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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7일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마 22 : 41 - 46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 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22장에 나타나는 천국의 실체 가운데서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 하느냐?”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면 천국의 실체가 될 수 없기에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너무나 무지하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와 그리스도’ 라는 단어가 나와 있고 그것이 곧 주님의 명칭이기 때문에
기도 할 때에도 늘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는 있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 질문을 하신 겁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았는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메시야인 겁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 직무에 헌신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름을 부으셔서 그들을 세우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안수’ 개념입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나 권사, 안수 집사, 교회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
특히 종신직을 맡아서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심, 즉 ‘안수’를 행하는 겁니다.
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단어가 연유가 되어진 5548 (크리오: 접촉하다)는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성을 맺는 겁니다.
그래서 기름 부으실 때에 나타나는 사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나서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크리오)는 5530 (크라오마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다) 공급의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급해 주시는 것이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필요를 수용하는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을 위해서 친히 세우시기도 하지만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고 또한 그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서 사용 할 수 있는 사용의 권한도 친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성경에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공식적인 직분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수행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이름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여기서 예수라 하는 이름의 뜻은 ‘저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여 줄 자’ 라는 겁니다. 그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주는 구원자로서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23절에 가면,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러면서 예수와 함께 구약적으로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히브리어)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입니다. 임마누엘을 풀어 보면 그 안에는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임마누엘이라' 그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발전된 것 중 하나가, ‘생명의 본질이 어디에서 나오고 있느냐?’를 찾는 겁니다.
생명의 본질은 어디에 있고 그 정체는 뭐냐, 그래서 수많은 실험과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원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물질을 분리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입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에서는 이 원자마저도 분해를 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원자를 분리하니까 세 가지 요소가 나왔는데
‘전자’ ‘광자’ ‘중성자’ 이것은 더 이상 ‘물질’에 속한 것이 아니고 ‘비물질’이라는 겁니다.
분명히 존재는 하고 있는데 그것은 물질이라고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전자나 광자나 중성자같은 비물질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이러한 현상은 무엇일까?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들의 결론은 첫째는 정보, 두 번째는 에너지입니다.
무엇에 대한 어떤 정보 즉 기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안에 어떤 원리 즉 정보가 있기 때문에 그 정보를 따라서 움직이는 에너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분해 할 수 없지만 어떤 환경이 되면 그들은 결합하는데 그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면
원자가 나오고 원자에서 분자가 나오고 분자에서 어떤 물질이 나온다는 겁니다.
과학자들은 창조론을 부인하기에 그것을 ‘진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발견해 낸 정보와 에너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이라는 겁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호 로고스)’가 무엇이냐?그들이 발견한 ‘정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이성’이라고 하고,
과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고 그 안에는 어떤 흐름이 있다는 것은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정보’라고 하는 겁니다. 똑같은 것이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각도와 그 사람의 어떤 관념에 의해서 다른 명칭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미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것은 (호 로고스) 하나의 원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어떻게 있느냐면,
(프로스 톤 데온)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프로스)무엇인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에너지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라고 하는 (호 로고스) 안에서 만물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고
만물은 그 (호 로고스)가 아니면 되어 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때문에 모든 만물 가운데에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신성이 부여 돼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이 부여되어 있고, 얼마나 부분적으로, 얼마나 총체적으로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격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 안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의 주체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어떤 정보를 가지고,
그들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향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힘이 그 에너지 안에서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 있는 것들은 계속해서 성장하는 겁니다.
그들의 성장이 이루어 졌을 때 그것이 합리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정보에 의해서 잘 이루어지고
그 주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현대 물리학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세계가 눈에 보이면 보이는 세계로 한정 돼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또 하나의 어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가장 미세하다고 하는 그 원자 안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놀라운 법칙은 그대로 유지되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여러분, 샤머니즘이 왜 나왔을까요? 사람들이 큰 바위를 보고 절하고 비는 이유가 뭘까요?
사람이 큰 바위에서 무엇을 봤냐면,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의 크심과 변하지 않는 불변성을 봤다는 겁니다.
그걸 발견한 사람들이 거기 가서 비는 겁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품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본 것에 관하여 빌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성황당이라고 하는 큰 고목나무 밑에 가면 꼭 새끼줄을 해 놓고 지나가면서 빕니다.
나무의 생명은 그 기간이 일반적으로 천년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가운데서 계속 성장하는 그것이 하나의 언약의 증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불변의 상황을 보고 비는 겁니다.
이런 가운데서 그런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사람이 그런 대상을 놓고 빌고 절하고 복을 구하는 것이란 얘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사람 속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총체적으로 들어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부분적인 것을 섬기기 때입니다.
누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놓고 비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 안에 완전하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이라고 하는 이 부분 때문입니다.
영원 전부터 우주와 만물이 만들어지기 그 이전에 계신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알지 못하면
사람도 하나의 미물과 같고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저 세상에 나왔다가 그저 시간을 때우고 사라져가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잠언 8장에서는 분명히 우리의 존재를 천지와 만물이 지어지기 그 이전에
우리가 천지와 만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과 함께 그 창조의 현장에서 즐거워하던 우리도 역시 선재성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증명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고 우리가 나온 본향을 생각한다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특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를 격하시켜 버리는 겁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 족보는 예수의 족보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란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예수의 족보입니다. 그러나,
(아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입니다.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 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 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족보가 누구로 마감되어지고 있습니까?
예수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마감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즉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어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하고 창조의 목적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서 부터는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거기서부터는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창조요 목표가 완성되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은 ‘육적 족보’로 알고 있지만 이제부터 ‘영적 족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의 성품 중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반드시 섬기는 사역을 합니다.
그 섬기는 사역이 두 가지로 나오는데 첫 번째는 구원자로 나오고 두 번째는 통치자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구주가 되어 지고 통치자로서 바로 우리의 주가 되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우리의 주입니다.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통치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그리스도는 어디에 나타나느냐, 우리 안에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마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많은 그리스도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어지는 자들이 누구냐면, ‘분명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마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리스도는 여기 있고 저기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역시 여기있다 저기있다가 아닙니다.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리고 본래 인간을 창조하고 만물을 창조할 때에 생명으로서 존재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다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은 겁니다. 이것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안 죽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실체화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섬김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오시는 겁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이 되어지는 겁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떠나셨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에게서 떠나셨다” “성령의 임재가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왜 떠났습니까?” 물어 보면,
‘욕심을 품고 죄를 지었더니’ ‘내가 엉뚱한 생각을 했더니’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주님이 물어 보신 것입니다.
오실 수도 있지만 떠날 수도 있는 성령은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임마누엘은 아닙니다.
그분이 오시면 우리가 죄인이면 구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가 세상에 물들어 있고 육적인 정욕에 빠져 있다고 하면
그 가운데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당신의 통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주요 통치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떠날 수없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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