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쟁의 호출은 때로 구세주 같다. 내가 축 쳐져 있을 시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지난 주말의 초대도 그랬다. 길고 추웠던 겨울에 짓눌린 몸과 마음이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들었던 것일까. 비록 초록색 볼 수 있는 저기 해남이나 제주행이 아니더라도 나는 발걸음 가볍게 대학로로 향했다. 버트란트러셀처럼 게으름을 찬양하며 대학로를 어슬렁거려야겠다. 머리도 안 감고 모자 눌러 쓴 채 깔끔한 된장비빔밥을 먹고 '만추'를 보고 찻집에 가서 차 한 잔 앞에 놓고 구겨앉아 있다가 와야지. 생각만으로도 살짝 설렜다. 때맞춰 찬기를 몰아내는 이른 봄 햇살이 흥건해서 나들이는 더욱 즐거웠다. ‘된장 예술’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이 식당은 입맛을 잃었을 때도 식욕이 왕성할 때도 늘 만족스럽다.
사진 갤러리 ‘루’를 찾아가는 길은 박쟁의 스마트폰이 해결했다. 그 놈 참 신기하다. 스마트폰 놀이로 닮은 연예인찾기도 했다. 35세 여자, 19% 닮은꼴 연예인이 윤여정, 유지인, 현미라고 나온다. 아마도 통통한 볼살이 닮았지 싶다.

지방에서 자동차 정비를 하는 한 남자, 공허하고 막막하고 쓸쓸할 때마다 예당 저수지의 한 나무만을 찍었단다. 그 나무를 짝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찍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나무는 그의 짝사랑을 알아차리고 그의 사진기 앞에서 반응했을까. 반응 없는 대상을 한결같이 짝사랑하는 심정은 지고지순한 순정이거나 그 대상에 자신을 투영할 때 가능할 것이다. 결국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잔가지 사이, 사이는 좁은 숨길이다. 나와 너 사이를 흐르는 미세한 사랑의 전류가 흐르는 곳이다.

만추, 지난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포스터를 본 후 개봉을 기다려 왔던 영화다. 개봉은 자꾸 늦어지더니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로 현빈이란 배우가 인기몰이를 한 후에 개봉했다. 그 시점이 마음에 안 들지만 영화 마케팅으로는 당연하다. 흥행에 기여할 것이 분명하다. 극장에 이렇게 3-40대로 보이는 여자들이 많은 것을 처음 본 듯하다.

김혜자-정동환의 ‘만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기본 줄거리는 알지만 사이사이를 이어가는 디테일한 내용들은 기억도 안 난다. 그러나 나는 붉은 단풍이 수북히 쌓여 바람에 날리던 김혜자의 기다림을 잊지 못한다. 짧은 시간의 인연이지만 붉은 단풍처럼 강렬하게 가슴을 물들였을 사랑을 부여잡고 견뎌낸 시간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부서지는 순간을 바라보던 김혜자의 서늘한 표정을 기억한다. 사랑의 종말은 쓸쓸하였다.

탕웨이-현빈의 ‘만추’는 붉은 단풍과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이 아니라 시애틀의 안개와 비가 배경이다. 드라마를 통해 ‘현빈앓이’라는 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현빈이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 그 연장선에서 영화는 개봉되었지만, 이 영화를 이끄는 힘은 탕웨이에서 나온다. 탕웨이는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고 현빈은 그에 비하면 겉돈다. 굳이 이렇게 반들하게 잘 생긴 배우가 이 배역에 필요했을까?
7년만에 감옥 밖으로 나온 애나, 그녀는 단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어머니 장례를 치르러 간다. 여자들을 유혹하여 얻어낸 돈으로 살아가는 제비족 훈이를 버스에서 만난다. 여자는 3일간의 감옥 밖 시간이 기다리고 있고, 남자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감옥으로 들어갈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 속 사랑에는 늘 우연이 따라다닌다. 우연히 시애틀 시내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여자는 무심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들러붙는다. 우중충하게 비 내리는 시애틀 시내를 돌아디니는 두 사람, 부유하는 삶을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움켜쥐어야 할 욕망이 없다. 욕망 없는 삶은 현실적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자유로움이 작용한다. 자유로울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상대의 상처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상처를 정서적으로 보듬는 순간에 사랑의 씨앗이 가슴 한 복판에 떨어진다.
감옥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훈이는 애나가 탄 버스에 올라탄다. 안개가 짙어 더 이상 운행이 곤란하여 잠시 들른 휴게소, 애나는 비로소 훈이를 향해 엷게 웃는다. 안개는 풍경을 지웠다. 흐릿한 윤곽선만으로 존재하는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눈다. 그 입맞춤은 벌거벗은 섹스보다 뜨겁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랑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은 찰나다. 찰나가 영원을 움켜쥔다. 애나는 두 손에 커피를 움켜쥐고 훈이를 찾아 안개 속에서 헤맨다. 훈이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경찰차가 요란하게 휴게소로 들어온다.
시간은 흐른다. 찰나로 영원을 움켜잡은 사랑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르익는다. 2년 후 애나는 휴게소에서 훈이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길어져도 애나의 얼굴은 그리 일그러지지 않는다. 훈이도 언젠가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을 믿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애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는 나는 쓸쓸하다. 저 평온함이 쓸쓸함의 뒷모습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내면은 쓸쓸하다. 사랑이 이 세상을 다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랑에 기대어 공허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사랑은 본질적으로 쓸쓸하다. 더구나 기약 없는 사랑을 기다리는 일은 더욱 쓸쓸하다. 애나의 시간은 안개로 가려진 늦가을 풍경처럼 흐릿하게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면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애나의 사랑도 그렇게 기다림 속에서 흔들리면서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비록 훗날 그 꽃이 시들어 책갈피 속 압화 한 장으로 눌려 있을지라도 피지 않은 꽃보다 아름답다.
탕웨이, ‘색계’에서 팜므피탈의 여주인공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더니 이번엔 안개 속에서 헤매는 여자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눈빛, 시선, 몸짓, 옷차림, 목소리까지 애나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시종일관 영화 속으로 관객을 이끌고 간다.
그리고 안개와 가느다란 빗줄기가 연기를 한다. 이 영화는 풍경을 에워싸서 희미하게 뭉개버리는 흐린 안개 가 탕웨이, 현빈에 이어 세번째 주인공이다.
첫댓글 세번째 주인공인 안개 연출위해 인공적으로도 더많이 만들었다고 해요, 오해로 시애틀 소방차까지 출동하는 헤프닝까지
지난 부산에서 김혜자의 [만추]를 떠올리시던 그 감정선이 얼마나 애뜻했게요 진작부터 [만추]는 당신과 보고싶다 여기며 기다렸어요.. 단풍의 가을도 만추의 애닯음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저에게 가을을 긍정하게 만들어 준건 절반은 제 앞에서 흘러가는 시간이겠지만 또 절반은 당신 덕분입니다.. 또 실은 첨엔 결과가 발표난 후일거라 여겼어요.. 축하든 의로든 필요할거라 생각했었어요.. 발표는 예정보다 더뎌 김이 좀 셌었지만 결과적로 축하를 드릴 수 있게되어 얼마나 기쁜지 :-)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구요 축하연은 네가 준비해야겠구나.. 라고
무겁고 부담되는 자리말고 늘처럼 단촐하고 캐주얼하게 자리 한번마련해 보도록할게요.. 이벤트는 없어도 마음은 가득한 축하연 :-)
글이 봄의 생동감과 의미가 있습니다 내용은 만추지만,,실은 두 김혜자의 만추도 현빈의 만추도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ㅋ 하지만 글을 쓰는 느낌이 좋군요,,
버트란트 러셀은 게으름을 찬양하되 앞으로 사회가 지향해야 될 복지에 대한 의무와 경고등
결코 편하게 그 책을 쓴 것 같지 않아요..그는 아니라고 근무시간 주택에 대한 것등..여러가지를 썻으나..
저는 이상하게 게으름에 대한 편함보다 더 부담스러운 사회적인 책무를 깨닫게 했던 책이엇습니다..
많은 분야에서 이야기를 했지요,..오랜만에 러셀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구요,,
단풍잎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김혜자이야기도 그리고
안개속의 탕웨이 이야기도 가슴저미게 듣습니다 그것이 말라 책속에 끼워진다해도 피워내는 꽃이 피워내지 않는
책보다 낫다라는 말이 봄향처럼 그렇게 가슴에 와닿아 하루 일 마무리하고 댓글답니다..감사합니다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