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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밝홈실 참의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설죽선생
곽재우(郭再祐) | |
출생 | 1552년 8월 28일 선 경상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
사망 | 1617년 4월 10일 선 경상도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망우정 |
사인 | 병사 (노환)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별칭은 홍의장군, 천강홍의장군 |
학력 | 1585년 별시 정시 급제 |
직업 | 의병장, 무신, 정치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상산김씨 |
자녀 | 아들 곽영, 아들 곽호, 딸 곽씨 |
부모 | 아버지 곽월, 어머니 진주강씨, 계모 허씨 |
친척 | 처외조부 조식, 동서 김우옹, 사위 성이도 |
복무 | 조선 육군 |
복무 기간 | 1592년 ~ 1613년 |
최종 계급 | 병마절도사 |
주요 참전 | 임진왜란, 정유재란 |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는 조선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으로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문장의 글귀가 왕의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40세가 넘도록 고향에서 학문과 낚시질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당하자, 당시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한다. 여러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김덕령 등의 의병장이 무고로 희생되는 것과 영창대군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여러번 사퇴하였다. 당색으로는 북인이었으나 광해군 집권기에도 여러 번 관직을 사퇴하거나 사양하였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이어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에 대한 사형 여론이 나타나자 영창대군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 이후 창녕 망우정에 은거하였다.
본관은 현풍(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으로,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자 그의 외손녀사위이다. 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顒)과는 동문이자 동서간이 되었다. 전란 중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을 자처하였으며, 전장에 나설 때 붉은 갑옷에 백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그의 이름을 모르던 장졸과 백성들로부터 홍의장군이라 불렸다.
생애
출생과 가계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출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사후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고, 수(守)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진주강씨의 셋째 아들로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친형제로 곽재희(郭再禧), 곽재록(郭再錄)과 누이 1명, 계모 허씨에게서는 이복동생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祺)와 이복 누이 1명이 더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출신 곽경(郭鏡, 1117 - 1179)으로 송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동래한 귀화인이었다. 곽경은 1138년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봉군되었다. 5대조 곽안방(郭安邦)은 세조조에 해남 현감(海南縣監),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내고 1467년(세조 12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여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세조대의 청백리였다. 고조부 곽승화(郭承華)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나 진사였고, 할아버지 곽지번이 성균관사성에 올라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수학과 소년기
일찍이 생모 진주강씨를 여의고 아버지 곽월은 허씨와 재혼하였다. 일찍이 영남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후에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되었다.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 역시 스승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됨으로써 동서간이 되었다.
그 뒤 상경하여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던 조식은 자신의 문도들과, 외조카 이준민(李俊民)이 한성부에 다녀오면 반드시 그의 소식을 묻곤 했다.
청년기
그 뒤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진사시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북인 당원이었으나 비주류였던 탓에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하여서 진사시에 들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고 혹평해놓기도 했다. 1585년(선조 18년) 과거를 보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스른 까닭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어 낙방되고 만다.
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40세가 넘도록 학문 연구와 농사를 지으며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조식의 문하생들이 대부분 김효원이 한때 조식의 문하에 있었던 인연으로 동인(東人)에 가담하면서 그도 동인의 당인이 되었다가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당될 때는 북인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동인과 북인 내부의 내분을 못마땅히 여기던 그는 이산해 등 다른 북인 당원들을 피하거나 일부러 멀리하였다.
그는 고향인 현풍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근검절약했는데,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계모 김해허씨가 창녕군 화왕산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잠시 울진으로 가 있기도 했다.
임진왜란기 의병장 활동
전란 초기.
평생 은거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같은 달인 음력 4월 22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신출귀몰하며 일본군을 물리치고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1592년 5월 함안군을 함락,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 도하 작전을 전개하는 왜군과 교전,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자처하였고, 기습과 매복이 성공을 거두어 관군도 이기지 못한 왜군을 격파하면서 유명인사가 된다.
정암진 전투
왜군이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왜군은 정암진 나루에 도착했다. 곽재우는 이때 정암진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날랜 병사 몇명을 선발,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한 다음 화살공격으로 전멸시켰다. 왜군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통과할 수 있는 지점 근처에 나무 표시 등 표식을 만들었다.
곽재우는 왜군 정찰대의 행동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고, 표식들을 늪지로 향하게 바꾸어 놓았다. 다음날 왜군이 잘못 표시된 표지목과 표식들을 따라가다 늪지에 빠지자 곽재우는 언덕에 숨어있던 병사들에게 공격령을 내려, 기습 공격을 가해 왜군을 몰살시켰다. 여기에서 2만 명의 일본군이 정암진 늪에 빠져 사망하였다.
관군의 패배와 그의 연전연승은 자주 비교되었고, 관군들 중에는 그를 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이 사정을 알고는 김성일의 특별 건의로 석방된 후,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음력 7월에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에 임명되었다가 비변사의 추천으로 5품직에 제수되어 바로 형조 정랑이 되었다.
이몽학의 난과 사퇴
1592년 음력 10월에는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10월말에는 무관 품계에서 문관 품계인 통정대부(정3품)로 변경, 임명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고, 음력 12월에는 다시 성주목사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1593년말 조정의 명을 전달받고 삼가(三嘉), 의령(宜寧), 단성(丹城), 고령(高靈) 및 낙동강 일대를 방어하고 무너지거나 파괴된 성곽을 보수, 수리하였다. 성주목사로 재직 중 삼가의 악견산성 등 성지 수축에 열중하다가 그해 12월말 진주목사에 임명, 전근되었다. 곧 경상우도조방장을 겸임되었고, 1595년 초 진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일시 휴전으로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로 돌아와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루머가 확산되면서 모함을 받고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당하기도 했으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곽재우와 절친한 사이인 의병장 김덕령은 끝내 이몽학의 난과 관련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곽재우는 스스로 사퇴하였는데, 이 일로 곽재우는 사실상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전황 중에도 그는 꾸준히 서신을 작성, 조정에 장계로 보내 전황을 보고하기도 했다.
정유재란과 종전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 방어사로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계모 김해허씨가 사망하였으므로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3년상을 입었다. 상중에 전란은 종결되었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그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경상좌병사로 부임 직후 왜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그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군사들을 고향에 되돌려 보내고 생업과 농사일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왕이 거절하자 그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어부 생활을 하였다.
한편 그는 전쟁을 하며 기묘한 전술로 승리했는데, 적군 군선의 예상 경로를 예측해 해로에 통나무를 띄워 적의 물자 보급을 막았다. 또한, 왜군이 늪지대를 건너기 위해 안전한 곳마다 깃발을 꽂아 군사들이 그 곳으로 지나게 하려는 계획을 알아채고 깃발을 늪지대에 꽂아 늪에 빠지게 한 뒤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다른 병사들에게도 붉은 옷을 입혀 교란 전술을 썼다. 또 보물이 들어있을 것 같은 황금 상자에 벌을 담은 후 길가에다 버려 놓았는데, 이를 보물 상자로 착각한 왜군이 열었다가 벌에 쏘여 죽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이정표를 바꿔 적을 혼란에 빠트리는 등의 기묘한 전술로 나라를 지켜냈다.
종전 이후
종전 직후와 은거
1599년(선조 30년) 다시 경상우도 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사퇴하였다. 동년 9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1개월간 지체하여 10월에 부임하였다. 1600년(선조 33년) 2월 일본과 화친을 할 것을 건의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국당하였다.
곤수는 이미 중임을 받아 병권을 전제(專制)하고 있으니 임의로 버리고 가서는 안 됩니다. 국법이 매우 엄할 뿐더러 신하의 의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결단코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상 좌수사 곽재우는 적을 토벌해야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화친을 통하기를 주장하면서 심지어 정백(鄭伯)이 어깨를 드러내고 양을 몰았다는 일까지 인용, 이를 문서에 드러내어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그리고는 소장을 올리자마자 진(鎭)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교만하고 패려한 죄를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추국하여 율(律)에 의거 죄를 정하소서.
동년 봄, 그는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 등으로부터 함부로 사퇴하였다는 이유와 전해 부임을 지체한 점 등을 구실로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602년 유배된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해 고향이 돌아와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 남쪽 창녕 창암진 솥바위나루 낙동강변에 정자를 짓고 망우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다시 거듭 출사 요청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년) 초 찰리사가 되었다.
관료 생활
찰리사로 재직 중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수축과 개보수를 건의하였다. 이어 그해 5월 선산 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직에서 사직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4년 8월 행(行)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가 10월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되고, 11월 승자(陞者)하여 가선대부 용양위상호군에 제수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 우윤을 지냈다. 1605년 2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뒤 동년 3월 한성부 우윤이 되고, 5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607년(선조 40년) 3월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말 사헌부로부터 음식을 끊고 도술과 수련에 전념한다는 점을 이유로 여러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다시 행용양위부호군으로 돌아왔으며, 1609년(광해군 1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광해군은 그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선조와 광해군, 북인 정권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그는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생애 후반
그 뒤에도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또한 동문수학하였던 정인홍 등과도 생각이 달랐으므로 그들은 이를 꺼렸다. 광해군 즉위 초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여러번 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관직에 출사할 것을 간청하여 결국 그해 한성으로 상경, 오위도총부의 부총관, 행호분위 부호군, 호분위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지냈다.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하여 부임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임기가 만료된 1612년(광해군 4년)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자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사형 건의가 나타나자 그는 인륜이 무너졌다고 분개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4월 다시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대북 계열에 의해 영창대군에 대한 탄핵이 있자, 1613년 6월 사직 상소와 함께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거나 사퇴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창암강사에서 은거 중 장례원 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최후
그 후로도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워지고,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죄없는 김덕령이 죽은 일 등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당시,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의 고위 무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다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갑자기 회오리가 그의 집을 덮쳤다는 설, 신선이 되었다는 설 등이 나돌았다.
글씨도 잘 썼는데 필체가 웅건하고 굵었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4월 28일 광해군의 명으로 장례비와 장례물품이 조정에서 지급되었고 바로 예관을 파견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예조좌랑 유약(柳瀹)을 파견하여 장례식을 주관하게 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6세였다.
사후
1617년(광해군 9년) 사람들은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그를 추모히기 위하여 의령 가태동에 충현사라는 사당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 그의 사당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숙종은 그의 공적을 높이 사, 1709년(숙종 35년) 증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하고, 다시 충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곽재우전이라는 군담 소설이 있으나 작자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유품들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저서
《망우당집》(忘憂堂集) : 보물 제671호
《곽재우전》(郭再祐傳) : 곽재우의 일생을 소설화한 군담소설(軍談小說).
가족 관계
증조부 : 곽위(郭瑋), 곽승화(郭承華)의 아들
할아버지 : 곽지번(郭之藩)
할머니 : 허씨, 허린의 딸
아버지 : 곽월(郭越, 1518년 ~ 1586년 8월 6일)
어머니 : 진주 강씨
부인 : 상주 김씨(尙州金氏), 상주인 김행(金行)의 딸, 조식의 외손녀
아들 : 곽영(郭濚)
아들 : 곽호(郭活)
딸 : 현풍 곽씨, 성이도(成爾)에게 출가
형 : 곽재희(郭再禧)
형 : 곽재록(郭再錄)
여동생 : 현풍 곽씨
숙부 : 곽규(郭赳, 학자, 1521년 - 1584년)
평가
선조의 비위를 거슬려서 과거 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낙방되자 그는 관직 진출을 단념한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 4월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당하고 백성들과 동료 양반들은 피난했음에도 스스로 의병을 조직한 점과 관군을 섬멸하고 올라온 왜군을 여러번 신출귀몰하여 물리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관련 문화재
보물 제671호 - 곽재우 유물 일괄(郭再祐 遺物 一括) : 경남 의령군 의령군
보물 제671-1호 - 곽재우 유물 일괄-장검(郭再祐 遺物 一括-長劍) : 경남 의령군 충익사관리사무소
보물 제671-2호 - 곽재우 유물 일괄-마구(郭再祐 遺物 一括-馬具) : 경남 의령군 충익사관리사무소
보물 제671-3호 - 곽재우 유물 일괄-포도연(郭再祐 遺物 一括-葡萄硯) : 경남 의령군 충익사관리사무소
보물 제671-4호 - 곽재우 유물 일괄-사자철인(郭再祐 遺物 一括-獅子鐵印) : 경남 의령군 충익사관리사무소
보물 제671-5호 - 곽재우 유물 일괄-화초문백지팔각대접(郭再祐 遺物 一括- 花草紋白磁八角大?) : 경남 의령군 충익사관리사무소
보물 제671-6호 - 곽재우 유물일괄 - 갓끈(郭再祐 遺物 一括 - 갓끈) : 경남 의령군 충익사관리사무소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忠翼公忘憂郭再佑遺墟碑) : 경남 창녕군 창녕군
기타
1618년 곽재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건립되고 훗날 그 규모가 확장되었으며 광해군이 사액을 내려 예연서원(禮淵書院)이 되었으며, 시호는 한참 후대에 추증되었는데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려져 충익공(忠翼公)이 되었다.
정인홍(鄭仁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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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鄭仁弘) | |
출생 | 1535년 9월 26일 선 경상도 합천 |
사망 | 1623년 4월 3일 선 한성부 |
사인 | 사형 (참수형) |
거주지 | 조선 경상남도 합천 → 한성부 → 함경북도 영변군 → 한성부 → 경상남도 합천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덕원, 호는 내암 |
학력 |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 |
직업 | 학자, 문신, 의병장, 정치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남원 양씨 |
자녀 | 아들 정연 |
부모 | 아버지 정륜, 어머니 진주 강씨 |
친척 | 할아버지 정언우, 동생 2명, 숙부 정건, 장인 양희 |
정인홍(鄭仁弘, 1535년 9월 26일 ~ 1623년 4월 3일)은 조선중기,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과 남명 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으며, 조식의 수제자이자 남명 학파의 지도자였다. 당색으로는 동인이었다가, 정철의 처벌을 놓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는 강경파로 북인이었다. 자(字)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1573년(선조 6년)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아 황간 현감으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제용감정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며 왜병을 격퇴하여 영남 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조식의 수제자로서 최영경, 오건, 김우옹, 곽재우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왜란이 끝난 후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며 북인이 분열한 후에는 이산해와 함께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전란 종결 후 대사헌, 중추부동지사, 공조 참판 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군되었다. 북인이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뉠 때는 적극 간여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인 이이첨 등이 대북이었으므로 광해군 정권의 원로로 예우받았다.
그러나 이언적, 이황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되는 등의 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1623년 능양군 등은 80세 이상의 재상은 처형하지 않는 관례를 어기고 그를 참형에 처했다. 그 뒤 서인과 노론으로부터 광해군 실정의 책임자의 한사람으로 비판을 받아오다가 1908년 순종때 가서야 복권되었다. 임훈, 조식의 문인이다.
생애
출생과 가계 배경
정인홍은 1535년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서릉부원군(瑞陵府院君)에 추봉된 정륜(鄭倫)과 진주 강씨의 3남 중 첫째 아들로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출생했다. 군수와 정자를 지낸 군수 정희(鄭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언우(彦佑)이다. 생년은 다소 불확실하여 일설에는 1536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이후 동생이 두 명이 더 태어났다.
아버지 정륜은 후일 그의 현달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의정부 영의정 서릉부원군에 추증되었다.
한 조정의 수상까지 지냈지만 정인홍은 출생 연도조차 확실하지 않다. 이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된 것의 영향 때문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강한 기 때문에 정인홍이 태어나던 해 가야산의 한 봉우리였던 성왕산의 풀과 나무가 마르기 시작하더니 3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인홍은 고조부 성검(成儉)의 대에 합천에 옮겨와 터를 잡고 살았다. 성검은 외아들 희(僖)를 두었는데, 하나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학문을 닦도록 독려했고, 증조부 희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고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1496년(연산군 2)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리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조부 정언우(鄭彦佑)와 아버지 정건은 오직 학문에만 힘썼을 뿐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의 집안은 그저 평범한 양반 가문이었다.
유년기
그는 일찍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했다 한다. 그가 3세 되던 무렵 아버지 정륜의 사랑방에 그가 몰래 들어가 아버지 정륜이 읽던 성리서를 보다가 그만 몇 장을 실수로 찢어버렸다. 아버지 정륜이 이를 알고는 그를 불러 화를 내면서 야단을 치자, 그는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만 책을 갖고 놀다가 찢어 버렸습니다. 저에게 지필묵을 주시면 지금이라도 당장 찢어져 없어진 면의 글 부분을 다시 적어서 같이 붙여 채워 놓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버지 정륜이 지필묵을 주자 정인홍은 찢어져 없어진 부분의 글귀를 기억해 내면서 다시 그 내용을 그대로 썼다고 한다. 이것을 본 아버지 정륜은 아들 정인홍이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일찍부터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한번 가르쳐준 글이나 문장은 두번 가르치지 않아도 아버지를 쳐다보며 한번에 줄줄 외웠다 한다.
1540년경의 어느 날에는 그가 집밖에서 어떤 어린 참새를 잡아 가지고 놀다가 부주의로 아기 참새를 죽이고 말았다. 죽은 아기 참새가 불쌍했던 정인홍은 통곡하다가 집 근처 강가의 버드나무 아래에 참새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집에 와서 지필묵을 가져다가 참새를 추도하는 제문 (祭鳥文, 弔鄒文)을 지어 조곡하였다.
조사인곡 (鳥死人哭) / 새가 죽어 사람이 곡하는 것은
어의불가 (於義不可) / 의에는 어긋나는 일인 줄은 아노라
여유아이사 (汝由我而死) / 그러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시이곡지 (是以哭之) / 나는 너를 위해 슬피 우노라
지나던 어느 선비가 그에게 이유를 묻자 어린 정인홍은 참새의 무덤을 만든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선비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참새의 무덤을 만들어 주면서 울면서 곡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지은 제문을 보여주었다. 선비는 어린이가 쓴 제문인데도 실력이 있음을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수학과 청년기
청소년기
정인홍은 청소년기 무렵 거창 안음에 사는 유학자 갈천 임훈(葛川 林薰)의 문하에서 잠시 수학하였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그가 임훈의 문하를 나온 배경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 한번은 섣달 그믐날 저녁에 임훈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밤을 새우는데 밤중이 되자 모두 잠이 들었으나 정인홍만은 바르게 앉은 채 밤을 새웠다. 그의 살갗에는 많은 손톱자국이 나 있고 핏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졸음을 쫓았던 것이다.
한번은 임훈이 집안의 가장 예쁜 계집종을 뽑아 정인홍이 글 읽는 방으로 보내 유혹했지만 그는 밤새워 태연히 긁만 읽고 계집종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일을 본 임훈은 이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문하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초인적인 인내력과 집념을 지녀 임훈이 문하에 두기조차 꺼렸던 정인홍을 거둔 이가 바로 합천의 남명 조식이었다.
남명의 문하에서 수학
그 뒤 자는 덕원(德遠)으로 후에 호를 내암(來庵)이라 하였다. 소년기의 정인홍은 비범하였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그가 소년기에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인홍이 11세 때 산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도의 감사가 당도하여, 밤에 글 외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더니 바로 정인홍이었다. 도사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데려다가 묻기를 "네 시를 잘 짓느냐?"고 묻자, 정인홍은 겸손해하면서 잘 짓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감사가 탑 근처 왜송(倭松)을 글제로 내고 운자를 불러주며 짓게 하였더니, 정인홍은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그는 당시 감사 또는 판결사이던 양희가 왜송을 주제로 내고 시를 지으라 하니 바로 시를 지었다 한다.
왜송 (矮松)
短短孤松在塔西 (단단고송재탑서) 짧고 짧은 외로운 솔이 탑 서쪽에 서 있으니
塔高松下不相齊 (탑고송하불상제) 탑은 높고 솔은 낮아 가지런하지 않네
莫言今日孤松短 (막언금일고송단) 오늘날 외로운 솔이 짧다고 말을 마소
松長他時塔反低 (송장타시탑반저) 솔이 자란 다음 날에 탑이 도리어 짧으리
감사가 감탄해 마지않으며 "후일에 반드시 현달하리라. 그러나 뜻이 참람하니 부디 경계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정인홍은 일찍부터 아이답지 않은 강한 자아의식과 승부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소나무는 만 11살인 정인홍 자신을, 탑은 당시 감사 또는 판결사(判決使)를 지낸 양희(梁喜)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였다. 훗날 정인홍은 양희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 뒤 정인홍은 남명 조식(曺植)을 찾아 문하생이 되었으며 이후 조식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효원·곽재우(郭再祐)·김효원·이산해·김우옹(金宇顒)·정구·이발·하진보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이들 중 하진보는 후일 그의 사돈이 되기도 했다. 친분이 있던 이산해는 그가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해도 후대에 제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스승 조식은 그에게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를 지어 주며 학문에 더욱 정진하도록 당부하였다. 남명은 내암의 자질이 비범함을 알아, 만년에 차고 다니던 칼을 주면서 경계를 삼도록 하였는데 그는 늘 꿇어앉아 칼을 턱밑에 대고 정신 가다듬기를 계속하였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를 포기했다.
관료 생활 초반
학행으로 이름을 날려, 소년시절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김우옹의 천거로 선조 초 관직에 나갔다. 1572년(선조 5년) 스승 조식은 임종에 이르러 그에게 자신의 칼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죽기 전 그에게 학자로서의 의리와 결단의 징표로 칼을 수여한 것이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랐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중앙으로 복귀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가 영천군수로 나갔다. 그 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에 가담, 서인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1580년 12월 정4품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정인홍은 법령을 지키고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이서들의 부정과 수령들의 비리를 적발하는 등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탄핵을 가했다. 그로 인해 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정신을 차렸으며, 시장의 장사치들이 감히 금하는 물건을 밖에서 내놓지 못했다.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동인과 북인의 중진
그의 강직함은 지방까지 널리 소문이 퍼져 시골 사람이 한성에 올라와 그의 얼굴을 보려 했다. 한 시골 사람은 "정 장령의 얼굴 생김새가 어떠한가. 그 위엄이 멀리 지방에까지 퍼져 병사와 수령 중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참으로 대장부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1580년(선조 13년) 부음정(孚飮亭)을 건립하였고,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수많은 문하생들을 길러냈다. 그해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어 아전, 서리 등 향리의 가렴주구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1년 다시 사헌부장령이 됐다. 이때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과의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이무렵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그는 이황, 조식의 제자들이 결성한 동인의 당원이 된다.
한편 그는 정경세가 모친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육식을 했고, 사명을 띠고 관동에 나아가서는 버젓이 기생을 끼고 놀았지만 워낙에 거물이라 아무도 탄핵하지 못했다. 이때 정인홍이 탄핵을 하고 나서자 사헌부의 다른 관원들이 정인홍을 비판하는 등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이는 그런 정인홍을 보고 돌격장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라고 은근히 비꼬기도 했다.
1581년(선조 14년) 서인 정철·윤두수를 탄핵하다 벼슬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82년에 어머니 진양강씨(晉陽姜氏) 상을 당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 복직, 1584년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서서 서인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1586년 익산군수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를 올려 왕에게 학문에 힘 쓸 것과 정치적 폐단을 혁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정철을 죽일 것을 주장하는 이산해 등 강경파의 주장에 동조하여 북인에 가담, 이후 북인의 영수(領首)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정철, 성혼 등 서인이 득세하고 이발 등 동인이 몰락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발의 80대 노모와 10세 미만의 자녀, 그의 동문인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등 2천 여 명의 동인 당원들이 억울하게 죽임당하고, 이때 정인홍도 삭탈관직되었다. 이 일로 그는 서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1589년 발생한 정여립의 옥사 이후 동인 당내에서는 정철을 사형시키자는 강경파와 사형은 과하다는 온건파로 나뉘었다. 이때 그는 유성룡, 우성전 등의 온건파에 대항하여 정철이 옥사를 날조했음을 주장하고, 이산해와 함께 정철의 사형을 원하는 강경파의 입장에 섰다. 이후 북인이 소북·대북으로 갈라지자 이산해·이이첨과 함께 대북을 이끌었으며, 1601년 인목대비에게서 적통인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적통을 주장하여 영창 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해 그는 광해군의 즉위를 주장하였다.
동인의 남북 분당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8]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8] 이발은 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
의병 창의
그 뒤 제용감정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문수학한 곽재우가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5월 그는 합천에서 김면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성주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쳤다. 성주에서 승리를 거둔 뒤 영남의병장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1592년 6월에는 고령군 무계 전투에서 매복 공격으로 왜적을 격파한다. 8월과 9월에 성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하였으나 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10월 진주성 1차전투때 적에게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러 오기도 하였다. 6월에 진주목사, 11월에는 영남 의병도대장이 되었다. 이어 그는 전란 중의 전공으로 진주목사, 제용감정(濟用監正) 성주가목(星州假牧)등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11월 진주목사와 지방관들에 이어 영남 의병대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그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남원의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정인홍은 자신의 전공(戰功)을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알고 있는 공로는 남보다 못하지만 사실은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 한다.
1593년(선조 26) 성주를 수복한 후, 국가재건계획이 담긴「사의장봉사」라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영남 의병도대장을 사직하고 의병장으로 활동한다. 1593년 격문을 돌려 영남 지역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고령·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무계(茂溪)전투, 초계(草溪)전투, 안언역(安彦驛)전투, 성주성(星州城)전투, 진주성 지원전투 등에서 승전을 거두었다.
그는 항일 의병활동을 통하여 명성과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하였다. 1593년 9월에는 당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의 청으로 영남의병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장문의 상소를 올려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혼란을 겪어야 했던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전쟁을 극복하고 전후 국가를 재건하는 방법을 건의하였다.
임진왜란 중
1594년 그는 상주목사, 영해부사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형조 참의, 부승지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1595년 조선 조정에서 일본측과 화의(和議)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등 국론이 분열되자 정인홍은 고령 성산 무계지역을 지나다가 이를 듣고, 주화론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지은 '과무계(過茂溪)'라는 시를 지어 이들을 질타하였다.
匹馬經過舊戰場 필마로 옛 싸움터 지나노라니
江流遺恨與俱長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於今誰唱和戎說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將士當年枉死亡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1597년(선조 30) 7월 일본군이 재침하자 다시 창의하였고, 1598년 정유재란이 종결되자 합천으로 낙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丁應泰)가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보고하여 큰 문제가 되었다. 조선 정부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라며 항변하는 한편 명나라에 변무사(辨誣使)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남인의 영수 유성룡은 개인적인 사정을 들어 변무사로 가기를 기피했다. 다른 신하들도 명나라로 가기를 주저했다.
고향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정인홍은 자신이 나서 명나라 인사에게 편지를 보내 선조를 옹호했다. 이 일로 정인홍은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 중 아들 정연(鄭沇)을 함께 의병에 참전시켰다가 잃었다.
1599년 12월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올라올수 없다고 사양하여 1600년 2월 체차되었다.
정치 활동
종전 직후
1602년 1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602년 사헌부 대사헌에 승진하였다. 정인홍을 비방하는 소리가 있자 선조는 "네가 감히 정인홍을 배척하여 모함할 계획이나, 인홍의 사람됨은 금수나 초목도 다 그 이름을 아는 바다."라고 비호할 정도로 정인홍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4월말 정경세를 탄핵한 일로 사헌부, 사간원의 다른 언관들과 마찰을 빚다 대사헌직에서 해임되고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이 되었으나 다시 병을 핑계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해에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을 지냈다.
1602년 7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상소를 올려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나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해 11월 대사헌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남인인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며, 홍여순·남이공 등 북인파와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 정권의 원로
1602년 대사헌에 임명되으나 기축옥사를 일으켰던 서인과 이를 방관하거나 서인 공격에 소극적이던 남인을 배제하고자 이들과 치열히 다투다가 수개월 후 낙향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산림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02년에는 스승인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 간행을 주도하였다. 1604년 여름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도하였으며,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그는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1604년 남명학파의 주도로 남명 조식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때 그가 쓴 발문에서 퇴계 이황을 비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팔도의 향교에 통문을 돌려 정인홍을 규탄하였다. 이 일로 인해 정인홍은 퇴계 제자들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게 되었다.
1606년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1607년 소북파 이효원의 탄핵으로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607년(선조 40) 그는 남계, 덕천, 향천서원 원장을 지냈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에 등용되어 대북 정권을 수립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합천으로 낙향하였다.
광해군 즉위 초반
1608년 3월 1일 복권되고, 그날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3월 29일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4월 세자시강원 보양관이 되었다가 5월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나, 6월초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의 문하생인 이이첨, 유자신 등이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광해군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사직상소를 올렸으며 청렴한 생활을 하여 산림정승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으로서 활약한 경력과 남명의 학통을 이어받은 수장으로써 영남사림의 강력한 영향력과 지지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는 이런 배경으로 정계 실력자로 등장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岩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3개 서원의 사액을 받아냈다.
1608년 6월 말 다시 대사헌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7월 7일 우찬성, 우찬성 겸 보양관에 제수되었으나 임명된지 17일만에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다. 1609년 3월에 의정부 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자 올라오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외곽에서 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 대북의 정권 주도를 지원하고 대북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황, 이언적 문묘종사 비판
광해군 때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 종사론이 나타났을 때 스승 조식은 제외되자 이황,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9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있었다. 종래 문묘에 모셔 오던 선현들 외에 새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모시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때 정인홍은 왕이 그의 문병을 위해 내의와 예관을 보내 상경할 것을 당부하자, 사직상소를 올렸다.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그는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도리어 그는 이황이 스승 조식을 비난했던 것을 언급하며 스승 조식을 변호하였다.
신(정인홍)이 젊어서 조식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읍니다. 신이 일찍이 故 찬성 이황이 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중도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 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중략) 조식과 성운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읍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중략)...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읍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읍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中道)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황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 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출임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노장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즉 퇴계가 남명과 성운을 평한 말을 빌어, 이황의 출처가 분명치 못함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묘종사에 반대한 것에 분개한 이황의 제자들, 이언적의 제자들이 그를 공격하였다. 이 일로 인해 조정과 사림에서는 큰 논쟁이 발생했다. 이황의 문도들이 중심이 된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捲堂, 현재의 동맹휴학과 같음)에 들어갔으며 그는 성균관의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청금록은 성균관에 비치된 유생들의 명부(名簿)이다.
생애 후반
인목대비 폐모론
1611년(광해군 3년) 그는 우찬성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12년 의정부 좌찬성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이이첨, 허균 등과 함께 계축옥사를 일으켜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탄핵하는데 지지하였다. 1613년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김제남을 비판하고, 영창대군을 지원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주장했으나 그는 전은론(全恩論)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의 축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4년 영창대군의 사형 여론이 나오자 이에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정운공신 1등(定勳功臣1等)에 책록되었고, 1615년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받았다.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참여하였으며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된 뒤 의정부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인륜에 어긋난다 하여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으나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판하는 소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당하였다.
그는 영의정을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고 광해군의 간곡한 부탁 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외부와 연락을 끊고 합천에 내려가 은둔하였다. 1618년 광해군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 '국사는 더욱 어렵고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어 경을 영상에 삼으니 급히 올라와 어려운 시국을 구하고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며 영의정 취임을 재촉하는 유지를 보낸다. 광해군의 거듭된 부탁으로 상경하였으나 1619년 다시 영의정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그에게 여러 벼슬을 내려 초빙하였지만 그는 대부분 사양하고 낙향, 산림에 은둔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을 양성하였다. 영창대군의 사형에 반대하고 인목대비 폐모(廢母) 논의에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며 폐모론에 반대, 폐모론이 단행되자 그는 광해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합천 가야 향리로 낙향, 소위 인조반정으로 체포될 때까지 도성에 올라가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의 문하에서는 정온, 조응인 등의 문하생이 배출되었지만 후일 그의 문도들은 인조 반정 이후 대부분 출사하지 못하거나, 출사를 포기하게 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 직후 문인 조정립은 중도부처, 조성생은 파직, 우참찬까지 오른 제자 윤선은 파직, 고령의 박종윤은 중도부처, 의령의 유활도 파직, 합천 가야의 문인 정결, 율곡의 대사간 문려, 고령의 승지 박종주 등도 이때 함께 처형되는 등 많은 정인홍 문인(門人)들이 화를 당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그가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문도들 외에도 남명학파 역시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인조반정과 체포, 사형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바로 체포된 뒤 3월 28일 한성부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국문당했다. 인조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그에게
첫째, 사림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품관(品官)이었다는 것,
둘째,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면서 무단을 위세를 부렸다는 것,
셋째, 괴귀한 학문을 퍼뜨렸다는 것,
넷째, 이언적. 이황을 배척하고 그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는 것,
다섯째, 폐비를 반대한 동료요 후배인 정온(鄭蘊), 이대기(李大期)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그를 체포, 국문했다.
국문에서 정인홍은 자신은 폐모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강변을 하였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 뒤 서인 정권은 정승을 지낸 인물과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참수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어기고 그를 사형선고하였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서도 담담하였다.
내 열 다섯의 어려서부터 스승 남명에게서 학문을 배워 군신부자(君臣父子)의 대의가 무엇인지 알았다. 아! 슬프다. 구원(丘園)에 물러나 있은 지 지금 20여 년! 어지러운 세상일을 듣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90세의 모진 목숨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마침내 폐모(廢母)의 죄명을 얻으니, 이제 한번 죽음에 돌아봐 서운한 것은 없으나. 장차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선조 임금)을 뵙겠는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1623년 4월 3일 그는 명나라를 배신한 죄와 폐모살제의 죄명으로 역적의 죄명을 쓰고 참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89세였다. 참형당하면서 가산은 모두 몰수당하였고, 이후 대북파는 정계에서 몰락하였다. 저서로 《내암집》이 있다.
정인홍이 처형되자 정인홍의 문도들은 비분강개하여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이로 인해 합천 등 여러 고을에는 벼슬하는 사람이 끊어졌다고 한다. 합천 사람들은 정인홍의 초상화를 안치해 놓고 제사를 지내는 등 합천에서 정인홍은 여전히 위엄 있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사후
경상남도 합천군 군북면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형되었으며 가산이 적몰(籍沒)당하였으나 그의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조선 영조때에 가서 그의 증손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처형당했다. 1728년 3월 합천 거창 청주 등지에서 발발한 무신사태(무신란) 후, 1729년(영조 5) 4월 9일 소론인 우의정 이태좌가, "정인홍의 증손(曾孫) 중 겹눈동자(重瞳)인 사람이 있어 영남사람들이 마구 몰려드는 등 민심이 현혹되고 있다"고 하자 영조는 사형을 명령한다.
정인홍은 의를 숭상하는 청렴한 인물에서 음험하고 포악한 인물로 격하되었다. 이후 조선 왕조 내내 정인홍은 대역 죄인 취급을 받았다.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1864년 늦가을에 합천군 군북면에 있던 정인홍의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가야산 해인사입구 각사 탑동(各寺 塔洞)으로 이장하기 위해 후손들이 그의 관의 뚜껑을 열었을 때, 정인홍의 시신은 입고 있던 수의도 썩지 않고, 머리칼, 피부도 살아생전 그대로이며 어깨와 목은 피 자국이 은은하게 그대로였다 한다. 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골(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627)에 개장되었다.
그의 문하생들은 고종 즉위 전까지 출사길이 막혔으며, 제자이자 그가 인목대비 폐모론을 지지한 것에 반발한 동계 정온의 학맥 일부만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고종 때 가서야 그의 후손들과 북인 계열 유생들이 복권 상소를 올렸다. 1863년(고종 원년) 12월 고종 즉위 직후 흥선대원군이 사색타파(四色打破)를 선언하자 정인홍의 후손 유학 정기덕을 중심으로 첫 신원의 요구가 있었으나 노론계열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1864년 다시 정인홍의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노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08년(대한제국 융희 2년)에 가서야 그해 4월 30일에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좌의정의 직위가 내려졌다. 조선 멸망 후 1911년에 문집이 재간행되었다.
현대
순종 때 복권되었으나 조선이 멸망한 뒤에 이르러 복권, 평가가 나타났다. 1911년 정인홍 문집이 전 15권 7책 실기 1권으로 발간되었다.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1931년 여순 감옥에서 홍명희에게 쓴 편지를 통해 그를 높이 평가했음을 밝혔다.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자신과 함께 매몰될지 모르겠다"며 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의 삼걸(三傑)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으며, 특히 정인홍의 개혁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1959년 대한민국 문교부장관 최규남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1983년에 그의 문집 내암집의 한글 영인본이 상하 2권으로 발간되었으며, 1997년 12월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정인홍 관련 고문서 및 서적, 교지 등 131점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0, 331, 332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정언우(鄭彦佑)
아버지 : 정륜(鄭倫)
어머니 : 진주 강씨(? - 1582년)
동생 : 이름 미상
동생 : 정인영(鄭仁榮, 1540년 - 1602년)
부인 : 남원 양씨, 양희(梁喜)의 딸
아들 : 정연(鄭沇, 1571년 - 1592년)
자부 : 진주하씨, 하진보(河晋寶)의 딸
손자 : 정능(鄭 木+菱)
장인 : 양희(梁喜, 1515년 - 1580년)
사돈 : 하진보(河晋寶, 1530년 - 1585년)
사돈 : 전의이씨, 이공도(李公度)의 딸, 하진보의 본처
사돈 : 정씨, 정수익(鄭壽益)의 딸, 며느리 진주하씨의 친정어머니
관련 작품
드라마
《서궁》(KBS2, 1995년~1995년, 배우:서상익)
《왕의 여자》(SBS, 2003년~2004년, 배우:최동준)
성격
정인홍은 사람을 대하여 논의를 할 때 칼로 끊은 듯이 하고, 남의 의롭지 못한 행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마치 노예처럼 비루하게 여기고 원수처럼 미워했다 비록 평소 알고 지내던 명유(名儒), 석사(碩士)로 불리는 자라도 조금만 아부하고 구차스레 화합하려는 태도가 있으면 절대로 함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꺼렸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저서 및 작품
저서
그의 문집과 작품 중 대부분 인조반정 이후 반대파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사라졌다. 《내암집》만이 현재 전한다.
《내암집》
《정맥고풍변》
작품
1546년(명종 1년) 해인사에서 독서할 때 지은「영송(詠松)」이라는 한시(漢詩) 등 몇수가 전한다.
영송
과무계
하진보 묘갈명
사상
경세관
그는 현실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외교·국방책을 논했으며, 보민제산(保民制産)·외우민암(畏于民암) 등 실학적인 보민(保民)의 위민사상(爲民思想)에 투철하였다. 한편 절용(節用)과 형평(衡平)을 말하면서 실제적이고 유용한 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부(富)가 고루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격
그는 평생 스승에 대한 의리, 국왕에 대한 의리를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삶을 파란만장하게 만든 것도 바로 바로 그 의리였다. 스승 남명 조식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다 남인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으며, 광해군에 대한 의리를 실천하다가 광해군 대 실정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지나친 엄격성으로 많은 적을 만들었지만, 그의 삶은 지식인의 자세와 의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논란
당파적 배경
조식의 사후에 조선의 사림정치는 곧 당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고, 남명학파는 최초의 동, 서 분당 그리고 뒤이은 남, 북 분당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 시기에 있어서 남명학파를 대표한 인물이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조식의 가르침에 유의하여 젊은 시기의 한때를 제외하고서는 한평생 벼슬길에 나아간 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고향인 합천에 머물러 강학 활동에 종사하였지만, 선조 말기 이래 광해군 시기에 걸쳐 국왕의 각별한 신임으로 말미암아 중앙 정계에서 중요한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선조 말기 이래 정인홍을 비롯한 남명학파가 정계에서 크게 대두한 배경에는 임진왜란 시기에 조식의 문인들 대부분이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킴으로써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는 데 기여한 점이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정인홍과 그 문인 이이첨을 영수로 삼은 대북 세력은 광해군 중기 이후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는데, 그 때문에 인조반정으로 말미암아 대북 정권이 전복되자 남명학파는 철저히 소외되어 더 이상 독자적 학파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정치 보복
그가 사형당하고, 이이첨이 그의 문하생이었으므로 그의 다른 문하생들 다수가 화를 입었다. 합천 묘산의 교리 조정립은 중도부처, 정언 조성생은 파직, 가회의 우참찬 윤선 파직, 고령의 이조좌랑 박종윤은 중도부처, 의령의 이조정랑 유활 파직, 합천 가야의 지평 정결, 율곡의 대사간 문려, 고령의 승지 박종주 등은 처형되는 등 많은 정인홍 문인(門人)들이 화를 당하고 출사길이 막혔다.
1629년(인조7년)에는 합천군이 정인홍의 고향이라하여 합천현으로 격하됨. 15년 후인 1644년(인조22)에야 합천군으로 복귀된다. 1631년(인조9) 2월 합천의 정한(鄭澣), 고령 도진의 박희집(朴禧集), 창녕 성지도(成至道) 등이 북인(대북) 잔당을 규합하여 광해군 복위를 계획하다 정한, 박희집 등 40여명이 죽고, 6명이 유배당하였다.
평가
서인이었지만 그와 교류가 있었던 율곡 이이는 그의 좌충우돌하고 강의한 성품을 돌격장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의를 숭상하는 청렴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자원하여 의병을 조직해 왜적과 맞서 싸웠지만, 인조반정으로 처형당했고 이이첨, 유희분 등이 그의 문하생이었고 정인홍 자신도 1623년 처형당하여 그는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복권 여론이 나온 것은 사후 240년이 지난 1863년이었다.
기타
동인의 강경파였지만 사적으로는 이이 등과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정철과는 끝까지 적대적이었다.
1629년(인조 7) 그의 고향 합천군은 정인홍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합천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5년 후인 1644년(인조 22년) 다시 합천군으로 회복되었다.
역사가 겸 작가 이병주(李炳注)는 한때 정인홍을 역적이라 비판하며 그의 무덤에서 죄를 논했다가 이를 후회했다고 한다. 후일 이병주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멋모르고 내암의 무덤 위에 올라가 내암의 죄업을 매도했는데, 金忠烈 교수의 글을 보니 아이구 그게 아니더라. 내가 잘못됐다.'라고 말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