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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지배를 반대하며 아메리카대륙에서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쿠바의 아투에이
그는 스페인에 진압을 당하고 화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스페인 종군 신부가 다가온다
스페인 신부: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수있는데 개종하고 세례를 받겠습니까?
아투에이 : 스페인 사람들도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갔습니까?
신부: 그렇습니다
아투에이 : 죄없는 내 아내와 딸들을 강간하고 살해한 그들과
내 동족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그 스페인 사람들도 천국에 갑니까?
신부 :... 그렇습니다
아투에이: 그렇다면 나는 지옥을 가겠습니다. 그들이 없는 지옥이 내게는 천국일테니
아투에이의 말에 스페인 신부는 아무말도 하지못했고 아투에이는 화형으로 삶을 마감한다.
당신들의 신은 왜 그토록 잔인한가
스페인의 강압정책에 대해 점차 쿠바 내에서 반발이 일어나고 쿠바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1868년 10월 오리엔테 지방의 제당업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 1819~1874)가 데마야과(Demajagua)의 야라(Yara) 마을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자신의 노예를 해방시키면서 쿠바의 독립선언을 외치고 전국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야라의 외침(El Grito de Yara)으로 기록된 이 선언은 스페인에 맞선 1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강권 통치가 쿠바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고 가혹한 관세제도는 쿠바의 경제이익을 해치고 있다며 스페인을 규탄했다. 노예제도를 강력히 비판하고 모든 국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에서 쿠바 최초로 스페인에 대항했던 아투에이(Hatuey) 타이노 족 추장을 기리었다.
스페인 사람이 있는 천당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
아투에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스페인인이 자신이 살던 섬을 점령하자 아투에이는 쿠바로 도망쳤다. 그는 부족을 이끌고 스페인에 저항했으나 결국 포로로 잡혔다. 스페인은 그를 화형에 처했다. 화형당하기 전 신부가 그에게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권유했다. 그가 왜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자, 신부는 그래야 죽어서 당신의 영혼이 천당에 갈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스페인 사람도 죽어서 천당에 가냐고 묻자 신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투에이는 "나는 스페인 사람이 있는 천당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말하며 세례를 거부하였다. 아투에이는 물었다. "당신들의 신은 왜 그토록 잔인한가?"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신 예수를 일컬음이다. 예수는 만인에 대한 이웃 사랑을 강조했다. 그러나 예수를 추종하는 후계자들은 말로만 사랑을 떠들지 이해관계가 얽히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도 이 사실은 진행 중이다.
1871년 아바나 대학생이 스페인 대지주의 묘지를 훼손했다는 누명을 쓰고 총살되자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져 독립운동은 더욱 거세어졌다. 1874년 스페인이 세스페데스를 처형한 이후 수많은 지식인들은 물론 해방된 노예와 쿨리들도 혁명에 가담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면서 독립군 내부는 분열되었고 자신의 이익에만 치중한 집단이 스페인에 협력하여 결국 독립전쟁은 실패하였다. 쿠바 최초로 해방혁명의 상징이 된 이 사건은 1878년 스페인의 승리로 끝나고 공식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었다. 이 전쟁을 10년 전쟁이라고 한다.
호세 마르티, 미 제국주의 등장을 예언하다
독립전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878년 일부 자산계층이 자유당을 창당했다. 자유당은 쿠바 사람들에게도 스페인 사람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고, 쿠바에도 스페인과 같은 법을 실시하며 정부가 노예주에게 배상하고 노예제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쿠바 생산품에 대한 수출입 관세도 낮추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쿠바의 자유화 개혁을 일축했다.
여러 비밀조직이 결성되고 많은 독립투사가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제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처형되기만 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독립투사가 호세 마르티이다. 쿠바 태생인 스페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16세 때 10년 전쟁에 참가하여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가 문학과 철학 그리고 법학을 공부하였다. 남미의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스페인 식민주의가 지배한 아메리카의 실체를 직접 체험하고 새로운 문화공동체 건설을 시도했다. 1879년 혁명에 실패하여 투옥된 후 다음 해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북아메리카에 대비해서 남아메리카를 우리 아메리카로 부른 그는 <우리 아메리카Nuestra America>(1881)라는 결의문에서 미국을 그들만의 아메리카로 규정하고 미 제국주의 등장을 예언해 우리 아메리카(남미)가 단결하여 미국의 야심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결의문은 이후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현실을 자각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1892년 마르티는 뉴욕에서 쿠바혁명당을 조직하고 푸에르토리코 해방을 적극 지원했다. 1894년 쿠바혁명당을 지휘하며 독립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쿠바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합하여 스페인 통치 전복을 기도했다. 12월 무기와 독립군을 실은 배 3척이 플로리다를 떠나 쿠바로 가려 했으나 미국의 방해로 2척이 플로리다에 억류되었다.
다음해 1월 쿠바 내의 독립군은 마르티의 군사원조 없이 독자적으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초반 중서부 투쟁에서 겪은 열세를 1895년 동남부를 기점으로 제2차 독립전쟁을 시작하여 열세를 극복해나갔다. 1895년 4월 해외 독립군이 합류하면서 쿠바의 독립전쟁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나 함께 온 마르티는 스페인 정부군의 총탄에 죽음을 맞이한다.
부자들은 전쟁으로 이득을 본다
1895년 9월 독립군은 까마구웨이에서 쿠바공화국를 수립하고 막시모 고메스(Maximo Gomez)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뮬라토 출신인 흑인 장군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ceo)는 부사령관이 되었으나 1896년 12월에 서부전선에서 전사한다. 미국은 아이티에 이은 제2의 흑인공화국 탄생을 염려하여 독립군에 대한 원조를 거부했다.
독립군이 쿠바의 절반 이상을 해방시키자 쿠바의 독립을 원하지 않은 미국은 쿠바 전쟁에 개입하려 했다. 그러자 시카고의 <노동자세계(Labor Worl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전쟁은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내서 치르는 가난한 사람들의 전쟁이다. 늘 그렇듯 부자들은 전쟁으로 이득을 본다." 그렇다. 가난한 쿠바 사람들이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쟁에 미국은 참전하여 결과적으로 미국의 자본가들을 살찌게 했다. 그 반대급부는 쿠바 인민의 가난한 삶이었다.
미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자국의 젊은이들을 죽이다
1898년 미국은 체류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스페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함 메인 호를 아바나 항에 입항시킨다. 입항한 지 3주도 지나지 않은 2월에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군함 메인 호가 폭발하여 260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스페인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내부에서 폭발한 것으로 판명 났으나 미국은 스페인 함정이 쏜 어뢰에 맞아 폭발했다고 주장하며 언론을 조작하여 이를 스페인과 전쟁에 빌미로 삼았다. 스페인은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미국은 일방적으로 4월 21일 선전포고를 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자작극이었다. 미국이 메인 호를 스스로 침몰시켰다. 미국은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자국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1898년 4월 미국은 스페인과 국교를 단절하고 스페인과 전쟁에 돌입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55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 대부분은 싸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군수업자가 납품한 부패한 음식을 먹고 죽었다. 이미 동부를 점령한 독립군은 미국이 쿠바 공화국 수립을 도와줄 것으로 믿고 함께 스페인과 전쟁을 했다. 결국 미국을 당할 수 없었던 스페인은 12월 10일 미국과 파리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조약에 쿠바 대표단을 참석시키지 않으면서 스페인 민간정부가 공공업무를 계속 보도록 했다.
파리 조약으로 스페인은 쿠바는 물론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그리고 괌을 미국에 넘기게 된다. 스페인과 미국 간 전쟁의 명목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지만, 미국은 새로 얻은 이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필리핀은 후에 독립했지만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푸에르토리코는 파나마 운하 공사를 위한 석탄 보급항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12월 19일 독립군 총사령관인 고메스는 쿠바가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전에는 절대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그러나 1899년 1월 1일 쿠바는 미국으로 이양됐다. 미국은 우선 쿠바혁명당을 해체하였고 독립군을 해산했다. 쿠바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면서 쿠바 역시 합병하려 했다. 그러나 쿠바의 합병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할 것이라는 미국 남부의 강력한 반대로 이 계획은 무산됐다.
미국, 내정 간섭할 수 있는 헌법을 강요하다
비록 쿠바를 합병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은 1901년 쿠바의 내정을 간섭할 수 있게 하는 플래트 수정안(Platt Amendment)이 포함된 쿠바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 수정안에 의해 미국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쿠바에 군사 개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관타나모에 해군기지를 세워 실질적으로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제2차 독립전쟁으로 40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으나 쿠바는 해방되지 못하고 스페인에 이어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년간의 미군정 시대가 끝나고 1902년 친미주의자 에스트라다 팔마(Thomas Estrada Palma)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자치주의를 주장하는 정부는 독립주의자들을 강경히 대처했고 미국 자본은 쿠바를 잠식해 갔다. 플래트 수정안을 근거로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관타나모를 영구히 임대하여 이곳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아직도 관타나모는 미국이 점령하고 있다.
1906년 8월 피나르 델 리오와 아바나 그리고 라스 투나스 등에서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에서 독립전쟁의 영웅 퀸틴 반데라스(Quinatin Banderas)가 정부군의 습격으로 사망하자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미국의 개입으로 1909년 호세 미구엘 고메스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고메스는 독립운동의 총사령관이었으나 쿠바 정부의 부패는 더 심해졌다. 이후 독립군 출신들이 대통령 직을 이어가기도 했으나 강력한 독재를 실시하면서 정부의 부패는 점점 심해지고 사회는 어지러워졌으며 경제는 미국이 독식하여 파탄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쿠바, 진정한 독립을 이루다
독재정부와 미국의 내정간섭에 반대하는 쿠바 인민의 투쟁으로 1933년 당시의 대통령은 하야하고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혼란스런 정국에 군부 출신인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가 등장했다. 바티스타는 1934년에서 1940년까지 육군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정부를 조정했다. 1934년 폐기된 플래트 수정안은 미국의 군사개입에서 경제침략으로 방향을 바꾸어 쿠바와 다시 체결되었다. 1940년 바티스타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쿠바혁명당이 집권했으나 집권하는 동안 내내 내부분열에 휩싸였다. 그러자 1952년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다시 장악했다. 그는 미국의 원조를 적극 유치했고 반공을 내세워 소련과 단교했다. 바티스타는 미국의 경제와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강력한 독재통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혁명군에 쫓겨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가 쿠바를 탈출하게 되면서 쿠바는 진정한 독립을 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0911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
스페인 정복자들의 '야만'에 대한 비판의 불을 댕긴 사람은, 바로 콜럼버스와 거의 동시대인이었던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였다. 라스카사스 신부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신대륙에 왔다. 그는 1510년, 사제에 서품된 뒤에도 계속 부를 축적하는 등 다른 정복자들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라스카사스 신부는 몬테시노스 신부가 원주민의 운명에 관해서 던졌던 "이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요? 그들은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까?"라는 질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식민지 체제의 불평등과 불의를 시정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원주민에게 저지르는 수많은 범죄행위를 고발했다.
원주민도 스페인 왕의 신민(臣民)이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누려야 하고, 그들은 지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으며,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애롭게 교화되어야 한다고 신대륙과 구대륙 양측을 오가며 끊임없이 주장했다. "설사 그들이 이교(異敎)의 신앙을 지녔다고 해서 그들을 인간의 종(種)에서 제외시켜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이교도이기 때문에 그들을 개종시킬 명분이 더 있는 것 아닌가?"라고 라스카사스 신부는 되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