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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웅장한 사모바위에 얽힌 전설과 진관사의 태극기
(기행 수필)
루수/김상화
그토록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계절을 만들어 사랑받던 구월도 뒤안길로 사라지누나! 여울목에 머문 구월이 우리를 두고 가는 것이 한없이 아쉬운가 보다. 그러나 10월이란 더 아름다운 계절을 물려주고 간다고 하니 고맙구나! 필자는 이 좋은 계절에 추억하나 만들어 보고 싶다. 무엇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볼까? 하고 생각을 하다 북한산을 가기로 했다. 그곳을 가면 맑은 공기를 접할 수 있고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활력을 찾을 것 같아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하게 다리를 단련시킨다면 건강에 일조할 것이다. 또 마음에 와닿는 한 편의 추억이 될 기행 수필을 남기고도 싶다. 이렇게 일조이석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산행이 아닌가 싶었다. 누구와 같이 갈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문득 생각이 떠오른다. 아 그분! 하며 나도 모르게 머리에 꽂힌다. 산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노하우를 가지신 송광/김문환 선생이시다. 생각 난 김에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쾌히 좋다고 한다. 북한산 어느 곳을 어느 방향으로 갈까 생각해 보았다.
북한산은 오르는 길이 하도 많아 선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산에 대한 전설, 숨어있는 이야기,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 등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와 자료가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누구는 이산의 가는 길이 수백 군데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길마다 숨은 이야기와 역사의 독특한 자료가 있을 것이다. 자세히 알려면 수백 번을 다녀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많이 갈 수는 없고 10번 정도 다녀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러면 북한산에 대한 글을 폭넓게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글의 묘미가 달라질 것이다. 어떤 길은 매우 험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럼 글도 고통스러움으로 나열될 것이다. 어느 길은 아늑한 오솔길에 외롭게 핀 야생화가 웃으며 반길 것이다. 다람쥐들이 뛰어놀며 재롱부리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길은 생각지도 못한 보석보다 아름다운 전설이 숨 쉬며 자기를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 필자를 기다리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최하 10번 정도는 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그때 문득 산울림 산악회에서 번개팅으로 북한산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인희 리더께 곧바로 전화했다. 반가워하며 같이 가자고 한다. 그러면서 불광역에서 10시 20분에 회원들을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잠실역에서 김문환 선생과 신인희 리더를 만나 전철을 타고 불광역까지 같다. 몇 명의 반가운 회원들이 벌써 기다리고 있다. 존경하는 이준태 고문도 만나 참으로 반가웠다. 수석 산악 대장 서완철님도 보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한 서석태 회장도 만났다.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보는 최대해 산악대장이 인솔을 한다. 오늘 코스는 구기터널 위로해서 북한산성을 거쳐 비봉 그리고 사모바위를 간다고 한다. 하산하면서 진관사를 들릴 것이다. 오르는 길은 매우 아기자기하다. 가을이 무르익었나 보다. 참나무가 우거진 어느 곳에선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신기할 정도로 톡톡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그 소리는 향기롭기까지 하다. 저것이 다람쥐를 비롯해 산짐승들의 겨울 양식이 될 것이다.
칠 부 능선쯤 올라온 것 같다. 그때 탕춘대성(蕩春臺城)을 보았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홍지동(4번지) 일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3호이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은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으로서, 도성과 외곽성(북한산성)의 방어기능을 보완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본래 북한산성을 쌓자마자 탕춘대성을 축성하려 하였으나 곧바로 시작하지 못하고 1718~1719년 두 해에 걸쳐 성을 짓게 되었다. 이 성을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연산군의 연회장소인 탕춘대가 지금의 세금정에서 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산봉우리(현재 세금정초등학교)에 있던 것과 관련이 있으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성(西城)으로도 불렸다.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한 탕춘대성(蕩春臺城)은 북한산 비봉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고 길이는 약 5.1km에 달한다. 보현봉~형제봉~북악산을 잇는 능선에도 성을 쌓으려 하였으나 숙종의 사망 등 정치적인 이유로 시행하지 못한 채 지금의 성곽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은 조선 후기 혼란기 속에서 훼손되고, 홍수 등으로 일부 구간이 무너지고 방치되다가 1977년 홍지문(弘智門)과 함께 일부 구간이 복원되고 정비되었다.
탕춘대성(蕩春臺城) 암문을 통과했다. 이곳서부터 성의 흔적이 또렷하게 보인다. 허물어진 성각 옆으로 등산길이 나 있다. 우리는 즐겁게 대화를 하며 한참을 걷다 큰 소나무가 우거진 편편한 곳이 있어 물도 마시고 몸에 충전도 할 겸 잠시 쉬었다. 이곳에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참으로 아름답다. 보이는 곳이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아름다운 수도 서울이다. 여기서 비봉까지는 약 1.6km이다. 걷다 보니 몸이 지치기 시작한다. 깔딱고개를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 깔딱 고개가 사모바위까지라고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안간힘을 다해 올라간다. 비봉이 보인다. 비봉 위에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비봉이 너무도 난코스라 올라가는 것을 금지했다. 멀리서 바라만 보고 가야만 하니 섭섭하기까지 하다.
문헌과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비석이 신라 시대 진흥왕순수비라고 한다.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은 추락위험 지역으로 출입금지 되어있다. 원래의 비석을 보존하기 위해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 비봉에 있는 비석은 모조품이라 한다. 비봉은 신라 진흥왕(540~576)이 지금의 한강 유역 등 새로 넓힌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세운 비석이 봉우리에 세워져 있어 불리는 이름이다. 비석의 내용은 진흥왕이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역사적인 자료를 직접 올라가 보지 못함이 아쉽다. 아마 이것도 나이 탓일 것이다. 30~40대의 젊음이라면 어딘들 못 가겠는가?
드디어 사모 바위까지 왔다. 보는 순간 심장이 멂은 듯했다. 그 큰 바위 위에 네모난 바위가 버젓이 앉아 위험을 드러낸다. 신께서 조각해 낸 장엄한 예술품은 그 자체만 보아도 서울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보인다. 아마 이렇게 훌륭한 작품를 만들어 놓은 것도 우리 인간을 위해서일 것이다. 이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바위 위에 올라가 있다는 신비로운 장면을 보고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모바위는 옛날 관리들의 관복과 함께 머리에 쓰던 사모(紗帽)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모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얽혀 있다. 병자호란 당시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청나라로 끌려간 사실을 알고 북쪽을 바라보면서 돌아오지 못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다 끝내 돌이 되었다는 안타까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힘이 없는 국가는 늘 이렇게 당하는 일만 생긴다. 그래서 내 조국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움트기 시작한다.
1968년 1월 21 사태 당시 무장공비들의 은신 장소가 이곳에 있다. 이것을 1.21 사태라고 불린다. 이곳엔 1960년대 북괴군이 우리나라 군인 복장을 하고 최종 목표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의 밀랍인형이 있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부대 소속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이 사모바위 밑 V자형 동굴에서 청와대 습격과 정부 요인 암살을 위해 무장을 점검하며 최종 은거한 장소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것도 보았다. 우리는 사모바위 아래서 기념사진 찍기 바쁘다. 김문환 선생께서는 사모바위를 올려놓은 곳까지 올라가며 나에게 올라오라 한다. 그래서 올라가려고 몇 번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힘도 달리고 겁도 나서 도무지 올라갈 수가 없었다. 올라가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만족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숨을 한번 내뱉으며 아름다운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서울의 전경이 펼쳐져 있고 우뚝 솟아있는 자랑스러운 남산타워가 보인다. 또 청와대 뒷산도 내려다보인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모바위다.
사모바위를 모두 구경하고 사진도 원 없이 찍었다. 황면연 부회장과 박종술 대장 그리고 이미희 회원은 동료들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다. 동료들 사진 찍는데 전력을 다한다. 이젠 점심을 먹고 내려갈 일만 남았다. 편편한 곳에 자리를 깔고 둘러앉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신인희 리더는 여기서도 역시 산울림의 어머니 역할을 한다. 자기도 배가 곱을 텐데 회원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며 부족한 것을 이리저리 채워준다. 조진순 총무와 여경이 대장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우리는 점심을 맛나게 먹었다. 이젠 하산을 해야 한다. 하산하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험하다. 로프를 타고 대롱대롱 매달려 거꾸로 내려가는 곳이 대여섯 차례 나온다. 서완철 수석 대장은 내가 염려스러웠는지 내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온다. 나에겐 너무도 고마운 분이다. 하산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 폭의 동양화처럼 진관사가 보인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드디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하산길도 무사히 내려왔다.
회원들은 먼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나 홀로 진관사를 보고 가려고 절로 향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진관사는 예로부터 "서쪽은 진관사(西津寬)'라 하여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사찰이다. 고려사(高麗史)와 여암전서(旅菴全書) 등에 따르면 진관사는 신혈사(神穴寺)의 후신으로, 1010년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 시설에 왕위 계승 과정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했다고 한다. 1090년 고려 선종(宣宗)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베푼 후부터 여러 왕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가적 사찰이 되었다. 1397년 조선 태조는 진관사에 행차해 수륙사(水陸社)를 짓고 국행수률재(國行水陸齋)를 설행하게 하였고, 1442년 세종은 사가독서당(賜暇讀書堂)을 진관사에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보내어 한글을 비밀리에 연구토록 하였다.
이후 진관사는 6.25전쟁으로 인해 나한전.칠성각. 독성전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3년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최진관 (崔眞觀)스님의 노력으로 옛 사격(寺格)을 복원하였다. 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 불사중 독립운동가 백초월(白初月)스님이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되어 독립운동의 거점사찰임이 확인되었고, 2013년에는"진관사국행수륙대재"가 복원되어 주요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치유를 통한 템플스테이 체험관(절 체험관), 사찰음식 체험관, 전통 문화체험관을 건립해 역사와 문화, 포교의 중심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종교와 인종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마음의 정원"을 지향하고 있다.
혼자서 진관사 경내를 모두 보았다. 몇 장의 기념사진도 손님들께 부탁해 찍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려고 걷는데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가 문화재청 등록된 문화재 제458호를 보았다. 돌을 깎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글을 새겨 넣었다.
태극기(太極旗)
三角山 마루에 새벽빗 비칠제
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를
네가 보앗나냐 죽은줄 알았던
우리 太極旗를 오늘 다시 보앗네
自由의 바람에 太極旗 날니네
二千萬 同胞야 萬歲를 불러라
다시산 大韓國
진관사 칠성각에서 발견된 독립신문(獨立新問)제30호에 실린 태극기(太極旗)의 시(詩) 일부이다. 진관사 칠성각 해체 복원 불사 중에 독립신문을 비롯한 신문 6종 20점이 태극기 안에 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1919년 중국과 국내의 항일독립운동에 실제 사용된 것으로 진관사가 당시 서울 지역 항일독립운동의 거점 사찰이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오늘 이곳에 와서 이러한 자료를 보고 간단 것은 큰 행운이다. 오늘 함께한 이준태 고문님을 비롯한 회원 여러분 고맙습니다. 저로 인해 불편하셨던 점이 있었다면 너그럽게 보아주시고, 저는 여러분 덕분에 오늘 산행을 무사히 행복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0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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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북한 산을 다시 올려다 봐야 겠어요
도봉산 찍었으니 다음에는 북한산에 오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