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신사임당이라 칭송받은 그녀가 해방을 맞이하기 전 옷을 벗고 우아한 핑크빛 망사를 걸친 채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그림은 45년 6월 해방 직전에 그려진 작품으로서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 속 여인은 북한의 현대판 ‘황진이’라고 비유하여 불려져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 그림은 월북 전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 당시 서명 싸인은 ‘정’과 ‘온’자에 중복된 이응‘ㅇ’이 가운데에서 매개가 되어 연결되며 포개진 채 두 글자를 위아래로 이어주는 필체를 띠고 있다. 이 그림은 정온녀가 월북시 북한으로 가지고 가서 추후 훼손된 부분을 정성껏 덧칠하여 복원한 그림으로 귀중한 장소에 오랜기간 보관되어져 왔었다.
이 작품은 누드화에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전통 유화기법을 따르고 있다. 바탕은 여러번의 겹침을 어두운 색조로 잡아주고 여인의 백옥 같은 흰 피부와 백색 씨스루(See Through) 천을 통해 여체의 미를 극대화시킴은 물론이고 콘트라스트(Contrast) 대비를 통해 드라마틱한 여인의 조형미를 표현하였다.
씨스루 대비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있으며 아래 왼쪽 대퇴부의 아름다운 곡선은 투영된 라인만 보일 듯 말 듯 하며 그림 가운데 부분에 완전히 드러나 있는 양손과 가녀린 긴 손마디의 표현은 이 그림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백색 씨스루(See Through) 천으로 살짝 가려진 풍만한 가슴의 실루엣과 부러질 듯한 여린 쇄골의 표현, 그리고 전체적인 비율과 완성도는 가히 압권이다. 이 누드화는 우아함과 섹시한 여체의 미를 한 단계 끌어올린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수작임에 틀림없다.
이 그림 속의 여인이 정온녀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제시대인 43년 미인대회에서 1등이 없는 2등을 차지한 경력의 그녀의 실제 미모에도 손색이 없고 골상과 눈매가 많이 닮아 있다. 화가가 그리는 보통의 인물화는 자화상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김흥수 화백은 일본 유학시절 정온녀와 교류하였는데 일본인 건물주가 구실을 붙여 화실에서 생활하던 그녀를 곤경에 처하게 했을 때, 칼을 들고 목숨을 걸다시피 일본인과 의기 있게 대처함으로써 정온녀가 쫒겨나지 않게 도왔다고 회고한데서도 미루어보면 남성을 사로잡는 매력이 충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개의 여인 누드화의 얼굴은 의식적으로 화려하게 미인형으로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드화의 경우 여체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돋보이려고 하는데, 여성 인물의 미모를 부각시키면 관심의 초첨이 노류장화(路柳墻花)의 요염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어 격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여인은 미모가 출중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기품있고 고아한 이미지가 물씬 풍기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눈동자가 우수와 한을 머금은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울컥 눈물을 쏟아내기 직전의 표정인 듯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고 눈 흰자위의 반이상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이 그림은 태평양 전쟁이 극한으로 치달을 무렵, 암울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이 우리의 삶을 뼈속 깊이 고통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시기에 탄생한 그림이지만, 시대를 앞질러간 한서린 여인의 기념비적 누드화이다. 인물의 배경은 암울한 감옥의 복도를 연상시킨다.
그전에 김관호의 1916년 근대 최초 누드화 <해질녁>은 여체의 뒷모습을 그렸고, 30-40년대 서진달의 누드화 등은 얼굴의 세부 묘사는 생략한 채 여체의 인상적인 부분을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하는데 주력했을 뿐이다. 당시로서는 이렇게 거의 전라(全裸)의 대담한 자태와 얼굴을 정면에서 세세하고 신비하게 형용한 그림은 없다.
이 그림은 전라 혹은 반라(半裸)를 막론하고 북한의 박물관이 유일무이하게 소장했었던 여인 누드화로서 진귀한 존재가치를 지닌다. 또한 해방 이전에 남겨진 우리(남북한)의 회화사에도 여체의 정면상을 정밀하게 다룬 누드화로는 거의 유일한 그림으로서 독보적인 진가를 지닌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출처 : 뉴스퀘스트(https://www.newsque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