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 살던 몇 년간 골프 연습장에 부지런히 나갔던 때가 있었다. 아침마다 1시간정도 부
담 없는 몸 비틀기와 더불어 거기서 만난 지인들과 커피 한 잔 나누면서 담소하였던 것이 즐
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운동하러 나오는 여자들은 비교적 생활이 안정된 편이어서 그런지
여간해서는 멤버가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직업이 뭔지, 취향이 뭔지 다
아는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 아직도 종종 만나는 친구 A는 그림을 그리는 여자
다. 그녀는 자기가 소유한 건물의 4층 전체를 자기의 화실로 쓰고 있다. 커다란 호수가 바라
다 보이는 한적한 곳에서 호젓하게 그림을 그리는 그녀. 처음엔 그녀의 그런 삶에 대한 호기
심 때문에 꽤 자주 그 화실에 놀러가서 구경도 하고 밥도 얻어먹었었다. 생활의 여유를 즐기
는 아마추어 화가라니 얼마나 우아한 인생인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골프 연습을 하러 나오는 여자들 중 그림을 전공했거나 그리는
여자들이 꽤 많았다. 일단 내가 알게 된 사람만 해도 다섯 명이었다. 그들 중 한 여자는 자
기가 그린 100호 짜리 풍경화를 축소해서 자기 명함의 배경으로 쓰기도 했다. 그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설레임으로 살고 싶은 여자 ㅇㅇㅇ’
거의 언제나 특이하게 생긴 모자를 꼭 쓰고 왔던 B도 그랬고, 자기 그림을 보여 주겠다고
나를 자기 집으로 기어이 초청했던 S도, 학원을 운영한다던 X도 모두 그림쟁이였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상당히 많다. 친정 조카며 사촌동생들이 대부분 시쳇
말로 한 그림 하는 재주꾼들이다. 媤家의 여자들도 거의 다 미술대학을 나왔거나 현재
다니고 있다. 그런 그들의 전공도 여러 분야다. 시각 디자인, 서양화, 조소, 무슨 심리 미
술 이래나 뭐래나 하는 것도 있고........
내가 어렸을 때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은 그림을 포함하여 미술 계통의 공부나 일을 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물론 문화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데다 또 그런 분야의 직업이 늘어난 때문이긴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평
범하게 그리는 그림재주 정도는 그렇게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운전을 하는 것처
럼 너무 흔한 무슨 기능쯤으로 인식될 지경이 되어 버렸다. 사실 나는 아주 그림을 잘 그리
거나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매우 대단하게 생각하고 흠모한다. 물론 내가 손재주가 별로
없는데다, 국민학교 시절 만화를 열심히 그려봤던 기억 외에는 미술이라고 일컫는 본격적인
그림에 대해서는 아주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미술 시간조차도 좋아하질 않아서, 중고
교 시절 내내 우리를 가르쳤던 미술선생과도 사이가 영 별로였다. 그래서 나중에 아이들을
키우면서 애들의 정서생활에 도움도 될 겸, 어린시절의 아쉬움도 해소할 겸, 해서 미술교사
를 한 명 초빙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겨우 일주일에 한 번이긴 했지만, 아이들 배우는 김
에 나도 옆에서 데생을 곁다리로 배웠다. 그런데 그 교사 말이 내가 제법 그림감각이 있다
는 것이었다. 그림 얘기만 나오면 맨날 주눅부터 들던 나는 그 말에 사기충천하였다. 그래
서 그날 이후 며칠 간 열심히 데생한 꽃병과 공을 여봐란 듯이 베란다에다 이젤과 함께 그대
로 펴 놓았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오는 사람마다 “어머, 저거 누가 그렸어요?” “내가
그렸죠.” “그림이 전공 인가요?” “아니. 그냥 심심해서요.” “오, 재주가 좋으시네
요.” 뭐 이랬었다는 거다. 하지만 그 데생 작품이후로 내가 그 이상의 흥미를 가지지는 못
했던 것을 보면, 내게 미술적 재능이 없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하기
는 했다. 나도 그림을 좀 더 일찍이 배울 기회를 가졌더라면 적어도 골프연습장의 그녀들만
큼의 취미생활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가끔 글과 말의 허무감 때문에 회의에 빠질 때는 나도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다. 눈앞에 펼
쳐져 있는 사물을 화폭에 옮기는 일에 푹 몰두하고 있는 그 순간의 무념무상. 그 순수함이
부러워서....... 나의 큰 오빠는 학창시절 어지간한 미술대회에는 나갔다 하면 다 큰 상을
받았을 정도로 훌륭한 그림재주를 갖고 있었다. 결국 그림과는 별 상관없는 일을 하며 먹고
살았지만, 그래도 한 동안 그는 회사일로 출장 갈 때면 작은 스케치북과 몇 가지 색의 사인
펜을 꽂고 다니면서 주변의 경치를 그려오곤 했었다. 슥슥 아주 쉽게 그려진 듯 유연하고도
섬세한 그 스케치북의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소녀시절의 난 얼마나 경탄을 했었던
가. 현실은 그에게 凡夫의 길을 가도록 만들었지만, 그의 재능은 아직도 그의 학창시절 친구
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토록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탁월한 재주꾼들인지도 모른
다. 다만 그것이 진흙 속에 묻힌 옥처럼 빛을 발한 기회를 갖지 못할 뿐.
중국의 名儒 ‘한유(韓兪)’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름지기 伯樂(황제의 말을 맡아 기르
는 사람, 즉 천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난 연후에야 千里馬도 있는 것이니, 千里馬란
늘 있는 것이나 伯樂은 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이 말은 즉 탁월한 인재감은 세상에 항상 있는 것이지만, 그 인재를 알아보고 제대로 그
에 맞는 양육과 가르침을 줄만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뜻이다. 비록 천리를 달릴 능력과 위
용을 타고 났다 하지만, 비루한 노예의 손에 맡겨져 더러운 구유에 입을 처박고, 변변찮은
먹이나 먹고 빌빌댄다면 어찌 그것이 천리마의 능력을 발휘하겠느냐는 것이다. 적절한 교
육, 또는 인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이지만, 이 글귀를 보면서 나는 가난과 답답한
현실 때문에 숱하게 묻혀버린 많은 才人들을 생각한다. 평범한 재능도 적당히 갈고 닦으면
일정 수준의 경지를 획득할 수 있거늘, 하물며 타고난 번득이는 재주가 있다면 두 말하여 무
엇하랴.
人間事,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고, 언제나 회한을 남기는 것이긴 하지만, 오빠의 삶에 대해
서 한 가닥 비애를 느끼게 됨을 어찌할 수 없다. 아까운 아들을 잃은 후 그가 다시금 그림
과 글씨를 시작했다고 한다. 뒤늦었음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풍편으로 전해 들었다. 아아, 왜 예술은 주로 불행한 生 속에서 꽃피는 것일까? 왜 그것은
悲壯美를 항상 품어야만 하는 것일까? 혹시 예술성이란 세상에서 찾기 힘든 伯樂을 대신하
여 불행을 그들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내 딸도 임자 잘못 만난 천리마가 아닐까 싶어서, 나는 가끔 딸에게 묻는다.
“채연아, 넌 뭐가 제일 하고 싶니. 뭘 가장 잘할 것 같니. 그림? 피아노? 아니면 바이올
린? 플룻은 어떨까?”
“아이, 엄마는 그런 거 다 싫어요. 강철의 연금술사’(일본만화)나 볼래요.”
"그래도 자기가 무엇을 젤 하고 싶은 지를 잘 알아서 빨리 계발해야지.”
“아, 난 괜찮아. 그런 거 몰라도 돼. 그냥 예쁜 사람 될 거야.”
“뭐? 그럼 나중에 성형수술이나 하려고?........”
하긴 내가 뭐 伯樂이냐? 애가 뭘 좋아하고 잘 할지 알 수 있을 정도면 나도 지금쯤 뭔가
한 작품 했게? 아아, 나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 무엇을 알 수 있으리오. 그저 하느님께서 딸
에게 좋은 길을 열어 주시길 바랄 뿐. 비록 천리마는 아닐지라도.
---P.G Princess---
카페 게시글
2. 낙서장
千里馬
안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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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
05.07.0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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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다니던 골프 연습장은 주로 철저한 자기관리 스탈의 30대 중반 커리어 우먼들이 많았는데...삼성동..테헤란로.. 그런 여유자적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과 같이 연습한다면...정말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확실한 계기가 되었을 것 같네요. 혜경 선배님 글 항상 너무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
오우, 땡큐....
어렵다는 분들이 골프!! 회사에서 임원이 아니면 치지 말라고 하는 통에 끊었습니다. 끊었다기 보다 소시적에 찝적되다 중단했죠. 나이들면 한적하게 집사람하고 골프치면서 하는게 인생의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