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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탐방단(구미문화지킴이. 옛.생활문화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1. 불국사(佛國寺)!
신라는 부처의 나라, 절의 나라!~
신라 5악중에 하나, 경주 토함산.
그 토함산 기슭에 한적하게 자리잡은 불국사.
이곳엔 1,200년전 신라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불국사.
신라인들은 왜 이 절의 이름을 '불국(佛國)'이라고 했을까?
"불국사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도 친근한 절입니다.
한때는 신혼여행지로 꼬박꼬박 찾았던 곳이고
지금도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 문화재를 자랑할 때도 첫손으로 꼽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국사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요?
오늘은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불국사의 새로운 면모를 들추어내볼까 합니다.
우선 절이름 불국사, 여기에 주목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불국!
부처불(佛), 나라국(國)!
부처의 나라!
절의 나라!
왜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되었을까요?
이 뜻을 푸는 단서가
불국사 안마당에 있습니다.
2. 통일 이후 쌍탑 양식,
왜? 석가탑과 다보탑은 판이하게 다른 모습일까?
석가탑, 그리고 다보탑.
여기서 사진 찍던 추억을 갖고 계십니까?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두 탑 사이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었던 기억 말입니다.
그런데 그 두 탑의 모양을 보십시요.
너무나 판이하게 다릅니다.
왜 이렇게 다른 모양의 두 탑이
유독 불국사 안마당에만 존재하고 있는걸까요?"
불국사가 세워진 것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다.
그 후 몇 차례나 재난을 당할 때마다 중건을 하여
현재의 모습이다.
불국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다보탑과 석가탑.
대웅전 앞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왔다.
왜 다보탑과 석가탑은 이렇게 절 마당에 중심을 두고 서 있는 걸까?
"원래 탑은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화장을 하자,
거기서 나온 것이 사리거든요.
부처님의 육신은 없어졌지만,
그 육신에서 나오신 유해인 사리는,
그 당시 부처님을 숭배했던 모든 인도의 불교인들이
탑에다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를 원했고,
그래서 탑은 곧 부처님을 상징하고
바로 그 탑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 성타 스님(불국사 주지)
삼국시대부터
경주에는 절과 탑이 많았다.
<삼국유사>는 당시 모습을
8자로 축약해서 기록하고 있다.
"寺寺星張 塔塔雁行(사사성장 탑탑안행)"
"절은 하늘의 별처럼 자리잡았고
탑들은 기러기 날으는 양 높이 솟았다."
<신라왕경도>에서도
곳곳에 흩어져있는 사찰들을 확인할 수 있다.
동천사지(東泉寺址)
분황사(芬皇寺)
황룡사지(皇龍寺址)
미탄사지(味呑寺址)
황복사지(皇福寺址)
중생사(衆生寺)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신라 어디에나 절 하나가 들어서면
탑이 들어섰다.
처음엔 한 개의 탑이 들어섰다가(일탑 양식)
통일 신라 이후엔 쌍탑이 세워졌다.
최초로 쌍탑이 세워진 건 감은사.
통일을 이룬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절의 쌍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감은사지 3층 석탑.
탁월한 균형미로
이후 3층 석탑의 원형이 된 이 감은사지 3층 석탑.
그 조각과 크기, 수법까지 똑같은 쌍둥이 탑이다.
그런데 불국사 안마당에 서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그 모양이 너무도 판이하다.
석가탑(국보 21호)은
간결하면서도 육중한 힘이 느껴지는 기단부와
경쾌한 균형미로 쌓아 올려진 탑신부로 인해
단순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이에 비해 다보탑(국보 20호)은
석재를 목재처럼 사용해
각층마다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
해답은 경전 속에 있다.
"법화경의 내용대로,
석가여래가 설법을 할 때
다보여래가 상주 증명을 한다는,
그러한 내용을 탑으로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석가탑은 석가여래가 계신 탑이라는 것이고
다보탑은 다보여래가 계신 탑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박경식 교수(단국대 사학과)
법화경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그의 중생들에게 진리를 설명하자
과거불인 다보부처가 그 말이 진리임을 증명했다고 한다.
見寶塔品(견보탑품)
釋迦如來常住說法塔(석가여래상주설법탑) - 釋迦塔(석가탑)
多寶如來常住證明塔(다보여래상주증명탑) - 多寶塔(다보탑)
다보탑과 석가탑의 이름도 거기서 유래했다.
이렇게 법화경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해낸 것이 다보탑과 석가탑인 것이다.
그래서 두 탑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얼마나 법화경의 내용을 충실히 표현해냈는지
우선 다보탑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높이는 3만리, 기단의 넓이는 1만 5천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굉장히 높고 크다는 뜻이죠.
그와 더불어서 난간과 감실이 수천개씩 조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박경식 교수(단국대 사학과)
법화경에 따르면
다보부처의 화신인 다보탑은 다음과 같다.
"난간이 오천개
문 없는 작은방이 천만개
깃발이 수없이 많고
보배로운 방울이 억만개"
그 뿐만 아니다.
'사면에선 아름다운 향이 뿜어나오고
하늘에서 둥근 꽃이 비오듯 뿌려졌다'
지극히 화려한 모습임이 명확하다.
다보탑을 보면
제일 밑바닥에 네모난 기단이 세워져 있고
네 면엔 각각 열 개의 계단이 자리잡고 있다.
그 위에 기와집 같은 추녀를 얹고
사각의 난간을 둘렸다.
또 팔각정을 세우고
대나무 기둥을 박은 다음
연꽃 수반을 올렸다.
그 위에 팔각판을 얹고
상륜부를 만들었다.
그 어느 탑보다 복잡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아주 단순하다.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네모난 중생'이,
정진을 함으로써
모서리가 떨어져나가고,
팔각으로...
원형으로...
원만한 깨달음의 과정을
탑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사람만이
불교의 최고 경지인 '연화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난간 사이에 숨겨진 대나무 기둥은
연화 세계를 만나기 위한
꺽이지 않는 힘의 상징이다.
다보탑에는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돌사자다.
돌사자는
바로 이런 부처의 깨달음을 전파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사자는 동물의 왕이예요.
근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게
진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왕중왕이고,
진리 중에 진리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를
동물의 왕 '사자'로 상징적으로 형상화해서 나타낸 것이죠.
탑을 만들 때
예를 들어 화엄사 4사자 3층석탑도
네 마리의 사자가 부처님의 진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 조형했고,
다보탑의 사자 경우도
부처님의 진리, 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그런 모습이지요."
- 도업 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장)
경전에 충실했던 것은
석가탑도 마찬가지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바위를 깔고 앉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다.
석가탑은 그 시대 다른 석탑들과 유사하지만
석가탑에만 보이는 특징이 있다.
바로 팔방금강좌다.
"팔방금강좌란 것은
부처님이 앉는 자리니까,
팔방이란 여덟개라기보다는
부처님이 앉은 자리를 중심으로,
사바 세계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다 불국토로 만든 자리,
그리고 그 모든 세계에 다 부처님이 앉아계신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이
아주 다른 모습으로 한 자리에 서 있는 건,
경전의 내용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바램 때문이었다.
3. 석가탑 속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세계 최초 목판인쇄술!~
"다보탑과 석가탑이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해낸 것이란 증거는
석가탑에서 또 나왔습니다.
1966년,
석가탑은 자신의 몸 속에 간직한 천 년의 비밀을 세상에 공개하게 됩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훼손과 도굴을 막기 위해
석가탑을 해체, 보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2층 탑신 부분에서
가로, 세로 41cm, 깊이가 19cm 되는 구멍이 발견이 되고
거기에서 석가탑의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모두가 국보급 반열에 들어갈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었습니다.
석가탑의 몸체 부분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석가탑 2층 탑신에서 맨 처음 나온 것은
사각형 금동 사리함이었다.
뒤이어 청동으로 만든 비천상,
나무로 깍은 작은 탑들,
관옥, 수정, 구리, 향을 싼 봉지도 나왔다.
그런데 가장 발굴팀의 관심을 끈 것은 비단보자기.
폭 6.7센치 , 길이 6.2미터의 두루마리 경전이 있었다.
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그렇다면 '다라니경'이란 무엇일까?
"다라니경이라고 하는 말은
한문으로 '총지',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라니경이란 말은
원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경이라고 말하고,
그 핵심, 요지,
이런 것을 다 농축시켜 뽑아놓은 것을 다라니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다라니는 글로써는 짧고 조그맣지만
그것이 팔만대장경을 다 포함하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
그런데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이
특별한 관심을 준 것은 이유가 있었다.
7세기말에서 8세기초까지 사용되었던
당나라 측천무후 때 사용된 글자가 발견된 것이다.
이것에 의하면 이 다라니경은
적어도 751년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8세기초에 건립된 황복사지에서 발견된 사리함 뚜껑에 새겨진 글씨 때문이었다.
황복사 사리함의 글씨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글씨체가
똑같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이란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일본 나라시에 있는 법륭사, 즉 호오류지의 5층 목탑이 있습니다.
그 탑 안에서 '백만탑다라니경'이 발견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라니경은 770년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석가탑 다라니경보다도
20년 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동안 법룡사 다라니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석가탑 다라니경이 발견되면서
목판 인쇄술의 원조는 우리나라임이 증명되고 인정되었습니다."
- 박방룡(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세계 최고의 이 목판 인쇄술은
부식이 심해
발견 당시 33조각으로 갈라져 있었다.
현재는 과학적인 복원 과정을 거쳐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이 다라니를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었던 것일까?
첫 작업은
경전을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사경).
정결한 몸으로
신비로운 축문 다라니를 한 자 한 자 베껴쓰는 사경 작업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극정성이 담겨야 한다.
글자 한 자 쓸 때마다
매번 절을 할 정도로 마음을 쏟았다.
이렇게 석가탑 다라니는
한 자 한 자를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라
쓰는 이의 혼이 담긴 결과물인 것이다.
이렇게 한 자 한 자 베껴쓴 후에는 판각 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엔 세계 최고의 신라 목판 기술이 접목된다.
옛날 그대로 판각을 하는
고인쇄 문화 전수관(청주)을 찾았다.
이곳에선 지난 1991년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을 그대로 복원해냈다.
5,336자를 그대로 복원하는데는
13개월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제작진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실재 크기대로 판각해줄 것을 의뢰했다.
폭 6.7센치의 목판에다 글자를 새겨내는 작업은
그야말로 고도의 긴장과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몇 mm의 오차,
손의 힘조절의 약간의 흔들림으로도 목판 전체 과정을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최고의 장인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굉장히 힘든 작업인데 한 자 파는데도 수십번 반복해요.
수십번 정도도 아니구요, 또 다듬질, 바닥 처리까지 상당히 까다로운데,
저희 같은 경우는 작업이 끝나면 눈도 아프죠, 팔도 아프지, 온몸 안아픈 곳이 없죠.
눈에 잘 보이는 글자면 또 모르지만 이건 거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은 글자니까요."
- 임인호(판각 전수자)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글자를
돋보기로 확인해가며
하루에 팔 수 있는 글자는
하루에 열여섯자 정도.
목판의 앞뒷면에 꼬박 240자를 새기는 데
보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이렇게 다라니를 사경하고 판각해서 탑 안에 봉안했던
신라인의 기술은 당시로선 최첨단의 것이었다.
"신라인들의
종이 기술이라든가, 판각, 모든 과학 기술의 총집약으로 봐야 되죠."
- 오국진(고인쇄문화전수관 금속활자장)
통일 신라 당시 최첨단의 목판 인쇄 기술과
당대 사람들의 뜨거운 종교적인 열망이 농축되어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왜 신라인들은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이 대다라니경을
석가탑 속에 모셔둬야 했을까?
"그러니까 탑에다가 부처님의 몸의 농축된 요지인 사리도 모시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지인 법사리에 해당되는 다라니도 그 속에 모셨죠.
왜 탑 속에 모셨는가 하면 모든 재난이 사라진다는 것이죠."
- 법륜 스님
재난이 없기를 갈망한 신라인들은
석가탑의 모습 뿐아니라
그 속도 경전의 세계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결국 신라인들의 이런 열망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술까지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신라인들은 경전을 형상화해서 탑을 만들고
그 속에 온갖 정성을 담은 다라니까지 넣음으로써
혼을 불어넣으려고 한 것입니다.
4. 그림자 없는 탑, 그리고 연지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 이 석가탑에 또 다른 이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죠?
무영탑입니다.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
둘은 혼인한 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백제 석공 아사달이 석가탑을 만들기 위해서
신라 땅으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게 되자
아사녀는 남편을 따라 서라벌로 찾아오게 되는데
탑이 완공이 되고 그 그림자가 연못에 비추어지게 되면
그때서야 남편이 돌아온다고 했는데,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는 비추어지지 않고
기다림에 여위어가던 아사녀는
결국 그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게 되고야 만다는 이야깁니다.
탑 그림자가 비춰지지 않아서 석가탑이 무영탑,
'그림자 없는 탑'이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석가탑 근방 어딘가에
그 그림자가 비춰질 연지가 있었던 걸까요?
여기서 조선 시대 차의 성인으로 불리우는
초의선사의 시를 한 편 살펴보겠습니다.
"昇天橋外九蓮池(승천교외구연지)
七寶樓台水底移(칠보누대수저이)
無影塔看還有影(무영탑간환유영)
阿斯來鑑到今疑(아사래감도금의)
승천교외 구연지에
칠보누각 아롱지고
무영탑 그림자를 보노라니
아사녀가 와서 보는 듯 하구나"
그러니까 거기엔 분명이 연지가 있었고
석가탑 그림자가 비췄다는 그런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탑의 그림자가 비칠 연지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처음 세워질 당시엔 2천여 전각으로 세워졌던 웅장한 불국사.
비를 맞지않고도 경내를 다닐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몇 차례 전란을 겪으며 수난을 당하게 된다.
1910년대 불국사 모습.
1970년대초 복원공사 모습.
불국사 복원의 노력은 계속 이어져왔다.
그러나 그나마 불국사가 옛 모습을 갖게 된 것은
70년대 대대적인 발굴, 복원 공사 이후였다.
그런데 그 당시 공사엔
흥미있는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발굴 당시 내리던 비로
웅덩이에 물이 고이자
말로만 전해지던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췄던 것이다.
그곳이 바로 연지로 추정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당시 복원 공사에서 연지의 복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불국사 연지에 대해 연구하는
<동국대 사찰조경 연구소>를 찾았다.
이곳에 조경학과 홍광표 교수는
복원되지 않은 연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내는 준비작업 중이다.
우선은 불국사 발굴 복원 공사 보고서에서 낸
연지의 위치와 크기 등이 타당한 지 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홍광표 교수팀과 함께 불국사 현장 실측 조사,
이곳에 과연 어디에, 얼마만한 연지가 있었는지 현장에서 가름하기 위해서다.
불국사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연지의 크기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실측 결과 청운교 남쪽에서 발견된 연못은
대략 동서 39.5미터, 남북으로 25.5미터에 이르는 타원형이고,
깊이는 약 2~3미터 정도로 돌로 쌓아올려 지은 인공 연못이라 전한다.
그렇다면 현재 청운교 앞 공터와 정원수 공간이
모두 연지터로 포함되는 자리였다.
옛날 신라인들은 청운교, 백운교 앞에서
인공으로 만든 연못을 만났을 것이다.
그럼 물은 어디서 어떻게 끌어왔을까?
토함산 정상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불국사가 나온다.
이 물이 불국사 연지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계곡물을 어떻게 연지로 끌어들였을까?
조선 선조 때
간재 이덕홍(선조 13년)의 경주여행기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덕홍이 경주를 여행하고 기록한 <동경유록(東京遊錄)>엔
불국사 구석구석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 돌다리를 건너니
큰바위 위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 북쪽에
나무 홈통을 통해
날으는 샘처럼
물이 횡으로 멀리 흐른다.
물이 떨어지는 아래에는
석조가 있고
날으는 샘 위쪽에는
구름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는 돌을 깎아 만든
무지개와 같았다."
토함산 정상부터 내려온 계곡물이
일정 높이로 설정된 나무 홈통을 통해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이 흘려 들어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범영루 아래의 물받이와 배수구다.
이 배수구를 통해 나오는 물은
계곡에서 흘려나오는 물이 아니었다.
불국사 경내에서 물이 흘려나왔던 곳이 있었다.
대웅전 뒷편의 무설전 근처엔
불과 얼마전까지 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샘의 물은 무설전을 거쳐 대웅전 서편을 거쳐
석가탑 옆을 지나 범영루 옆으로 낸 배수구에 이르게 된다.
---------- 무설전
ㅣ
ㅣ
ㅣ 대웅전
극락전 ㅣ
ㅣ
ㅣ 석가탑 다보탑
ㅣ
안양문 범영루 자하문
ㅣ
백운교
청운교
이렇게 계곡물과 샘물이 서로 만나
연지는 늘 깨끗한 물로 가득 채워졌던 것이다.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써 지금
부감된 항공 사진을 놓고 복원해보려고 합니다."
- 홍광표 교수(동국대 사찰조경 연구소)
동국대 사찰조경 연구소에서는 현장 조사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그래픽으로 불국사 연지를 복원해봤다.
그렇다면 이런 연못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목조 비구를 통해서
물을 폭포처럼 떨어트려 물보라를 일으킨다든지,
연지로 인해서 생기는 안개 효과를 통해
석당 위에 성스러운 공간을 환상적으로 연출하려고 하는,
그런 의도도 숨어있지 않았겠는가 싶습니다."
- 홍광표 교수
불국사를 세웠을 당시
신라인들에게 이 연지는 왜 필요했을까?
"여러 종교들이 이쪽 차안의 세계로부터
저쪽 피안의 세계로 가는 상징들을 갖고 있죠.
이 연지는
차안과 피안의 세계를 구분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해줬죠.
이 현실의 세계에서
저쪽 아름다운 피안, 극락 세계로 향해 갈 때,
배를 타고 가거나,
혹은 다리를 건너서 가거나,
혹은 수레를 타고 간다는 것이죠."
- 김상현 교수(동국대 사학과)
불국사 연지.
그것은 지금은 잃어버린 신라인들의 또 다른 불국 세계였다.
"연지가 있을 때 어떨까요?
그것은 세속과 극락 세계를 확연히 구분하고,
푸른구름, 흰 구름의 청운교, 백운교의 의미도 완벽하게 살아나지 않습니까?
아마도 아침, 저녁이면 이 연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처럼 신비롭게 이 불국사를 감쌌을 것입니다.
5. 불국사의 독특한 구조,
독립된 각자가 하나의 전체로 조화!~
그렇다면 보라빛 노을이라는 자하문도 그저 문학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로 나타나보이는 현상이겠습니다.
연지를 지나
저와 함께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국토로 향하게 하는 이 계단은
아랫쪽 청운교와 윗쪽 백운교를 합해 모두 33개,
이 33은 깨달음의 과정을 나타내주는 그런 숫자입니다.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겪는 중생들이
한 발 한 발 노력하여 부처의 세계에 가 닿기를 염원하며 밟아올라가는
희망의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공덕을 쌓으며 이 무지개 다리를 다 올라서면
거기에는 자하문이 있습니다.
보라빛 안개 가득한 문, 자하문(紫霞門).
이곳을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불국 세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뜯어보면 무엇 하나 그냥 지어진 게 없지 않습니까?
조형물 하나, 건축물 하나도 모두 깊은 뜻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국사는 하나하나의 조형물에만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다.
불국사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공간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다
또 각 공간이 크기도 서로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불국사가 다른 사찰과 가장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가람의 배치가 독특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이 배열되어 있는데
불국사는 회랑,
즉 담장을 쳐서 각각의 건물들을 독립시켜놨다.
불국사의 주요 건물로는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자하문, 좌경루가 있고,
뒷쪽으로는 대웅전이 있으며,
빙 둘러 회랑이 쳐져 있다,
그리고 불국사 뒷편으론 관음전, 비로전이 있다.
대웅전 옆 극락전은
연화교, 칠보교, 그리고 안양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불국사의 전각들은
서로 다른 공간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불국사의 중심인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 부처가 머물고 있고,
현실 세계를 상징하는 곳이다.
법화경을 바탕으로 지어진 세계다.
극락전(極樂殿)은
아미타 부처가 머물며
죽어서 가는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곳이다.
아미타경에 근거해서 세워졌다.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비로전(毗盧殿)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을 상징하고 있다.
화엄경이 바탕을 이룬다.
가장 낮은 중생,
가장 고통받는 백성들을 손수 돌보는 관세음보살은
바로 관음전(觀音殿)에 머물고 있다.
법화경에 근거한다
불국사는
이렇게 다양한 부처들이 독립해 있으면서
전체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각 불국의 세계를 따로 따로 건설하면서도
또한 그것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으로 만들었죠.
획일적인 하나도 아니고,
떨어진 별개도 아니고,
각각으로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
이것을 화엄의 세계라고 하지요.
화단의 꽃이 크기도 다르고, 종류도 다르고, 색도 다르지만,
같이 피어서 아름다운 화단을 이루잖습니까."
-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
6. 대웅전이 크고 높은 이유?
- 극락 세계보다 현실 세계가 연꽃자리!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각 영역들은 규모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웅전의 넓이는 좌우폭 51미터, 전후폭은 71미터인데,
극락전의 넓이는 좌우폭 38미터, 전후폭이 42미터다.
이를 평수로 계산해보면
대웅전쪽은 1,072평,
극락전은 473평이다.
대웅전의 넓이가 두 배가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각의 넓이만 봐도
대웅전 64평, 극락전 27평이다.
범영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전각의 넓이가 이렇게 확연히 구분된다.
넓이 뿐만 아니라
높이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대웅전의 영역이
극락전 영역보다 석축 한 단 크기만큼 더 높다.
높이의 차이는 <불국사정면도>를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극락전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건물 한 치의 높이로 높게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대웅전과 극락전은
높이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이는 셈이다.
그렇다면 아미타 부처의 극락전보다
석가모니 부처의 대웅전이 크고 높게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석가모니 부처의 세계를 특별히 크고 높게 한 것은
시각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니까
가까이에서 보니까 크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측면도 있고
현실 세계를 강조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세계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강조하고 중시한 의미라 봅니다."
- 법륜 스님
불국사를 지은 신라인들에겐
살아있는 세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7. 불국사의 구조,
서로 다른 종파와 경전을 너머!~
그렇지만 어느 한 부분이 강조되었다고
다른 부분이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하나만 중시되는 것이 아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신라인들에겐 더욱 중요했다.
이런 신라인들의 생각을 불국사는 표현해놓고 있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이상 세계를
불교가 말하는 불국 세계를 통해 조형화 시켜보려고 한거죠.
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선
하나로 단순화 시켜서 이 세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아미타경, 혹은 법화경, 화엄경에서 말하는 불국 세계를 ,
하나의 세계에 담아보려고 했던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상 세계를 한꺼번에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 김상현 교수
오묘한 조화의 세계를 이룬 불국사.
일주문을 지나면
불국사의 수문장 사천왕을 만난다.
세속과 불국 세계의 경계인 연지를 지나면
볼 수 있는 것이 청운교, 백운교.
신라인들은 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랐다.
한 단 한 단 오를 때마다 욕심을 버리고 정상에 올라서면
거기서부턴 본격적인 부처의 나라다.
석가모니불의 성전, 대웅전 마당을 장식하는 석등과 탑.
마음의 불을 밝히고 스스로 정진하면 깨달음에 가 닿고
이승도 꽃밭이 될 수 있다.
"자, 어떻습니까?
불국사는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지요?
이 불국사 가람은 구석구석까지 예사롭게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하나의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보다 큰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파와 서로 다른 경전의 가르침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죠.
대웅전으로 가 보겠습니다.
특히 이 크고 웅장한 대웅전에선
죽어서 가는 내세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더 중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 세계를 부처의 세계로 만들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작고 하찮은 건축에도
온갖 정성을 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정성을 다한다는 말은
그것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그런 뜻인데,
그렇다면 신라인들에게
이 불국사를 만드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8. 석축, 엄청난 공력,
자연석과 인공석의 조화!~
불국사의 가장 특징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석축.
칼로 베어온 듯한 인공석에서
마구 가져다 쌓은 듯한 자연석까지
수많은 돌들이 불국사를 이루고 있다.
이 거대한 돌들은
불국사가 얼마나 세우기 힘든 절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가 20여 년이 넘어서도 완공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돌의 운반과 가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엄청난 양의 돌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불국사가 자리잡은 토함산.
석재 전문가와 그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직도 토함산 기슭 여기저기엔
불국사 공사에 떼낸 돌들의 흔적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거네요.
큰돌을 잘라서 쓰려고 쇄기를 넣었네요.
이쪽은 떨어지니 가져갖고 다른 쪽은 안떨어져서 남아있는 것이죠.
여기 이렇게 다 쇄기구멍이지요."
토함산에 있는 대부분의 돌이 화강암이고,
불국사에 쓰여진 돌이 화강암임을 볼 때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토함산의 돌들은
불국사를 건립하는데 유용하게 쓰인 것이다.
그럼 이 돌들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다뤄진 것일까?
삼국 시대 방식 그대로 산성을 쌓고 있는 이천의 설봉산성.
백제석성 복원공사다.
이곳에서 불국사의 돌이 어떻게 다뤄졌는지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쇄기를 박아 돌을 잘라낸다.
그렇게 잘라낸 돌 하나하나를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져 날라야 한다.
이렇게 폭68미터, 높이 2.2~5미터의 설봉산성을 만드는 데
10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총인원은 현재 14명이 투입되었는데요,
돌 전문가 4명, 석공 6명, 목도 4명입니다."
- 이의상(서원기공, 석공예 40년)
14명의 전문가가 잠시도 쉬지않고 매진하는 작업에서
불국사를 세운 신라인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불국사의 석축은
길이도 설봉산성보다 훨씬 긴 90미터인데다가
인공석과 자연석을 섞어 쌓아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런 기술을 가진 신라의 돌전문가들이
판석 하나를 가다듬고 제자리에 끼우는데
엄청난 공력이 들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 면을 다듬는데 자기가 정을 만들고, 망치를 만들어서 썼기 때문에,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30센치를 단위로 해서,
세 배 정도의 면, 하루 한 면, 1미터 정도 겨우 다듬을 수 있죠.
그렇게 앞면, 옆면 해서 돌기둥 하나,
사람 키높이 정도 돌기둥 하나 다듬는데 약 15일 정도 걸리지요."
- 권오달(남강석재, 석공예 명장)
당시 불국사 공사가 얼마나 대규모 공사였는지는
1970년 불국사 복원공사 보고서를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현대 기술로도 5년 동안 약 8만 6천여 명,
그 중 석공만 3만 3천 9백여 명이 투입된 엄청난 공사였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불국사 공사에 신라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대성이 751년 불국사 건설 시작,
774년에 완성을 못하고 죽자, 국가에서 완성"
9. 신라인들의 신심,
이곳에 불국토를 이루리라!~
그렇다면 신라는 당시 어떤 시대길래 그런 대규모 공사를 시작한 것일까?
불국사가 세워질 무렵은
신라 문화의 전성기였다.
수많은 걸작들이 이 때 만들어지고 세워졌다.
성덕대왕 신종.
독특한 석탑 양식과 탁월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유려한 석재 가공 기술과 온화한 불상의 분위기가 잘 살아나는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자연과 인공이 만들어낸 조형예술의 극치 안압지.
모두 세계적인 유산이다.
그런 문화적 토대와 자신감 바탕 위에
불국사는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조성된 문화유산의 상당수가 있습니다만
특히 당나라 대종에게 선물로 보낸 만불산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나라 대종이 보고
이것은 '하늘에서 만든 작품이다'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로
신라 예술의 수준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점이
바로 8세기 초중반의 상황이란 것이죠.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황룡사 대종 같은 것도 기록만 보더라도 상당히 대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신라는
사상적으로, 교학적으로, 또 불교문화예술적으로도
상당히 발전을 구가하던 시대였고,
그것이 곧 불국사 창건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상영 교수(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배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라인들의 마음이었다.
"건물을 지을 때 사람들이 모두 염불을 하면서 지었대요.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나무를 깍는 사람도 '나무아미타불'을 외면서 하고
돌을 다듬는 사람도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단순히 돈 받고,
혹은 강제 동원된 노동력에 의해서,
만리장성이나 궁궐을 지을 때처럼
민중의 고혈을 빨아서 지은 건 아니라는 거죠.
불국사는
동원된 신라인들의 신심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 법륜 스님
계층과 신분을 너머
순수한 마음 하나로 힘을 모은 사람들.
불국사는
당대 신라인들의 열망과 믿음이 결집하여 이뤄낸 산물이었다.
"저 서방정토만 극락 세계가 아니고,
저 인도만 부처님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라도
바로 부처님의 나라다,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타방이 아니라
여기 우리나라 신라가 부처님의 나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어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자는
신라인들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 법륜 스님
그래서 불국사는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절로 남아있는 것이다.
"통일을 이룬 후 100년이 지나면서 신라는
정치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고
문화 또한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신라는 소중하게 얻은 이 기회를
소중하게 영구히 유지되기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대립과 갈등,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땅,
이상 세계를 멀리서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라 땅 경주에 부처의 나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국사입니다.
최고의 기술력, 문화적 자신감,
그리고 신라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하나되어 만들어낸 이상 세계.
불국사.
그래서 신라인들은 이 절에 '불국'이란 이름을 당당하게 붙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추운 날씨가 이어집니다!~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