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으로부터의 미국 독립 선언은 1776년 7월 4일 당시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13개 주의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발표한 것이다.
17세기 영국은 '왕의 권리는 신(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국왕은 법 위에 있다'는 왕권신
수설(王權神授說)이 지배하던 절대 왕권의 시대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식이 없어서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가 영국 왕이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의회를 무시하고, 가톨릭 신자와 청교도를 억압했다. 강제로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반발한 의회는 새롭게 의회에 많이 진출한 신흥 지주인 젠트리와 청교도 세력들이 본
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였다.
달라진 정치를 원하던 의회는 1628년,
의회의 허락 없이는 왕 마음대로 세금을 거둘 수 없고
함부로 인신을 구속할 수 없다는 권리청원서를
만들어 왕을 압박하였고. 당시 스코트랜드와 전쟁을 하고 있었던 찰스 1세는 마지못해 허락
해 주었다.
그러나 의회와 계속 충돌을 빚던 찰스 1세는 의회를
멋대로 해산해 버리고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열지 않고 의회의 기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며 힘으로 의회를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의회를 지지하는 의회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전쟁은 결국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이 혁명을 주도한 세력들이 신흥지주및 상인들인 젠트리이자 청교도였다. 1649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이다.
의회파를 이끌던 크롬웰은 군대를 이끌고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공화국을선포했다. 드디
어 왕이 사라지고 국민이 뽑은 대표자들에 의해 다스리는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로써 영국은
‘왕이 통치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영국 명예혁명과 권리장전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항해법, 금욕법등 각종 개혁안을 실시하였다. 영국으로 수입되는 상품
은 반드시 영국 배이거나 그 물건을 생산하는 영국 식민자의 배로만 나르도록 한 법이 항해법
이다.
덕분에 그동안 무역을 통해 바다를 지배하던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영국이 유럽 최고의 해양
대국이 되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크롬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자신을 ‘영국의 수호자’라는 의미의 ‘호국경’(Lord
Protector)을 자처하면서 독재정치를 하였다.
거의 왕처럼 행동하고. 게다가 청교도 신앙을 바탕으로 엄하게 나라를 다스려서 국민들은
크롬웰을 싫어하게 되었다.
크롬웰이 병으로 죽자, 다시 왕의 통치를 바라는 사람들이 생겼고.
덕분에 프랑스로 피신해 있던 찰스 1세의 아들이 환영을 받으며,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영국은 다시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찰스 2세와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을 보호하고, 왕 마음대
로 정치를 했다.
국민들과 의회는 영국이 가톨릭 나라가 될까봐 두려웠고 고민 끝에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과 결혼한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윌리엄과 메리가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들어오자 제임스 2세는 스스로 프랑스로 달아나
버렸다.
왕위에 오른 윌리엄과 메리는 의회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어떤 법도 만들지 않고, 세금도
부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권리 장전’에 1689년 도장을 찍었다. 이 문서로 더 이상 왕
의 독재는 불가능해졌다.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왕을 바꾼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이로써 왕은 있으나 법에 의해 통치하고, 의회가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입헌 군
주제’가 탄생되었다.
윌리엄과 메리의 뒤를 이은 앤 여왕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하노버 가문에서 태어난
조지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독일 사람인 조지 1세는 영어도 잘못하는 데다 영국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의회에서 다수
를 차지한 정당이 책임을 지고 정치를 하는 ‘내각 책임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다수당의 우두머리가 총리를 맡고, 정치는 총리와 총리가 만든 정부가 담당하면서 ‘왕은 군림
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이때 만들어졌다.
오늘날 내각책임제 정치제도는 영어를 못하는 영국 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는
아이러니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독립선언문
영국의 명예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권리장전은 미국의 독립 선언, 프랑스 인권 선언에 큰 영향
을 미쳤다.
17세기 초반부터 영국의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와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북아메리카로 이주
하여 정착하고 살았다. 이렇게 해서 대서양 서쪽 북미 13개주는 자연스럽게 본국 영국의 식
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북미 영국 이주민들은 나름 많은 자치와 자유를 누렸고 오히려 영국이라는 보호막 아래 많은
'공짜 이익'도 누렸다. 하지만 영국은 북미에서, 또 유럽에서 계속 전쟁을 치렀고 재정압박에
내몰렸다.
탈출구는 북미대륙 신흥 식민지였다.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하는 법을 잇따
라 만들며 식민지인들을 쥐어짜기 시작했. 설탕법, 인지법 차세 등등.
당연히 반발이 일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조세 관련 법 철폐 운동이
벌어졌다.
영국 상품 불매운동도 일어났다. 영국도 그냥 있지 않았다. 충돌은 당연했고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터져 나왔다.
1770년 보스턴 주둔 영국군과 주민들간의 사소한 충돌로 식민지 주민 5명이 사망했고 반영
감정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3년 후 1773년엔 보스턴 차(Tea) 사건이 터졌다.
식민지 사람들이 차에 부과되는 세금에 반대하며 보스턴 항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 회사 선박
에 잠입, 선적돼 있던 수백 박스의 차를 바다 속으로 던져버린 사건이다.

영국의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보스턴 항을 폐쇄했고 찻 값 보상을 요구했으며 자치권도 철회
했다. 4천명의 병력과 함께 새 영국 총독이 부임했다.
식민지인들은 분노했다. 매사추세츠뿐 아니라 다른 주까지 가세했다.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영국의 강압적 법령에 반대하는 결의안이 채택됐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2차 회의를 소
집한다는데도 합의했다.
이제 독립은 시대적 소명이 됐다. 이른바 '애국자'(patriot)들은 연설로 혹은 책으로 대중을
각성시켰다.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1775년 버지니아 의회 연설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고 절규했다.
토머스 페인은 1776년 처음 발간된 '상식'이란 책에서 작은 섬나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라 주장했다. 책은 50만부 이상 팔렸다.
1776년 7월 4일 채택된 독립선언서는 그 절정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한 독립선언서는 미국 식민지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인간의 천부 인권사상/자유ㆍ행복 추구권/저항권을 담아냄으로써 세계사적인 명 문장이
만들어졌다.
제퍼슨은 존 로커의 정부론의 저서에 담긴 사상에 영향을 받아 독립선언문 기초를 만들
었다.
독립을 향한 첫 총성은 이미 울렸다. 1775년 매사추세츠주 렉싱턴에서였다. 식민지군 8명이
영국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다시 필라델피아에 모여 2차 대륙회의를
열었다.
영국과의 전쟁을 공식 결의하고 식민지 연합군인 대륙군을 창설했다. 총사령관은 조지 워싱턴
이었다.
전쟁은 1775년부터 8년간 이어졌다. 전투는 지지 부진했고 대륙 군은 고전했다. 조지 워싱턴
은 지구전으로 버텼다. 시간은 식민지 편이었다. 몇 차례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었고 영국을
견제하던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도 식민지 편에 섰다.
마침내 대륙 군은 1781년 버지니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 주력부대의 항복을 받았다. 영국은
의회도 국왕도 더 이상의 전쟁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1783년 파리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유럽 각국이 식민지 미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강화조
약이 파리에서 열린 것만 봐도 미국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얼마나 많은 지원을 했는지 짐작
을 할 수 있다.
독립전쟁은 북미 대륙에서 벌어졌지만 여러 유럽 국가들이 영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프랑스 군인들은 귀국해 왕도 없고 신분도 계급도 없는 새 나라 미국 이야기를 전했다.
그들이 전한 자유와 평등의 꿈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어떻게 최강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했을까?
결국 정의의 문제다.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 지식인들은 끓어 오른다. 당시 미국 식민지의 주 세력이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해 개혁을 외치던 청교도들 아니던가?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행동한다.
미국의 독립 전쟁 승리는 단순히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상의 '위대한 사건'이었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한 민주주의 정신과 몽테스키외가 주장한 삼권분립
정신이 합쳐진 최초의 민주국가 미합중국의 탄생이었으며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출발 점
이였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미국 독립 전쟁의 최고 영웅은 조지 워싱턴이다. 버지니아의 농장주였던 그는 대륙군 총
사령관이 되어 별다른 전투경험이 없는 오합지졸들로 영국군에 맞섰다. 그럼에도 탁월한
지도력으로 7년을 버티다 마침내 난공불락의 요크타운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는 미국 독립후 첫 대통령이 되었고 건국의 아버지로 모든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가장 미국인다운 미국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천재였던 그는 정치인, 외교관, 작가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피뢰침을 발명한 과학자이기도 했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세운 교육가이기도 했다. 미국
최초로 무료 도서관을 세웠고 소방서도 만들었다.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루이 16세를 설득,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미국
독립운동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토머스 제퍼슨도 독립선언서 기초를 작성하여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철학과 과학, 문학에
두루 정통했고 나중에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됐지만 자신의 묘비명엔 대통령 경력은 안
쓰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것을 남겼을 정도로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권리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쟁취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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