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전철역이 아닌, 의정부 기차역에 모임.
1월13일 고대산행의 첫 집결지다.
늘 그렇듯이 여러명과 시간을 정해서 하는 산행은 그 며칠 전부터 마음의 준비와 약간의 몸풀기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긴장은 마치 데이트 약속을 앞둔 마음과도 비슷하다.
기차역에서 만나 경원선을 타고 저 북쪽 철도종단점까지 가서 철원평야를 내려다보며 하는 산행...
너무도 멋진 데이트 상대에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새벽 4시부터 눈이 뜨인다. 알람은 6시에 맞춰놨는데...이불 속에서 좀 더 밍기적거리다 6시 되어 일어나
7시쯤 집을 나섰다. 한 이십년 전 쯤에 한번 이용해봤던(벽제 화장터 갈 때 였나..) 불광동 서부시외버스터미널까지 지하철을 타고 간다. 걸어서 6호선 증산역까지 13분, 불광까지 십여분. 총 삼십여분 잡으면 된다. 그리고 34번 시외버스를 타고 의정부까지는 3,4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종우형은 말했지만
초행길인지라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나선 것이다.
어슴프레 새벽, 날씨는 약간 쌀쌀.
의정부 근처 인력시장에 나가는 (그들의 대화로 짐작컨대) 추워보이는 아저씨들 두엇과 함께 썰렁한 버스에 몸을 싣고, 연신내 구파발 북한산성 가는 길을 거쳐 김동리선생의 단편이 생각나는 송추를 지나쳐 의정부를 향해 가는 3번 국도.
우선 버스노선표에 의정부역이 아닌, 의정부북부역이라고 표기돼있어 버스기사에게 그게 의정부기차역임을 확인한 후 내렸다. 길가의 표지판을 보고 찾아가보니 새로 단장한듯한 역사의 간판은 '가능역'이었다. 의정부역을 가능역이라고 표기하는 것도 요즘처럼 모든 게 휙휙 바뀌어가는 시대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하며 역사로 들어서니 기차역 냄새는 나지 않고 전철 표시만 보인다. 우선 급한대로 지나가는 아줌니에게 물어본다. 여기가 의정부북부역 맞단다. 나는 계속 걸어 가장 정확한 정보를 알려줄 안내창구로 갔다.
의정부기차역은 지난 12월 15일부터 1호선 '가능역'으로 바뀌었고, 경원선 전철이 새로 개통되어 가능역에서 동두천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야한다는 거였다. 불과 한 달 전 일이라서 우리의 산행대장님도 이 사실을 몰랐던 거다. 급히 가온형에게 콜.. 다른 사람들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키 위함이었다.
처음처럼, 나경, 건원형은 기차를 바로 탈 수 있는 동두천역으로 가게 하고, 나처럼 34번 버스를 타고 오던 가온형을 기다림. 그동안 나는 햇볕 한점 들지 않는 역사 부근을 배회하며 추위에 떨어야했다. 북쪽냄새가 확 나는 동네임에 틀림없다. 역 주변, 문을 연 만두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좀 살까, 오뎅이라도 한꼬치 먹을까 잠시 갈등을 때리다 다시 난방도 안되어 바깥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역사로 들어서 서성이고 있자니 가온형이 온다. 반갑게 자초지종을 다시 정리하고 동두천행 전철에 몸을 싣고 보니 주내역까지만 가는 거다. 다시 내려 한참을 기다리니까 소요산행 전철이 온다. 승객들이 듬성듬성 있는 저 전철에 지금쯤 나머지 사람들도 타고 있을지 모른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객실 안을 살펴보니 나경과 처음처럼의 모습이 보인다. 히히~우리는 그쪽 출입문으로 막 달려가 올라타서 그들을 놀래켜주고, 건원형에게도 전화를 해보니 역시나 같은 전철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극적으로 모두 만난 곳은 새로 개통한 경원선 전철 안이 되었다. 우왕좌왕 하다 그렇게 달리는 전철 안에서 아이들처럼 모이고 보니 반갑기 그지 없다.
하지만 건원형은 집안 모임이 있어 산행은 안되고 우리들 배웅이라도 해주려고 거기까지 먼길을 온것이었다. 그는 추운 날씨에 옷이 부실한 사람에게 큼직한 등산티도 벗어주고(전철 안에서), 새로 산 폴라포리스 장갑 두 쪽도 뺏기우고, 신탄리행 기차표 네 장까지 끊어준 다음 우리와 아쉬운 작별을 해야했다. 의리있고 고마운 형이다. 그리고 바뀐 기차역 때문에 제일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음에 꼭 고대산행 함께 하고 싶다. 무엇보다 고대산 내려와서 양평손두부집 나무 때는 둥그런 드럼통 앞에 둘러서서 철판에 궈먹는 돼지고기도 함께 맛나게 먹고 싶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신탄리로 향해 가는 기차 안, 우리들이 앉은 기다란 의자에는 겨울햇살이 환하게 비쳐들고 들녘 풍경도 정겹고...마치 옛날에 비둘기호 타고 엠티 가던 시절처럼 방만하게 앉아서 여전히 시려운 발을 위해 양말 한 겹씩 더 꺼내 신고, 추위를 달래줄 특수음료와 천하장사 소시지를 먹으며 희희낙락.. 가온 형의 막내동생이 복무해서 면회도 왔었다던 군부대를 지나 점점 북쪽으로 달려갔다.
날씨는 맑고 하늘은 파랗고 그쪽 기온은 영하 10도쯤 되려나..제법 되는 다른 등산객들과 함께 고대산 입구까지 한가로이 걸어간다. 세 가지 코스가 있는데 우리는 칼바위를 지나는 2코스로 해서 표범폭포가 있는 3코스로 내려왔다. 오르는 길은 옆에 줄도 간간이 있고 힘들지 않은 등산로라서 눈길이지만 아이젠 없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은 안전하게 아이젠 신고 팍팍 내려왔다. 가온형이 준비해온 비닐돗자리 썰매를 타고 나경은 신나라 하고..
산행이란 남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론 의미가 없기에 간단히 쓰고 생략한다.
산행이란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그리고 각자의 감동과 추억이 생겨나는 것이기에 직접 체험해보기만을 권할 뿐이다.
잠시만 쉬어도 땀이 식고 금방 추워지는 날씨지만 전반적으로 바람도 없고 좋은 조건 속에서 어떤 초보자라도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지 앤 해피 산행.
양평손두부집 식당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좋은 기억만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렇게 구워먹는 돼지 생고기 맛있고 함께 구워먹는 김치 두부 밑반찬 미나리 씀바귀나물 다 기가 막힌데..그집 주인은 방송에도 나왔다는 욕쟁이 할머니(뭐 실제 인물을 보면 갓 60이나 됐으려나 할머니 같지도 않다). 우리 네 명이 한근을 먹기엔 좀 많지 않겠냐고 말했던 나경이 불시에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그 집의 실체를 알게되었다. 유명한 욕쟁이 할머니집들이 서울에도 몇군데 있긴 하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런집에 가보기는 처음이다. 우리처럼 평소에 순화된 언어만 쓰는 사람들에게 욕이란 불시의 언어폭력이라서 감당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욕을 그저 우리말 상소리로 대접해주고, 그 깊은 바닥에는 끈끈한 믿음과 애정이 깔려있는 거라고 애써 위로하다보면 우리의 모든 언어를 욕으로 일관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러면 사람들이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을까?
그 식당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의정부지역의 고깃집 특성을 갖추고 있다. 그건 불을 때는 둥그런 드럼통 위에 철판을 깔아놓고 고기를 구워먹는 것. 앉는 자리도 따로 없이 너 나 할 것 없이 되는대로 둘러서서 먹는 것... 한 십년전 쯤 남편과 의정부 안골 근처 어느 산에 갔다가 산동네 어느 허름한 집에서 그렇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막일 하는 사람들이 추위 녹이며 소주 한 잔에 돼지고기 몇 점 서서 먹고 가는 집. 값도 무척이나 저렴하고. 돼지고기는 이런 식으로 먹는 게 어울린다.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그 욕마저 정겹게 듣고 고기도 맛있게 먹었는데...막판 야박한 반찬 인심에 사실은 기분이 상해버렸다. 그 욕쟁이 할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돈'이었던 것이다. 돈 안 되는 밑반찬은 절대 두 번 이상 추가로 줄 순 없었던 거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 딴에는 셀프로 반찬을 가져오다가 욕을 한바가지 먹었다. 나도 뭐라뭐라(나보다 연장자라서 감히 욕은 못하고) 큰소리로 손님들이 다 구경하는 가운데 대들어보긴 했으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욕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 입장에서 욕할 만 하니까 하는 것이고, 듣는 사람들은 욕들을 입장이 아닌데 들으니까 황당하기도 한 것이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종우형은 언젠가 그런 집에서 하도 기분이 나빠 같이 허벌난 전라도욕으로 응수해줬다고 한다. 그러자 그 할머니 끽소리 못하더라고..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눈에는 눈으로, 욕에는 욕으로.
다시 의정부로 돌아왔다. 거기서 마지막 뒤풀이를 하고 네사람은 찢어지기로 했다.
산행의 끝맛은 뒤풀이에서 좌우된다. 뒤풀이를 망치면 그날 좋았던 산행도 좀 우울하게 기억된다.
하지만 이날은 나에게 알찬 뒤풀이였고 다시 없을 좋은 산행이었다.
어게인 의정부. 서울의 서부 지구로 돌아올 34번 시외버스 막차를 끝내 놓쳐버리고
의정부발 서울 구로행 전철 막차에 극적으로 몸을 실은 시각은 11시 19분.
하루가 온전히 의정부와 그 언저리에 바쳐진 느낌이다.
2000년인가 어떤 고민거리가 있어 비 쏟아지는 의정부에 온 적이 있다. 친구가 소개해준 어느 점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개천가에 우산을 쓰고 서서 내리는 빗줄기와 콸콸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며 내가 했던 어떤 마음의 정리도 기억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라는 영화가 있다.
"그 겨울 나는 원스어폰어타임인어메리카를 백번 이상 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나의 쓰다만 소설도 생각난다.
내가 감히 의정부를 말할 수 있으랴!
이런 제목은 그냥 가볍게 웃자고 붙여본 것 뿐이다.
하지만 이 산행후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그 영화와 내 소설이 생각나고,
내가 이날 의정부에서 보낸 하루. 추웠던 아침과 춥지 않았던 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런 시간은, 늘 그렇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신입대원의 의무가 산행기 올리는 것을 어찌 알았을꼬? (...기특...) 잘 읽었네. 의정부 언저리에서 아침과 밤 언저리를 서성였던 "추운"아침과 "춥지 안았던"밤의 기억이 좋은 추억이 되길.
와! 세세하게 그 날의 여정과 산정이 담겨있고 어떤 길님의 마음도 그득 담겨있는 정겨운 소감이넹..이 글을 읽으니 파노라마 처럼 토요일의 즐거웠던 순간들이 머리속을 스쳐간다. 종일 함께해서 즐거웠고 뒷풀이등등에서 속풀이 해서 너무 편안했다오. 어떤길님! 입가에 미소 지으며 편안하게 머물다 갑니다. 새로운 한주간 멋지게 시작하시고 즐겁게 일하며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
짝짝짝!! 박수~ 소설같은 산행기 감사! 감동!! 춥지만 맑고 시원한 바람맞으며 함께 다녀와서 좋았소. 욕쟁이 할머니의 무차별 사격에 초탄에 심장을 꿰뚫린 나경, 아! 신부체면에 어디가서 그런 욕을 들었을까? 나는 두구 관통. 가온, 우리에겐 진즉에 허벌난 호남욕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단한 몸을 맡긴 열차 여행이 그 상처를 씻어주었구나. 그래서 결국은 상가에 가야만한다는 정신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의정부에서 자리깔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덕분에 나는 집에서 또 한발 맞았다. 욕은 아니지만....) 다음에도 완스어판어타임 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