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 왕국 제일 권세가
2편. 신의 뜻은 어디로
3편. 성왕패구
4편. 최초의 여성 재무관
6편. 38일의 겨울 여왕
7편. 텅 빈 자문회
세계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고 산 자는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푸아티에 가문의 여덟번째 이야기입니다.
☆
두 번째로 인사드립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키텐의 상왕 길패트릭입니다.
11월이 되자 노령이었던 재상 뤼지냥 백작이 세상을 떠나고, 뤼지냥은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갓 성년이 된 어린 청년입니다.
재상을 채워야겠군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재상 따위가 아닙니다. 제 딸이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 사이 툴루즈 여공작이 흑사병으로 사망했군요.
비어있던 것이나 다름 없던 3공작 자리에 야심만만한 청년이 진입해 빨간 주먹을 치켜들고 있습니다.
아키텐의 국왕이 되고 싶다고? 이게 죽고 싶어서 콱.
다행히 동원 병력이 천 명 남짓하고 동맹을 맺어놓은 곳도 없군요.
관문은 열 수 없고 오라드는 치료 한 번 못 받은 채 죽어가는데 서유럽은 확실하게 초토화됐습니다.
"그래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우리 딸…."
내전 전에 7천명에 달하던 아키텐의 병력은 4천명까지 줄었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조세도 없죠.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다 같이 어려우니 그나마 낫다고 하기에는 가혹한 현실입니다.
아키텐의 어린 여왕은 다행히 모든 방면에서 고른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라는 건 없습니다. 그저 살아만 있어준다면…….
대장군이 늦둥이 딸을 본 가운데, 흑사병이 북유럽마저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질병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아키텐 왕가를 버리지 않았다면….
선선대왕 조슬랭의 마지막 치세였던 1126년부터 지금 1131년.
장장 5년에 걸친 흑사병 창궐은 아키텐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관문을 열려는 찰나 궁정 사제가 주교 하나를 잡아왔습니다. 재주도 좋다.
보아하니…….
"고작 농민들 몇 사람 말만 듣고 혐의를 판단해 사람을 죽인다면, 세상에 목숨 붙이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나?"
사실이라 쳐도 고작 악몽 몇 번 꾸는 것과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게 뭐가 더 끔찍할까요.
잡혀 온 주교는 방면합니다. 궁정사제면 궁정사제답게 포교나 할 일이지 어디서 사람을 죽이라고 쯧쯧….
1131년 8월 31일. 드디어 관문을 개방합니다.
"문을 열어라. 폐쇄는 오늘로 끝이다."
이 와중에 전 포익스 백작이 시복되었는데….
기만적인 호모섹슈얼인데도 시복이 됐군요.
……그럴 거면 차라리 악덕 하나 없었던 처남을 시복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기준이 뭐야…?
의사부터 찾아봅니다.
야햐 야히드라는 35세의 젊은 무슬림이 나타났습니다.
……의사는 아닙니다. 의료 개론서를 쓰는 학자입니다.
학력이 아주 높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아닙니다. 이교도라서 교회가 싫어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놓치면 3년간 다시 의사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이교도든 뭐든 상관 없다. 내 딸만 살릴 수 있으면 돼."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합니다.
우리 부녀가 잡은 게 지푸라기가 아니라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이길 바랍니다.
"오라드, 이 아저씨가 널 고쳐주실 거야."
야햐는 암을 치료해주지는 못했지만 꽤 좋은 치료를 해줬습니다.
앞으로 5년간은 잘 자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라드가 좀 더 자라서 힘이 붙으면 더 힘든 치료도 견뎌낼 수 있겠죠.
(*암으로 건강 -3. 치료 버프로 올 스탯 +2에 건강 +2)
그러면 이제 그만 롤라드 파의 반란을 정리해야겠습니다.
돈도 충분히 모였고, 아키텐의 전력을 더 소모할 수 없으니 용병을 부르겠습니다.
처남은 아키텐 사람간의 문제에 외국 용병을 투입하는 걸 싫어했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아마 이해해주겠죠.
지금 아키텐 병력이 저러니 말입니다…. 병사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721원이나 모였으니 300원 정도는 괜찮겠죠.
적장은 혼자서 무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1:1 매치입니다.
바로 괴멸되었죠.
참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벌써 3년이 되어가네요.
롤라드 파의 반란은 이렇게 전투 한 번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극단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무기 한 번 쥐어보지 못한 농부들로 3년이나 군대를 이끌었단 점을 높이 사서 방면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이단자라 하나 재주가 아깝구나. 내가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풀어줘라."
딸의 치세에 벌써부터 (무력으로 굴복시켰지만) 항복한 사람을 죽였다는 평가를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정말로 재상을 채워야 하는데……
머리도 나쁜 돌들의 합창곡들이 인성 봐라, 진짜.
"…됐다. 당분간은 필요 없으니."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는 법이죠.
병이 깊어 그런지 오라드의 유년기는 무미건조합니다.
그저 잘 자라 주는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아버지가 언제나 지켜줄 거야. 그렇지만 너도 너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단다."
학문 편식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파트리샤는 재무회계 외의 다른 건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오라드는 다방면으로 고른 걸 보아 처남이나 저를 좀 더 닮은 것 같네요.
아키텐에서 흑사병은 물러갔지만, 세계는 여전히 흑사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무사히 성년을 맞을 것 같으니 사윗감을 물색해보겠습니다만…….
왕자들이 흑사병으로 다 죽은 모양이군요.
마음에 드는 왕자가 없습니다. 천재는 없고….
"…어차피 나도 왕자라서 파트리샤와 결혼한 건 아니었다. 적당한 귀족 자제 중에서 다시 찾아봐라."
살레르노를 다스리는 오트빌 가문에 영재 소년이 있습니다.
사생아인 것이 조금 아쉽지만 이 아이와 약혼을 맺겠습니다.
모계결혼 상대를 구한다는데 나바라의 어린 소년왕이 나서서 좀 놀랐습니다.
하지만 왕국 결합을 하기에는 나바라의 사정이 무척 좋지 않습니다.
나바라 왕국의 문장이 보이십니까?
나바라 왕국은 이제 나바라 백작령 하나만으로 몰락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각축전에 아키텐이 휘말릴 수는 없습니다.
오라드가 아픈 게 뭐가 어때서. 오라드 능력이 뭐?
어쨌든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1133년 12월. 드디어 세계에서 흑사병이 사라집니다.
희망찬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합니다.
대장군이 늦둥이 아들을 봤습니다. 아이의 생일이 12월 22일이니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겠군요.
돈이 어느 정도 모였으니 가장 먼저 병동을 짓겠습니다.
축하를 하자마자 대장군이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그럼 대장군을 새로 채워야지요.
아, 참. 재상 자리를 아직 공석으로 뒀군요.
우선 대장군은 현재 우리 아키텐에서 가장 힘이 센 남자인 지휘관 마르탱에게 제수하겠습니다. (*무력 25)
던바에서 희한하게도 적성에 안 맞게 낮은 무력으로 대장군을 하고 있는 에릭이란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무력 10 외교력 20)
예전에 장인도 적성에 맞지 않게 대장군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동향 사람이기도 하고, 헤드헌팅을 시도해보겠습니다.
"춥고 척박한 던바보다 보르도가 더 낫지 않겠나? 이건 선금이네."
돈 싫다는 사람 못 봤습니다.
장인과 처남 대에 걸쳐 충성하던 알바라신 선대 백작 마리 재상에 이어 약 10년만에 똑똑한 재상이 자문회에 들어왔습니다.
생각하기 싫지만, 제 딸이 후계자를 얻지 못할 경우 왕위계승서열 1위인 필리파 공주가 다시 과부가 되었습니다.
처제와 떨어진 가엾은 처조카는 이미 살해당했고요.
……?
처제에게 사생아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리스에서 고생 많았어. 그만 친정으로 돌아와……."
……?
태어나서 지금까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하나뿐인 언니의 유일한 아이가 싫고….
전 시아주버니인 디라히온 공작 니케포로스 팔라이올로고스가 너무너무 좋아서 가고 싶지가 않고……
이미 디라히온 공작과 애인 사이라서 헤어지고 싶지 않다…….
이놈이 좋아서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나이도 훌쩍 더 많고……
할 짓이 없어서 제수씨를 탐하는 데다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모른 체 하는 무책임한 놈이 좋아서……
죽은 언니가 남긴 유일한 자식을 돌봐주지 않고……
하물며 현 왕위계승서열 1위가………
"…오라드에게는 알리지 마라."
시간 좀 지나면 정신을 차릴 지도 모르죠.
자문회의 투덜이 첩보관 아르투아 여백작 아르신드가 일을 합니다.
툴루즈 공작은 현재 아키텐 최고 권신이기 때문에 위협을 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몸도 무거운데 일해주다니 참 고맙습니다.
아들을 얻은 것도 축하할 겸 해서 용돈을 좀 줍니다.
받고 더 열심히 일해줘.
새 대장군 마르탱도 일을 합니다.
그런데 능력이 좀 아쉽군요.
기왕 왔으니 잠시 데리고 있다가 성장하는 걸 봐서 계속 데리고 있거나 다른 귀족 여성에게 신랑으로 보내주든지 해야겠습니다.
"어머니, 축하드려요. 전 제게는 동생이 생기지 않을 줄 알았어요."
누나가 된 오라드가 기뻐서 안아보고 들어보고 난리가 났습니다.
1136년 6월 2일, 제게 절 닮은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천재 아들입니다.
이름은 파커(Farquhar)라고 지었습니다.
파커는 아키텐의 왕자는 아니지만 아키텐 국왕의 하나뿐인 형제입니다.
이후에라도 남매가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겠죠. 그러길 바랍니다.
흑사병으로 입은 피해도 어느 정도 회복을 보이고 있으니, 보르도의 성벽을 증축하겠습니다.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시간이 점점 다가옵니다.
"그래. 역시 파트리샤의 딸이구나. 장하다."
아이 엄마는 원래 하나를 잡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죠.
오라드는 음모 방면의 최고 레벨인 환영의 그림자를 찍었습니다.
성년을 맞은 아키텐의 국왕을 소개합니다.
관리력에서 최고 레벨 마이더스의 손을 찍은 파트리샤처럼 계략 최고 레벨 환영의 그림자로 성장했으며, 근면성실합니다.
쓸모없는 악덕을 주렁주렁 갖고 있는 것보다야 심플한 성격이 더 낫겠죠.
어머니처럼 짙은 흑발에, 눈매나 얼굴 생김은 저를 많이 닮았네요. 눈동자도 초록빛이고.
아직 병마를 떨쳐내지 못했지만 좋은 치료만 받으면 회복될 수 있을 겁니다.
"국왕께서 성년이 되셨으니 오늘로 섭정을 마감한다. 부족한 날 돕느라 모두들 수고 많았다. 이후로는 날 돕던 것처럼 내 딸을 보좌하리라 믿겠다."
9년간의 섭정을 마치고 전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다음 이야기부터는 딸아이가 인사드릴 겁니다.
☆
때 이르게 나온 초승달이 서쪽 바다 위에서 하얗게 빛나던 시각이었다. 긴 낮은 밤을 늦게 불렀고 달을 둘러싼 하늘은 아직 연보랏빛으로 맑은 빛을 뿌렸다. 바다 밑으로 잠긴 태양의 남은 열기가 잔잔히 퍼지는 늦은 오후, 보르도 궁성 내로 짐수레 행렬이 쉴 새 없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바위를 깎아 만든 것처럼 퉁퉁한 짐말이 이끄는 수레와 눈망울이 고운 나귀가 이끄는 수레 등. 빛깔 고운 오곡백과와 염장한 고기를 나눠 담은 나무통들이 진동에 덜컹거리며 경쾌한 화음을 울렸다. 모든 것이 침잠하는 시각이었지만 궁성은 태양이 떠 있을 때보다 더욱 분주했다. 철야를 마다않고 며칠째 격무 중인 시종장은 아예 성 곳곳을 뛰어다녔고 힘을 쓰는 위병들은 소속에 무관하게 궁내관과 하녀들을 거들었다. 그 움직임이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창에서 아키텐의 섭정상왕 길패트릭은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쁜 건 여기도 피차일반이었다.
“이제 더는 못 입어요. 그만.”
검은 머리를 땋아 우아하게 올리고 왕관을 쓴 소녀가 맥이 빠진 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 동작에 맞춰 소녀가 입은 새빨간 드레스가 아찔한 광택을 뿌리며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벽에 나란히 밀어둔 의자 중 하나를 끄집어 내 털썩 앉았다. 머리를 아프게 누르던 왕관을 벗어서 가느다란 손목에 건 건 덤이다. 저런. 머리가 반쯤은 하얗게 센 닥스 여백작 기랑드가 소녀의 손에서 왕관을 받아들어 조심스레 검은 벨벳을 깐 상자 속에 내려놓았다.
“폐하께서 하도 고우시니 부왕께서 기쁘셔서 그러시는 게지요.”
나이 어린 손녀를 달래듯 자애로운 말투였다. 정작 그걸 듣는 사람이 중노동에 지쳐 의자에 기대 무너지고 있으니 문제였지만. 힝. 소녀는, 아니 아키텐 국왕 오라드는 갓난아이가 그러는 것처럼 손을 쭉 뻗고 쥐락펴락했다.
“먹을 거나 좀 갖다 주세요. 이러다가 내 생일인데 내가 배고파서 쓰러지겠어. 안 그래도 아까부터 밖에서 먹을 거 만드는 소리가 시끄러웠단 말이에요.”
투정이 어렸지만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내일 16세 성년을 맞이하며 대내외에 친정을 선포할 국왕이 탈진하면 안 되니까. 오라드의 초록빛 눈동자는 물속에 잠긴 에메랄드처럼 광채가 흐려지고 있었다. 기랑드는 허락을 구하는 표정으로 길패트릭을 보았다. 그리고 자식의 기운 없는 “배고파.”를 듣고도 참으라고 할 부모는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 수고 많았다. 이만 밥 먹자. 먼저 가 있으렴. 경들도 함께 하지.”
오라드의 얼굴에 꽃이 피어나듯 발그레한 화색이 돌았다. 원래 밥 같은 걸로 일희일비할 아이가 아닌데 그만큼 힘들었단 뜻일까. 먼저 가라는 말에 의욕이 앞서 일어서려던 오라드는 현기증이 일었는지 휘청거리면서 의자에 손을 짚었다. 폐하. 기랑드가 옆에서 오라드를 부축하고 조심스레 인도했다.
방 안에는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와 장신구가 세기도 어려울 만큼 즐비했다. 입이 떡 벌어질 가격을 자랑하는 염색 원단으로 만든 진한 색 드레스가 있는가 하면 차분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한 색 드레스도 있었다. 장신구 또한 이국에서 지중해를 건너 온 최신 제작품과 수도의 공방에서 공수한 것, 프랑스의 공주였던 할머니 콩스탕스가 결혼하면서 가져온 것이나 어머니인 선왕 파트리샤가 아끼느라 별로 쓰지도 않은 것 등이 각양각색으로 찬란히 빛났다.
“각별히 주의하도록. 두 분 폐하께 아주 소중한 것들이니.”
아르투아 여백작 아르신드는 시종들에게 당부하면서 그들과 함께 무심한 눈길로 귀금속들을 상자에 담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귀중품의 가치를 모르는 무지렁이 촌뜨기라 해도 눈이 뒤집힐 물건이었지만 그것도 점심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눈이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인이 그만큼 내일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반증이며 좋게 보자면 하나뿐인 딸이 너무나 소중한 아버지의 배려였다. 정작 그 당사자의 머릿속에 혼돈이 몰아쳐도.
“아르신드.”
상왕은 이름으로 왕국 첩보관이기도 한 아르투아 여백작을 불렀다.
“그대 생각엔 어떤가?”
질문이 아니라 도움 요청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직감으로 알아챘다. 요지는 이렇다. ‘내일 친정을 선포하면서 군중 앞으로 나설 때, 그리고 저녁 연회에 어떤 차림을 하는 게 가장 좋을까?’ 그러나 의도를 파악하는 것과 대답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명백히 별개다.
우선, 피부가 하얀 오라드는 어떤 색이든 잘 어울렸다. 함초롬한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갸름했고 짙은 쌍꺼풀은 한여름 녹음 같은 초록빛 눈을 한층 더 그윽하게 만들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닮은 흑단처럼 검은 머리는 허리를 넘겼고 반듯한 콧날에 도톰한 입술까지 꼭 애정을 가지고서 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미인이라 여길 수 있는 외모였다. 어떤 옷이든 안 어울릴 리가 없다. 하지만 의식을 준비하는 측에서는 그런 장점들만 고려할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오라드는 병을 오래 앓아 또래에 비해 몸이 무척 가냘팠고 키도 아담한 편이었다. 신체적인 조건이야 어쩔 수 없지만 군주가 왜소하게 보이는 건 좋지 않다. 그 결과 조금 전 몸이 불편해 돌아간 상왕비 프레블라나 말고도 특별히 자문회의 여성 구성원인 조언자 기랑드와 첩보관 아르신드를 불러 정무 시간도 단축하고 패션쇼를 벌인 건데.
“내 눈에는 다 예뻐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길패트릭은 어이가 없다는 양 웃었다. 아르신드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고르다가 가장 무난하다 싶은 답을 꺼냈다.
“마지막에 입으신 입성이 가장 화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목이 쏠릴 테니 오래 각인될 차림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녁 연회에 입으실 입성은 국왕께서 직접 고르게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저녁도 이유가 있나?”
“네. 마음에도 없는 불편한 옷을 오래 입으면 기분만 나빠지니까요.”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다.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옷이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길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는 어느새 그들밖에 남지 않았다.
“고맙네. 여러 가지로.”
“아닙니다, 상왕폐하.”
“그대는 여기 오는 게 탐탁치는 않았을 텐데.”
순간 방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말을 던진 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무감한 눈으로 상대를 보았으나 정작 상대는 그렇게 평온하지 못했다. 아르신드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상왕의 의중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렸다. 여상히 여기기에는 말이 무겁다. 비단 오늘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터.
“…아르투아는 국왕께 충성합니다.”
아르신드는 상투적인 대답을 하며 일부러 싱긋 웃어보였다. 만족스러울 대답이 아니라는 건 애초에 알고 있다. 푸아티에 가문은 유서 깊은 명문가이며 유럽의 여러 왕후귀족과도 인척으로 연결을 갖고 있지만 왕가로서는 신생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아르투아는 플랑드르에 소속된 지역으로 비록 공위를 잃었지만 플랑드르의 오랜 지배자였던 반 플란더렌 가문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무엇보다 두 왕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 가담지이기도 했다. 종친과 외척이 모두 국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전쟁의 당사자 앞에서 당연한 봉신의 의무를 거론하는 건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리고 제가 아무리 벽촌에서 왔다 하나 상왕의 부르심을 거절할 만큼 무례하지도, 또한 무지하지도 않습니다.”
전쟁에 나아가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던 초대 국왕 기욤의 치세는 10년도 가지 못했다. 아키텐이 프랑스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불과 15년만에 왕조의 운명은 여섯 살 밖에 안 된 어린 손녀와 그 생부인 26세 청년에게 맡겨졌다. 구심점을 잃고 휘청거리는 불안한 미래를 두고 귀족들은 스코틀랜드 이방인이며 고작 백작의 3남이었던 상왕보다는 아키텐의 최고 권력자였던 앙주 공작 풀크를 섭정으로 추대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부녀에게 충신을 자처하는 이 따위는 없었다. 아르신드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역시, 이상하다.
“……왜 저를 첩보관으로 택하셨습니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무례한 언사라 꾸짖고 대화를 자른다면 할 말은 없다. 인사에 대해 이유를 묻는 것도 불경이다. 그러나.
“그대가 제일 뛰어났으니까.”
별 걸 다 묻는군. 길패트릭은 작게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질문한 상대가 놀란 개구리처럼 그간 한 번도 볼 수 없던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리는 줄도 모른 채. 뜬금없는 침묵이 이어지자 그는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했다. 아, 그렇군. 설명이 부족했나.
“…그 이상의 이유를 말하라면 못하겠군.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라 실망했다면 미안하네.”
가장 우수한 인물에게 맡겼을 뿐이다. 거기에 굳이 사심을 덧붙인다면 장차 오라드가 국정을 논의하려 중앙의 자리에 앉았을 때 보일 얼굴이 전원 이성인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말을 달리고 자신의 강함을 인정받아 세상의 계단을 오르는 사회에서 여성 군주는 선호 받지 못했고 여성이 상속받은 유산은 어느 때보다도 더 강탈에 취약해졌다. 적어도 군주의 눈과 귀가 될 첩보관은 군주를 위협할 일이 없을 사람이어야 했다. 길패트릭은 속사정을 일일이 말하는 대신 입을 닫고 발걸음을 떼었다. 군말은 해봐야 좋을 게 없다.
“감사합니다. 상왕폐하.”
아르신드의 목소리가 여실히 떨렸다.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길패트릭은 나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아르신드가 표정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섭정에서 물러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인이 나간 방에 객이 머물 수는 없으니 잠시 여유를 준 것 뿐인데 예상치 않은 말이 나왔다. 아마 발화자 본인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는지 아르신드는 명백히 겁먹은 눈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고 그냥 나갈지 추궁할지 길패트릭도 선택할 시간이 필요했다. 밖에 시종과 위병이 늘어선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마저 말하게. 이 방에는 나 밖에 없으니. 그대가 어떤 말을 해도 이 일로 위해가 가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
의문을 남겨두는 건 좋지 않다. 또한 봉신이자 자문회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이 석연치 않은 마음을 가졌다면 비슷한 여파가 없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겠노라 약속했지만 다음 말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고르는 걸까. 아니면.
“……국왕께서는 아직 연소하시며 병약하십니다.”
기다림 끝에 나온 말은 저릿하니 아팠다. 아무리 주지의 사실이라 하나 남의 입으로 듣는 건 평온치 않았다.
“상왕폐하. 이미 폐하께서 직접 통치하신지 9년이 지났습니다. 모두들 폐하의 명을 받잡는 것이 더 익숙합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한참 젊으십니다.”
그렇군.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섭정상왕이 갓 16세가 된 딸에게 친정을 시키고 물러난다는 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가. 길패트릭은 몇 마디 되지 않은 상대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발화자의 위치도 마찬가지로.
“그대는 내 딸을 너무 얕잡아보는군.”
벌써부터 편을 가르며 보는 시선들이 있다. 9년. 비록 섭정의 위치였다고는 하나 푸아티에 왕조 이래 최장 통치기간이 되어버린 세월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국왕에게 위협이 될 권세가들은 흑사병으로 가주를 잃어 주춤거렸고 자문회는 수시로 자리가 비었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급사태였지만 그만큼 왕권이 상대적으로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길패트릭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자타공인 그는 아키텐의 모든 것을 통솔한 실질적인 왕이고 그의 딸과 달리 30대 중후반의 젊은 남성이며 원숙한 통치자였다. 그는 화사하게 웃던 자신의 딸과 그 딸을 세상에 있게 한 또 다른 여성을 겹쳐 떠올렸다.
“그 아이는 내가 키웠네. 그 전에는 선왕이 키웠지. 그 아이가 나만 못할 것 같은가?”
“폐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만. 길패트릭은 손을 들어 아르신드를 제지했다. 차라리 지금 들어서 다행이었다. 말에는 검보다도 강력한 힘이 있어 금석 같던 사이도 독이 서린 몇 마디에 융해되듯 멀어져버린다. 시간이 중첩되면 오라드의 충신을 자처하는 자가 권력욕에 눈이 먼 상왕을 질타할 것이고 상왕의 충신을 자처하는 자는 자신을 내세워 오라드를 압박할 것이다. 사람은 권력을 쥐기 위해 기꺼이 혈육을 이용하지만 권력 앞에서 혈육이 없다는 이유는 그런 뜻이다. 더는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내몰리기 때문에. 목숨보다도 소중한 딸이다. 겨우 그까짓 것과 바꿀 수 없다. 길패트릭은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그 동안 내 성격에 맞지 않게 너무 열심히 일했네. 귀찮은 건 오라드에게 맡기고 좀 쉬어야겠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저 딸에게 자기 자리를 찾아줄 뿐이다. 명분이나 구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자식을 지키려 힘썼던 시간들이 결국 자식과 칼끝을 겨누게 되는 최악의 미래를 가져오는 단계가 된다면 그야말로 후회밖에 남지 않을 테니.
“오늘 이야기는 잘 들었네. 어서 가지. 오라드가 우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길패트릭은 더 길게 말하지 않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비 없이 먼저 식기를 들지 않을 착한 딸을 떠올리면서. 그 뒤로 긴 옷자락이 스르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일부러 말을 아꼈다. 때로는 표면상의 이유가 진실한 속내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도 했다. 궁내관들은 표정 없이 두 사람을 따랐다.
달은 어느새 해수면에 한 뼘 더 가까워져 있었다. 아키텐 왕국의 섭정상왕으로서 보는 마지막 달이었다.
☆
+)새해 첫 연대기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는 일 이루는 행복한 한 해 되세요.
+)글 잘 쓰고 싶습니다…… _(.ㅁ. _ )_
+)사람이 갑자기 단 게 마구마구 땡기면 몸살이 올 징조라는 걸 알았습니다.
|
첫댓글 흠.. 저도 일전에 저런 남매를 둔 적이 있었는데, 누나가 갑자기 곰으로 변하더니 남동생에게 함락되서 정치 서스펜스가 갑자기 아침 막장드라마로 변모한 적이 있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게 뭐예요 뭔 일이에요ㅋㅋㅋㅋㅋㅋㅋ 자세히 설명 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디아나 http://cafe.daum.net/Europa/1AT/23872
기억이 가물했는데 누나가 아니라 쌍둥이였네요.
@Draka 수양대군들을 경계하셨는데 저 나이까지 살아남으신 걸 보니 숙부들이 수양대군이 아니라 주공 단이었네요…… 화목한 가정………
@디아나 삼촌이 셋이었는데, 셋 다 줄줄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되었죠.
뭐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자면 반란으로 작위가 회수되는 바람에 분할상속되었던 영지가 통합되었다는 점?
@Draka 역시 지극히 현실적인 교육적 갓겜 크킹입니다(._.) 합쳐지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다시 합쳐지는 그거슨…… (급 분위기 중화)
본편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전 진짜 오라드가 행복하길 바랐습니다(._.) 하지만 이 게임은 크킹이었고……
@디아나 페스트 터지고 부계가 절단난 시점에서 이미.. orz
@Draka 아 맞다 그랬져 이 집 2대만에 부계 끊겼져……… 하하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도 유전자 추적은 Y염색체보다는 미토콘드리아 추적으로 하니까 어 잠깐 그러면 어차피 자식 대에서 미토콘드리아는 변경되고 조슬랭-파트리샤-오라드 셋이 미토콘드리아 공유……… 인데 가문의 실질적인 유일한 희망은 암환자고……………
에라이(뒤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