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일기(28) - 역답사(함창역-상주역)
기차여행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커다란 창문 너머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멀리서 아련하게 비치는 이어지는 산들의 모습과 기차길 옆 하천과 논밭의 여유로움은 일상의 시선과는 다른 각도의 방향에서 우리의 산하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아무 생각없이 풍경에 몰두하면 그 자체로 마음은 평화로워진다. 하지만 최근 열차들의 속도들이 빨라져 기차 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풍경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그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어지러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KTX는 풍경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빠른 시간의 효율성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차일 뿐이다.
최근 기차여행의 낭만을 다시 찾는 기회를 가졌다. 김천에서 영주 사이를 운행하는 ‘경북선’을 타면서부터이다. 경북선 사이를 운행하는 기차는 다른 곳의 기차보다 조금은 낡고 페인트도 군데군데 벗겨져 있다. 하지만 그 낡음이 기차의 낭만을 회복시켜 준다. 경북선의 열차들은 다른 곳보다 더 천천히 달린다. KTX는 물론이고 무궁화호보다도 더 천천히 이동한다. 그런 이유로 열차의 바퀴 소리는 더 생생하게 들려오고, 창밖 풍경도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의자에 몸을 누이고 먼 시선으로 창문을 바라보면 어떤 영화관보다 크고 선명한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속도가 줄어들면 그만큼 더 많은 시선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1. (상주) <함창역>
함창역은 기차길도 하나밖에 없는 아주 작은 간이역이다. 철도 옆 좁은 플랫폼에 의자들이 줄지어있고 기차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기차를 기다린다. 아주 평화로운 시골역의 모습이다. 과거 <모래시계> 속 기차역 장면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떠남과 기다림, 그 속에 숨겨진 수많은 인간들의 관계가 조용한 간이역에서 형상화된다. 역의 규모와 읍의 규모가 조금은 불균형하다. 역의 크기만큼 읍의 규모는 작지 않기 때문이다. ‘함창장터’의 존재가 그나마 역의 생존을 지켰는지도 모른다.
함창역을 나서면 예상치 못한 안내를 발견한다. 이곳에 <고령가야> 왕족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함창읍’이 과거 ‘고령가야’의 도읍지라는 말이다. “고령가야는 삼국유사에 6가야 구성국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일대로 전해지고 있다. 최소한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인식이었는데, 함창읍 일대에 이를 뒷받침한다고 추정되는 여러 유적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조는 근대의 역사학계에서도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라는 인터넷 설명처럼, 가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역사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반대 견해도 존재하는데 “함창 지역에 독립적인 소국이 존재했던 것은 맞지만 가야계 국가는 아니었고 신라에 병합당한 이후에 인식의 변화에 따라 '고령가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하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가야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 경난 함안의 <아라가야>가 대표적인데, 6가야의 하나라고 추정되는 <고령가야>의 흔적을 전혀 예상도 없이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가야의 통치 영역이 상당히 북쪽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2. <상주역>
상주의 중심 지역으로 상주시청과 대표적인 행정기관이 있는 곳이다.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왕산역사공원’이 나오고 ‘왕산’이라는 작은 산이 나오는데, 과거 상주 읍성의 중심부에 있던 산이라고 한다. ‘왕산’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략 때 피신하여 머물던 장소에서 유래되었다. 산은 정말 작다. 10분 정도 걸으면 산 주위를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이다. 그럼에도 작은 산이 주는 풍취는 좋다. 압도하지 않는 친근감일 것이다.
거리에 <1500억 상주시청, 신축 반대>라는 시민단체의 플랭카드가 보였다. 최근 지방 도시들의 청사들은 엄청난 규모로 커지고 있다. 낡고 비좁은 청사는 주민들이 이용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바뀌어야 하지만 불필요하게 커지고 있는 청사들은 시민들의 세금을 낭비하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현재의 상주시청 청사는 굳이 새롭게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시민단체의 반대가 적절해 보인다. 도시는 쪼그라들고 있는데 홀로 거대해진 청사의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도시의 얼굴은 아닐 것이다.
첫댓글 - 기차 여행의 낭만은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달리는 중에도 객차 사이를 서서 걸어다니는 맛에 있다.
- 홀로 거대해진 청사의 모습이 아닌 작고 오래된 청사에서 배어나오는 역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