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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이씨 종친회 대표카페(hammlee family representative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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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회 * 파종회◆ 스크랩 손죽도, 이대원 제독 석상 건립 제막식
계현/광주/54 추천 0 조회 91 15.07.03 10:21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손죽도(巽竹島)는 행정구역상 여수시 삼산면 되어 있지만 옛 문헌에는 고흥군(흥양)에 속했고, 실제 도화면 지죽대교에서 손죽도까지 40km로 가장 가깝다.배편은 도화면 지죽대교에서 비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여객선을 이용한다.

 

 손죽도 마을이름 유래는 1587년 이대원 장군의 죽음으로 대원을 잃었다는 뜻의 손대도(損大島)라 하여서 손죽도(巽竹島)가 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조선왕조실록> 중종 55년에 손죽도(巽竹島)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손죽도(巽竹島)는 섬 안에 시누대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시누대 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손죽도라 하였다고 한다.

 

이대원 장군은 1566(명종 21) 37일 경기도 포승면 희곡리 194번지에서 부친 이춘방의 장남으로 출생, 자는 호연 본관은 함평진사공파 이다.

18세의 나이에 무과에 응시, 당당히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등과(登科) 하였고, 3년 후 21세 되던 해에 고흥군 도양읍 녹도만호(4)가 되었다.

22세가 되던 15872101차 출병하여 손죽도 인근 해상에 침공한 왜구 20여척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다.

2172차 출병은 일백여명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까지 출전하여 용전분투하며 싸웠으나, 병력숫자로도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싸울 수가 없어 본영에 구원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수군절도사 심암은 병력지원을 하지 않자 속적삼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절명시를 남겼다.

해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 건너와/ 군사는 외로운 힘이 없어 죽으니 슬프도다

임금님과 부모님께 충효를 보답하지 못하니 은혜 못하니/ 한스러움과 먹구름에 얽혀 끝내 풀길이 없네

이 시를 부하(손대남)에게 전하고 나서 적의 포로가 되었지만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적을 꾸짖었다고 한다.

끝내 항복을 하지 않자 적군은 저희 배 돛대에다 매어달아 참혹하게 칼로 찔러 절명케 했는데 끝까지 적을 나무라는 그의 호령소리는 손죽도 바다 위를 쩌렁쩌렁 울려 펴졌다고 한다.

 

 손죽도와 이대원 장군의 관계는 임진왜란(1592)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즈음 한참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KBS 사극 징비록에도 이대원 손죽도가 언급되고 있는 가운데 왜장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설에 대해 조정에서는 신하들끼리 찬반양론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 사신으로 다녀온 김성일의 주장은 풍신수길이 야만인으로서 허세와 허풍이 많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민심동요를 먼저 걱정해야 했고, 황윤길은 풍신수길이 거대한 야욕을 품고 있기에 반듯이 침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이런 혼란을 겪으면서도 직접 민심을 탐방하고 구멍 뚫린 군사체계를  제승방략과 진관체제로 전환하고자 했으며, 임진왜란 발발 하기전 고흥(손죽도)에서 발생한 정해왜변(1587년)의 예를 들어 관련자를 질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해 선조는 왜변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나서도 안 될 것이오. 아무리 왜가 오만방자하게 협박을 했다손 치더라도, 일어나지도 않은 왜변 때문에 팔도의 민심이 이반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참담함이 눈앞에 보여서야 되겠는가 전국 수령 방백들에게 명을 내리라면서 지금부터 왜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들을 엄히 다스리고, 관에 허가 없이 고을을 떠난 백성들을 모두 강제 귀향 조치토록 하라. 또한 방방곳곳 방을 붙이라. 변경지역에 성을 보수하고, 군사를 늘려 경계토록 할 것이며, 만에 하나 단 한척의 왜선이라도 침입할 시에는 과거 세종대왕 시절 우리가 쓰시마를 정벌했던 것처럼 과인이 직접 대군을 이끌어 왜의 본토를 정벌할 것이라면서 엄포를 놓았다.

 

이미 왜구들은 남해안, 특히 군사요충지인 고흥 14포 지역을 자주 공략했다.

이때 이대원 장군은 1차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웠지만 2차 손죽도해전에서는 끝내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붙잡혀 장렬하게 순국했다.

징비록고사철요에 의하면 정해년 선조 20년 봄에 왜적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략하였다. 녹도 만호 이대원이 고립된 군사로 손죽도(損竹島)에서 애써 싸우다가 후원군이 없어 전사하였다. 좌수사 심암은 통솔함에 있어 군율을 어겼으므로 잡아다가 효시 하였다

처음 적선 두어 척이 녹도를 침범하였다. 만호 이대원이 창졸간이라 보고할 겨를이 없어 혼자서 왜적을 잡았다. 좌수사 심암이 깊이 그를 미워하였는데 이때 적선이 또 죽도(竹島)를 침범하니 이대원으로 척후를 삼아 싸우게 하고, 자기는 수군을 거느리고 관망만 하다가 구해주지 않고 물러나왔다. 이대원은 고립된 군사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심암은 스스로 군률을 어긴 것을 알고 적세가 대단하다고 거짓으로 아뢰고 내지의 군사를 징발하였다. 우참찬 김명원을 도순무사로 삼아 녹도를 침범한 적을 치게 하였는데 적은 이미 물러간 뒤였다. 좌방어사 변협, 우방어사신립을 보내어 밤을 새워 남쪽 지방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전라 감사가 도내의 군사를 다 출동시켜 바닷가에 주둔하였으나 왜선은 이미 돌아가 버렸다고 기록했다.

 

 이대원 장군이 손죽도 해상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자  마을주민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남쪽 뚝바골 목에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주민들은 초가로 얽어 사당을 짓고 춘추로 제사 지내며 두·세번의 중수를 거듭하면서 면면히 이어오다가 1983년 마을주민의 정성으로 이를 중수하여 충열사라는 사액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유적지 및 전적지로는 경기도 평택시에 이대원 장군묘, 신도비(기념물56) 확충사 등이 있고, 고흥군 도양읍에 쌍충사 경내에서 매년 쌍충제전 개최. 여수시 손죽도에는 이대원 장군 사당과 동상 그리고 지난 52일 이대원 장군 석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이대원 장군 석상 건립문구에 마제봉 정기를 받아 손죽항 부두에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석상을 세운다 전적지요 유적지인 손죽도 똑바골 무구장터에는 장군의 분묘가 안장되어 있고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을 중심에는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 박면군관 휘하 무명 장졸들을 모셔있는 장군사당(문화재239)이 있으며 매년 33일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날 행사를 위해 손죽초등학교총동문회 주관으로 제3함대 군악대를 비롯해 이대원 장군 종친회와 쌍충사 모충회 회원 지역 주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식전행사로는 농악 화전놀이와 이재영 명창의 판소리 공연이 펼쳐졌다.

특히 이계훈 전 공군참모총장의 절명시낭독은 우리에게 정충보국 호국충절의 정신을 일깨워 주웠다.

 

▲KBS 사극 '징비록' 방영된 고흥관련 내용

이대원 장군 석상 제막식 연혁 및 경과보고

▲이대원 장군 석상 건립 회장 인사말

▲이계훈 전 공군참모총장 감사의 말씀(이대원 장군 후손 대표)

  이대원 장군 절명시 낭독

▲ 손죽도 주민 화전놀이

 

해군 제3함대 군악대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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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7.03 14:00

    첫댓글 내력과 동영상 사진 잘 봤습니다. 생동감이 넘치고 감개무량합니다.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 작성자 15.07.06 08:43

    이대원장군에 대한 자료를 찾던중
    소중한 자료라 생각되어
    시간이 경과 했지만 올렸습니다.....

  • 15.07.06 09:56

    이대원장군 손죽도 동상제막식 사진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입니다.

  • 15.07.06 13:17

    우리모두 꼭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섬 손죽도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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