 홍씨 가문에 장가들었다.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 대왕을 보필하여 국가 대계를 세웠다,
정조는 단옷날 다산에게 선방(扇房)에서 쓸 부채를 선물로 내렸다. 옷 칠이 된 부채 손잡이는 윤이 났다. 또한 바른말을 하라는 의미로 붓과 주사부적을 하사했다. 정조가 다산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1세에 홍문관의 수찬(修撰)하고 33세에 암행어사로 탐관오리들을 징치(懲治)하였다. 34세에 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 이어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39세에 정조 대왕이 붕어하자 벼슬길이 끊기고 환란이 시작되었다.
11세의 어린 순조가 등극하고 벽파가 득세하자 시파 일당들은 다산을 사교(邪敎)라는 누명을 씨어 귀양을 보냈다. 40세(1801)부터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며. 이 기간에 5백 권이라는 방대한 실학관계 저서를 완성하였다.
57세에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18년에 걸쳐 학문을 마무리하고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집 뒤의 묘소가 있다.
실사구시 철학
다산은 유배생활 중에도 강진 초당에서 실사구시를 몸소 체험하려고 벌통(養蜂)을 쳤다. 그리고 벌의 생태를 자세히 관찰하여 기록하였다.
벌은 단체생활을 한다. 장수도 있고 일꾼도 있다. 방을 만들고 양식을 비축해 두는 등, 모두가 협동하여 부지런히 일을 한다.
나비는 만사태평이다. 자기가 거처할 둥지도 만들지 않는다. 먹을 양식을 비축해 두지도 않는다. 오직 하늘을 날아다니며 생을 즐긴다.
벌은 부지런한 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 비축해 놓은 꿀을 말벌에게 약탈당했다. 일벌과 애벌레는 거의가 죽임을 당했다. (蜂以積著之, 故終招大殃)
그렇지만 나비는 벌과 달랐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건너뛰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천하를 주유하며 드넓은 평야에서 마음껏 노닐다가 생을 마감한다.
다산은 부지런하고 일사불란한 꿀벌과, 놀기 좋아하는 나비를 서로 비교하는 글을 썼는데. 당연히 꿀벌을 칭찬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비가 더 부럽더라고 했다.
애써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꿀벌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걱정은 묶어두고 천지를 소요하며 거침없이 살다가 재앙 없이 생을 마감하는 나비의 삶이 한결 가볍고 부러운 것이라는 결론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생을 택하겠습니까?
인간의 세 가지 병통
다산 정약용에게 글을 배우고자 찾아온 제자 황상은, "선생님! 저는 세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너무 둔하고, 앞뒤가 꽉 막히고, 사리분별을 못합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이에 다산은,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 한 번 보고 척척 외우는 사람은, 그 뜻을 음미하지 않아 금세 잊어버린다.
둘째, 제목만 던져 줘도 글을 짓는 사람은, 똑똑하지만 오히려 글은 가볍다.
셋째, 한마디만 해도 금세 알아듣는 사람은, 곱씹지 않아 깊이가 없다.
스승이 일깨워준 "새로운 자신"을 돌아본 황상은 단점을 발판삼아 배움에 정진하여, 추사도 인정할 정도로 명문장가가 되었습니다.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
젊은 시절 다산의 말은 거침없고, 행동은 도도했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진중해졌다. 불운과 역경이 뾰족한 재기를 눌러 주었을 것이다.
“언제쯤이나 침방(寢房)에서 아름답게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워하지 않겠어요! 그리워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어쩌지요? 꿈속에서라도 그대 슬픈 얼굴 봐야겠어요.'
유배지에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시를 남겼다. 가족을 그리워할 때는 그도 범부나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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