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 / 고임순
내가 살아 있음을 가장 실감할 때는 아침잠에서 깨어나 커튼을 걷고 창을 여는 순간이다. 나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눈을 크게 뜨고 솟구치는 생명력으로 오늘 하루를 연다.
그리고 하늘을 날고 귀소하는 새처럼 열린 창으로 나가 하루를 뛰다가 밤이 되면 오렌지 불빛이 아른거리는 창가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면 진정한 삶의 기쁨이 창문을 닫고 어둠 속에 포근히 잠들 때 나를 휘감는다.
열리는 창 그리고 닫히는 창, 그 창 속에는 사람마다의 생활이 있고 제각기 살아가는 기쁨과 슬픔이 맴돌고 있다. 아무리 작은 창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삶을 엮고 세월을 갈면서 변모해 간다.
창밖에는 항상 바람이 오가고 창 안에는 따뜻한 인정이 머문다. 창은 밝고 솔직하여 밖의 모습도 안의 움직임도 거짓 없이 드러내준다. 그래서 열린 창 속에는 활기차고 단란한 가정이 있고 닫힌 창은 병든 폐가를 느끼게 한다.
창은 바로 우리의 두 눈 같은 것이 아닐까.
지난번 일본 북해도 여행에서 본 아이누족의 흙집은 창구멍이 두 개가 있었다. 우리의 초가삼간처럼 아무렇게나 종이를 바른 창에서 포근한 인간미를 느꼈다. 순박한 시골 노인의 선량한 눈동자에서처럼.
대형 주택의 큰 창보다는 이렇게 원시적인 창이 사람의 눈임을 더욱 연상케 했다. 나는 그때 그 창 속에서 눈 덮인 겨울을 이겨냈던 원주민의 의지를 발견했다. 통나무를 깎아 카누를 만들고 창살을 만들며 그들은 그 창으로 곰의 움직임을 쫓고 강이 녹는 봄을 기다렸으리라. 그 사람들의 숨결이 아직도 그 창가에 머물고 있는 것만 같다.
영혼을 담은 집인 우리 육체의 창인 두 눈은 유리알처럼 밝은 광채로 삶의 척도를 나타낸다. 두 눈동자가 샛별처럼 빛날 때 우리는 생동감으로 충만해진다.
눈은 오직 마음의 진실을 토로하는 거울이다. 창을 통해 그 속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눈을 통해 그 마음속을 환하게 꿰뚫는다.
우리는 서로의 만남에서 반가운 청안에 미소 짓고 증오의 백안에 섬뜩해진다. 사랑의 눈빛, 탐욕의 눈빛, 거짓 꾸밈의 눈빛, 이렇게 눈빛은 하늘처럼 흐렸다 개면서 다양한 빛깔로 마음속을 드러내 놓는다.
이 세상에 사랑의 진실을 고백하는 이의 눈빛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서로 사랑하는 눈빛의 마주침은 오팔 같은 오묘한 빛으로 반사한다. 사랑이 깊을수록 아픔도 깊은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사랑의 눈빛 속에는 그 아픔 때문에 더 신비스런 빛이 번뜩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리는 눈 그리고 닫히는 눈.
탯줄에서 끊겨 나온 내 분신과의 첫 대면의 감격은 바로 눈과의 마주침이었다. 이제 막 열린 그 영롱한 눈동자에서 해돋이 같은 서광을 받을 때 나는 이제 나를 버려야 함을 깨달았다. 그 작은 눈동자가 하늘처럼 내 몸 위로 덮쳐옴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흐려지지 않도록 정성으로 마음을 썼다. 삼 남매가 온몸으로 나에게 쏟는 믿음과 사랑의 눈빛 그 한없는 심연, 그것은 나를 오늘날까지 가정이라는 항구에 정박시켜 주었던 닻의 무게였고 등대의 불빛이 아니었던가.
마지막 닫히는 순간의 눈빛도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 있다.
임종 때의 어머니 눈빛, 자손들이 엎드려 기도와 찬송으로 임종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는 사흘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감았던 눈을 번쩍 뜨신 기적을 보여 주셨다. 그때 물기 어린 흑진주 같은 광채는 섬광처럼 짜릿짜릿 내 가슴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를 한없는 회한의 늪으로 빠지게 했던 그 눈빛, 그것은 평생 동안 쏟으신 한량없는 사랑의 앙금으로 응고된 눈빛으로 이미 이 세상의 빛은 아니었다.
영원히 열 수 없는 눈을 닫으신 어머니의 점점 식어가는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드니 눈앞에 저녁노을이 물든 창이 눈부셨다. 어머니의 닫힌 눈은 저 창을 통해 이미 천국을 향해 열리고 있었다. 나 혼자만이 저녁노을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이 창을 내리신 것이라 여겼다.
'사람은 눈이 보일 때까지 손을 움직여 일해야 한다.'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머무는 창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목까지 채우시고 유리창을 닦고 또 닦으시며 큰딸 오기만을 기다리시던 어머니, 나를 반기시던 어머니 눈빛은 이 창과 함께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