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세대론 동원 국민연금 개편 추진 / 노인과 달리 청년들은 제도 폐지 원해 / “복지 배분을 세대 문제 호도해선 안 돼”/ 정치권선 노인들 ‘표’ 구하려 갈등 이용 / 기초연금 아무런 기준 없이 지급 결정 / 선진국, 헌법에 '세대 간 형평성' 먕시 / 한국선 노인·청년 배제하고 정책 수립 / "함께 손잡고 미래로 나갈 방안 찾아야"
취업을 앞둔 한 대학생의 절규다. 그의 부모처럼 고도성장을 경험한 세대들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진 경우가 많다. 당시에는 노력에 따라 사회·경제적으로 올라설 수 있는 계층 간 사다리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이 교육을 받았음에도 지금의 청년은 미래를 비관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만이 아니라 고령화가 진행된 선진국에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유럽에서도 청년들 사이에 자신을 ‘패자 세대’로 보는 인식이 퍼져 있다. 윗세대보다 사회 주류에 편입될 기회와 가능성이 현저히 작은데도 더 많은 사회보험료를 부담한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유럽과 달리 고도성장을 경험했다고 해서 한국 노인이 잘사는 건 아니다. 국내 노인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반세기 만에 정치·사회·경제적 격변을 맞은 탓에 노인과 청년세대 모두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대가 서로 처지를 이해하고 돕기는커녕 청년은 기성세대를 향해 “기회와 가능성을 다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비난하고 노인은 “고생을 안 해 봐서 편하게 지내려고만 한다”며 젊은이들을 매도한다. 각 세대가 삶의 어려움을 서로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1일 전문가들에 따르면 정치권이 이런 세대 간 갈등을 부채질하며 골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정치권이 표를 얻기 위해 세대갈등을 이용하고 정부는 ‘세대 간 정의(正義)’를 고려하지 않는 정책을 펴면서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과 입법 과정에 세대 간 형평성을 반영한 나라들처럼 세대 통합을 위한 입법적,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념갈등과 지역갈등 못지않게 첨예한 쟁점이 된 이슈가 공적연금 개혁이다. 은퇴를 앞둔 50대가 서둘러 국민연금에 가입하고 있는 것과 달리 청년들은 제도 폐지를 주장하며 세대 간에 확연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국민연금 개편을 추진할 때마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대로 두면) 미래세대에 보험료 폭탄”, “세대 간 도적질” 등 세대론을 동원해 왔다.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에 성공한 여·야가 기세를 몰아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높이는 소득보장안에 합의하자 당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세대 간 도적질”이라고 힐난했다. 청와대도 미래세대의 부담을 강조하며 ‘세금 폭탄론’을 주장했다.
국민연금은 1988년 제도 도입 초기에 보험료율(3%)은 너무 낮고 소득대체율(70%)은 터무니없이 높게 설정됐다가, 지금은 적게 내고(보험료율 9%) 적게 받는(2028년까지 소득대체율 40%) 구조로 바뀌었다. 노후소득을 위해 적절하게 부담하자는 논리를 펴기보다는 각 정권이 그때그때 여론 눈치를 살핀 결과다. 그나마 변화도 ‘기금 공포론’을 동원한 탓에 대다수 국민은 “내가 낸 돈이 곧 없어진다”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연금제도의 핵심인 ‘세대 간 연대’가 자라날 틈이 없었다.
서정일 목원대 교수(교양교육원)는 ‘공적 체계로서의 복지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이해’ 보고서에서 “독일의 젊은 세대는 설문조사 결과 윗세대가 경제활동기간에 복지제도의 기초를 닦았고 세금을 납부하면서 인프라 구조를 확충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젊은 세대가 느끼는 부당하다는 정서는 복지정책 변화에 대한 반응이지 나이든 세대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인이라고 해서 모두 빈곤층이 아닌데) 계급, 계층 간의 빈부문제를 은폐하고 복지 배분을 세대 문제로 호도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노동개혁에도 세대갈등 동원
노인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공약 남발은 사회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대표 사례가 만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하위 70%에게 주는 기초연금이다. 연금 전문가들은 “70%는 빈곤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정치적인 기준”이라고 지적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선 때 모든 노인에게 주겠다고 공약했다가 재정 문제에 부닥치자 일부를 떼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청와대와 줄다리기를 하다가 끝내 사퇴했다. 세밀한 설계 없이 선거 때 주먹구구식으로 도입한 결과다. 주요 선진국들은 모든 노인에게 지급한 뒤 고소득 노인에게 준 지원금을 조세정책을 통해 환수하거나 빈곤선 이하 노인에게만 주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2013년 1월 서울 용산구 효창동 대한노인회를 방문한 뒤 배웅하는 대한노인회 관계자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들과의 간담회에서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어르신들께 노후 안정을 보장해드리는 건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며 노인복지공약 실천을 약속했다. 자료사진 |
사회 개혁의 명분으로 세대갈등이 동원되기도 했다. 정부가 2015년 일정 연령에 도달한 근로자의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를 추진하며 내세운 논리 중 하나가 “청년실업은 기성세대의 책임”이었다. 부모세대의 임금을 깎아 청년 고용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노총 소속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이 2015년 연맹 산하 41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금피크제 및 고용증가 간 상관관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금피크제 도입 이후 48.8% 사업장은 고용에 변동이 없었고 19.5%에서는 오히려 신규 채용이 감소했다. 김정석 동국대 교수(사회학과)는 “박근혜정부는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책으로 기성세대의 양보를 요구하면서 세대갈등을 부추겼다”며 “청년층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장년층의 과도한 임금 때문이 아니라 기업이나 사회가 그만한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책에 세대 간 형평성 반영해야
이제는 노인뿐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소외된 청년에게도 복지가 필요하다. 양측 모두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세대갈등을 조장하면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의 손해로 이어지는 ‘세대 간 제로섬’ 의식이 커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국민연금 등 세대 간 연대원칙에 기반을 둔 사회보장제도뿐만 아니라 국가의 기반인 조세제도까지 흔들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세대갈등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건 고령화사회에 국가를 망치는 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구 유럽과 자원을 기반으로 성장한 나라들은 헌법에 세대 간 형평성을 명시하고 입법과정에 세대 간 이익을 고려하는 장치를 뒀다. 유한한 자원을 현세대가 마구 쓰면 후세대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쿠바는 헌법에 “현재와 미래세대의 생존과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환경과 천연자원이 경제, 사회발전과 긴밀한 관계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명시했고, 독일은 “세대 간 형평성 유지를 위해 국가채무의 한계를 정한다”고 적시했다. 이러한 헌법적 가치를 준수하기 위해 입법 과정에 위원회를 둔 나라들도 많다.
한국은 미래세대는커녕 현재의 당사자조차 배제한 채 정치적 논리로 정책을 추진할 때가 많다. 오세제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세대갈등 해소를 위한 정치·입법과제’ 보고서에서 “국민연금, 기초연금 등 고령자 대상 정책은 대개 노인 당사자의 직접 참여 없이 관료와 전문가 집단, 표를 의식한 정치인과 정당이 중심이 돼 결정됐다”며 “노인과 청년 등 이해당사자 간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과정이 생략됐다”고 지적했다. 또 “비용부담 집단에게 납득 가능한 정보를 제공하고 동의를 구하는 정치 과정이 있어야 연금수혜자들이 무임승차가 아닌 사회적 동의에 입각한 정당한 수급을 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김정석 교수는 “대한민국은 기성세대와 청년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미래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침몰하는 배 위에서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을 하다가 몰락할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며 “어느 쪽일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