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궁(雨花宮)에 걸려 있는 주련 10개 중 맨 먼저 4구는 조선 후기 야운대사(野雲大師)의 칠언율시에서 발췌하였고, 그 다음 4구는 조선 중기 소석가(小釋迦)라 불리는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선시이며, 나머지 2구는 조선 초기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설잠(雪岑) 스님의 시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주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명이자 5세 신동(神童)이라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라면 누구나 잘 아시겠지만 설잠(雪岑) 스님이라면 혹 낯설지 모르겠습니다.
《전통사찰총서》를 통해 매월당 김시습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김시습(金時習, 세종 17년. 1435 ~ 성종 24년. 1493)은 문인으로서 이른바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사람이자 또한 스님이기도 하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봉(東峰)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碧山)ㆍ청은(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 등이며,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본관은 강릉이며, 고려의 시중(侍中) 김태현(金台鉉)의 후손이고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3세에 이미 시에 능했고, 5세에는 『중용(中庸)』과『대학(大學)』에 통하여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1455년(세조 1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문을 닫고 3일 동안이나 통곡하였다.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출가하여 설잠(雪岑)이라 이름하였다. 양주 수락사(水落寺)와 경주 금오산 용장사(茸長寺) 등에 머물렀는데, 그의 높은 학식이 알려져 승속을 막론하고 배움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1460년(세조 6년) 책을 사려고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맡았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했다. 1481년(성종 12년) 47세에 환속했다가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들어가 두타행(頭陀行)을 했으며, 1493년(성종 24년) 무량사에서 나이 59세로 입적했다. 유언에 따라 다비하지 않고 절 옆에 묻었는데, 3년 뒤에 파 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다고 한다.
숙종 때 그를 '해동의 백이(伯夷)'라고 불렀으며, 1782년(정조 6년)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청간(淸簡)이라고 내렸으며, 영월의 육신사(六臣祠)에 제향했다.
저서로는 『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錄後志)』ㆍ『탕유관동록후지(宕遊關東錄後志)』ㆍ『매월당사유록(梅月堂四遊錄)』ㆍ『매월당집(梅月堂集)』『화엄일승법계도주(華嚴一乘法界圖註)』ㆍ『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ㆍ『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ㆍ『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ㆍ『금오신화(金鰲新話))』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그의 사당인 청일사(淸逸祠)를 무량사 내에 짓고 그를 흠모하였다. 이 청일사는 1621년(광해군 13년) 당시 홍산 현감으로 있던 심완식(沈完植)이 무량사 옆에 조그마한 사우를 세우면서부터인데,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홍산 현감이던 권흔(權俒)에 의해서였다. 1704년(숙종 30년)에 사액(賜額)을 받았고 1866년(고종 3년)에 철폐되었으나 1970년 복구되었다. 청일사에는 김시습과 김효종(金孝宗)을 배향하고 있다.」
이것이 매월당 김시습 설잠 스님에 대한 대강입니다. 우화궁에 걸려 있는 주련은 2구가 걸려 있는데 이 선시가 설잠 스님의 시라는 것만 밝혀졌을 뿐 출처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정요산월귀선실(靜邀山月歸禪室) 산 위의 달 고이 맞아 선실로 돌아가서
한전강운포납의(閑剪江雲袍衲衣) 강의 구름 가만 잘라 납의 솜옷 누비리라.
이 선시의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이 두 구로도 고요한 산사의 살림살이가 청검(淸儉)함을 엿보게 됩니다.
이 선시의 두 구는 대구를 이루고 있어 운치를 더해 줍니다. 정요산월(靜邀山月)에서 정(靜)은 '고요할 정,'이고, 요(邀)는 '맞을 요, 부를 요'이니. 정요산월(靜邀山月)은 고요히 산 위에 뜬 달 맞이한다는 뜻이고, 귀선실(歸禪室)은 선실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정요산월귀선실(靜邀山月歸禪室)은 고요히 산 위에 뜬 달을 맞이하여 선실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한전강운(閑剪江雲)에서 한(閑)은 '고요할 한, 느긋할, 한, 한가할 한'이니 마음이 한가로움을 나타냅니다. 전(剪)은 전(翦)의 속자(俗字)로 '자를 전, 가위 전, 화살 전'입니다. 강운(江雲)은 '강 위에 떠 있는 구름'을 말합니다. 따라서 한전강운(閑剪江雲)은 강 위에 떠 있는 솜 같은 구름을 한가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자른다는 표현입니다. 포납의(袍衲衣)에서 포(袍)는 '핫옷 포, 솜옷 포, 웃옷 포'이고, 납의(衲衣)는 법의(法衣)의 일종으로 납가사(衲袈裟) 또는 분소의(糞掃衣)라고도 합니다. 납(衲)은 '깁다'의 뜻이니, 납의(衲衣)는 세상 사람들이 쓸모가 없어 내다버린 여러 가지 낡은 천을 모아서 누덕누덕 기워 만든 옷을 말합니다. 출가 수행승들은 이런 옷을 입기 때문에 납자(衲子) 또는 납승(衲僧)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포납의(袍衲衣)는 납의를 솜옷으로 만든다는 의미로 새겨집니다. 이것을 모두 종합해 보면 한전강운포납의(閑剪江雲袍衲衣)는 가만히 강 위에 떠있는 솜 같은 구름을 잘라다 납의에 넣어 솜옷을 누비리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산 위에 뜬 둥근달을 고요히 맞이하여 선실(禪室)에 등불처럼 밝히고 그 달빛 아래 강 위에 뜬 솜 같은 구름을 한 자락 잘라다 납의에 넣어 따뜻한 솜옷을 만들겠다는 야무진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여기엔 그 어떤 세속의 찌든 그림자도 범접하지 못할 청검(淸儉)함이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대자연과 합일(合一)하여 사는 수행자의 살림이 이만하면 넉넉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설잠 스님의 이력에서 보았듯이 학문에 뜻을 두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하던 중, 21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탄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다음, 읽었던 유교서적을 불태우고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머리를 깎고 출가한 후 산천을 벗삼아 유랑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승려가 된 그는 단종의 복위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처참하게 죽어 길가에 버려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묻어 주기도 했고, 당대의 최고 권신들을 조롱하기도 하면서 울화를 풀기도 했습니다. 또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저술하고 수많은 시를 썼는가 하면 불교저술도 많이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평하여 심유적불(心儒迹佛)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마음은 선비였으나 그의 모습은 불도를 걸었다는 이야기지요. 선비인가 하면 선비가 아니고 스님인가 하면 마음은 그렇지 않아 비유비승(非儒非僧)의 생활을 한동안 하였습니다. 유교의 바른 도리를 배운 선비로서 세상의 상도가 무너짐을 보고 그는 비분강개한 생활를 하면서 그 격정의 마음을 어떻게 달랬을까? 불심으로 다스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항상 헛헛한 마음에 환속을 하였지만 다시 쓰라린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다시 두타행을 하다가 만년을 무량사에 의탁하였다고 하니 50대 만년에 들어서서야 마음에 들끓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실로 불가에 귀의한 것이 아닐까... 제행무상(諸行無常)...
산 위의 밝은 달을 바라보노라니 일만 시름이 사라져 밝은 달을 등불 삼아 선실을 밝히고 강 위의 구름 한 자락 잘라다 납의에 넣어 납의를 누비리라는 푸근하고 넉넉하며 한가로운 모습은 진정 탈속의 도인의 삶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첫댓글 설잠스님의 낭만적고 청아한 주련 잘 봤습니다. _()_
무량사에서는 친절하게도 주련마다 뜻을 해석하여 붙여 놓았는데 그곳에 이 선시가 설잠 스님의 시라고 _()_ _(())_
적혀 있어서 이 선시가 설잠 스님의 선시임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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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